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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지각되는 것은 지각하는 자일 수 없다...아이 앰 댓 (I AM THAT) 하권
문: 저는 지금까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수행에 맞는 여러 가지 요가들을 알아봤는데 아직 제게 가장 맞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지를 못했습니다. 좀 실용적인 조언을 해주시면 좋겠군요. 사실 지금은 오랫동안 찾아 헤매다 보니 진리를 발견하다는 말만 들어도 싫증이 납니다. 괜히 불필요하고 골치 아프기만 한 것 같습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길 만하니 뭐 개선이고 어쩌고 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M: 지금의 만족에 머무를 수 있다면 대환영이네만 그럴 수 있겠나? 젊음, 활력, 돈, 이 모든 것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지나가 버릴 거야. 지금까지 기피해왔던 고통이 곧바로 자네 뒤를 쫓을 걸세. 만약 자네가 고통을 넘어서고 싶으면 그것과 타협하고 맞아드리지 않으면 안 돼. 습관을 버리고 단순하고 맑은 삶을 살도록 하고 생명을 해치지 말도록 해 그게 바로 요가의 근본일세.
진리를 발견하고 싶으면 날마다 사소한 행위 속에서 진실해야 해. 진리를 구하는 데에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아. 지금 인생이 즐길 만하다고 하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당장은 그렇지만 도대체 삶을 즐기고 있는 게 누구란 말인가?
문: 사실 저는 즐기는 게 누군지도, 즐겨지는 게 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냥 즐길 뿐입니다.
M: 됐어. 하지만 즐긴다고 하는 건 마음의 상태야. 그건 왔다가 가는 거라구. 그처럼 영구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변화하지 않는 것은 의식할 수가 없어. 모든 의식은 변하는 것만을 의식할 수 있을 뿐이야. 그러나 변화를 지각하는 것 자체는 불변의 배경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겠어?
문: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나간 상태의 기억과 현재 상태의 생생함이 대비될 적에 변화의 체험이 생기는 것입니다.
M: 기억된 것과 실제의 상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그것은 순간순간마다 관찰될 수 있는 것이야. 어느 순간이라도 실제의 상태가 기억된 것이 아닐세. 둘 사이에는 그 강도뿐만 아니라 성질에조차 차이가 있어. 실제의 상태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것이라 어떠한 노력이나 상상으로도 두 가지를 서로 바꿀 수는 없다네. 자, 그러면 실제의 상태에 이런 독특한 성질을 부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나?
문: 실제의 상태는 참된 것이지만 기억된 것에는 대단히 많은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M: 바로 그렇지. 그러나 그게 왜 그렇지? 기억된 것이라 해도 한순간 전에는 현실이었고, 실제 상태도 눈 깜박할 사이에 기억된 상태로 변해버리지 않나? 도대체 실제의 상태를 특징짓는 게 뭘까? 필시 그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자네 자신의 감각이 아니겠나? 기억과 기대 속에는 그것이 관찰되고 있는 정신적 상태라고 하는 명증한 느낌이 있어. 그러나 실제의 상태 속에서는 그 느낌이 근본적으로 생생하고 깨어있는 것일세.
문: 예, 알겠습니다. 실제와 기억을 구별되게 하는 것은 바로 깨어있음 이군요. 과거나 현재는 생각 속에 있지만 사람이 존재하는 건 바로 지금 여기에서입니다.
M: 어딜 가든지, 사람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의 느낌을 가지고 다니지. 그것은 달리 말하면 자네가 시공(時空)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 시간과 공간이 자네의 내부에 있는 것이지 자네가 그 속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이야. 사람에게 한계감을 주는 것은 당연히 시공 속에 제한되어 있는 육신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야. 실제론 자넨 무한하고 영원하다네.
문: 그런 무한하고 영원한 저의 본래면목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M: 자네가 알고자 하는 자아가 뭐 제2의 자아이기라도 한 건가? 자네 자신이 여럿의 자아로 되어있단 말인가? 분명히 자아는 하나밖에 없고 바로 자네가 그 자아가 아닌가? 자넨 자신인 바로 그 자아가 존재하는 유일한 자아일세.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관념을 버리게. 그러면 이미 화창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야. 자기에 대한 이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은 바로 자네의 마음일 뿐일세.
문: 어떻게 해야 마음을 제거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마음 없는 생활이 도대체 가능하기라도 한 것인가요?
M: 마음 같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거야. 여러 가지 관념이 있는데 그 중에서 틀린 관념이 있으니 틀린 관념을 버려야 해. 왜냐하면 틀린 관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오해를 유발하거든.
문: 어떤 것이 틀린 관념이고 어떤 것이 바른 관념입니까?
