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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우 이사장님의 시집 『설문雪門』 출간 안내가 없군요...
아마 직접 올리시기 그려셔서 빠트리신 듯 합니다.
늦었습니다만 다시 축하드리면서 제가 <페북>에 소개드렸던 글, 옮겨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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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회 이사장이신 임채우 시인-평론가의 신작 시집, 『설문雪門』이 출간되었습니다(도서출판움).
축하드립니다.
많은 독자들의 사랑 받으시길 바라며 응원합니다.
이 시집이 제게 특히 더 의미있는 것은 시집의 원고를 먼저 읽고 해설을 쓰는 귀한 기회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시집을 출간하는 경륜있는 시인이자 깊이 있는 비평으로 <우리시>의 시 해설을 맡아하고 계신 임채우 시인-평론가의 시를 읽는 것으로 첫 시집 해설을 하게 된 것은 부담인 동시에 그만큼 의미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제 눈이 시의 깊이와 넓이를 다 담아내지 못하고 사족처럼 매달려 있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임채우 시인-비평가의 시집 『설문雪門』 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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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우, 『설문雪門』(도서출판움, 2021, 10)
평범한 일상의 비범한 시선 - 설문雪門의 세계에 들어서다
평범함의 비범함
시인 임채우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의 시는 소박한 듯 단단하고, 단순한 듯 깊다. 그가 바라보는 대상들은 특별한 대상들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현상이며 사물이며 존재들이다. 그는 특별한 대상이나 사상을 시의 소재로 특화하지 않는다. 그는 시를 위해 대상을 비틀지 않으며, 자신의 대상을 왜곡하여 사상을 덧입히지 않는다. 그의 시 속에서 평범한 대상들은 오롯한 그의 글과 말을 거쳐 올곧은 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화려한 수사로 시를 치장하지 않으며, 현란한 철학을 시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화려한 수사도, 현란한 철학도 쉽사리 담을 수 없는 빛나는 순간들이 반짝인다. 때로는 비판이 때로는 성찰이 함께 하며. 「따뜻한 눈물」은 이런 그의 시적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색한 서울역 광장
굵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늦은 출근길에 종종걸음 치는 행인들 사이로
얇은 옷의 한 노숙자가 사내를 가로막았다
너무 추워요, 따뜻한 커피 한 잔만 사 주시면…
가던 길 멈추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내
자신의 점퍼를 벗어 노숙자의 꾸부정한 어깨 위로 팔을 둘러 입혀 주었다
장갑을 벗어 차가운 손에 끼워 주었다
지갑에서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쥐어 주었다
사내는 총총히 가던 길을 갔다
포근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눈물」전문>
그대로 풍경이다. 마치 현장에서 보는 것처럼 사실 자체를 가감 없이 묘사하고 있는 이 시는 실제로 지난 해 겨울, 서울역 광장에서 있었던 실화를 보도한 신문기사를 보고 쓴 시라고 시인 자신이 밝힌 바 있다. “굵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광장에서 “얇은 옷”을 걸친 노숙자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자신의 점퍼를 벗어” 노숙자에게 “입혀 주”고, “장갑을 벗어” 그의 “손에 끼워” 준 채 “총총히 가던 길을” 가는 사내, 그 사내가 바로 시인 임채우요, 그 사내의 마음이 바로 임채우의 시다. 저 한 번의 호의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광장에 쌓이는 “포근한 함박눈”처럼 그의 시는 우리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평범한 일상의 빛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비범한 시각, 치장하지 않은 단순, 소박한 진술, 그러나 큰 울림, 시인 임채우의 시다.
평범한 일상을 포착하는 시인의 비범하고 따듯한 시선은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다. 다음 시를 보자.
집오리 에미가 새끼 열넷을 거느리고 8차선 도로 앞에서 뒤뚱거리는 행진을 멈추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경찰관이 오리 떼가 무사히 건널 때까지 차량 통행을 얼마나 가로막았다. 대로를 건넌 오리 가족이 궁둥이를 흔들며 벼가 파릇파릇 자라는 무논으로 사라졌다.
