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3장 통일교, 세계로 뻗어나가다 2. 통일교는 어떻게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는가
1954년 5월 1일 서울 북학동 391번지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가 세워졌다. 창립된지 3년 만에 문선명은 세계 선교로 눈을 돌렸다. 1958년 6월 15일에 최봉춘 선교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시초였다. 뒤를 이어 1959년 1월 2일에 김영운 선교사가 미국으로 출발해 세계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동되었다.
이후 1965년 통일교 선교사가 활동하는 나라는 10개국으로 늘었다. 그해 문선명은 세계 40개국을 처음으로 순회하며 120곳의 성지를 정한 뒤 한국의 흙과 돌을 그곳에 묻었다. 이는 통일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심적 기반이 되었다. 1975년까지 127개국에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오늘날 190개가 넘는 나라에서 선교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 중남미,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등 5대양 6대주 곳곳에 선교사가 파송되어 있다. 이들 국가들 중에는 한국과 미수교 국가도 있었을 뿐 아니라 과거 공산권 국가에서는 목숨을 걸고 지하 선교를 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전 세계적인 교회로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문선명은 여러 단계에 걸쳐 세계 선교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는 어떤 기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60년 한학자 총재와의 성혼으로 가정이 안정되고, 교회 성장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후인 1975년 세계 120개국에 선교사 파견을 목표로 했다. 물론 이전까지 여러 형태의 소소한 선교사 파송이 더러 있었고, 40개 나라에 선교사가 이미 파송되었지만 집중적이고, 세계적으로 선교사를 보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미국 신도 95명, 독일 신도 82명, 일본 신도 96명 등 273명의 선교사들은 5월 1일에 3인 1조가 되어 95개국으로 나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또 1990년 9월에는 한국인 선교사 30명이 일본에서 3달 동안 훈련을 받은 후 임지로 떠났다. 이전에 한국 선교사는 5~6명씩 소규모로 나갔는데, 대규모의 한국 선교사가 파송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들은 1989년 10월 서울 한남동 공관에서 열린 목회자 집회 때 하나님의 뜻을 세계에 전해야 한다는 문선명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로 자원했다.
통일교가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데에는 특히 일본 신도들의 땀과 눈물이 많은 역할을 했다.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유럽, 남미, 중동, 아프리카, 북미주, 오세아니아에는 일본 신도에 의해 전도되거나, 축복결혼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미국에서도 1970년대 일본 신도들이 선교활동을 벌여 많은 미국인들을 인도했으며, '신앙의 조국' 한국으로 넘어와 한국인과 축복결혼을 한 후 교회 활동을 벌인 여성들은 수천 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지방의 통일교회를 방문하면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가진 일본 여성들이 많다. 그들의 헌신적이고 추진력 강한 활동이 한국 교회의 운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선교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선교사들이 임지로 떠날 때는 선교 자금이 부족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1975년 일본 선교사들을 해외 각지로 보낼 때 문선명은 여비조차 풍족하게 주지 못했다. 단지 한 사람씩 손을 잡고 "자네는 가나의 임금님 같다"든가, "쿠웨이트의 석유회사 사장 같다"는 말로 격려할 뿐이었다. 하지만 선교 자금이 턱없이 부족해 출발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선교부장 미야모토 노리히데는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보낼 수는 없다. 굶어 죽는 순교자가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걱정했다. 반면 일본 통일교를 개척해 온 마쓰모토 미치꼬는 "돈은 뒤에서 따라오는 것이니 우선 전원을 먼저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당장 쓸 돈을 조금이라도 마련한 사람부터 출발했다.