M: 주장하는 것이 대개 틀리고 부정하는 것이 대개 옳아.
문: 모든 걸 부정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M: 오직 부정함으로써만이 살 수가 있어. 주장을 하는 것은 속박이 돼. 의문을 갖고 부정을 하는 것은 필연적이야. 그것이 바로 저항의 핵심인데, 저항하지 않으면 자유도 있을 수가 없다네. 제 2의 자아라든가 고차원의 자아를 찾는 게 아니야. 자네 자신이 바로 고차원의 자아라네. 그러니 단지 자신에 대해 잘못된 생각들만을 포기하도록 해.
신념과 이성 모두가, 사람은 육신도 육신의 욕망과 두려움도 아니며 온갖 망념으로 가득찬 마음도 아님, 또 사회가 강요하는 역할도 아니며, 또 자네로 간주되는 그런 인간도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으니 잘못된 것을 버리도록 하게. 그리하면 참된 것이 저절로 드러날 거야. 자넨 지금 자신의 본성을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자네가 바로 본성이야.
사람이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아닌 다른 것일 수가 있나? 앎이 존재와 분리되어 있다고 보나?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마음이 만든 것이지 자네가 아니야.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나는 존재한다. 나는 깨어있다.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라는 말뿐일세.
문: 제가 느끼기엔 살아있는 상태가 곧 고통인 것 같습니다.
M: 자네가 바로 삶 그 자체이니까. 자네가 따로 살아있는 게 아니야. 고통을 느끼는 것은 자네가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그 인간일 뿐이지 자네 자신이 아닐세. 그 인간을 자각으로써 분해해 버리도록 해. 그건 단지 기억과 습관의 다발일 뿐이야. 비실재의 자각으로부터 자신의 본성의 자각으로 넘어가는 데에는 틈이 있는데, 만약 자네가 순수한 자각의 기법만 터득하면 그 틈을 쉽게 넘을 수가 있어.
문: 제가 아는 것은 본래면목을 모른다는 사실뿐입니다.
M: 도대체 자넨 자기가 본래면목을 모른다는 건 어떻게 아나? 무엇보다 직접적인 통찰이 이미 자기 자신을 먼저 알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나? 왜냐하면 자네가 있어서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그 무엇도 자네에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말일세. 지금 자네가 자기 자신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네가 자신의 자아를 묘사할 수가 없기 때문일세.
우린 언제나 “난 내가 있음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지. 그러나 묘사될 수 있는 것은 자네의 본성일 수가 없어. 있는 그대로의 자네 모습은 묘사될 수가 없는 거라구. 본성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를 정의하거나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서 자기 자신이 되어 봄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야.
일단 자기의 면모가 지각되거나 상상될 수 없는 것이고 의식의 장에 나타나는 것은 결코 자신의 본성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본성을 보다 더 깊이 깨닫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써 모든 자기동일시를 버리게 될 걸세. 말 그대로 버림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 자신이 몸속에 있는 것도 마음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 둘 모두를 잘 자각하고 있는 것 그것이 이미 참다운 자신에 대한 앎일세.
문: 만약 제가 몸도 마음도 아니라면 제가 그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저와는 전혀 동떨어진 것을 어떻게 지각할 수 있습니까?
M: “그 무엇도 내가 아니다”라는 것이 초보이며 “모든 것이 나이다”는 그 다음이지. 그 둘은 모두가 “세상에 있다”라는 생각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야. 이 생각도 포기되면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되는 것이야. 둘이 아닌 본체가 되는 것이지. 자넨 지금 여기에서 바로 그것일세. 그런데 그것에 대한 잘못된 관념 때문에 자네의 시각이 장애를 일으키고 있는 거라구.
문: 글쎄요. 전 제가 지금 있고 과거에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거라는 것, 즉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는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저의 존재엔 의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안팎의 조화에서 생겨나는 환희가 빠져 있습니다. 만약 저 홀로 있고 세상이 오직 하나의 상에 불과하다면 왜 부조화가 있겠습니까?
M: 그런 식으로 부조화를 스스로 만들어서 스스로 불평을 하는 거야. 욕망과 두려움을 안고 느낌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면 자넨 어쩔 도리 없이 슬픔과 속박을 낳게 돼. 뭔가를 만들더라도 사랑과 지혜로써 해야 하고 그러한 자신의 창조물에 재해서도 집착심이 없으면 그 결과는 조화와 평화일세.