봄볕은 따사롭고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 <「봄볕은 따사롭고 ―북한산일기 · 34」 전문>
또한 일상의 풍경이다. “새끼 열넷을 거느리고 도로를 건너려는 어미 집오리”와 “오리떼가 도로를 무사히 건널 때까지 차량을 막아주는 경찰관”, 이런 모습이 우리의 일상인 한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시인의 마음은 우리 마음까지 봄볕처럼 따사롭게 밝혀준다. 현란한 비유도, 무슨 대단한 사유도 없는 듯 하지만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에 환하게 밝혀질 등불과 입가의 미소가 그려진다. 이런 시 앞에 사유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시는 더러 이래야 하는 것이다. 어디 사람과 동물뿐인가.
산딸나무 하얀 나비 떼
마름모형 꽃이 실은 잎이라나
아파트 단지 화단 한쪽
비죽비죽 우듬지 돋고
산딸나무 꽃잎 지고
잎 색깔 열매 맺고
타고난 대로 고스란히
잎인 듯 열매인 듯
크지도 작지도 별나지 않게
투정도 시기도 다툼도 없이
있는 둥 마는 둥
엷은 초록으로 <「산딸나무」 전문>
아파트 단지 화단에 핀 산딸나무가 시인의 눈에 들어온다. “타고난 대로 고스란히” 요란스럽지 않게, “크지도 작지도” 않고 “별나지 않”은 이 산딸나무들은 “투정도 시기도 다툼도 없이// 있는 둥 마는 둥” 피어있다. 그걸 봐내는 시인의 마음의 눈이 정겹고, 그 마음에 떠올랐을 올망졸망 별나지 않게 “투정도 시기도 다툼도 없이” 살아가는/살아갔으면 하는 이웃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있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제 모습, 제 자리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작고 보잘것없이 보이는 존재들이 그렇게 제 자리 지키며 있기에 세상은 굴러가는 것. 그러니 그 작고 보잘것없는 평범한 것들이야말로 진실로 큰 것이라는, 평범하지만 자주 잊히는 이 진실을 시인은 또한 놓치지 않는다.
큰 것은 크게
작은 것은 더 작게
이 시대의 흐름에 대하여
생전에 칼 세이건이 명왕성 즈음에서 찍은 지구 사진을 놓고
우주 공간에 파르라니 떨고 있는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시각을 교정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들이 뿔 달린 거대한 철탑인 양
세상의 달팽이들아!
너희들은 작아도 너무 작아
뱃구레에 욕심만 가득 찬
시각 교정 DNA가 부재한 미물
이 세상에 진실로진실로 큰 것은
너희들 눈에는 띄지도 않겠지만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
홀로 핀 이름 모를 들꽃 <「큰 것은 작게 작은 것은 크게」전문>
시인이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큰 것은 (더)크”게, “작은 것은 더 작게” 보고, 그렇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강자는 더 강해지고 약자는 한없이 약해지(도록 강요받)는 가운데 소수의 강자가 다수의 약자 위에 선, 약육강식의 법칙이 만연하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지구라는 세상. 우주 공간에서 보면 “파르라니 떨고 있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으면서도, 우리는 마치 “뿔 달린 거대한 철탑인”양 행동한다. 그런 인간들에게 시인은 너무도 중요한 진실을 알려준다. “이 세상에 진실로진실로 큰 것은…//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 홀로 핀 이름 모를 들꽃”이라는 사실을. 가장 작고 연약한 것이 진실로 큰 존재라는 이 역설의 진실을 찾아낼 줄 아는 마음의 눈, 시인이 가져야 할 진정 소중한 자산일 것이다.
전통과 변화의 길목에서
시인이 주목하는 오늘 우리 일상의 평범한 모습 가운데 하나는 전통과 변화가 맞닿아 일어나는 현상이다. 전통은 급속하게 자리를 잃어가고, 변화는 빠른 물결이 되어 밀려오고 있다. 그러나 전통도 변화도 어느 한 힘으로만 움직일 수는 없는 것, 시인은 그 둘 사이의 물결 속에서 전통의 흐름에 발을 담근 채 아직 변화의 물결 쪽으로 완전히 몸을 옮기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지켜야 할 전통이 있기에, 자신의 손으로 그 전통을 버릴 수는 없다.
