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의 3백 용사에 관한 이야기는 몇 년 전에 영화로도 나왔지만 언제 들어도 정말 감동적인 실화입니다. 페르시아의 20만 대군이 그리스를 2차로 침략해 왔을 때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아테네가 정복되고 나면 그 다음은 바로 자기네 차례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동맹군을 결성하고 대항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국민들은 자국 군대가 국경 밖으로 나가면 국내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참전을 꺼렸고, 그 결과 레오니다스 왕은 겨우 3백 명의 군인들만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수적으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전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니다스 왕은 그들을 이끌고 '테르모필레'라는 곳으로 나아가서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이했습니다. 그 곳은 페르시아군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좁은 통로였는데, 한쪽은 험준한 산이고 다른 한쪽은 바다로 떨어지는 절벽이어서 페르시아 군대가 한꺼번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는 천혜의 요지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정예 군인으로 훈련을 받았던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그 곳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페르시아군을 용감히 막아내었지만, 상금에 눈이 먼 그리스의 한 농부가 페르시아의 크세륵세스 왕에게 산을 넘을 수 있는 우회로를 가르쳐 주는 바람에 결국 앞뒤로 포위당하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니다스 왕을 위시한 3백 용사들은 끝까지 저항하며 싸웠고 그 결과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전원 장렬하게 전사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시간을 벌게 되었던 그리스 동맹군은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그 후에 그리스 사람들이 테르모필레의 협곡에 그 3백 용사들을 기념하는 비를 세웠는데 거기에는 "길손들이여, 스파르타에 가서 전해 주오. 조국의 명을 받들어 우리가 여기 이렇게 누워 있노라고."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다윗 왕 역시 그처럼 용감한 정예 용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 용사들의 대표적인 전공을 총망라해 놓은 내용인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예나 지금이나 '전투하는 지상교회'가 원수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우리 기독신자들이 과연 어떤 영적 용사가 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앙의 용사는 전세가 불리할 때일수록 더욱 용맹을 발휘하여 자기편의 사기를 북돋우는 자입니다.
본문 10절부터 14절에 "10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두목은 이러하니라 이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윗의 힘을 도와 나라를 얻게 하고 세워 왕을 삼았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대로 함이었더라 11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학몬 사람의 아들 야소브암은 삼십인의 두목이라 저가 창을 들어 한 때에 삼백인을 죽였고 12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세 용사 중 하나이라 13저가 바스담밈에서 다윗과 함께 하였더니 블레셋 사람이 그곳에 모여와서 치니 거기 보리가 많이 난 밭이 있더라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14저희가 그 밭 가운데 서서 그 밭을 보호하여 블레셋 사람을 죽였으니 여호와께서 큰 구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두 용사들은 소위 "세 용사" 혹은 '첫 삼인'이라 불린 자들 중에 속한 멤버였는데, 그처럼 용맹과 무공으로 유명했던 삼총사 중 첫째가 바로 "삼십 인의 두목"인 "야소브암"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야소브암이 "창을 들어 한 때에(한꺼번에) 삼백 인을 죽였다"고 했는데,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하 23장 8절에 보면 그가 '팔백 명'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아마 사무엘하에 있는 것은 그가 죽인 적군 전체의 수자이고, 이 역대상의 내용은 어느 한 전투에서 일시에 죽인 수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 야소브암이 삼백 명을 한 전투에서 죽였을 때, 혼자였는지 아니면 비록 중과부적이기는 했지만 자기편 부하들도 있는 가운데서 특별히 앞장서서 종횡무진으로 적군을 유린했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어떤 상황이었든지 간에, 야소브암은 수적으로 절대 불리한 상황에서 놀라운 용맹을 발휘함으로써 전세를 뒤집고 아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던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압도적인 적군의 세력을 보면서 다들 두려워하고 있는 판이었는데, 자기편의 장군이 몸소 앞장서서 돌격하면서 혼자 적군 삼백 명을 쳐 죽이는 모습을 목도하거나 그런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에 그 부하들이 얼마나 용기백배하게 되었겠습니까? 용사는 이처럼 자기 혼자만 잘 싸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용감무쌍한 솔선수범을 통하여 아군의 용기를 북돋우어 줌으로써 함께 승리하는 군대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삼인 중 둘째 용사인 엘르아살도 그러했습니다. 