마음의 상태가 어떤 식으로 자네에게 비추어지는 걸 아는가? 행복을 낳는 것도 불행을 낳는 것도 모두가 자기동일시 일세. 속박과 굴레는 바로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걸 통찰하여 애착과 반감의 사슬들을 끊어 버리게. 그리고 자유라는 목표를 마음속에 새기게. 그리하면 자신은 이미 자유로우며, 자유나 해방이라는 것이 애써서 얻을 수 있는 먼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걸세. 해방이라는 것은 획득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야. 이미 자신은 자유롭고 그러한 자유에 근거해서 살 수 있다고 믿는 바로 그러한 용기가 문제라네.
문: 만약 제가 저 좋을 대로 산다면 반드시 사는 게 힘들어질 것입니다.
M: 그렇지만 자유롭지. 자네가 하는 행동의 결과들은 사회와 사회의 관습에 따라 달라질 거고.
문: 앞뒤를 안 가리고 행동할 수도 있지요.
M: 용기와 더불어 비로소 지혜와 자비 그리고 행동의 기술이 드러나게 될 걸세. 그리되면 자연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거고 무슨 일을 하든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겠지.
문: 지금 제 경우에는 저 자신의 여러 측면들이 서로간의 분쟁을 일으키고 있어서 내면의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용기도 없으며 지혜나 연민 같은 것도 있을 턱이 없습니다. 지금 저의 행동들은 오직 제가 존재하고 있는 틈을 더 늘려놓기만 합니다.
M: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넨 자기 자신이 뭔가 혹은 누군가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 멈추어서 잘 살펴보고 바른 의문을 갖도록 해. 그리고 바른 결론에 이르러 거기에 따라 행동하면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관찰해 볼 용기를 가지라구.
첫걸음을 땔 때야 머리 위로 천정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을 터이지만 머지않아 격동의 시절은 사라지고 평화와 환희가 오게 된다네. 지금 자넨 자기 자신에 대해 몹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만 그런 식으론 더 알수록 더 모르게 되는 거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라구. 꾸준히 내면을 바라보고 지각되는 것은 지각하는 자와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해.
자네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어떤 일을 할 때라도 자넨 발생하는 그것이 아니고 자네에게서 그 일이 생기는거라구. “내가 있음”의 느낌에 깊이 잠겨보면 틀림없이 그 지각의 중심은, 마치 세상을 비추는 빛이 보편적인 것처럼,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야. 우주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하는, 즉 조용한 관조자에게 발생하는 것이며, 그 반면 행해지는 일은 모두 보편적이며 고갈되지 않는 힘의 원천인 자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야.
문: 그것은 참으로 듣기 좋은 말입니다. 말없는 관조자이며 동시에 보편적 에너지라는 건 좋습니다만 이런 식의 언어적 수준에서 직접적인 앎의 상태로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듣는 것은 아는 게 아니니까 말입니다.
M: 직접 알려면 그 전에 아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해. 지금까지 자넨 마음이 아는 거라고 여겨왔을 테지만 그렇지는 않아. 마음은 생명을 상과 관념으로 묶어 놓는다구. 그러면 이놈들이 기억 속에 흔적을 남기지. 지금 자넨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혼동하는데 참 앎이라는 것은 언제나 신선하고 새로우며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것이야. 속에서 솟아나는 거라구. 자기가 무엇인지 알 때에는 자기가 아는 것과 자기 자신이 일체가 되어 앎과 존재 사이에 틈이 존재하질 않아.
문: 저로선 마음으로써 마음을 관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M: 모든 수단을 다 써도 좋으니 마음을 이용해서 마음을 알아봐. 그건 타당하며 마음을 넘어서기 위해 가장 좋은 준비작업이기도 하니까. 존재함과 앎과 즐기는 것은 자네 자신의 것이야. 우선 자신의 존재함을 깨닫도록 하게. 그게 쉬운 것이야. “내가 있음”의 느낌이 언제나 자네와 함께 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고 나서 앎의 내용과 별도로 존재하는 아는 자로서의 자네 자신을 만나도록 해. 일단 자기가 순수존재임을 알면 자유의 황홀경은 자네 자신의 것이야.
문: 그건 무슨 요가입니까?
M: 그건 왜? 자네가 여기 온 건 지금 생활에, 그러니까 자기 심신을 위주로 하는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심신을 조절하거나 해서 이상적인 상태로 유도하여 개선할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심신과의 자기동일시를 전적으로 그만두고 전혀 자신이 개입하지 않은 채 심신을 마치 외계의 일을 바라보듯 해도 괜찮은 방법이 되겠지.
문: 그러면 조절과 훈련의 길이 라아자 요가이고 집착을 버리는 쪽이 즈나나 요가, 하나의 이상을 숭배하는 것이 박티 요가라고 할 수 있겠군요.