성경 역대상 1장에서 9장까지는 팍팍한 사막이다
끝없이 발길에 차이는 얼굴 없는 이름들
이름을 담고 있는 그릇도 똑같아
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의 자손은 누구고
누구는 누구의 아들이요 누구의 손자요 누구의 증손이니
거명된 유대의 유명 씨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차라리 a는 b를 낳고 b는 c를 낳았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으랴
그러나, 이 족보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뿌렸을 유대인들을 생각하라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그발강가에서 애가를 부르며 자신들의 뿌리는 잊지 말자고
보고 또 보고 뼛속까지 새겼을 이름
책과는 거리가 먼
모진 세월 건너신 선친께서
나에게 남기고 간 것은
손때 묻은 『白湖集』 한 질 <「역대상 1-9장」 전문>
성경에 끝없이 이어져 나오는 유대인 조상들의 이름이야 순서 뒤바뀐다고 우리들에게는 문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대로 핏줄이요 전통인 유대인들은 “족보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뿌렸을” 것이다. “자신들의 뿌리는 잊지 말자고/ 보고 또 보고 뼛속까지 새”기면서. 전통이란 그런 것이다. 그처럼 “책과는 거리가 먼” 선친이 남긴 “손때 묻은『白湖集』한 질”을 간직하는 시인의 마음을 보라. 『白湖集』은 조선 중기의 문인 임제(林悌,1549~1587)의 시문집이니 시인의 가계 혈통과 닿아있는 이 시문집을 남긴 선친의 마음을 받아 간직하는 시인의 마음, 전통을 지키는 마음, 그런 것이다.
전통을 지키려는 그의 태도는 명절 풍경을 다룬「전 부치기」에서는 좀 더 단호한 태도로 나타난다. 명절에 전 부치는 아내를 대신해 전을 부쳐본 후 나름대로 일을 도와온 시인에게 “아들놈과 조카들이 전수받을 생각은 안 하고…// 남들처럼 시장에서 사다가 차례상 올리면 안” 되냐고 되묻자 화자는 말한다.
…
나는 단호하다, 안 돼, 할머니 살아계실 동안은
전은 내가 부치고, 할머니는 할머니표 육개장을 끓여
본댁에 모인 자손들이 한 끼 식사를 나누는 거야
이것이 우리 집안의 전통이고 힘이야
화자의 태도는 단호하다. 그 단호한 태도는 그러나 단순한 생떼요 고집이 아니다. 어머님(전통)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자신도 전통을 지키는 것은 힘들다. “어머니, 저도 힘들어요.” 그러니 그도 “시장에서 부쳐 놓은 전 사다가/ 차례상에나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미수를 넘기신 노모께서 틀니 낀 입으로 오물오물 전을 떼시며/…행복해하시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그만둘 수 없”다. 전통이란 그런 것이다. 힘들지만 그럼에도 끌어안고 가기도 해야 하는 것. “후계자 없는 그의 전 부치기”처럼 더 이상 지켜질 수 없을 그 순간까지.
당연하게도 가끔 옛것과 새것은 혼란스럽게 만나기도 한다. 시인은 그런 경험을 또 다른 일상에서 포착해낸다. 시인의 다섯 살 손자는 영어 유치원엘 다닌다. 시인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손자는 “원어민 선생님하고 소통이 자유로”울 정도의 “유창한 원어민 발음으로” 자기소개를 한다. 그런 손자에게 할아버지 시인이 “가에 ㄱ 하면 각하고,/ 가에 ㄴ 하면 간하고...”라며 한글을 가르치지만, 손자는 “재미없는 한글공부”에 심드렁하고, 그걸 보는 “할아배 마음만” 급하다. 손자와 할아버지, 한글과 영어는 서로 다른 시간과 세대에서 충돌하면서 서로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옛것과 새것이 종종 그러하듯.
