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유록/서호자(西湖子)
귀성(龜城)에서 청량산까지는 80여 리 거리이다. 매번 산에서 오는 사람들을 만나 유람한 감상을 묻고는 가보고 싶은 마음을 품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침내 박직경(朴直卿)과 함께 행장을 꾸리고는 경자년(1600년, 선조 33년) 9월 14일 갑인일에 어머니께 작별을 아뢰고 학현(鶴峴)을 넘어 말을 내달려 소게정(召憩亭)에 이르니, 장인 및 덕자(德滋) 이희무(李希楙). , 전제뢰(全帝賚)는 이미 모여 있었다. 장인은 계상(溪上)에 일을 보러 왔고 전제뢰는 예전의 약속을 지키러 왔으며 이덕자는 백부 홍중(弘重) 씨의 두 번째 기일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왔다. 정자는 돌로 쌓았고 그 아래에 십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다. 키가 백여 척이고 큰 것은 한 아름이나 되었는데,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가 이 곳을 다스릴 때에 심은 것이다. 그 뒤에 본도의 관찰사가 되어 이곳에서 머물렀으므로 ‘소게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퇴계 선생도 이곳을 지나가면서 이름을 송석대(松石臺)라고 바꾸셨다. 나의 할아버지 안촌공(安村公) 과 백암공(栢巖公)이 청량산을 유람하는 길에 이 정자를 지나가셨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시를 한 수 지으셨다.
舊號洪亭子(구호홍정자) 예전에 홍정자라 부르더니 今稱松石臺(금칭송석대) 이젠 송석대라 부르는구나. 亭留人不在(정류인부재) 정자만 남아 있고 사람은 남아 있지 않은데 斜日坐荒苔(사일좌황태) 해 기울어 거친 이끼에 앉는구나.
이때가 만력(萬曆) 경자년(1600년, 선조 33년)이다.
말에 꼴을 먹이고 용수현(龍首峴)을 넘어 온계(溫溪)에 이르러 이(李) 어른 빈소에 조문하였다. 예전에 들으니 만년송 한 그루가 당 아래에 있고 사면을 나무로 지탱하여 하나의 정자가 되며 그 아래에는 40여 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나와 장인, 박직경 형 세 사람은 날이 저물어 계상(溪上)에 도착하여 한계정사(寒溪精舍)를 지나가는데, 창 밖으로 몇 그루의 매화가 있어 진정한 은자가 거처하는 곳 같았다. 외사촌 형〔內兄〕 김휴(金烋) 씨는 이곳에 살면서 도를 구현하려는 의지를 가졌으나 나이가 마흔이 되도록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여윤(汝胤) 이극철(李克哲)의 집에서 묵었는데, 나와 이극철은 증조가 같으니, 증조는 곧 퇴계 선생의 맏아들이다. 박직경과 이맹명(李孟明), 이원명(李原明) 등은 재종 형제이다. 이 때문에 다음날 15일 을묘일에 이재랑(李齋郞) 맹명(孟明)의 집에 가서 선생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맹명은 이름이 명철(命哲)이고, 이씨 가문의 종손이다. 전동현(箭洞峴)을 경유하여 도산서원에 들어갔다. 전제뢰가 이미 온계에서 와서 사당을 참배한 후에 전교당(典敎堂)으로 나와서 애일당(愛日堂)으로 향할지를 의논하였다. 방향을 바꾸어
동암(東巖)에 오르니 ‘롱(聾)’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것은 농암 이현보가 취하여 호로 쓴 바위다. 나는 감흥이 일어 시 한 수를 지었다.
單童匹馬尋陶院(단동필마심도원) 동자 하나 말 한 필로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西日來登愛日堂(서일래등애일당) 해질녘 애일당에 올랐네. 誠孝百年人起感(성효백년인기감) 진실한 효도는 백 년 동안 사람을 감동시키니 逍遙非得領風光(소요비득영풍광) 소요하면서 유독 풍광만을 얻은 것 아닐세.
