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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20)
(20) 전실판사(全失判事)’의 숙녹비법전(熟鹿皮法典)-이재명 야당 대표의 판결 <공직선거법 위반 1심, 2024년 11월 15일 유죄 선고:징역1년, 집행유예 2년>을 보고
이재명 대표에 대한 판결이 나라를 뒤흔든다. 법치주의에서 검사의 기소와 구형, 판사의 판결에 이의를 단다는 게 구차스럽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이고 검사나 판사는 법원 소속 국가공무원이란 점에서 몇 자 적는다.
우리 문학사에 이런 재판과 관련된 소설이 있다. 백성끼리 분쟁이 있을 때, 관부에 호소하여 판결을 구하던 일을 다룬 소설로 ‘송사소설(訟事小說)’, 혹은 ‘공안소설(公案小說)’이라 한다. 이들 소설은 대개 현명한 재판관을 만나 억울함을 풀며 이야기가 끝난다.
하지만 이 소설들 중, 재판관의 농간이나 어리석음으로 오히려 피해자가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소설[우언이라고도 한다]이 한 편 있다. <황새결송>이다. ‘결송(決訟)’이 백성들 사이에 일어난 송사를 판결하여 처리하는 일이니, 풀이하자면 ‘황새 재판관의 농간에 의한 재판’ 정도의 의미이다. <황새결송>은 조선 후기의 풍자소설로, 부패한 사회와 뇌물·모략에 의해 좌우되는 재판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다.
그 대략 내용은 이렇다. [옛날 경상도에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의 친척 중 간악한 이가 재산의 절반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린다. 부자는 참다못해 서울로 올라가 형조(刑曹,법원)에 소송을 제기한다. 하지만 간악한 친척이 재판관은 물론 그 수하에 있는 형조의 서리들에게도 뇌물을 써서 결국 재판에서 승소한다. 부자는 억울함을 참지 못해 형조 관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옛날에 꾀꼬리, 뻐꾸기, 따오기가 살았다. 셋은 서로 제가 우는 소리가 가장 좋다고 다투었다. 결정이 나지 않자 학장군 황새를 찾아가 송사를 벌인다. 따오기는 자신의 소리가 가장 못나다는 것을 알고 미리 황새가 좋아하는 여러 곤충들을 잡아다 뇌물로 바친다. 드디어 재판날이 되었다. 황새는 세 짐승이 각기 소리를 내어 보도록 하고는 ‘뇌물 판결’을 내린다. 황새는 꾀꼬리의 소리는 애잔하여 쓸데없다고 하여 내친다. 또 뻐꾸기의 소리는 궁상스럽고 수심이 깃들었다 한다. 그러고는 따오기의 소리가 가장 웅장하다며 최고의 소리로 판결한다.] <황새결송>은 이렇듯 부자가 짐승들의 이야기를 빗대어 물욕에 잠겨 뇌물을 받고 그릇된 판결을 내린 법관들을 비꼬아 풍자한 소설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법 관련 서적인 『흠흠신서(欽欽新書)』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부잣집 자식으로 허랑방탕한 놈이 있었다. 그 자식은 외간 놈들과 짜고 돈 200냥을 쓴 것으로 위조증서를 만들며 그것이 원래 공금이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또 아전을 끌어들인다. 그러고는 아전이 부잣집 자식을 관에 고발한다. 수령은 곧 부자집 자식을 잡아다가 가두어 놓고 빚을 독촉하는 한편, 그 부형을 잡아들여 아들 대신 돈을 바치라고 한다. 부자가 돈을 바치자 허랑방탕한 부잣집 자식 놈, 외간 놈, 아전 셋이 나누어 갖는다.”
다산은, 수령은 마땅히 저 세 놈을 벌주어야 하는데 어리석어 옳고 그름을 판결치 못하여 부자의 재산 반을 잃게 하였다며, 이런 어리석은 재판관들을 ‘반실태수(半失太守)’라 하였다. 이는 ‘절반을 잃게 하는 재판관’이라는 의미이다. 재물을 다투는 소송에서 재판관이 사리를 정확히 분별해 시비를 가리기보다 양측에 절반씩 적당히 나누는 식으로 판결하는 것을 말한다. 다산은 이 반실태수를 “최하 등급의 판관이다(此最下者也)”라 하였다.
‘숙녹비대전(熟鹿皮大典,엉터리 경국대전 해석)’이란 말도 저러한 무능한 판관의 그릇된 판정을 말한다. ‘숙녹’은 삶은 사슴 가죽이다. 속담에 “녹비(‘피’가 아닌 ‘비’로 읽는다)에 가로왈 자(鹿皮曰字)”라는 말이 있다. 부드러운 녹비에 쓴 왈(曰) 자는 그 가죽을 당기는데 따라 ‘날 일(日)’ 자도 되고 ‘가로 왈(曰)’ 자도 된다는 뜻이다. 이는 곧 주견머리 없이 남의 말에 붙좇아 일이 이리도 저리도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러니 ‘숙녹비대전’은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여기서는 이렇고 저기서는 저렇게 해석하여 내리는 엉터리 판결을 조롱하는 말이다.
이 시절 이재명 야당 대표의 판결을 보며 ‘반실태수’가 ‘전실판사(全失判事,모든 것을 잃게 만든 판사)’로 ‘숙녹비대전’이 ‘숙녹비법전(熟鹿皮法典,엉터리 대한민국법전 해석)’으로 퇴화한 듯하여, 보기에 딱하고 안타깝다. 후일 이 판결을 한 이의 이름을 따 <한성진 결송>이란 소설이 역사 속에 적바림 될지도 모르겠다.
*『흠흠신서』의 ‘흠흠’은 “삼가고 삼가는 게 본디 형벌을 다스리는 근본이다(謂之欽欽者何也 欽欽固理刑之本也).”에서 제목을 취하였다. 재판관은 개인에게는 생사와 일생을, 사회로는 시비와 선악을, 국가로는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흠흠’, 즉 ‘삼가고 또 삼가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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