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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9장 38-42절
두려워 숨기더니 이 일후에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 하시고 숨을 거두셨지만 숨을 거두신 후에도 구약 예언의 성취는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두 가지를 보여주셨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아니한 것으로,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을 찌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의 경우 큰 날로서의 안식일에는 시체를 달아 둘 수 없다는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십자가를 그대로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청하기를 범죄자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요청을 들어줬는지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리는 꺾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죽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20절입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도다” 바로 이 말씀을 성취하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에 이른 것과 같이 그의 몸 된 교회 역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뼈가 꺾이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지만 고난에서 건진다는 것이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그 고난이 교회를 완전히 넘어뜨리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하나입니다.
더불어 또 다른 성취가 있는데, 군인들은 분명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확인한 정도가 아니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것으로 끝날 수 있었지만, 성경은 한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고 기록합니다. 죽음을 확인하고 확신했는데도 찔렀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의 명령은 아마도 유대인들의 요청에 따라 다리를 꺾어 빨리 죽여 십자가를 치우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명의 죄수의 경우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죽음을 확인했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면 다리를 꺾는 것이 빌라도의 명령이었을 텐데, 다리는 꺾지 않으면서도 옆구리에 창은 찌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 있었고, 그 예언된 바가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가랴 12장 10절을 성취한 것인데,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로마 군인 한 사람이 찌른 것으로 있지만, 인용된 구절은 유대인이 찌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유대인들이 찌른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고 독자를 위하여 애통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스가랴 13장으로 가면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13:1)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이냐? 지금은 저들이 찌른 자로 있지만, 찌른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것이요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통해 회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대상이 유대인 모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은 제외되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구약 예언은 유대인을 지칭하고 있지만, 이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의미가 분명 내포되어 있습니다. 특히 군인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왔는데, 이 피와 물은 모든 죄와 더러움을 씻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 제사 제도와 정결 예식을 통해 예표 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씻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두 사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지난 시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유대인과,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 나온 백부장에 대하여 비교한 바 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의 죽음과 관련해 나타난 현상들을 보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죄인이 아니라 의인임을 고백한 것이 백부장이었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 나타난 현상들을 함께 보았을 것이지만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완악함, 강퍅함을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또 다른 부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이들은 다 유대인들입니다. 또한 유대 사회에서 어느 정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재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경우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고, 아리마대 요셉의 경우 새 무덤을 예수님을 위해 사용할 정도의 수준입니다(마27:60 참고). 이런 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여 장사 지낸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이들이 처음부터 이런 담대함을 가졌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38절에 보시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여기서 ‘이 일 후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라는 말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지만 그 전에는 어떠했는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요, 그분을 쫓아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이면서도 자신의 정체를 숨겼는데, 왜냐하면 유대인이 두려워서입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자면, 마가복음 15장에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도 설명합니다(막15:43). 공회원이라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존경 받는 공회원입니다. 그만큼 신분에 걸맞은 일을 잘 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인데, 어떤 의미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사회에 팽배해 있었던 것이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런 그에 대하여 누가복음 23장에서는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눅23:50-51)고도 설명합니다. 다수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했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만큼은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공회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일도 잘 하는 사람이었지만, 또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이 분명했지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입니다. 39절과 40절을 보시면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그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요한복음 3장 1절에 의하면 바리새인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찾아올 때는 오늘 본문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밤에 찾아왔습니다.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이 안 되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한복음 3장 내용에 근거하자면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는 참된 신앙 가운데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남, 중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퍼지면서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찾아왔지만,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에 엉뚱한 소리만 하는 것이 니고데모의 수준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있었지만,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는 굉장히 무지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이런 말씀을 듣고 갔지만 그가 언제 참된 회심을 했는지는 말씀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니고데모 역시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고 할 때 그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자신의 신앙을 좀 더 분명히 드러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역으로 요한복음 3장 이후 분명 거듭남의 은총을 받았을 것이고, 그도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 있었지만,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리마대 요셉처럼 유대인이 두려워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 후에’,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그는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참고로 칼빈 시대에 ‘니고데모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황주의 안에 있으면서 신음합니다. 교황주의 안에서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주의 안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거기서 나오기보다는 계속해서 거기 머무름으로 칼빈의 표현으로 하자면 우상숭배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이기에 그들을 니고데모파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런 자세는 분명히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자라면 요한복음 3장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니고데모파인 너희가 말하는 니고데모는 밤에 주님을 만나러 와서 제자가 될 것을 밝히지 않은 자로(요3:1-21) 그때의 니고데모는 눈이 밝아지기 전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의의 태양이 비취고 난 후에는 여전히 자기 은신처에 머물렀던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주님을 장사하기 위해 아리마대 요셉과 더불어 주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요구한 니고데모라는 것입니다(요19:38-42).