앞 나루의 작은 배가 있는데 어부가에서 말한 ‘분강(汾江)의 고깃배’이다. 돌아올 때 천연대(天淵臺)에 올랐는데, 이 대는 선생이 직접 쌓은 것이다. 가을 물결은 바닥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아 구름 그림자 일렁이는데, 솔개 날고 고기 뛰어노는 즐거움, 즉 자연의 이치는 초학자가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암서헌(巖棲軒)에 들어가려는데, 산이 무너진 지 벌써 70년이었다. 후생 소자로서 지금 이 당에 오른 자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황홀하여 노둔하고 완고한 품성을 질책 받는 듯한데, 하물며 그 당시에 직접 가르침을 받던 자임에랴. 이날 밤 전교당에서 묵었다. 이희철(李希哲) 과 김박(金鑮) 두 사람이 시내에서 달빛을 타고 방문하여 함께 산에 오르기로 하였다.
다음날 16일 병진일. 우리 세 사람과 이희철, 김박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강을 따라 단사협(丹砂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협의 서쪽에 갈선대(葛仙臺)가 있는데, 이 또한 퇴계선생이 노닐며 완상하던 곳으로, 이 동네부터는 깊고 으슥하여 산봉우리들이 점차 기이하며 가끔씩 강가에는 작은 마을이 있어 무릉도원이라 생각이 들 만큼 황홀하였다. 나는 기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貧病叢中歲月遷(빈병총중세월천) 가난과 병 속에 늙어가는 인생 夢魂長繞丈人顚(몽혼장요장인전) 꿈속의 혼만이 장인봉을 늘 맴돌았지. 今朝試入丹砂路(금조시입단사로) 오늘 아침 단사협 길에 들어오니 滿目雲霞我欲仙(만목운하아욕선) 눈에 가득한 구름·노을에 내가 신선이 되려 하네.
흰 구름 걸린 곳을 지나 고산(孤山)으로 들어가니 강물은 못을 이루고 깎아지른 절벽이 좌우로 펼쳐져 있으며 물새는 바위틈에 깃들어 있으면서 쌍쌍이 오르내리니 또한 그윽한 경치를 도왔다. 주변에 조그마한 정자가 있기에 물어봤더니, 봉화(奉化) 금난수(琴蘭秀)가 만든 것이라 하였다. 잠시 쉬었다가 말을 타고 나부수(羅浮水)를 건넌 뒤 청량산 입구로 들어갔는데, 바로 장인봉 아래였다. 산길은 비탈지고 굽어 있었으며 나무들은 울창하여 그 사이로 해가 보이지 않는 곳도 있고 곁에는 계곡물과 여러 바위가 있었는데 폭포의 하류이다. 비로소 봉우리들이 보였는데, 삐쭉 솟아 먹줄을 매긴 것처럼 깎아지른 듯하니, 금탑봉(金塔峯)이었다.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물주의 솜씨가 어찌 이다지도 기이하단 말인가? 마땅히 이 산의 제1봉우리가 될 것일세.” 라고 하였다. 연대사(蓮臺寺)에 이르러 주위의 여러 봉우리를 빙 둘러보니 모두 금탑봉처럼 기이하였다. 절 앞에 연대(蓮臺)라는 대(臺)가 있었고, 그 서쪽에는 연화봉(蓮花峯)이 있었다. 오랫동안 문 밖에 앉아 있었는데도 나와 보는 승려가 하나도 없으니, 손님을 꺼려하는 승려들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들어가 종각에 앉아 있으니, 승려 원혜(元惠), 원민(元敏), 학정(學正) 등이 비로소 앞으로 와서 절을 하였다. 갑자기 후두둑 비가 내려 동천(洞天)이 어둑어둑해졌다. 이날 밤 동쪽 상실(上室)에서 묵었다. 한밤 중에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더니 대낮처럼 달빛이 환하였다. 모든 바위가 한 색이어서 자못 신선이 사는 구령(緱嶺)에서 퉁소를 부는 흥취가 있었다. 연대로 나가 배회하였다. 한참 있다가 나는 시 한 수를 지었다.
