1949년 5월 23일 졸업한 육군사관학교 8기의 졸업앨범에 실린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맨 위 왼쪽에서 넷째). JP 왼쪽은 후에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 소장. 맨 아래 가운데는 JP가 처음 사병으로 13연대에 입대했다가 탈영할 때 불침번을 서면서 신고하지 않았던 임달순. JP는 8기 생도 시절 1대대 3중대 4구대 소속이었다. 단체사진에서 JP는 뒷줄 맨 왼쪽에 서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미 군정은 46년 7월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경성대학의 3개 학부와 9개 관립 전문학교를 통폐합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발표했다. 친일교수 배격, 국립대 행정권 조선인에게 이양 등의 이슈로 서울대생들은 국대안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었다. 주로 좌익이 주도하는 국대안 반대세력은 동맹휴학을 주동했다. 그들은 몽둥이를 든 채 학교 정문과 본부 건물을 잔뜩 에워싸고 일반 학생의 등록을 방해했다. 나는 그들이 지키고 있는 정문을 피해 후미진 곳의 철조망 울타리 밑으로 기어 들어가 등록을 마쳤다. 당시 국대안에 찬성하는 학생들은 사각모를 쓰고 윗도리는 서울대 교복을 반듯하게 입고 다녔다. 나 역시 사각모 교복 차림으로 학교를 다녔는데 그렇다고 국대안 반대 학생들과 정면으로 싸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고향 금성산에서 금광 개발에 뛰어들었던 아버지께서 빚을 가득 남긴 채 돌아가셨다. 대학 2학년 때다. 가산을 정리하니 시골집 한 채와 서울 안암동의 집 한 채가 전부였다. 그때부터 고학의 길이 시작됐다. 안암동 집을 전세 주고 뺀 돈으로 일제 소형 중고차인 ‘닷도산’(Datsun·영국제 오스틴 세븐 라이선스 생산) 한 대를 구입했다. 운전면허를 따 휴강시간엔 택시영업을 했다. 그러나 학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48년 6월, 3학년 1학기를 끝으로 학업을 포기했다.
사고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48년 7월 초, 나는 ‘닷도산’을 몰고 가던 중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으로 돌아가던 전차(電車)가 갑자기 차를 덮쳤다. 운전석은 무사했지만 차 앞쪽이 날아가 버렸다. 반파된 차를 버려두고 안암동 하숙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방바닥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각진 교모를 쓴 대학생 신분도, 일제 자동차도 모두 부유한 아버지의 은덕으로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쓸쓸히 혼자 계셨다. 재산도 모두 사라졌다. 이젠 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공주중학교 동창으로 성균관대에 다니던 김왕수를 만나 종로를 걸었다. “야, 왕수야. 이제 모든 걸 버리고 밑바닥서부터 내 힘으로 살아 가보려고 한다. 넌 어떠냐?” 진지하게 말하는 내 모습에 왕수는 “미쳤나, 이 자식이”라며 의아해했다. “사실 작년에 아버지 돌아가신 뒤 우리 집이 거덜 났다.”
그런 얘기를 하다 보니 파고다공원(탑골공원) 앞이었다. 공원 입구에 ‘조선경비대 보병 13연대 창설요원 모집’이라는 입간판이 보였다. 내가 “입대원서 한 장 주시오” 하니 장교가 “대학생 같은데 입대하려고?”라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정말 갈 거냐.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입대원서를 써 냈다. 이튿날 오후 1시 용산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검사관이 “합격”이라고 해 “네”라고 답했다. “야 이놈아, 복창을 해야 할 것 아녀”란 호통이 돌아왔다. 군대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합격”하고 복창했더니 저쪽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집에 잠시 다녀올 틈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도 모른 채 그날 밤 무작정 화차(貨車·화물차)에 올라타야 했다. 열차는 남쪽으로 한참 내달리다 덜컹하고 천안역에 섰다.
66년 5월 23일 육사 8기 졸업 17주년을 맞아 태릉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한 김종필 공화당 의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밥에 쌀알은 셀 수 있을 정도고 강냉이가 대부분이었다. 설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욕바가지와 주먹질, 몽둥이 세례가 수시로 돌아왔다. 새사람이 되겠다고 군에 왔는데 이러다간 새 인간이 되기 전에 죽을 것 같았다. 입대한 지 열흘 되던 날 밤 입대 동기생인 임달순과 둘이 불침번을 섰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내가 얘기를 했다. “야, 우리 도망가자. 여기 있다간 사람이 안 돼. 더 이상한 놈 되겠어.” 임달순은 고개를 저었다. “난 이북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여기서 나가면 밥 먹여 줄 사람도, 잠재워 줄 사람도 없다. 넌 여기가 고향이니까 아무 데 가도 밥은 먹을 수 있잖아. 너 혼자 도망가라.” 나는 “그럼 2시간 동안 신고만 하지 마라”고 부탁했다.