선교사 전원이 일본을 떠난 후 문선명은 "선교사들에게 선교비를 지원받아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이 대답을 못하자 문선명은 그들을 꾸짖었다. "여러분은 하루 몇 끼를 먹습니까?"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세 끼"라고 대답하자 문선명은 "그러면 안 됩니다. 3끼를 2끼로 줄이고 그 남은 돈을 모아 선교사에게 보내야 합니다. 그것은 선교사를 위한 돈입니다"라고 당부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 선교사들의 고투가 시작됐다. 막연하게 '5년 정도'로 예상했지만 길게는 20년 이상 아프리카와 중동에 머물면서 선교를 했다. 문선명은 항상 '불행히도 순교자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결국 그러한 염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사사모토 마사키의 처음 임지는 말라위였으나 후에 탄자니아로 바뀌었다. 새로운 임지가 결정되자 사사모토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세계는 정말로 넓고 크다. 거기에는 많은 나라와 민족이 존재한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탄자니아와 같은 가난한 나라에 내가 가기를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 비록 그 길이 사막 한가운데를 오랜 기간 걸어야 하는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노정이라 해도 나는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사모토가 탄자니아에서 순교한 것은 1980년 12월 18일이었다. 항구도시 다르에스살람에서 총에 맞아 순교한 것이다. 성스러운 순교는 이미 1973년부터 시작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선교사를 비롯한 신도 30여 명이 한꺼번에 검거되는 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24살의 마리 지브나는 차디찬 감방에서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어 공산국가에서 선교하다 숨진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이듬해에 또 다른 신도가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선교를 하다가 추방되는 일은 다반사였고 공산권 국가에서는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공포의 상황이 계속되었다. 단지 통일교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해를 받은 신도들의 사연은 참으로 애처롭다. 중국, 남미, 중동 등 세계 각국에서 생명을 위협받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의 발길은 1958년 이래 한 번도 쉬지 않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찾아 다녔다. 그 고통과 위험 속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돕고, 학교를 세우고, 직업교육을 시키고, 황야를 개척해 먹고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일에도 뛰어들었다. 오늘날 190개가 넘는 나라에 통일교회가 있고 신도들이 있는 것은 모두 선교사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교 창시자로서 문선명 역시 선교사 중의 한 명이었다. 미국에서 여러 차례 50개주 순회 강연을 통해 미국인의 신앙심을 일깨웠으며 1990년대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과 북한을 방문해 한 치의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전 세계 선교사들은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의 정신을 물려받아 묵묵히 순교의 길을 걸었으며 정신적인 폭력 뿐만아니라 온갖 학대와 억압을 견뎌냈다.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통일교는 한국인의 의해 창시된 신흥종교로서 전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 일본 : 세계화의 첫발을 내딛다
1. 일본의 사명은 무엇인가?
일본 통일교 역사는 눈물의 순교 역사로 점철되었다. 1976년 열린 미국 뉴욕 양키스타디움 대회를 준비하다가 흑인 소년에게 구타를 당해 순교한 와타나베마사루 선교사는 22세의 젊은 청년이었다. 사사모토 마사키 선교사는 탄자니아에서 선교를 하다가 1980년 12월 18일, 30세의 젊은 나이에 총격으로 순교했다. 오바타 노리마사 선교사는 1986년 3월 테네시 내슈빌의 공원에서 선교활동 중 총격으로 순교했다. 시로마 모토꼬 자매는 1995년 2월 9일 적도기니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말라리아에 의한 노상마비로 인해 2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이외에도 일본 신도의 순교는 끊이지 않았다. 왜 일본에서는 통일교 순교자가 이처럼 많이 나왔을까? 그리고 또 통일교 신도가 전 세계에서 일본에 왜 가장 많을까? 그것을 문선명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한반도는 남성을 상징하며 섬나라 일본은 여성을 상징합니다. 이 남자와 여자가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아시아 여러 나라를 고통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럼에도 1970년대부터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올라섰습니다. 그것은 일본이 해와국가로 선택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아버지인 아담국가이고, 일본은 어머니인 해와국가입니다. 즉 아버지의 나라와 어머니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지구의 인류를 한 가족으로 보았을 때 부모국가인 한국과 일본은 자녀 입장에 있는 전 세계 나라들을 올바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사명입니다."
문선명은 일찍이 일본이 이러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일본의 수많은 신도들은 이 사명을 받아들였다. 문선명은 일본과 인연이 참 깊다. 처음 일본에 간 때는 21살인 1941년 3월 31일이다. 우리 나라가 일본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면서 고아와 같은 한민족을 두고 가는 것이 너무 서러워 외투를 뒤집어쓰고 통곡했다.
일본에서의 유학시절은 기쁨도 많았고 별의별 유혹도 많았으며 아픔도 많았다. 1941년 4월 와세대대학 부속 와세대고등학교 전기공학과에 입학해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하며 한편으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도 부지런히 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문선명에게 일본은 참으로 원수의 나라였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인 모두를 진심으로 용서했다. 일본인 형사에게 심한 고문을 받아 죽음 직전까지 가는 참혹한 고통을 겪었으나 그마저 용서했다. 또 패전 후 쫓기는 일본인들을 몰래 도와주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1954년 통일교회가 세워진 후 문선명은 세계 선교를 마음속에 담고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갔다. 첫 번째 선교지로 일본이 선택되었고, 1958년 7월 대망의 첫 선교사 최봉춘이 부산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그는 밀항과 투옥, 추방, 밀항을 거듭하며 처절한 몸부림으로 일본 땅을 개척해 1959년 10월 2일 금요일 오후 7시15분, 4명(최봉춘, 시미즈 요시오, 스다 도쿠, 다무라 요시코)이 도쿄에 모여 일본 통일교회 역사상 첫 예배를 드렸다. 세계 선교국가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일본교회가 창립된 것이다. 그곳이 유케이사(雄鶏舎) 시계포 2층이었기에 그 시대를 '유케이사 시대'라 부른다(재미있는 것은 유케이사 시계포가 있는 곳에서 5분 거리에 문선명이 일본 유학 시절에 하숙했던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은 아주 오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의 통일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폭넓은 성장을 했다. 그러나 일본 선교는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이단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 승공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일본 공산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받았으며, 순교자가 계속 나왔다. 심지어 통일교회에 나가는 아들을 감금해서 시끌벅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 통일교는 유케이사 시대, 토우와샤 시대, 신오오쿠보 시대, 스기나미구 마바시 시대 등을 거치며 무럭무럭 커나갔다.