물론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중에 참된 신앙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에는 아리마대 요셉과 다를 바 없이 니고데모도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니고데모, 이런 아리마대 요셉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앙은 있지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는 매우 연약한 모습에 대해서는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가 아닌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다는 것은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떤 면에 있어서 유대인의 승리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땅에 설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다는 것은 유대 사회로 볼 때 쉽지 않은, 어쩌면 죽음조차 각오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다는 것은 그만큼 칭찬을 받아 마땅하고, 그런 신앙에 대하여 우리는 본받을만하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의 강퍅함, 완악함과 대조되는 두 사람의 신앙을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가장 어려울 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소위 사람이 두려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못하는 그런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괜찮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0장 32절과 33절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쳐진다가 아니라,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만한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더 중요하게 살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설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왜 하필 유대인들 가운데 높은 신분이라 할 수 있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장사하게 했는가? 이전에는 분명 자신의 신앙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칼빈 시대 니고데모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고서 예수님의 죽음을 장사하도록 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코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비록 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른 죄인들과 같은 그런 죽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죽음이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 있는 자가 처형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죄가 없음에도 유대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로 넘겨져 죽었을 뿐입니다. 성경도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며, 죄와 무관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처럼 죽으셨는데, 왜냐하면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죽음이 어떻게 수치스러운 것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칼빈은 공관복음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물론 요셉의 노력을 높이 평가 해야겠지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야겠다. 곧 하나님께서 그 민족 가운데서 고귀한 신분의 사람을 선택하셔서 정중한 장례로 십자가의 수치를 감싸신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만이 아닙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 또한 니고데모의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통해 장사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값진 것이요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매튜 풀로 알려진 마태복음 주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라는 말도 덧붙이지만, 요셉과 니고데모가 우리 주님을 장사지낸 방식은 통상적인 것은 아니었고, 단지 그렇게 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지극히 낮아지시고 비천하게 살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존귀와 영광을 더하시는 과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요한복음 12장으로 가시면 그의 죽음이 값진 죽음임을, 결코 수치스러운 죽음이 아님을 조금 더 일찍 드러낸 사건이 있습니다. 1절 이하를 보시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12:1-8)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난 뒤 그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께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사건입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의 마음은 그의 입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가 굉장히 비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면죄부에 대한 가치를 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 43항에서 46항까지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43. 가난한 자에게 주는 일 또는 궁핍한 자에게 빌려주는 일이 면죄부를 확보하는 일보다 더 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져야 한다.
44.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자라나고 사람은 더 선하게 되는 법이지만, 면죄부를 통해서는 사람이 더 선하게 되지 않으며 단지 형벌로부터 더 자유롭게 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45. 궁핍한 사람을 보고 그것을 무시하고 면죄부를 위해 주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에게 있도록 요구하는 것이라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져야 한다.
46. 풍부하게 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집을 위하여 필요를 보유하고 면죄부를 위하여 낭비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져야 한다.
오늘날 교회 건축을 위해서라면 빚을 져서라도 헌금해야 한다는 한국교회의 현실로 보자면, 한국교회는 루터의 이런 개혁정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루터의 개혁정신에 근거하자면 방금 읽은 요한복음 12장의 내용은 마음과 입이 달랐지만 가룟 유다의 말 자체로 의미가 있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낭비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더 의미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한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결코 낭비한 것이 아님을 밝히십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26:10)고 말씀하시까지 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만큼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값비싼 향유를 부어도 좋을 만큼, 아니 그것조차도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고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앞서 유월절 엿새 전, 마리아를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떠한 죽음인지를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으로 나타내셨던 것이고, 이제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으시고 난 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통해 그 가치를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마리아 사건에서는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였다고 증거 하고 있는데(요12:3), 예수 그리스도가 택하신 백성의 향기로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지만 그의 죽음의 가치는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고, 그런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이 가르쳐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는 어김없이 가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마리아란 여자를 기억하도록 한다기보다는 여자가 행한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를 위하여 행한 바 그의 죽음이 가치가 있고 향기가 될 것임을 기억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가치요, 복음의 향기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오늘 본문에 대한 요한복음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바를 향품을 가져 오고 있는데 그들이 먼저 그의 죽으심의 향기의 흩뿌림을 받고 거기에 젖지 않았던들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살아나도록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의 신앙을 숨기던 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할 수 있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끝난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신자들에게는 능력이 됩니다. 그의 죽음은 죽어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살아나게 합니다. 그의 부활을 통해 이 사실은 더욱 더 분명하게 되지만, 요한복음 12장 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숨길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신앙이 이제 살아나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칼빈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이 두 사람의 마음에 불어 넣어 준 향기의 효력은 얼마나 컸던지 그들의 모든 육적인 생각을 순식간에 불식하고 말았다. 