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16]엄흥섭 '새벽바다'
화려한 발전 뒤 빈민들의 희생
근대도시 인천의 모순 드러내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4-05-01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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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9일 오후 인천 중구 도원동에 있는 광성중·고등학교 옥상에서 바라본 인천의 모습.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인천 바다는 고층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김민재기자 |
작가란
언제든지 그 시대의,
그 환경의,
민중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작품은
그 시대,
그 환경,
그 민중의
좋은 거울인 동시에
등대여야 한다
中에 팔려가는 소녀들 '비극' 그 덕에 먹고사는 지게꾼
일제강점기 빈곤층의 삶 역설… 현재 도원동 배경인 듯
진취·투쟁적 작품활동… 문학잡지 참여로 인천과 인연
월북작가 중 한명 해방이후 대중일보 등 언론에 몸담아
엄흥섭(1906~1987)은 시대의 등대가 되길 원했던 작가다. 그는 1937년 '통속작가에게 일언'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작가란 언제든지 그 시대의, 그 환경의, 민중의 앞에 서 있어야 한다"며 "작품은 그 시대, 그 환경, 그 민중의 좋은 거울인 동시에 등대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가가 독자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독자가 작가를 따라오게끔 만드는 게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였다.
엄흥섭의 작품은 대부분 진취적이고 투쟁적이다. 그가 인천을 배경으로 쓴 단편소설 '새벽바다'(1935)도 당대 인천지역 빈민의 곤궁한 삶을 보여줌으로써 근대도시 인천이 갖고 있는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개항도시로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인천의 화려함 뒤에는 언제나 빈민들의 희생이 따랐다는 걸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데뷔작 '흘러간마을'(1930)과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출범전후'(1930)는 농민·어민들의 삶을 짓밟는 지주와 어업회사에 저항하는 내용이다. 파업, 파산, 지주, 소작농은 그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엄흥섭은 동시대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계열 작가나 월북작가들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다. 카프 지도부를 비판했다가 제명당해 '주류'에서 멀어진 탓도 있을 것이지만 빼놓을 수는 없는 인물이다.
월북작가 연구자인 이주형 경북대 명예교수는 엄흥섭에 대해 "양심적 지식인으로서는 중요한 인물이었고, 문학이 자신의 신념을 사회에 알리는 통로라고 여긴 작가였다"고 평가했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경남 진주에서 교직생활을 했던 그는 인천과도 각별한 인연을 갖고있다. 인천지역 문학잡지 창간에 힘을 보탰고, 해방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 하루살이 최 서방의 '새벽바다'
항구에서도 가장 빈민굴에 사는 최 서방. 그는 선창(항구)에서 승객들의 짐이나 술독을 실어주며 하루를 근근이 버티는 지게꾼이다. 역설적이게도 최 서방은 자신처럼 가난에 허덕이다 중국으로 팔려가는 계집이라도 없으면 한 끼 몫조차 벌지 못하는 신세다.
"경상도에서 대련으로 팔려가는 계집의 짐짝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저녁을 굶었을 것"이라는 최 서방의 푸념 속에 당시 서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제강점기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농민들은 어린 딸을 부잣집 수양딸로 보내곤 했는데, 이 과정에 악덕 '브로커'가 끼어들어 어린 소녀들을 중국으로 팔아 넘기고는 했다. 1936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는 수양딸로 보내진 14세 소녀가 중국 다롄 유곽으로 팔려갔다는 기사를 싣는다.
"경남 함양에 본적을 둔 권병택은 지난번 수해로 살수가 없어 그 딸(14)을 같은 마을 누군가에게 수양녀를 주었는데, 그는 중국인에게 60원에 팔려 대련 반유곽 대동강 작부로 어린몸이 외국인의 상대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단돈 몇십원에 팔려갔을 이름 모를 소녀의 짐짝을 들어주는 대가로 최 서방이 손에 쥔 돈은 50전이었다. 소녀의 비극인 인신매매가 최 서방에게는 입에 풀칠하게 하는 생활 수단을 주는 삶의 역설을 엄흥섭은 그리려 했다.
엄흥섭은 문학잡지 '월미(月尾)' 창간호에 쓴 '인천소감'이란 글에서 이 작품의 배경이 인천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인천이야말로 근대도시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장소라고 강조했다.
최 서방은 날마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들끓는 인천항에서도 '실그러진 성냥갑처럼, 게딱지처럼 옹기종기, 다닥다닥' 붙은 빈민촌에 거주한다. 최 서방의 빈궁한 삶은 해가 저문 뒤 인천항에서 집으로 가는 퇴근길에 만난 청춘남녀와 대조된다.
최 서방은 바닷가에서 '망할놈의 석탄가루'에 눈을 비비며 일감을 찾는데 비해 젊은 연인들은 바닷바람을 쐬거나 해수욕을 즐긴다.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 영화관, 숲이 우거진 집 건너편에서 흘러나오는 레코드 소리, '납량연화대회(納凉煙火大會)' 불꽃놀이는 최 서방과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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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영화관 표관 /인천개항박물관 제공 |
최 서방은 밤이 늦도록 공장다니는 딸과 일본인 집으로 '오마니'(파출부) 일을 하러 가는 아내를 기다린다. 깊은 밤에는 땔감을 구하러 공동묘지의 나무말뚝을 뽑기도 한다.
