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민 상가에 오다
산을 향해 위로 올라오던 로마는 교회 마당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동규 일행이 내려오는 걸 기다린다. 그 자리에 서서는…. 교회 앞마당 산 초입에 오똑 서 있다. 동규는 역시 믿기지 않았다. 그는 급히 솔숲을 헤치고 뛰어 교회 쪽으로 내려간다. 역시 틀림없는 로마였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로마임이 확실했다. 산을 향해 올라오던 중이었는데 동규가 뛰어 내려오자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동규는 숨이 찼지만, 더 빨리 뛰어 내려간다. 얼굴이 활짝 펴진다. 반가워하는 얼굴은 로마도 마찬가지이다.
"로마? 너 어쩐 일이야?"
그는 잠시 후, 큰소리로 외치면서 로마 앞에서 우뚝 멈춰 선다. 그러면서 숨을 몰아쉰다. 로마가 그를 향해 환히 웃는다. 이 자리가, 민 씨네가 상을 당해 벌써 여러 날을 슬픔에 잠겨 왕래하던 애도의 길이라는 걸 잊고 있는 얼굴이다. 그녀는 늘 그러했듯이 해맑은얼굴이다. 스물일곱인데도….그 큰 눈에 가득히 웃음이 서려 있다. 맞다. 그녀는 여전히 동규가 불과 며칠 전에 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밝은 얼굴이다. 역시 상가에 문상을 온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가 마침내 동규를 향해 입을 연다.
"왜 할머님이 돌아가신 걸 내게 알리지 않았어?"
로마는 그제야 웃음을 거둔다. 그리곤 항의성 발언을 한다. 그녀의 태도가 좀 진지해진다. 갑자기 서운한 얼굴이 된다.동규에게 불만이란 듯이 볼멘소리를 하는 것이다. 중1 때부터 이곳 평촌 마을을 드나들던 로마였다. 민혜숙때문에 처음 만남부터 서먹하지는 않았다. 한 반이기는 했지만 남녀가 유별한 전통 유교사회의 마지막 세대라는 성장 배경을 가진 그들이었다. 그런데도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순전히 혜숙이 누나 때문이다.
사춘기를 맞는 설렘과 어설픔이 있었지만 바로 그게 극복이 되었다.
그만큼 로마에게 평촌은 처음부터 낯선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당시 중3이었던 동규 누나 민혜숙을 엑스 언니로 삼아 자주 드나들었다. 그 무렵 그들이 다니던 풀꽃 중학교에서는 후배가 입학하면 여학생들 간에는 자매의 연을 맞는 게 유행이었다. 그게 대세였다. 신입생들이 입학해 들어오면 상급생 언니들이 하나씩 찍어 인연을 맺고는 학교생활도 안내하고 공부도 돌보아주는 전통이 있었다. 로마가 민혜숙에게 찍힌 셈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는 십여 리나 되는 시골길을 더러는 걸어 엑스 언니로 삼은 민혜숙의 집까지 찾아 왔다. 그 바람에 동규네 가족은 로마가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얼굴이었다. 물론 동규도 민혜숙 누나를 따라 함께 한두 번 역촌 로마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 로마의 부모에게도 인사를 드렸다. 하지만 그녀가 평촌에 왔던 게 훨씬 더 많았다.
"미안해. 하지만 아직 네가 우리 할머니를… . 그래, 넌 내 사람이 분명하지만 우리가 정혼한 것도 아니어서 널 오라고 하는 건 가족들에게 쑥스러웠어. 명분이 좀 약해서 …. 그런데도 이렇게 왔네. 고마워"
동규는 머리에 손을 얹고는 피씩 웃으면서 많이 쑥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진정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그 말에 샐쭉해진다. 실은 내내 상을 치르면서도 로마에 갇혀 있었던 동규였다. 이미 로마는 동규의 사람이었다. 한데도 로마를 부를 명분이 옅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할머니를 떠나보내는 슬픔과 상실감이 크면 클수록 동규 안에는 로마가 자리를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직 약혼한 것도 아니어서 어정쩡했기에 부음을 정식으로 전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동규는 이미 저 지난 일요일 밤 그러니까 2주 전 그녀와의 내밀한 추억을 공유했다. 사춘기 소년이 첫사랑으로 만난 지 만 13년 만에….