하지만 시인은 알고 있다. 변화는 온다는 걸. 그것이 필연이기도 하다는 걸. 그의 전 부치기가 “후계자 없”어 끝날 순간이 오듯, 미래의 시간은 그의 시간이 아니라 손자의 시간이듯.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변화는 아주 급격하게가 아니라 천천히 와야한다는 것. 시인은 그 사실을 잊지 않는다.
경칩 지난 봄 뜰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산수유 검붉은 열매
발 시린 새들에게 몸 보시하더니
메마른 등걸에 점점이 찍힌
노란 꽃 몽우리
고인 웅덩이에 새 물 들이듯
묵은 것들 한방에 일소하는 것이 아니라
피 흘려 혁명하자는 것이 아니라
설날 큰집에 대가족이 모여
왕할머니 품이 낯설어 쭈뼛거리는 증손자처럼
몇 남은 검붉은 쭈그렁 열매와
산수유 뽀얀 꽃 몽우리가
풍경 하나로 겹치는구나! <「겹치다」전문>
“경칩 지”나고 “산수유 노란 꽃 몽우리” 돋듯, “왕할머니”와 “증손자”가 “쭈뼛거리며” 한 품에 안겨있는 것처럼, 새것과 옛것은 “고인 웅덩이에 새 물 들이듯” 그리 가고와야 하는 것. “묵은 것들 한방에 일소하는/ 피 흘려 혁명하”는 것이 아니다. 옛것과 새것의 가고옴은, 하나가 가고 다른 하나가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겹치는” 것! “고인 웅덩이에 새 물 들이듯” 천천히 바뀌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전통이란 어느 정도 지켜야할 것이긴 하지만 세월의 변화에 따라 새것에 밀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다만, 그 변화는 천천히 “고인 웅덩이에 새 물 들이듯” 와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전통주의자이면서도 변화를 수용하는 시인의 기본 입장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진솔한 자의식과 성찰의 시
시인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존재이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의식과 성찰 없이 시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는 그런 자의식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임채우 시인 또한 인간, 그리고 시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진지한 존재론적 성찰을 놓치지 않는다.
밤 기온이 낮과 비슷하여 밤새 에어컨 켜고 거실에서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기쁨보다 슬픔이, 숱한 주저와 부끄러움과 수치로 점철된 나의 생이 임종 자리에 먼저 와 있었다. 하늘에는 수상한 먹구름, 주위엔 가족도 친지도 보이지 않고 슬퍼하지 않는 낯선 얼굴들이 나의 머리맡을 에워싸고 있었다. 아, 꿈이구나.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온 듯 짧게 진저리치며 터지는 안도의 한숨. 베란다 창이 환하여 아직은 주섬주섬 챙겨야 할 것이 많은 이 세상. 아, 꿈이었구나. 축축한 뒷목의 한기, 바람 한 점 없는 아침이다. (「열대야-북한산일기·25」 전문)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기쁨보다 슬픔이, 숱한 주저와 부끄러움과 수치로 점철된 나의 생”이라는 한 구절로 집약되고 있다. 비록 꿈속의 일이지만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시간을 지나 “아직은 주섬주섬 챙겨야 할 것이 많은 이 세상”에서 시인은 부끄러움과 수치, 슬픔과 주저함을 안고 또 하루의 “바람 한 점 없는 아침”을 맞는다.
시인 임채우의 존재론적 성찰은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추상적 관념의 영역으로 달아나지도 않는다. 그의 모든 시들이 그러하듯 평범한 일상 속에 그의 성찰은 투영된다.
사는 게 제각각인 듯해도
아파트 1층에서 꼭대기까지 비슷비슷하여
텔레비전 앞 거실 소파
층층이 안방 침대
문득, 포개자는 걸 생각하면
한길 스치는 사람들 제각각인 듯해도
나름대로 착각덩어리
너나없이 모순덩어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 볼일 마치면
돌아보지도 않고 영안실행이라니 <「끔찍하다」 전문>
세상에 존재하는 만큼 무수한 인간들이 그만큼 다양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그 삶은 때로 ‘끔찍하게’ 느껴질 만큼 동질의 것임을 우리는 안다. 저녁에 불켜진 아파트 건물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영화 장면을 떠올려본다. “아파트 1층에서 꼭대기까지 비슷비슷”한 모습, 같은 구조에, 같은 인테리어에, 다 비슷하게 사는 모양새. 어디 모양뿐인가. “스치는 사람들 제각각인 듯해도” 다 하나같이 착각과 모순 속에 살아가는 것. 그러다 “세상 볼일 마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인간 존재의 본질적 한계에 대한 담담한 묘사 속에 ‘그러니 어찔 살 것인가’라는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담겨있음을 아는 이는 알아챌 것이니, 굳이 말하지 않는 것 또한 시인의 마음.