명월도천심(明月到天心) 밝은 달 天心에 이르고 만학경요굴(萬壑瓊瑤窟) 온 골짜기는 옥으로 만든 굴일세. 유인수홀각(遊人睡忽覺) 나그네 자다가 잠시 깨어 산보태정곡(散步苔庭曲) 이끼 난 정원 길을 산책하네.
전제뢰가 화답하였다.
17일 정사일. 신발을 신고 승려 원혜를 앞장서게 한 다음 지장전(地藏殿)을 거쳐가니 연대사의 동쪽 벽 위에 할아버지 안촌공[배응경]과 백암공[김륵]께서 이름을 새긴 것이 있었다. 50년 전의 먹의 자취가 어제인 듯 선명했다. 성언(聲彦) 김박(金鑮)은 곧 백암공의 손자였는데, 서로 추모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시왕전을 지나 금탑봉에 이르니 서쪽 허리에 어풍대(御風臺)가 있었다. 대는 매우 널찍하여 마치 허공에 의지하여 신선이 된 느낌이 들었다. 대 옆에는 총명수(聰明水)가 있었는데, 승려들이 최치원이 이 물을 마시고 총명하게 되었다는 전설로 사람을 속이곤 하였다. 원혜가 말하기를, “이 물은 진실로 바위틈에서 흘러 나와 맛이 지극히 맑고 차서 다른 비루한 물과는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총명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어찌 진짜로 이 물을 마신다고 총명해지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몇 걸음쯤 가니 요초대(瑤草臺)가 나왔고 대의 동쪽에는 치원암(致遠庵) 있었는데, 승려는 살지 않았고 벽에는 퇴계 선생이 친필로 이름을 적어 놓았다. 치원암에서 열 걸음쯤 가니 극일암(克一庵)이 나왔는데, 여기는 금탑봉의 남쪽 허리에 해당하고 또한 승려가 살지 않았다. 김성언을 시켜 벽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서쪽에 풍혈대(風穴臺)가 있었는데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때 배를 바닥에 붙인 뒤에야 이 바위에 오를 수 있다. 덮개돌은 가운데가 높고도 넓어 앉을 수도 있고 설 수도 있으며 비록 솜씨 좋은 석공이 모든 바위를 쪼아 이러한 모양을 만들더라도 반드시 이 바위보다는 못하리라. 바위에는 장인과 사형(舍兄) 중춘(仲春)이 함께 노닌 기록이 있었는데, 사형의 필적이었다. 동굴 입구에는 두 개의 판자가 있었는데, 원혜가 ‘최고운의 바둑판’이라 하나 말에 근거가 없어 믿을 수 없다. 동쪽으로 한 암자가 있는데 안중암(安中庵)이다. 전설에 의하면, 안중(安中)은 여인으로, 신처럼 변화불측하여 여러 암자를 처음 건립할 때 시주를 많이 한 공이 있어 반 칸짜리 사당을 지어 그 사람의 상(像)을 모신다. 몇 걸음 가니 상청량사(上淸凉寺)가 있었다. 절 왼쪽에는 얼음이 바위 안에서 나오는데 조그마한 구유〔槽〕를 타고 땅에 떨어져 작은 샘이 되었다. 맑게 고여 있어 마실 수 있다. 아래에는 하청량사(下淸凉寺)가 있었는데 벽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 있었다. 나는 신재의 유람기를 본 적 있는데, 이곳저곳 유람한 것 외에도 일에 따라 뜻을 붙여 밝혀 놓은 것이 많았다. 12개의 기이한 봉우리에 불교식의 비루한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선생이 일신하여 통렬히 이름을 바꾸어 선계의 신령을 위로하고 맑은 기운을 밝히셨으니, 이것이 어찌 자잘한 일이겠는가? 동쪽으로 수십 걸음 가서 경일암(擎日庵)에 올랐는데 길이 매우 험하고 위태로웠다. 경일봉(擎日峯)의 지맥과 금탑봉 정상을 넘고 돌길을 거쳐서 김생굴(金生窟)에 이르렀다. 굴은 큰 바위 아래에 있었는데, 큰 소반을 덮어 놓은 듯한 모양이 마치 무지개다리 같았다. 하늘에는 한 조각의 구름도 없는데, 비가 옷을 적시므로 이상하게 생각하여 위를 쳐다보니 굴 위의 폭포에서 흩어져 내렸는데, 방울방울 옥이 떨어지듯 점점이 구슬을 내뿜는 듯하여 가장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석순(石笋)이 바위틈에서 자라났고 그 옆에는 김생암(金生庵)이 있었다. 