조모는 생전에 로마가 평촌에 다녀갈 때마다 그것도 성장해 스무 살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아예 손자며느리 감으로 인정했다. 그녀 역시 동규를 좌파의 아들로 내몰아 입지를 궁색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이념이 개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사랑으로만 만났다. 성장해 이념의 정체를 알면서부터는 오히려 그녀는 이념으로 인한 결핍과 가정 형편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결손 상황을 극복하도록 마음을 써 주면서 모성애를 발휘했다.
로마는 언제부터인가 둘 사이에 엑스 언니 민혜숙을 등장시키지 않았다. 게다가 민혜숙이 서독으로 떠난 마당에 점점 멀어졌고 어쩌면 파독된 민혜숙의 영향력이 잊혀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적으로 조모는 점점 로마를 더 많이 귀여워했고 말이다. 그녀도 아주 살갑게 조모를 대했다. 그건 김사건 중 백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탓에 서로 간에 정이 담뿍 들었다. 실은 조모의 부음 소식을 전해도 괜찮은 사이였다.
그렇게 오래도록 로마는 동네 가족과 허물이 없는 사이였다. 어릴 때부터 동규의 조모를 할머니로 호칭했고, 중 백모와도 아주 많이 친했다. 함께 성장한 현옥이, 윤옥이와도 가까워졌다. 그게 다 로마가 동규에게 또 동규가 로마에게 향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였다. 서로 아름다운 첫사랑이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이 정작 더 가까워진 것은 대전 숙모 때문이었다. 대전 숙모 오홍숙 선생님이 재직하고 있는 동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로마는 대전 작은댁까지 외연을 넓혔다. 로마는 콩새아저씨와도 친했다. 그러나 가족 중에 제일 속 깊게 로마를 바라본 이는 역시 중백모 김사건이었다. 중백모는 동규의 짝으로 적합한 성격인가, 지적 수준, 그리고 로마네 집안 형편까지도 넌지시 알아보았다. 미륵댕이 장날이 되면 정산 쪽에서 넘어오는 지인들에게 수소문하듯이 로마네 집에 대해 곰파보면서 관심을 가졌다. 부모 없이 자란 동규에게 일찍 짝을 정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으로 작정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핍 상태로 자란 동규를 맡겨도 괜찮을 만큼의 모성애를 넉넉하게 소유하고 있는지를 따져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순간적으로 동규는 로마를 다시 바라보며 조모에게 당연히 와야 했었던 두 주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날 동규는 조모 대신에 로마를 택했다. 예당저수지 인근 대흥면 농협지소 부근 로마가 살고 있는 집에서의 의미 있는 만남이 머릿속으로 확 다가든다. 스킨십만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간에 몸을 공유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얼굴이 화끈해진다.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면서도 황홀해진다. 처음부터 학우로, 친구로 허물없이 만나다 보니 설렘이 옅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주 전의 예당저수지의 만남은 그들 둘을 분명하게 한데 묶을 수 있었다. 그 밤에…. 역시 그 밤에.
조모 앞에서, 중백모 앞에서, 대전 숙모 앞에서의 그들 둘의 만남은 늘 교과서적이었다. 남녀가 존재를 인정하고, 구심점이 같아지고, 정신을 합하는 것만 중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이는 오래도록 친구였다. 기껏해야 손을 잡는 데이트였다. 첫 키스를 한 것을 굳이 숨길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제 동규는 로마에게 정식으로 청혼하고 싶었다. 로마의 어머니가 사위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점을 찍어 준 이후부터 마음속으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 주 전 그날 조모에게 가야 한다는 논리보다 예당저수지로의 아름다운 서정을 택했다. 역시 그는 점점 더 고독한 영혼을 품어줄 정 깊은 모성애를 가진 여자인 그녀가 필요했다. 그러면서 할머니의 둥지에서 벗어나야 할 때를 생각했다.
(<할미새의 둥지 · 그 열여덟> 중 일부/김영훈 작/호서문학 2022. 여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