그가 "바스담밈"이란 곳에서 "다윗과 함께 하였다"고 했는데, 아마 엘르아살이 다윗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블레셋군의 기습공격을 당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전세가 몰리게 되면서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통상 실전에서 그처럼 아군의 병사들이 전선을 이탈하면서 탈주하기 시작하면 그 전쟁은 이미 진 것이나 다를 바 없으며, 그런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시킨 경우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이스라엘군이 풍비박산이 나면서 전멸 일보 직전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엘르아살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그 밭을 보호하여 블레셋 사람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즉 엘르아살은 무슨 '큰 나무'나 '바위'를 등지고 싸움으로써 최소한 후면만은 보호되는 상황이 아니라, 완전히 노출되어 사방팔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불리한 지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군을 맞서 싸우면서 끝까지 다윗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개역 성경에는 이 문장의 주어가 "저희"라고 복수로 되어 있지만, 백성들은 다들 도망치기 바쁜 상황이었으므로 지금 엘르아살 곁에는 다윗 왕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실제적으로는 엘르아살 혼자 적군을 상대했던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래서 14절의 주어를 "저희"가 아니라 아예 "그"라고 단수로 번역하고 있는 역본들도 많이 있습니다. 마치 조조의 백만 대군을 장판교에서 혼자 막아 지켰다는 장비처럼 엘르아살은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적군을 맞아 싸웠던 것이며, 삼십육계를 놓기에 바빴던 이스라엘 군사들은 바로 그런 엘르아살의 용감하고도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고 다시 "그 밭"으로 돌아와서 전열에 합류했으며 그 결과 "여호와께서 큰 구원으로 구원하시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기편의 전세가 불리하고 사기가 크게 떨어졌을 때에나 혹은 아예 곁에 있던 동료들이 후퇴까지 시작했을 때에도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전선을 사수함으로써,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어 주고 패전 일보 직전에서 통쾌한 역전승을 거두게 만드는 자가 진정한 용사입니다.
'전투하는 지상교회'에도 바로 그런 신앙의 용사들이 꼭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일을 하다 보면 많은 교인들이 힘에 부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바로 그럴 때에 혼자서 '삼백 명'을 무찔러 내는 용기와 힘이 있는 신자가 꼭 필요합니다. 그런 '용사 신자' 한 명이 앞장서서 나아가게 되면 그때까지는 자기 한 사람의 몫도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다른 교인들이 크게 고무되면서 교회 전체의 사기가 충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절대다수의 교인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완전히 포기하려 하는 경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때야말로 혼자서라도 '그 밭 가운데 서서 그 밭을 보호하여' 지키려는 용사가 꼭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다들 고개를 돌리고 꽁무니를 빼려 하는 가운데서도 단 한 명이라도 그런 용사가 일어나서 '죽도록 충성하는' 싸움을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면, 뒤로 물러서려던 교인들까지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그 전열에 합세하는 놀라운 일이 반드시 따라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형세가 교회 쪽에 불리하게 보이고 교인들 가운데 낙심하는 사람까지 생길 때일수록 더욱 용기를 내어 앞장서서 싸움으로써 아군 전체의 사기를 북돋우어 끝내 역전승을 하게 만드는 멋진 용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의 용사는 자기가 섬기는 일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는 자입니다.
15절부터 19절에 기록하기를 "15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바위로 내려가서 아둘람굴 다윗에게 이를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6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7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18이 세 사람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고 19가로되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록된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란 첫째 삼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위 "둘째 삼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20절 이하에 나타나는 이름들은 바로 그들이 이끌었던 '삼십 두목'들입니다. 이 '두 번째 삼총사'들 역시 다윗을 모시고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블레셋군이 베들레헴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베들레헴은 아시다시피 다윗의 고향입니다.
그렇게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윗은 갑자기 자기가 자라났던 동네에 있는 우물물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심코 "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이 참 시원하고 맛있었는데 누가 나에게 한 모금 마시게 해 줄 수 있었으면..."이라고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명령이 결코 아니었고 그저 다윗이 고향 동네를 바라보다가 추억에 사로잡히면서 문득 튀어나온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 두 번째 삼총사들이 당장 블레셋 군대를 "충돌하고"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로 돌격해 들어갔습니다. 그 우물물 한 그릇을 길어 오기 위하여 적군의 "영채"가 있는 한가운데를 그 세 명이 그야말로 좌충우돌하면서 뚫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우물물 한 바가지를 떠와서 다윗 왕에게 바쳤습니다.