나는 예전에 김생의 필적을 본 적이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힘차서 기이하고 빼어난 이 산의 모습과 같았다. 신재 주세붕이, 장욱(張旭)의 인위적으로 쓴 자취가 없이 춤을 추듯 써 내려간 글씨에 비유했는데, 적절한 비유이다. 북쪽으로 하대승암(下大乘庵)을 향해 가는데 잔도(棧道)가 매우 위태로웠다. 암자 위에는 상대승암(上大乘庵) 터가 있었다. 암자 앞에는 대(臺)가 있고 대 위에 있는 커다란 세 그루 홰나무의 잎은 푸르고 울창하여 맑은 바람소리가 절로 생겨나는 듯 했다. 다섯 사람은 홰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승려 몇 명이 숲 사이에서 힐끗힐끗 보이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합장하며 말하기를, “여러분께서 산비탈을 오르내리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저희 암자에서 쉬어 가시지요.” 라고 하였다. 우리를 급히 이끌고 간 이는 문수암(文殊庵)의 승려였다. 나는 매우 기뻐서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踏盡淸凉又大乘(답진청량우대승) 청량산을 다 돌아다녀도 대승이건만 奇巖處處恨無僧(기암처처한무승) 기암 곳곳에 승려 보이지 않는 것이 한스러웠지 幸逢仙子文殊寺(행봉선자문수사) 다행스럽게도 문수사의 선자들을 만나니 始覺閒情一倍增(시각한정일배증) 한가한 정이 더욱 풍부해짐을 비로소 알겠구나.
그 승려들 중에 홍민(弘敏)이란 자는 나와 안면이 있었다. 암자 좌우로 폭포가 있고 사면이 모두 기암절벽으로 병풍을 끼고 있는 듯하니, 곧 경일봉 아래의 제일가는 암자이다. 서쪽으로 보현암(普賢庵)을 지나 환선대(喚仙臺)에 오르니 대는 매우 탁 트여 높이는 천여 척으로 어풍대(御風臺)와 마주하고 있었다. 진불암(眞佛庵)이 그 아래에 있었는데, 모두 승려가 없었다. 우리들은 몹시 배도 고프고 피곤하기도 하고 날까지 저물어 곧장 지장전 뒷길을 따라 연대사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뒤 이원명과 김성언이 일이 있다면서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이날 밤 다시 동쪽 상실(上室)에서 묵었다. 우리를 인도하던 승려 원혜가 선당(禪堂)에서 와서는 명산의 형승에 대해자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다음날 18일 무오일. 학정을 앞장서게 한 뒤 다시 문수암에 들렀다. 박직경이 먼저 하대승암 길을 경유하여 문수암 뒤 널찍한 바위에 앉아서 호쾌한 노래 몇 곡을 뽑았는데, 참으로 통쾌하였다. 시내가의 길을 따라 상만월암(上滿月庵)에 오르니 지세가 험준하고 시야가 탁 트였다. 경일봉이 왼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연화봉과 금탑봉은 마치 다리 아래에 있는 듯하였으며, 산국화가 들에 가득하여 그윽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수많은 단풍 숲이 모두 한눈에 들어와 또한 한 차례 흥취를 돋우었다. 백운암(白雲庵)은 그 위에 있었는데, 산불에 소실되어 이끼만이 옛길을 덮고 있고 인적이 매우 드물었다. 나는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兩日耽看猶未洽(양일탐간유미흡) 이틀 동안 두루 돌아보아도 흡족하지 않아 白雲巖下久盤桓(백운암하구반환) 백운암 아래에서 오래도록 서성였지. 白雲滿洞蒼苔老(백운만동창태로) 흰 구름 골짜기에 가득하고 푸른 이끼 늙어가니 疑有仙翁住此間(의유선옹주차간) 이 곳은 신선이 사는 곳인가?
