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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다. 사도들이 임의로 전도를 계획적으로 다닌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이끄시는대로 다닐 수 밖에 없었으니, 선교의 주체는 성령이었다.
젊었을 때는 남이 여행한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직접 여행을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이제는 직접 여행을 가는 것보다 남들이 여행을 갔다온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흥미를 느끼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우리는 바울이 이리 저리 다닌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치 내가 경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대리 만족이고 대리 경험이다. 그리고 바울이 발견했던 진리와 경험을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도 발견하고 경험한다.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동명이인이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다. 아나니아는 성령의 음성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바울이 있는 곳으로 간다. 우리는 자기 생각보다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성령님은 바울에 대하여 질문하는 그에게 ‘가라’고 명령하셨고, 그는 즉시 자신의 뜻을 버리고 바울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바울을 보자마자 ‘형제 사울아.’라고 불렀다. 사도행전에는 교회를 부르는 명칭들이 다양하게 나온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주의 성도들, 교회, 성도들, 주님의 제자들, 그리스도인,...... 다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형제라는 말도 그 중에 하나이다. 그들은 서로 형제라고 불렀다. 아나니아는 악명 높은 사울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붙인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선입견을 버리고 성령께 순종했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사사기에 보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특별히 세우신 사사들이 있다. 입다, 삼손, 사무엘, 기드온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령 충만을 받아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하면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한 것은 사울을 사도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나니아의 순종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바울은 성령 충만, 성령 세례를 받은 후 물세례를 닫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물세례를 받은 후 성령 세례를 받았다. 물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시니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그에게 내렸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우리도 물세례를 받은 후 성령 세례를 받기도 하고,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물세례를 받기도 한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말씀을 깨다는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 곧 바로 빌립 집사에게 물 세례를 받았다. 이 두 세례의 순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세례는 어느 한 세례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으로 세례를 받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고백해야 된다. 이것이 인간의 삶이다. 인간은 혼자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기를 지지하는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살아야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사실이다.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사울은 3일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아나니아의 방문으로 통하여 눈이 다시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였다. 그는 음식을 먹고 육체의 기운도 차렸다.
그리고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은 자신을 닮은 사람들과 함께 만나서 대화도 하고 사귀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더 확실하게 알게 해 준다.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사귀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행동을 보였다.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람이 갑자기 돌변하면 사람들은 당황한다.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 말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살벌하게 박해하고 몰아붙였던 사울이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사울이 다메섹에 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혼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유대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바울에 대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은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 자기는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뿐에 없다. 아무나 회심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큰 계기로 인해서 사람은 바뀌는 것이고, 그 계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이다.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여러 날이라는 말은 많은 날이라는 것이다. 22절과 23절의 사이에는 약 3년이라는 긴 시간의 간격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기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갈라디아서 1장
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배워서 지도자가 되려고 했던 마술사 시몬과는 다르다. 목사의 권위는 하늘로 부터 온다. 사람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 간 이유가 무엇일까? 기도하고 공부하러 갔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바울은 자신의 신학을 바꾸는 데 3일이 걸렸을 것이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있으면서 회심한 것 같이 바울도 3일이 걸렸을 것이다. 그 후에 바울은 아라비아로 가서 전도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아라비아는 시내산이 있는 그 넓은 아라비아 광야, 아라비아 사막, 지금의 넓은 땅 사우디 아라비아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나바티아 지역, 즉 지금의 요단 동편 지역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나바티아 지역은 매우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진 나라가 있었다. 지금도 성지 순례를 가면 나바티아 지역의 유적과 유물을 보고 온다. 나바티아 왕국의 수도는 페트라였고, 지금도 페트라에 가면 놀라운 유적들을 볼 수 있다.
그가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전도를 하자 그 지역에 큰 소요가 일어났던 것 같다. 3년 후 바울이 다시 다메섹으로 왔을 때 나바티아 왕이 바울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다는 내용이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 11장에 나온다.
32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아레다 왕은 나바티아 왕의 이름이다. 바울은 어디를 가나 소요를 일으키면서 사람들을 회심시켰던 불 같은 사람이었다.
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아라비아에서 3년간 전도하고 다메섹으로 돌아온 바울을 아라비아의 왕이 보낸 사람이 유대교인들과 합세하여 죽이려고 한다는 첩보가 바울에게 알려졌다. 그러자 사울로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사울을 성 밖으로 빼돌려 도망치게 하였다.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이 광주리는 예전에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 쓰였던 큰 광주리와 같은 것이었다.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은 드디어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해 출발했던 예루살렘으로 3년 후 돌아왔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울을 믿을 수 없었다. 사울은 결국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뿐에 만날 수 없었다. 베드로와 15일을 지내면서 형제로서의 우정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바나바라는 사람이 바울이 예수님의 직계 사도들과 사귀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바나바은 바울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사람이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사울이 사도들이 인정하는 사역자가 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바나바와 같이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조력자들은 꼭 필요한 사람이다. 나중에 바나바와 사울은 사소한 다툼으로 헤어지게 되었지만, 바나바 없이는 사울은 없다고 볼 수 있다.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년 전에 사울은 헬라파 유대인들과 합세하여 스데반 집사를 죽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다메섹에서 광주리에 달려 내려와 도망쳤던 바울의 첫 번 째 고난 후, 다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두 번 째 도망을 치는 수난을 겪었다.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가이사랴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항구가 있었다. 헤롯 왕은 훌륭한 건축가였다. 모레 땅이라는 항구가 만들어질 수 없는 장소에 항구를 만들었다. 북쪽 페니키아 항구에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뱃길 가운데 머물 수 있는 항구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가이사랴에 항구 도시를 건축하고, 그 도시 이름을 황제의 명칭을 따서 가이사랴 라고 한 것이다. 당시 황제의 명칭은 가이사였다.
다소는 바울의 고향이다. 현재는 타르수스(Tarsus)라고 불리운다. 터키의 항구도시이고, 길리기아의 수도였다. 히타이트 문명의 영향 하에 건설된 도시이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시작될 때 생겨난 도시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셋째 아들 셋이 이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 다소는 정치, 경제, 학문적으로 아주 발전된 도시였다. 다소는 다메섹과 같이 교통의 중심에 있는 도시로, 그리이스 문명과 로마 문명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도시이다. 바울은 그곳에 살면서 로마어인 라틴어를 배웠고, 그리이스어인 헬라어를 배웠다. 그리고 유대인인 아버지에게 성경 언어인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배웠을 것이다. 바울은 언어적인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영역이 넓었던 것이다. 통역 없이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잇점이다.
다소는 천막 제조업이 성했던 도시여서, 바울도 자연스럽게 천막 만드는 일을 배웠고 선교 사역 중에도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었다.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에서 사라져버린 바울의 행전 14년. 그 중 4년은 아라비아에서, 나머지 10년은 다소에서 사라졌다. 바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울이 무엇을 했는지 사도행전을 통해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다소로 가서 10년 있는 동안 무명의 전도자로 살았을 것이고, 그 후 안디옥에서 목회하던 바나바가 바울을 다소에서 안디옥 교회로 데리고 와서 함께 동역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지역의 교회들은 점점 더 강건해지고 발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