이러한 그의 시선은 “케이블 다큐멘터리 재방송/ 내가 아닌 당신들의 삶”을 보면서 “누구든 이곳에서는 주연 배우”가 되어, “각자 자기가 맡은 역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새삼 확인하고(「인간극장」), 그 세상 속에서 “이루어 놓은 것 없고 앞길이 막막”하게 느끼다가도 “아직은 내일이 있다는” 데 “희망”을 갖고 “일모의 풍광이 아름답게 빛날” 내일을 기대하기도 한다(「일모도원日暮途遠」). 일상에 투영된 시인의 존재론적 성찰의 과정이 잘 드러난 시가 한 편 있다.
고즈넉한 수도원처럼 하느님 모시는 집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길을 열어 주어
주민 센터에, 혈압약 지으러 지름길로 간다
검붉은 벽돌과 색 바랜 스테인드글라스, 양철지붕과 종탑 보루
천사들이 지키고 있는 본당은 지은 지 하마 60년
번성한 은행나무, 느티나무가 성전 파수꾼이다
성당은 피난민들의 거처를 굽어보는 언덕배기에 있는데
지금은 사방 고층 아파트 숲 옴팍한 저지대로 남아 있다
가끔 이 길을 지나며 안쪽을 힐끔거리나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화단 가에 박혀 있는 다듬지 않은 돌들까지
차분한 본당의 분위기에 경배하듯 유순하다
홍해 길을 열어주신 신부님께선 아셨을까
주민들 이 길을 지나며
삶에 이어 죽음은 오리니
나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관리하는 사람 없어도
홍해를 건너 주민 센터에, 학교에, 시장에 간다
잠시 부산스런 마음 부려 놓으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모두 제자리에 있다
(「천주교 의정부교구 일산성당」전문)
천주교 신자이건 아니건 성당이라는 특별한 건물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들이 지키고” 있는 “고즈넉한 수도원처럼 하느님 모시는 집”이 “사방 고층 아파트 숲 옴팍한 저지대”에 남아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길을 열어 주”고 있다. “홍해 길을 열어 주”듯. 세상 한 가운데 신의 집을 지름길 삼아 지나 시인은 “주민 센터에, 학교에, 시장에 간다.” 신의 세계를 관통해 비로소 인간의 세계를 향하고, 인간의 세계는 신의 세계를 지나 자리하고 있다. 마치 “삶에 이어 죽음은” 올 것은 미리 생각하게 하듯,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 자리한 것임을 전하기라도 하듯. 잠시 “나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하는 존재론적 질문에 빠져보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부산스런 마음 부려 놓으”면 알게 된다. 보게 된다. 여기 우리 발 밑의 세상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맹이 하나 모두 제자리에 있”는 여기 이 세상을.
“모두 제자리에 는" 이 세상이야말로 시인 임채우의 시의 고향이다. 그러니 “발걸음 떼기도 아까”운, “눈길조차 돌리기 아쉬”운 이 세상의 “모든 폐허”조차 아름답고, “덧없는 목숨이기에 더없이 고와” 이 세상에서라면 “천년만년 폐허로”라도 남고 싶은(「내변산 실상사지에서」) 것이다. 시인 임채우의 시는 바로 그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을 살며 그 세상과 공감하는 데서 비로서 시작되고 나오는 것이다.
공명共鳴의 시, 설문雪門의 세계로 들어서다
시인은 속으로 울며 세상과 공감하고 공명해야 한다. 시는 곧, 그 속울음과 공감, 공명의 소리다. 이명耳鳴이 시인의 숙명인 까닭이다.