서쪽으로 십 보쯤 가서 만월대(滿月臺)에 오르니 길옆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숲이 빽빽하여 제대로 볼 수 없어 전제뢰가 실족하였다. 내가 놀려대며, “오히려 이 풍진 세상에 몸을 빠뜨린 것보단 낫지 않은가?” 라고 하고는 함께 웃었다. 다시 환선대를 쳐다보았더니 몸이 광한궁(廣寒宮)위에 있는 듯했다. 원효암(元曉庵)이 그 아래에 있고 환선대 서쪽에는 몽상암(夢想庵) 옛터가 있었다. 여기에서 곧장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 자소봉(紫霄峯)에 당도하였다. 푸른 절벽이 천 길 높이여서 올라갈 수 없었다. 동쪽은 자란봉(紫鸞峯)이고 서쪽은 탁필봉(卓筆峯), 연적봉(硯滴峯)이었다. 마침내 자란봉을 먼저 올랐는데, 길이 매우 험준하여 발을 한껏 쳐들면서 올라갔고 몸을 돌려가며 내려 왔다. 참으로 이른바 ‘앞 사람이 뒷사람의 머리를 보고, 뒷사람은 앞 사람의 발을 본다.’는 경우인가 보다. 산성의 옛터를 밟으며 내려왔다가 동쪽에 있는 대에 오르니 작은 풀들이 돌 위에 자라고 있었다. 꺾어서 씹어 보니 산초를 씹는 듯했다. 학정이 선초(仙草)라고 하였다. 이 대는 자소봉의 지맥으로 자란봉, 백운봉보다 높았고 만월대가 도리어 그 보다 낮았다. 내가 학정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 대를 통해 더 멀리 보고자하는데, 좋은 요령이 있는가?” 라고 하니, 학정이 말하기를, “여러 봉우리 중에 오를 수 있는 것으로 동쪽의 자란봉과 서쪽의 연적봉 중 동대(東臺)가 있고, 오를 수 없는 것으로 자소봉과 탁필봉 둘이 있습니다. 이 두 봉우리는 눈의 정(釘)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동대(東臺)에 있어서는 우연(虞淵)이 막고 있고, 연적봉에 오르면 양곡(暘谷)이 막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괜찮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겠네. 동대의 동북쪽, 연적봉의 서남쪽은 가능한가?” 라고 하니, 학정이 이에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주었다. 청량산의 지맥은 진실로 태백산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수백 리를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다가 다시 이어져 재산현 서쪽에 이르러 바로 이 산이 되니, 안동부 경계 내에 있는 산이다. 저 동쪽에 멀리 있는 것은 일고산(日高山)과 비파산(琵琶山)이요, 북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은 태백산(太白山)이며 가까이 있는 것은 문수산(文殊山), 봉황산(鳳凰山)이다. 동북쪽으로는 이와 같을 뿐이다. 가슴에 시원스러워져 뭔가 터득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欲識淸凉最高處(욕식청량최고처) 청량산의 가장 높은 곳을 알려 한다면 紫宵峯下有東臺(자소봉하유동대) 자소봉 아래의 동대가 있다네. 登臨不獨供遊玩(등림부독공유완) 올라가 보면 노닐기 좋을 뿐만 아니라 滌盡平生芥滯懷(척진평생개체회) 평소 막혀 있던 회포도 씻어 준다네.