문선명이 다시 일본 땅을 밟은 것은 1965년 제1차 세계 순회노정 때였다. 일본 유학 후 21년만인 1965년 1월 28일 오후 5시 22분에 도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첫 선교지 방문이었다. 신도들과 함께 공항에서 통일교 성가 '동산의 노래'를 부른 뒤 도쿄교회로 향했다. 250여 명이 모인 예배에서 문선명은 감격의 감사기도를 올렸다.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당신께서 허락하신 이곳에 모인 식구들은 당신의 심정을 중심으로 모여든 자녀들입니다. 일본의 1억 국민 가운데 당신께서 선택하고 부르신 이 식구들을 아무쪼록 영원한 사랑과 심정의 품으로 안아주시고 이 죄악세계에서 힘찬 승리를 쟁취하여 생애의 승리를 먼저 세울 수 있도록 이 시간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기 바랍니다."
문선명은 일본 선교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미국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일본을 잊지 않았다. 그 사이에 리틀엔젤스가 일본으로 건너가 순회공연을 펼쳐 한국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냈다. 어린 천사들은 큰 박수갈채를 받으며 일본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많은 고난을 헤쳐 나가면서 일본 신도들은 곳곳에 교회와 수련소를 세웠다. 특히 다카라즈카 연수원, 아츠기 수련소, 모리야마 수련소, 미야자카다이 수련소 등은 일본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일본의 사명을 깨달을 수 있는 성소가 되었다. 또 일본어판 「원리해설」을 간행했고 기관지 「성약신문」, 「성약주보」, 월간지 「성약의 종」, 계간지 「축복」등을 꾸준히 발간했으며 「새 공산주의 비판」을 통해 일본에서 창궐하는 공산주의 저지에 큰 역할을 맡았다.
축복결혼도 미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시작했다. 일본 신도들이 축복결혼에 본격적으로 참석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그 최초는 1968년 2월 22일 한국에서 430쌍 축복식이 거행될 때 쿠보키 오사미 회장 부부가 참가한 것이다. 이후 1969년 5월 1일 43쌍 축복결혼 중에서 22쌍의 축복식이 도쿄에서 거행되었다. 1970년 777쌍 축복결혼식에는 235쌍이 참가했고, 1978년 9월 거행된 6,000쌍 축복식에는 1,610쌍이 참가했다. 이후 축복결혼의 역사는 꾸준히 이어져 일본 신부와 한국 신랑, 한국 신부와 일본 신랑, 일본 신랑과 미국 신부 등 전 세계적인 교차 축복결혼이 꾸준히 이어졌다.
축복결혼 후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 신부들은 한국의 도시, 농촌, 산간을 가리지 않고 통일가정에 들어가 헌신하며 살았다. 자신보다 학력이 못한 신랑, 훨씬 더 가난한 시댁,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게 핍박 받은 시부모의 반대를 딛고 오로지 해와국가 국민으로서의 맡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 기도하며 살아간 것이다.
아담국가를 대표한 한국인과 해와국가를 대표한 일본인이 교체 결혼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개인적 차원을 넘어 국가적 차원으로 넘어선 것이며 세계적 시대로 넘어가는 의미가 있다. 한국으로 넘어온 일본인 신도 중에는 도쿄대학 출신도 많았고 국회의원 비서실장도 있었으며 의사도 많았다. 그들은 일본에서의 편안한 삶을 뿌리치고 고생이 훤한 길을 택한 것이다.
문선명은 그 누구보다 일본인에게 탄압을 받았지만 누구보다 일본을 사랑하며 늘 일본의 장래를 걱정했다.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났다하여 한국의 앞날만 걱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보면서 세계가 앓고 있는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부은 것이다. 특히 일본은 청년시절 큰 인연이 있었던 땅으로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