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박봉애( 朴奉愛) - 세상 것 돌아보지 않고 3. 통일교회 입교와 세 번째 탄생
1 부산 대한부인회관에서 피난살이를 하면서 부인회 운동을 하다가 서울이 수복되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은 폭격에 없어지고 말았다. 몸담을 곳이 없어 한강도 건너지 못한 채 집을 구하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마침 흑석동에 살고 있는 김순화 씨 집엘 들렸었다.
2 하늘이 내 발길을 그곳으로 옮겼으리라 믿는다. 그때 김순화 씨가 훌륭한 청년 선생 한 분을 소개해 주겠다고 자청해 왔다. 서울 운동장 뒤 조그마한 집에서 신구약 성서를 과학적으로 해설하는 청년이 있으니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3 그러나 한동안 집 이사 관계로 가보지 못하였다. 어느 정도 집 안이 정리된 후 기억을 더듬어 서울 운동장 뒤 흥인동에 있는 청년을 찾아 나섰다. 이날이 1955년 2월 22일 바로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날이었다.
4 왜식 집 집안에 들어서니 다다미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 안에는 불구자인 청년 한 분이 몇 사람의 청년과 부인을 대상으로 열렬히 강의를 하고 있다. 불구의 몸임에도 땀을 흘리면서 신념에 넘치는 강의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분이 통일교회 초대 협회장 유효원 씨이다.
5 나는 신(神)의 실존 문제와 인간 창조, 우주에 관한 창조 원리에서부터 인류 역사를 동시성으로 풀이하는 복귀원리까지 3일간을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밤 3시간 쉬지 않고 들었다. 피곤한 것도 잊어버리고 새로운 말씀에 도취되어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기쁜 마음으로 일어섰다. 집 걱정이 되어 마음이 초조했기 때문이다.
6 그러나 그때 “중요한 강의 한 가지만 더 듣고 가십시오” 하고 유선생이 부탁해 왔다. 망설였으나 ‘중요한 강의가 무엇일까?’ 기왕 왔으니 한 가지만 더 듣고 가자 하고 주저앉았다. 중요한 강의란 원리 가운데 결론인 재림론이었다.
7 재림의 방법은 육신 현현이며 재림 장소는 한국이라는 것, 도무지 꿈같은 얘기지만 가슴 깊이 파고드는 어떤 강한 힘이 작용했다. 재림론을 다 듣고 난 나는 돌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현기증을 의식했고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무거웠다.
8 결코 기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 저 뒤에 자리한 곳에서 지성과 성령의 교류가 시작되는 듯 했다. 과연 그 청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9 그날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세파 속에서 단련해 온 이성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계산해 보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부정할 근거가 없으면 긍정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원리를 통해 새로이 나타난 나를 객관화시켜 놓고 수십 번 자문자답해 보았지만 부정할 한 치의 근거도 없었다. 10 얼마가 지난 후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온통 지축을 흔드는 오열을 의식하였다. 아! 47년 동안 나는 헛살아왔구나. 한국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 기정적 사실이라면 이제부터 내 생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
11 아침 일찍 일어나 유협회장을 뵙고 다음 주일 오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 하자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가시오” 하고 선생님이라는 분 앞으로 안내한다. 유선생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나는 ‘선생님’에게 특별한 관심 없이 인사를 드렸다. 그때 옆에 앉았던 옥세현 모친이 선생님께서 기도해 주신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엎드렸다. 12 선생님의 기도는 영혼 깊이 파고드는 통곡의 기도였다. 6천 년 역사를 휘어 쥐고 하늘을 향해 올리는 기도는 과거 어느 집회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다. 나는 솟구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난생 처음 실컷 울고 또 울었다. 실컷 울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대담해질 수 없었다.
13 일제시 아니, 6·25 때 이미 죽었을 목숨을 하늘은 구해 주시더니 이렇게 귀한 말씀까지 주셨으니 내 또 무엇을 원하랴? 나의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뜻 위해 살아보자. 이 혁명 대열에 내가 빠졌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을까. ‘여생을 정말 멋지게 살아보자’ 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때 입교한 동창생들이 승공연합 김인철 이사장, 최정순 여사 등이다.
14 혁명은 일단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입교 이후 오늘까지 나는 그날의 각오를 잊어버리지 않고 나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걸어왔다. 그러나 기성교회의 빗발치듯 쏘아대는 박해의 화살은 매스컴을 동원하여 일제히 쏘아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계의 핍박은 대중의 분노와 의혹을 사기에 알맞도록 여론 조성을 꾀했다. 15 “이단이다” “사교다” “한 번 빠지면 나올 수 없다” “교인을 감금하고 마취시킨다” “음란과 난교〈亂交(피가름)〉가 교리에 의해 공공연히 진행된다”라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모략과 중상이 군중심리를 자극하면서 나타났다. 내용을 알지 못하는 국민 대중은 그럴 수 있느냐는 의혹을 느끼면서도 믿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16 나는 분노하다 못해 개탄했다. 기독교가 부패하고 교역자들이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고 집권당의 앞잡이가 되어 썩어질 대로 썩어져 그 농도가 극에 달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터이지만 이처럼 하늘 뜻대로 살려는 ‘선한 집단’을 향하여 모략중상까지 자행하는 무리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17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현대 교육을 받고 민주시민을 육성하는 교육가로서 또 정치가로서 선악을 분별하는 식견과 예리한 판단력을 지니고 있는 나는 양심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왔다.
18 그러기에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 정권의 권력과 금력, 조직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정치적 소신과 개인의 인격을 지켜 왔다고 자부하는 내가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식의 통일교회에 빠져 양심도 이성도 잃어버리고 속물로 전락할 수 있었단 말인가?
19 새 역사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낡은 역사로부터 많은 질시와 박해를 받으며 그것을 밑거름으로 새역사 창조의 꽃을 피웠다고 하지만 정작 현실적으로 그 상황이 부각될 때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