마침내 내려와 서쪽으로 수십 보쯤 가서 연적봉에 올랐다. 연적봉의 탁 트인 맛은 동대에 뒤지지 않았으나 평평한 느낌은 동대에 미치지 못했다. 서쪽으로 멀리 있는 것이 소백산(小白山)이고 서남쪽으로 가까이 있는 학가산(鶴駕山)이며 남쪽으로 멀리 있는 것은 보현산(普賢山)과 주왕산(周王山)인데, 이상은 서남쪽으로 볼 수 있는 산이다. 물도 보였는데, 골짜기 입구에서 물이 빙 돌아 흰 구름이 있는 곳에서 장담(長潭)이 되고 또 그 아래로 내려가 도산서원 애일당(愛日堂) 앞 연못이 되었다. 우리들은 지팡이를 짚고 한참 있다가 노래를 부르며 돌아왔다. 길이 더욱 험하여 몇 리쯤 내려와 선학봉(仙鶴峯)에 도착했으니 바로 연대사(蓮臺寺)의 뒤쪽이다. 또 서쪽으로 서암(西庵)에 갔는데, 여기서부터 본 것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다만 산포도만 있었을 뿐이다. 우리들은 열매를 따서 갈증을 해소했는데 가슴속을 씻어 주는 듯하여 마음과 몸이 모두 상쾌하였다. 한참 동안 게일정(憩日亭)에서 쉬다가 정오쯤 비로소 암자에 도착하였다. 암자 앞뒤에 층층이 쌓인 바위들 수십 개의 형세가 매우 시원하였으니 이 산의 별세계였다. 절의 창문과 벽을 다시 고치고 뜰 앞의 섬돌을 씻어 놓았으며 키나 빗자루 또한 구비되어 있었으나 승려는 없었다. 이상하게 여겨 물어보니 학정이 말하기를, “멀리 있는 승려가 먼저 와서 청소를 해 놓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암자 북쪽에 샘이 있었는데, 맛이 달고 찼으며 암자 앞에는 대가 있어 올라가 보니 조망할 수가 있었다. 서쪽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아래에는 자비암(慈悲庵)의 옛터가 있었다. 관음전 뒤를 따라 연대사로 돌아왔다. 절 남쪽에 축융봉(祝融峯)이 있었는데 이 청량산 중에 오직 이 봉우리만이 흙을 이고 활처첨 둥근 모양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는 두 개의 돌이 있는 데 봉황이 나는 듯하여 그것을 바라보면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 정도였다. 밖으로 탁립봉(卓立峯)이 있는데 또한 신재(愼齋)가 품평하여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비겼다. 낮잠을 잔 뒤에 산을 나설 계획을 짜려는데, 홍민, 원혜, 학정 등이 모두 와서 모였다. 내가 학정에게 말하기를, “12봉우리는 내 이미 어느 정도 보았네. 이 곳에 29개의 절과 암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본 것은 그 수에 모자라니 그 나머지 암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라고 하니, 학정이 말하기를, “장인봉 동쪽에 수도암(修道菴)이 있고 장인봉 정상에 쌍실암(雙臺庵)이 있습니다. 동수암(東水庵)은 경일봉 동쪽에 있고 상운암(上雲庵)은 경일봉 남쪽 수운(水雲) 사이에 있고, 또 동초막(東草幕)이 있지만 지금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이른바 29개의 암자라는 것은 세 개의 전각과 남은 터를 합쳐서 말하는 것입니다. 연대사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천천히 골짜기 입구를 나서는데, 승려들이 옛 성터에서 송별해 주었고 십리 쯤 오다가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장인봉이 보이지 않았다. 전제뢰가 내게 말하기를, “세상 일이 사람을 구속하고 호사다마하니 이 이후로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가 없다네. 어찌 돌아보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라고 하였다. 박직경과 전제뢰 두 사람은 온계로 가고 나는 다시 계상(溪上)에 이르러 이날 밤 이여윤(李汝胤)의 집에서 묵었다. 장인은 일이 있어 머무르고 여러 친구분들 일제히 모여 밤새도록 담소하다가 마쳤다.