퍼붓는 빗줄기를 뚫고 철조망을 넘어 도망쳤다. 군기병이 쫓아올까 봐 산길로 갔다. 비는 계속 오고, 아랫도리는 다 해지고 꼴이 엉망이었다. 새벽녘 천안역 조역(助役·부역장 역할)으로 근무하는 중학교 동기 전영민의 집을 찾아갔다. “ 영민아!” 내가 부르는 소리에 영민이가 문을 여는가 싶더니 바로 싹 닫아버렸다. 비썩 말라서 거지꼴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귀신 같았던 모양이다. 다시 불렀다. “영민아, 나야. 목소리 들으면 몰라?” 그제야 영민이가 문을 열어줬다. 들어가자마자 “밥 좀 해줘”라고 했더니 결혼한 지 겨우 일주일 된 신부를 깨워 밥을 지어 주었는데 따뜻한 밥에서 분 냄새가 모락모락 나는 듯했다.
서울 집으로 돌아왔지만 당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밥도 잘 먹히지 않았다. 난 못 참고 도망 나왔지만 나와 함께 입대했던 동기들은 그 어려운 환경에서 버티고 있을 터였다. ‘넌 뭐냐. 바닥부터 기어 올라가겠다고 큰소리치더니만. 이미 틀려먹지 않았느냐’. 죄책감과 자학, 수치심이 밀려왔다.
3주쯤 지난 48년 8월 3일. 을지로 황금좌극장(후에 국도국장)으로 ‘왕중왕’이란 영화를 보러 갔다. 머릿속이 복잡해 스크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 중간 쉬는 시간에 극장 2층을 돌아봤더니 군인 100여 명이 단체관람을 와 있었다. 육사 교도대(敎導隊) 사병들이었다. 화랑담배를 나눠 피우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기껏해야 중학교밖에 안 나왔을 저 애들도 참고 지내는데. 대학까지 나온 놈이 그걸 못 참고 도망 오다니. 난 패배자 아닌가’.
불현듯이 일어나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인솔장교인 기세훈 중위를 붙잡고 탈영병임을 고백했다. “13연대에서 도망 나왔습니다. 생각을 고쳐먹었으니 저를 교도대에 데리고 가십시오.” 기 중위는 내 경력을 묻더니만 “선생이 될 인텔리가 왜 군에 가려 하느냐”며 나를 만류했다. 나는 “제발 입대시켜 달라. 여기서 안 받아주면 나는 타락해 인간을 포기할 경지로 갈지 모른다”고 사정했다. 겨우 기 중위의 허락을 받아 교도대 사병들이 타고 돌아가는 GMC 트럭 꽁무니에 올라탔다.
육사 교도대라고 13연대보다 나을 건 없었다. 첫날 밤 강당에서 모포를 덮고 자는데 사방이 가려웠다. 라이터를 켜서 보니 빈대들이 분열식을 하듯 기어 다녔다. 느닷없이 누군가가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빈대가 많아서 못 자나 본데 뜯기면서 자. 또 일어났다간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팰 줄 알아.” 그날 밤을 꼴딱 새웠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또다시 포기할 순 없다고 스스로 다잡았다.
재입대한 지 2주 정도 지났다. 어느 날 ‘나는 왜 군인이 됐는가’란 제목으로 작문을 쓰라고 했다. 탈영과 재입대까지 과정을 써냈다. 사흘 뒤 대대본부 선임장교이던 최택원 (육사 5기·후에 총무처 차관) 중위가 나를 불렀다. “야,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이런 데 끼여 왔느냐?” 그 후 최 중위 추천으로 육군사관학교 행정처(처장 박율선 대위)에 근무하게 됐다. 박 대위는 “ 군인이 될 바엔 장교가 돼야 한다”며 육군사관학교에 가라고 권했다. 49년 1월 중순 육사 8기생 추가 모집 시험 에 응시했다. 시험장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13연대에서 도망 나올 때 같이 불침번을 섰던 임달순이었다. 반가워 얼싸안았다. 우리 둘 다 합격해 8기생 1대대 3중대로 배속됐다.
8기 교육훈련은 5개월이었다. 졸업할 때 학과 성적은 공동 1등이었다. 면접시험을 보는데 공주중 선배인 박병권(국방부 장관) 교무처장이 면접관으로 앉아 있기에 반가워 웃었더니 면접 태도가 불손하다고 점수가 깎였다. 종합성적 6등으로 졸업했다. 졸업식이 열린 49년 5월 23일, 1년 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대학을 그만두고 13연대에 들어가면서 집에 일절 소식을 끊었다. 내 힘으로 일어선 모습을 보여줘 놀라게 해드릴 생각이었다. “이 자식아, 살아 있었구나.” 눈물 흘리는 어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정리=전영기·최준호·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