변화에 둔감한 나를 두고 혹자는
자아가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
언제부턴가 내 안에 둥지 튼
열무김치 먹고 여름내 여물어간다는 여치와
귀밑에 대침 박아 막장 내던 매미와
골똘하게 귀 뚫린 귀뚜라미가
밖이 울면 안도 울고
안이 울면 밖도 운다 (「이명耳鳴」 전문)
“자아가 강한 사람”을 달리 말하면, 앞에서 본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강한 자아는 강한 공감과 공명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내 울림이 없는데 밖의 울림을 어찌 받아 함께 공명할 것인가. “…여름내 여물어간다는 여치”도 “귀밑에 대침 박은 매미”도 “골똘하게 귀 뚫린 귀뚜라미”도 “내 안에 둥지”를 틀었으니, “밖이 울면 안도 울고 / 안이 울면 밖도” 우는 이 절절한 공명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가 자기 안의 폭포를 찾아 쉼없이 노래부르는 이유, 여기 있다.
내 안의 폭포를 찾아서
천길만길 수직 낙하
소리꾼들이 피 토하던
물벽 하나 만나러
폭포는 심산유곡에 거하여
산길에는 바람꽃이 피고
계곡물 소리 발길을 붙잡고
단풍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우레와 비말의 폭포
천지는 먹먹하고, 고요하다
바람만이 종횡으로 허옇게
허옇게 말라버린 폭포
내 안에는 우레와도 같이
여전히 물 떨어지는 소리 (「직소폭포」전문)
“우레와도 같이 / 여전히 물 떨어지는 소리” 가득한 바로 그것, 시의 폭포는 그에게 자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줄기 바람”처럼, “도둑고양이처럼” 다가오다가 “한 줄기 바람인가 물결인가” 알 수 없게 “없는 듯 돌아서”기도 하다가 마침내 “내 안에 고개 쳐든 / 독사 대가리”처럼 “몸서리쳐지”게 나타나기도 한다(「시詩 · 2」). 그러니 “북으로, 북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 보고도 “길 가다 하늘 보고 / 혼잣말하”기도 하고(「기러기」), “고향 강가에서 예쁜 조약돌을 줍듯이 네 곁에서 언어를 고르고”(「느티나무」), “낡은 사진첩을 뒤적이며 / 영롱한 언어 탑을 허물었다 / 다시 고운 거로 쌓”기도 하다(「석류를 깨뜨리며」), 마침내 “때론 진국을 내기 위해선 / 삶을 푹푹 삶아야 한”다는(「닭곰탕, ―북한산일기 · 28」)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 시는 이제 운명에 다름 아니다.
한 그루 내 나무라 하면 안 되나, 너를
천년을 기다려 죽음의 자리까지 내준
바오밥나무라 하면 안 되나, 너를
새들이 지저귀며 들락거리고
바람 불어 스산한 가지에
오랜 기다림으로 붙박여
환하게 타오르는 너를
누구는 운명이라 했고
누구는 절박이라 했고
누구는 허물이라 했다
아프다고 엄살깨나 부리고
허섭스레기 같은 나날을 참회하며
너무 경건치 않아 곰살맞은 친구 같은 너를
내 나무의 나이테라 하면 안 되나, 너를
-시라 하면 안 되나? (「시詩 · 1」전문)
“한 그루 나무”요, “천년을 기다려 죽음을 자리까지 내준 / 바오밥나무”요, “운명”이요, “절박”이요, “허물”이고, “곰살맞은 친구 같은” 것. 그리고 마침내 “내 나무의 나이테”, 곧 ‘내 삶과 내 인생의 시간’인 그것, 시인 임채우에게 시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시는 마침내 자신의 세계를 찾았으니, 보라.