돈과 야망에 대한 사랑이 그들을 지배하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온 세상을 포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를 안다면, 그분의 죽으심의 고귀함을 안다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향기로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숨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세상의 가치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을 세상 가치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예수를 잘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복을 통해 우리 신앙의 좋고 나쁨을 생각하는 방식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잘못된 방식입니다. 한때 구약이 그런 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아 교회를 향한 말씀의 방식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는 신앙은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주님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기도 하셨던 겁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4-4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그가 다시금 살아나는 것의 가치, 이것이 복음인데, 복음의 가치를 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쫓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서 주를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것을 위한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향기를 맛본 자들은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주께서 주신 그 향기를 동일하게 나타내기 위해 살아가는 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향기로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구원 받는 자들에게는 향기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자가 아닙니다. 망하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 자체가 향기로 있지 못합니다. 우리의 향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향기, 진리의 향기는 구원 받는 자와 망하는 자에게 달리 풍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받은 자들은 없는 것 같지만 있는 자요, 무능한 자가 같지만 유능한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세상적인 것으로 있는 자, 세상적인 것으로 유능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런 자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에 빠져 있는 자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그 말씀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냄새만을 풍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순종해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죽으셨고, 죽음이 악취가 아닌 향기로 나타나도록 하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면서 세상을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부패한 악취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패한 악취를 위한 죽음은 아닙니다. 고귀한 죽음이요, 그 고귀한 죽음은 향기로 있는 겁니다. 그 향기는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 때문에 세상을 따라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했을 때 빌라도는 건네줍니다. 그래서 받아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무덤에 두게 되는데, 오늘 본문 41절과 42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고 하면서 죽은 예수님을 매장하게 됩니다. 간혹 이런 예수님의 죽음의 예를 통해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돈을 들여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 그 고귀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지, 이것이 본이 되어 우리의 죽음도 이러한 화려함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40절에서 ‘유대인의 장례법대로’라고 할 때 율법에 따라 그 일을 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어느 정도 화려하게 장례를 치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광채가 밝게 비치기 전입니다. 그때는 이러한 화려함이 있었습니다. 많은 의식과 그 의식 가운데 있었던 화려함, 사실은 성전의 화려함도 그런 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체가 온 이상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화려함으로 모든 율법이 폐해졌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장례가 화려함과 그런 식의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그렇게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 우리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다음 주 보게 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부활을 소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 검소하지 않고, 자제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오는 사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를 말살하고 마는 셈이 될 것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새 무덤에 장사한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42절에 의하면 분명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전통에는 안식일에 많이 움직이는 것은 불법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12절에 보면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고 한정되어 있었고, 그런 점에서 가까운 무덤으로 아리마대 요셉 자신의 무덤을 선택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무덤이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새 무덤에 안치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비록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죽었지만,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고 부활하는 자들 가운데서 첫 열매가 되도록 정해져 있었던 만큼 그에게 새로운 무덤이 주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을 위하여 새 무덤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이 사실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안식일이 얼마 남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서 가까운 곳에 안치하고자 할 때 아리마대 요셉은 그런 위치에 있는 무덤을 골랐던 것입니다. 그것이 새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혹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위치적으로 볼 때 괜찮은 자신의 새 무덤을 내놓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물론 부활(復活)이라는 말은 다시 산다고 해서, 생물학적으로 생명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생명체가 소생하여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만 본다면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도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면서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증거 하는데(마27:51-52), 그때도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일 수 없는가? 그것은 시간적으로만 보는 관점입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의 구원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구약 백성의 구원도 말합니다. 시간적으로는 신약 시대에 오셨지만,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방식과 그에 대한 믿음으로 구약 백성 역시 구원을 말한다면, 부활의 첫 열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적으로 구약에서도 부활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전에도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것입니다. 장차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서 시간적으로 앞서 있었던 사람들의 부활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입니다. 나사로의 부활과 관련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으셨고 장사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에게는, 모두가 아닌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는 향기로 있습니다. 그 향기가 얼마나 강하고 능력 있는지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불안한 마음을 강하게 하셔서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내게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모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새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부활, 즉 중생이라는 첫 번째 부활로부터 시작해서 영생이라는 두 번째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그리스도로 마치는 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우리는 무엇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로마서 11장 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시작과 과정과 끝이 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목적은 그로부터 시작하고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그분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서 본을 보인 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자신의 신앙을 숨기던 자들이 더욱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고귀한 것임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면 늘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단지 예수 믿는다는 말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향기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