다윗은 느닷없이 자기 앞에 바쳐진 물 한 바가지를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자기가 그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그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부하 세 명이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다녀왔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살아 돌아왔기에 망정이지 그 물 한 바가지 때문에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죽게 되었다든지 중상이라도 입게 되었다면 다윗으로서는 그 얼마나 후회스럽고 통탄할 일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그 물을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즉 그 우물물을 그 자리에서 즉시 '관제'로 하나님께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내게 겨우 물 한 바가지를 갖다 주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돌아보지 않고 적진으로 돌격을 하게 만든 이런 어리석은 짓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 이 용사들의 이런 충정이 그 어떤 경우에도 다윗이라는 한 개인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어서는 결코 안 되겠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바치는 이 고귀한 충성과 용맹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쓰이도록 하겠습니다."라는 회개와 서원의 기도였던 것이었습니다.
그 세 용사들 역시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새삼 깨닫는 바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지금 다윗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택하신 이스라엘을 위하여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새로운 결단과 각오를 다지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 역시 신앙의 용사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너무나 고귀한 마음자세입니다. '우리 교회의 장로들이 나를 철저히 지지하고 받들어 모셔 주어야 내 목회가 성공할 수 있을 텐데.' - 목사가 이런 생각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목사의 목회를 축복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우리 목사님이 좋아하실까?' - 만약 교회의 장로, 집사, 권사들의 생각이 여기에서 끝난다면 그런 교회는 결국 교주를 하나님처럼 모시는 이단과 오십보백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강단에 설 때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생애 최고와 전부를 제물로 바치게 만들어야 할 텐데.'라는 마음으로 가르치는 목사, 교회를 출입할 때마다 '내가 우리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충성하며 섬겨야 할까?'라는 간절함으로 기도하며 헌신하는 교인 – 바로 이런 용장과 용사들이 있는 교회만이 진정 연전연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섬기는 일이 목사나 교인이라는 사람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위하여 바치는 실로 고귀하고도 영예로운 헌신인 것을 단 한시도 잊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진정한 용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앙의 용사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책임만큼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완수하는 자입니다.
20절 이하 25절의 말씀에 "20요압의 아우 아비새는 그 삼인의 두목이라 저가 창을 들어 삼백인을 죽이고 그 삼인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21저는 둘째 삼인 중에 가장 존귀하여 저희의 두목이 되었으나 그러나 첫째 삼인에게는 미치지 못하니라 22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효용한 일을 행한 자라 저가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한 사자를 죽였으며 23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 사람의 키가 다섯 규빗이요 그 손에 든 창이 베틀채 같으나 저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더라 24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5삼십인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첫 삼인에게는 미치지 못하니라 다윗이 저를 세워 시위대 장관을 삼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두 사람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두 번째 삼인'에 포함되는 용사들입니다. 그 중 하나인 "아비새"로 말하자면 그 역시 "창을 들어 삼백 인을 죽이고 그 삼인 중에서도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첫 번째 삼인'의 우두머리였던 야소브암에 버금가는 용맹과 무공을 자랑했던 것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 "브나야" 역시 "효용한 일을 행한" 용사였다고 했는데, 이 말은 '많은 공적을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가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모압의 사자같이 용맹스러운 두 장수를 죽였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브나야는 "눈 올 때 함정에 내려가서 한 사자를 죽였다"고 했는데, 아마 눈이 덮여 먹을 것을 찾지 못해 인가에 내려온 사자가 함정에 빠졌을 때 그 속에 뛰어 들어가서 직접 사자를 죽였다는 뜻일 것입니다. 