M: 이름을 그렇게 붙이고 싶으면 그렇게 해. 말이란 뭔가를 가리키는 수단에 불과해. 그 자체가 실재를 설명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이해를 통해 해탈을 이루는 오래되고 단순한 방법이야. 마음을 잘 이해하게. 그리하면 마음의 지배력이 떨어져 나갈 거야. 마음은 곧잘 오해를 하는데, 오해야말로 마음의 본성이지. 이름은 뭐라 해도 좋지만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야.
이것은 아주 오래된 방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최근의 방법이기도 해.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다루기 때문이야. 그러나 자네가 행하는 어떤 일이 변화를 낳지는 않아. 왜냐하면 자넨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거든. 몸과 마음을 바꿀 수는 있지만 변하는 것은 언제나 외적인 것이지 자네 자신은 아니란 말이야. 왜 뭔가를 바꾸려 애를 쓰나? 그러지 말고 단 한번이라도 몸이나 마음, 그리고 심지어는 자네의 의식조차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의식이나 무의식을 넘어선 자신의 본성 속에 홀로 서 있어 보게. 노력을 통해 가능한 게 아니고 오직 명증한 이해만이 필요한 거야.
자신의 오해를 추적해서 그것들을 버리면 돼. 찾고 발견할 게 없어. 왜냐하면 잃어버린 게 없으니까. 그냥 쉬면서 “내가 있음”을 지켜보라구. 진리는 바로 그 뒤에 있어. 조용히 고요히 있어 보면 그것이 드러나게 될 걸세. 아니면 자네를 내면으로 이끌고 간다고나 할까?
문: 심신을 먼저 없애버려야 하는 게 아닙니까?
M: 그럴 수가 없어. 왜냐하면 바로 그 생각이 심신에 지네를 묶어두기 때문이야. 그러니 그냥 이해하고 무시해 버리게나.
문: 저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심신이 원만한 상태에 있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M: 자신이 완전히 통합되어서 생각과 행동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상상을 하라구. 물론 그렇게 해도 자신을 몸이나 마음이라고 오해하는 데에서 풀어주진 못하지. 그러니 있는 그대로 “저건 내가 아니야” 라고 보게나. 그리하면 그게 끝이야.
문: 선생님 말씀은 잊어버릴 것을 명심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M: 그런 것 같지. 그러나 못할 일이 아니야. 할 수 있어. 그냥 진지하게 시작을 해 보라구. 그냥 시작해 보기만 하면 반드시 되게 되어 있다구. 찾는 것이 곧 발견하는 것이야. 실패는 없어.
문: 저희는 원만하게 통합되어 있지를 않아서 고통을 겪습니다.
M: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이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촉발되는 한 반드시 고통은 겪게 되어 있어. 욕망과 두려움이 얼마나 공허한지 보라구. 그리하면 그것들이 낳은 위험과 혼돈이 없어지게 돼. 자신을 개혁하려고 하기 전에 모든 변화의 무익함을 보라구. 변하는 건 계속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이미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변화가 자네를 불변의 상태로 데려다 주리라고 기대하지 말아.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 오직 변화라는 관념이 허망하다는 걸 알고 포기될 때에만 불변의 것이 저절로 나타날 수 있는 거야.
문: 저는 어딜 가든지 진리를 보기 전에 먼저 제 자신이 완전히 탈바꿈을 해야 하며, 그러한 주의 깊은 노력으로 스스로에게 가한 변화가 요가라고 들었습니다.
M: 모든 변화는 오직 마음의 변화일 뿐이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되려면 마음을 넘어선 본성으로 들어가야 해. 만약 마음을 영원히 떠나기만 한다면 뒤에 남기는 마음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또 그것은 깨달음이 없이는 불가능하지.
문: 마음을 포기하는 것과 깨달음은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M: 깨달음이 먼저지. 마음은 스스로 자신을 넘어설 수가 없어. 폭발해 버려야지.
문: 폭발 이전에 탐구가 있는 게 아니구요?
M: 폭발의 힘은 실재로부터 오는 것인데 자넨 마음을 준비시킬 많은 조언을 들어 둔 거야. 그처럼 마음이 관심을 두니 실재에서 뭐가 오겠나. 자네가 그런 식으로 하는 건 두려움 때문이네 두려움은 언제나 폭발을 지체시킬 뿐이야. 그러면 또 다른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문: 전 언제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M: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모든 필요한 요소들이 갖추어진 상황이 발생해야 해. 그렇다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어. “내가 있음”에 머무르는 것이 또 다른 기회를 낳아주니까. 모름지기 기회라는 건 태도가 만들어 내는 법이야. 지금 자네가 아는 건 모두가 간접적인 것밖에 없어 “내가 있음”만이 직접적이고 증거가 없어도 되는 것이니 그 느낌에 머무르도록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