19일 기미일. 김성언과 함께 잠시 월란사(月灡寺)를 방문하였다. 의인 구현(宜仁舊縣)을 지나 이겸(爾兼) 금삼달(琴三達)을 보고 그와 함께 역동서원에 이르렀다. 역동서원은 좨주(祭酒) 우탁(禹卓) 선생을 배향한 곳으로 퇴계 선생과 여러 유생들이 상의하여 세운 것이다. 우탁 선생은 역학(易學)을 창도하고 밝혀 ‘역동(易東)’으로 이름났다. 예안(禮安)은 조그마한 동네인데, 도산(陶山)과 역동(易東)이 5리쯤 거리를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어 우리 유가의 성대함이 동방에서 으뜸이 되니 그 얼마나 위대한가? 금이겸과 함께 몇 잔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금화숙(琴和叔)을 만나 한 잔 했다. 걸어서 송대(松臺)를 나서 풍월담(風月潭)을 지나 금화숙의 집에서 묵었는데, 그 동네는 부포촌(夫浦村)이다.
20일 경신일. 오천(烏川)으로 가려다가 월천서당(月川書堂)에 들렀다. 서당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 ~ 1606)이 시를 읊던 곳으로 측실의 자식인 조석붕(趙錫朋)이 문학으로 가문을 유지하고 있으니 가상하다. 오는 길에 김성언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농암을 넘어 오천에 도착하니 만나는 친구들마다 기뻐하였다. 금람(琴欖) 씨네 집에서 묵었는데, 그는 현감 금응훈(琴應壎, 1540 ~ 1616)의 맏아들이며, 현감 금응훈은 우리 외조모의 시아버지이다. 21일 신유일. 교관(敎官) 김광계(金光繼) 빈소에 조문하였다. 이 사람은 검소한 행실로 당시의 동료들이 추앙하였다. 빨리 밥을 먹고는 말을 타고 동포(東浦)에 이르렀다. 시 한 수를 지었다.
十二峯巒領略歸(십이봉만령약귀) 열두 봉우리 다보고 돌아오는데 天風吹送遠遊衣(천풍취송원유의) 천풍이 먼 여행을 하고 오는 사람의 옷깃 불어 전송해준다. 溪山觸處難爲眼(계산촉처난위안) 계곡과 산 디디는 곳에서 안목이 생기긴 어렵겠지만 斗覺胸襟異昔時(두각흉금이석시) 흉금은 예전과 달라졌음을 알겠노라.