또한 그는 "키가 다섯 규빗" 즉 2.3미터나 되며 "베틀채"같이 굵은 창을 가진 "장대한 애굽 사람"을 상대로 막대기만 가지고 싸웠는데 결국 그의 창까지 빼앗아서 그 거인을 죽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26절 이하에 보면 그 외의 용사들의 명단들이 47절까지 자세히 나열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이 '둘째 삼인'이나 '삼십인'에 속한 다윗의 부하들 역시 대단한 용맹을 발휘했으며 혁혁한 무공들을 남긴 용사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다시 보면 이들에 대하여 특별한 주석이 따라 붙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아비새를 가리켜서는 "저는 둘째 삼인 중에 가장 존귀하여 두목이 되었으나 그러나 첫째 삼인에게는 미치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브나야에 대해서도 역시 25절에 "삼십인보다 존귀하니 그러나 첫 삼인에게는 미치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즉 객관적인 판단을 통해서 볼 때에는 이 '둘째 삼인'보다는 '첫째 삼인'이 단연 더 뛰어났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휘하에 있던 부하들이 개개인으로 보면 다 뛰어난 용사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비교해 보자면 그 중에 가장 돋보이는 '첫 삼인'이 있었고 그 다음이 '둘째 삼인'이었고 그 외에도 '삼십인'의 용사들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능력의 차이는 좀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 모두가 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강력히 건설하는 데에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리 첫 삼인이 그처럼 돋보이는 용사들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힘만으로 그 막중한 일을 다 해낼 수는 결코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그 '첫째 삼인'의 충성과 용맹을 이어 받은 '둘째 삼인'도 꼭 있어야 했으며, 그런 삼총사들을 '두목'으로 따르면서 함께 수많은 전투를 치렀던 '삼십인'의 특전단 역시 없어서는 안 될 정예요원이었습니다. 즉 '최고의 용사'들뿐 아니라 그들보다는 조금 못하다 할지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한 몫만큼은 톡톡히 다해 낸 '일반 용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 왕은 명실 공히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왕국'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교회에는 '앞장서서 싸우는 첫 삼인'의 사명을 감당할 훌륭한 장로들이 있어야만 하며, 또한 그런 선배들의 모범을 본받아 그들의 뒤를 잇는 '둘째 삼인'이 될 후배 장로들이 줄을 이어야만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감독들의 지도하에 교회 일에 손발 노릇을 감당하는 '삼십인'의 집사, 권사들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 역시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다 사도'가 될 수 없으며 '다 선지자'가 될 수도 없지만, 우리 모두는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이 교회에 없어서는 아니 될 '필수적인 지체'요 '요긴한 군사'들인 것입니다.
교인 전부가 다 '첫 삼인' 같은 사람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지상교회는 단 하나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 일은 목사 한 사람만의 영력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장로들만 목사를 잘 보좌하고 협력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 또한 절대로 아닙니다. 목사로부터 시작하여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다 각자가 받은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만 교회 전체는 실로 '승리하는 전투교회'의 축복과 영광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이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에 꼭 남기는 '신앙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10절 상반절을 다시 보시면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두목은 이러하니라"고 시작하면서 "이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윗의 힘을 도와 나라를 얻게 하고 왕을 삼았으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결코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세웠던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용사들이 있었던 까닭에 그처럼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교회도 똑같습니다. 교회는 물론 '말씀을 맡은 장로'인 목사를 중심으로 세워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강단에서 목사가 설교하는 소리만 있고 그 말씀대로 용맹을 떨치며 힘을 발휘하는 용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교회가 되고 말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용장 밑에 용사가 따라야' 실전에서 백전백승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렸던 레오니다스 왕과 스파르타의 3백 용사들은 단지 조국을 구했을 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을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 이후의 세계사는 서양이 아니라 동양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전개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신앙의 용사'들로 똘똘 뭉쳐진 교회는 단지 자기 교회가 성장하는 축복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 완성에 실로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바로 이런 용사들이 계속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다른 교우들의 영적 사기를 북돋우고 교회 전체의 전의를 가다듬어 줄 수 있도록 자기 혼자서라도 앞장서서 죽을 때까지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첫 삼인'들이 꼭 필요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체면이나 입장 같은 것은 전혀 따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적진을 충돌하면서 그 한가운데를 돌파해 나가는 멋진 '둘째 삼인'들이 경향의 2세대를 통하여서도 줄을 이어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의 중직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크든지 작든지 간에 주님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그 몫만큼은 반드시 감당하는 '삼십인'의 용사들 역시 제직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야만 합니다. 전세가 불리해 보일 때일수록 오히려 앞장서서 돌진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한 목적만을 붙들고 싸우며, 끝까지 자기가 서 있는 자리만큼은 죽을 각오로 지키는 이런 신앙의 용사들이 되어서 이 경향교회를 중심으로 지난 40년 동안 누렸던 것보다 오히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축복의 전성시대를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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