엄흥섭은 '인천소감'에서 "그동안 인천은 카페가 늘고 술집이 늘고 양복점이 늘고 사진관이 늘고 미두꾼이 늘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늘어간다는 것은 부두의 수천 노동자의 생애가 날마다 쪼들려 간다는 반향(反響)이 아닐 수 없다. 인천! 인천을 사랑하면서도 인천을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최 서방과 같은 인천 빈민들의 삶은 처참했다. 먹을 것이 없어 시장통이나 요릿집 쓰레기통을 뒤져 복어 내장을 주워먹고 중독돼 숨지는 경우도 잦았다. 실제로 1925년 1월 27일 인천의 한 노동자가 설 명절 먹을 음식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져 복어 내장을 날로 먹고 숨졌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빈민들이 버려진 복어내장을 먹고 죽는 일이 잦아지자 신문에서는 대책을 요구하는 기사를 싣기까지 했다.
"항구인천에 지금까지 있어온 복어중독사건은 먹다가 기아에 굶주린 토막민이 쓰러기통에서 주서다 먹은 것이다…. 앞으로는 복어를 먹는 가정이나 요정같은데서는 복어대가리와 내장을 쓰러기통에 버리지 말고 차라리 변소간에 버리거나 혹은 땅속에 파묻게 해야 한다…."(동아일보 1940년 5월3일자)
'인천부세일반'(仁川府勢一班·1935~1936) 등에 따르면 1934년 인천부의 조선인 가구는 1만3천418호, 인구는 6만1천603명이었는데, 이중 빈민(세궁민·細窮民)은 1천974가구(14.7%), 8천419명(13.6%)이었다.
당시 인천부에 해당하는 오늘날 중·동구 지역엔 2014년 3월말 기준 7만9천462가구에 18만4천153명이 살고, 이중 3천943가구(4.9%), 5천927명(3.2%)이 기초생활보장수급자다. 지금의 남구, 연수구, 남동구 지역은 1936년에 부천군에서 인천부로 편입됐다.
최 서방은 하루 벌이로 짐을 날라 주고 50전을 벌었는데, 이는 '새벽바다' 속에 나오는 것처럼 '막걸리 한 사발에 밥 한 끼'가 10전이었다고 하니 5끼니 값이다. 요즘 막노동 하루 품삯이 8만~9만원이다. 빈민계층의 삶은 지금이나 그때나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 빈민층 비율은 줄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최 서방들이 인천에 살고 있다. 당시 최 서방이 살던 곳이 어디인지는 명확지 않다. 작품 속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가파른 비탈길로 그려지는 걸로 봐서는 도원동 일대로 추정할 수 있다.
구름이 잔뜩 낀 지난 4월 29일 오후, 최 서방이 오르내렸을 도원동 일대를 찾았다. 도원동 꼭대기에 있는 광성중·고등학교 서동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높은 건물에 가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부두 너머로 멀리 인천대교가 보였다. 높게 들어선 아파트 오른편으로는 월미도 전망대와 자유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1935년 종합운동장 개발계획으로 도원동 빈민촌은 철거됐고, 그들은 내쫓겼다. 아마 최서방도 그때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도시 외곽 어디론가 떠났을 것이다. 최 서방은 바다를 보면서 내일을 생각하기도 싫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내일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신세다.
"내일은 또 어디로 팔려가는 계집애들의 짐을 져다줄 것인가도 잊어버리려했다 …. 온종일 밖에 못나가고 문고리에 매달린 채 어미 애비가 돌아올 때까지를 기다리고 울다가 울다가 나중에 까무러쳐 폭 엎드려 자는 어린 자식 돌이의 내일도 이 순간 그는 잊어버리려 했다…. 금세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다. 최 서방은 어느 틈에 스르르 내일 일이 걱정되었다. 새벽바다는 더 한층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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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잡지 '월미' 창간호 표지 /연세대 학술정보원 국학자료실 제공 |
# 엄흥섭과 인천
엄흥섭은 1927년 '습작시대'라는 동인지 창간에 참여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1937년 동아일보 '나의 수업시대-작가의 올챙이때 이야기' 시리즈에 쓴 글을 통해 "인천의 진우촌, 한형택, 김도인 제군과 손을 잡고, 습작시대란 동인지를 비로소 문단에 내놓았다"고 회고했다.
그때 함께했던 작가는 유도순, 박아지, 양재응, 최병화 등이었다. 이어 김도인과 함께 1937년 1월 창간한 '월미'라는 동인지에 참여했고, 이 월미에 '인천소감'이라는 수필을 쓴다. 해방이후 엄흥섭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등 좌파 중앙 문학조직 활동경험을 바탕으로 1945년 12월 인천에서 '인천문학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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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흥섭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대중일보 사옥 /인천시 제공 |
엄흥섭은 언론인으로서도 활동했는데, 1945년 10월 7일 창간한 '대중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고, 같은해 11월 28일 인천지역 기자 20여명이 결성한 '인천신문기자협회' 위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1946년 3월 1일 창간된 '인천신문'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당시 인천시청 관련 비리 등을 보도했다가 미군정재판에 넘겨져 6개월 집행유예와 벌금 5천원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 엄흥섭은 1947년 7월 25일자로 서울의 '제일신문' 편집국장으로 옮겼고, 여기서 '북조선인민공화국 창건소식'을 보도했다가 실형을 살았다.
엄흥섭은 1951년 9월 28일 서울수복 직전에 인민군에 합류해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북한에서 여러 소설을 발표하고 북한작가동맹 평양지부장과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87년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글 = 김민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