지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눈의 문, 눈의 제국으로 들어가는
눈부신 백설이 법이고 진리인
그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
내가 발을 딛는 설씨卨氏 문중은
이미 훼파되어 흩어져버렸다
반농반도半農半都, 논두렁 위의 가건물
가끔 외로운 왜가리 한 마리 홰를 치고
무시로 드나들며 먼지를 뒤집어쓴 트럭과 마을버스와
낮술에 취한 사내들, 야산은 헐리어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하늘공원에서 울려 퍼지는 트럼펫 진혼곡 소리
설문은 어디에 있는가
언어와 실재가 심각하게 뒤틀리고
나는 피 흘리는 언어를 껴안는다
설문은 사시사철 눈이 펑펑 내리고
옮겨 심은 언덕배기 노송에도 눈이 내리고
세상의 온갖 추함을 덮는구나
나의 추상은 가없다
아, 언어여!
추상이여, 빛이여,
생기 잃은
아름다움이여! (「설문雪門 · 7」)
설문雪門은 설문동雪門洞을 말하는 것으로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에 속한 동이다. 옛날 이곳에 설씨 문중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일제강점기 때 행정지명 개칭에 따라 설문리로 바뀌었다(임채우, 「소아과에서 차례 기다리기」, 39). 설문雪門, 이곳은 시인 임채우의 거처요, 앞으로 그의 시의 거처이기도 할 것 같다.
“논두렁 위의 가건물” “외로운 왜가리” “무시로 드나”드는 “트럭과 마을버스” “낮술에 취한 사내들” 헐린 야산의 전원주택, “하늘공원에서 울려 퍼지는 트럼펫 진혼곡 소리” 가득한 “반농반도半農半都”의 현실 공간인 설문雪門은 “눈의 문, 눈의 제국으로 들어가는” 순수함과 텅 빈 백지의 이미지를 담은 “법이고 진리”인 나라다. “세상의 온갖 추함”이 덮히고, 시인의 “추상도 가없”어 지는 곳이며, 현실과 언어가, 사실과 추상이 한덩어리로 엉켜 있는 곳이다. “언어와 실재가 심각하게 뒤틀리”면서 언어마저 “생기 잃은” 바로 이곳에서 시인은 “피 흘리는 언어를 껴안”고 현실을 담아내는 자신의 작업을 해나가고자 한다.
「소아과에서 차례 기다리기」에서 시작되어 이 시집까지 이어지는「설문雪門」연작시가 그러하고, 「북한산 일기」연작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산 일기」연작이 현실에 대한 무미건조한 표상이 승하여 이면에 자리해야 할 깊이있는 성찰의 흔적이 곧추 드러나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인이 이제 막 들어선 「설문雪門」의 세계에서 시인이 걸어갈 다음 길과 걸음이 더욱 궁금해지는 건 당연하다. 이어질「설문雪門」의 시편들이 평범한 현실 세계의 현상들을 비범한 시선으로 포착해 “피 흘리는 언어”로 담아내려는 시인 임채우의 노력을 진주처럼 열매맺는 결실을 얻기를 기원하며, 「설문雪門」의 우주를 단독자로 떠돌며 노래부를 시인 임채우를 떠오르게 하는 다음 시를 읽으며 글을 마친다.
…그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 무리 지어 떠도는 소행성대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떠돌이와도 거리가 무한히 멀었다. 천문학자들이 편의상 소행성대라고 이름 지어 부를 뿐 그는 어느 떠돌이와도 유대가 없었다. 그는 고요의 바다에서 가끔 태곳적 음향에 몸을 떨었다. 그 음향은 맑은 수정체가 부딪히며 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깊은 심연에서 솟구치는 호른 소리와도 같았다. 그가 사무치게 외롭다든가 그리움에 휩싸이면 자신도 모르게 빛살과도 같은 쟁쟁한 소리를 내거나 깊은 내면의 울음이 솟구쳤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짧은 지속의 순간이 진저리치며 고요 속으로 꼬리를 감추었다. 소리 없는 시간은 죽음과도 같았다. 그는 현존하며, 음향과 고요 속을 떠돌고 있다. (「어느 떠돌이별의 이야기」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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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자리를 빌려 여국현 교수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볼품없는 저의 시에 자리를 잡아주셨습니다. 해설이란 평론의 장르가 말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만, 해설이 시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시를 살리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여 교수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말씀 ! -
감사드립니다
저도 임채우 시인님시집 예쁜글 설문(雪門) 잘보고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