할아버지의 유산록(遊山錄) 중에 이른바 ‘열두 봉우리의 맑고 높은 운취를 모두 흡수하여 청풍이 양쪽 겨드랑이에서 생기는 흥’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언덕과 봉우리를 대하고 나면 웬만한 것은 산이 되기 어렵고 계곡의 물을 마주 대하고 나면 웬만한 것은 물이 되기 어렵다라는 말이 남긴 뜻일 것이다. 이 날 저녁 집으로 돌아왔다. 청량산을 한 바퀴 도는데 멀다 해도 백리에 지나지 않으나 봉우리는 기이함을 다투고 암벽은 깎아지른 듯하여 우뚝하고 높았다. 그 모습은 칼과 창이 마주한 듯, 연꽃이 고개를 내민 듯, 올곧은 사람이 좌석에 앉아 있어 범접할 수 없는 듯, 용사가 적과 마주하여 분기탱천하여 혼자서 감당하는 듯하였다. 희미하게 뜬구름이 저녁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것은 층층이 쌓인 절들이요, 어슴푸레 은하수가 구천에 떨어지는 듯한 것은 폭포의 물이 휘날리는 것이다. 비록 호랑이가 걸터앉아 있는 듯하고 용이 서려 있는 듯한 태백산과 소백산일지라도 반듯하고 엄하며 상쾌하고 깨끗하며 빼어남에 있어서는 청량산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으니, 신재(愼齋)가 작은 산 중의 신선(神仙)이라고 한 것은 진실로 적절하다고 하겠다. 또한 이름 난 산들의 깨끗한 경계는 천지 사이의 맑은 기운이 모인 곳이요 신선이 굴로 집을 삼는 곳이다. 진실로 가슴 속의 회포를 씻어내고 저 멀리 노을 밖으로 마음을 두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마음에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 없겠으며, 어찌 진정한 즐거움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산에 오르고 물에 임하여 비단 자연의 경물만을 즐긴 것이 아니라 온갖 기운을 모으고 혼연한 이치를 터득하여 나의 성정(性情)을 충만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기심은 우뚝하여 더할 수가 없거니와 주자(朱子)가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노래하신 것과 사마천이 문장을 지은 것에 대해, 드러난 실적의 깊고 얕음, 지향하는 뜻의 높고 낮음에 있어서는 구별이 없을 수 없으나, 산수의 오묘함을 터득한 것에 있어서는 한가지다. 유람에서 본 것을 통해 아직 이르지 못한 것으로 확산시킨다면 가슴속에서 터득한 것이 있을 것이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나는 약관의 나이 때부터 이미 바깥 사물에 마음을 두어 이 산을 한 번 구경하고자 하여 꿈속에서 상상으로 이 곳을 노닌 지가 거의 15~6년이 되었다. 이번 가을에 용감히 산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고 이번 가을의 풍광이 진실로 좋아 국화와 단풍 사이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켰으며 또한 등산하는 날에 날씨가 청명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님에 무한한 기상을 얻었고 하늘이 나에게 베푼 것 또한 많았다. 또 느낀 점이 있었다. 금탑봉에서 보면 선학봉이 높지만 만월대가 선학봉보다 높았고 자소봉이 만월대보다 높았다. 만약 천하의 산을 논해 본다면 어찌 자소봉보다 높은 것이 비단 수천 개가 넘을 줄 어찌 알겠는가? 처한 곳이 점점 높아질수록 보는 것인 점차 원대해짐을 깨달았다면 산을 만들 때에 아홉 길의 공(功)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학상달(下學上達)의 효과 또한 이를 통해 미룰 수 있다. 아! 앞뒤로 이 산을 유람한 사람들의 기록을 고찰할 만한 것이 그 얼마나 많겠는가? 유독 신재(愼齋)의 가정(嘉靖) 갑진년(甲辰年, 1544)과 할아버지의 만력(萬曆) 경자년(庚子年, 1600) 유람록을 볼 때, 갑진년 유람록은 경자년 유람록 보다 57년, 경자년 유람록은 정해년(1647) 유람록보다 48년 앞선다. 갑진년의 유람록에는 여러 암자와 승려들이 모두 있었는데, 경자년에는 승려들이 없다는 한탄이 있었고, 정해년에는 이보다 심해졌다. 이를 통해 점점 퇴락했으니 뒷날 유람하는 자들은 다만 산봉우리의 우뚝함과 초목의 울창함만을 볼 뿐일 것이니, 어디에 의지하여 예전의 성대한 모습을 찾을 수 있겠는가? 퇴계 선생께서 산을 유람한 사람은 기록이 없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기록이 산을 유람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이에 본 것을 거칠게나마 기록하여 뒷날 사람들의 지식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예컨대 사물을 형상화한 것의 오묘함이나 총론의 상세함은 신재(愼齋)의 유람록에 모두 있으니 어찌 가져다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해년(1647) 10월 상순(上旬)에 서호자(西湖子)는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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