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발표 작품
작품1. 작품명< 백지 >
백지
나는 창문을 열고 맨몸으로 서 있다
적막과 고독이 혼잣말을 하면
바람은 비로소 불어오는 것이었다
컹컹, 개 짖는 소리 아득히 들려오고
귓불이 파르르 떨리곤 했다
차마 문장이 되지 못한 검지들이
합수혈을 찌르듯 여기저기 울음으로 차올랐다
단단하게 뭉쳤던 구름근육이
이 낯선 것들과 조우하면 이 세계는 부드러워졌다
슬픔은 바람에 찢겨 만장처럼 펄럭였다
나는 어디를 떠돌다 이토록 구겨졌을까
나의 먼 집이 저 숲은 아니었을까
나선의 시간들을 고르게 펴면
이 작은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까
모래무덤처럼 부서지는 성역聖城
쌓고 또 쌓았으나 오르지 못할 저 직립문자
사라진 팔과 다리가 꼬리가 되어
흔들거나 짖다보면 나는 짐승으로 다시 태어났다
걸어도 걸어도 풍경은 늘 그 자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흰 것은 흰 것이어서
나는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일 뿐
옆구리 안쪽에 박힌 박쥐 떼가
비막에 쌓인 꼬리를 내보인다
콕콕 찌르는 통증을 참고 오랜 기억을 더듬으면
나는 살아있는 사람, 삶을 사는 사람
전등을 켜지 않았으나
내 꿈의 발전기는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온통 땀으로 범벅된 손금 위를 흐르는
협곡, 그 무한한 나의 골짜기
작품2. 작품명< 규화목 >
규화목
달팽이가 집을 이고 젖은 그늘을 순례하는 동안
골목의 끝은 늘 막혀있어
잣나무가 꺾인 자리에 눈이 박혔다
안과 바깥이 펼쳐놓은 그림자를 따라 뿌리는
어둠을 그러쥐거나 앞발 버텨보는 습성
어디쯤인가 지금, 계단 없이 오르내린 흔적들을 당긴다
카인이 다시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만들 때
울음은 나이테를 따라 입 벌리는 동굴
당신의 고립은 눈자위가 부석부석하다
어느 날 누군가 당신의 목을 의자로 앉았다
출구 없는 무덤은 차라리 아늑함
잃어버린 채 잠든 것들
목청 늘리며
골과 골을 견뎌온 바람이 두 손을 모은다
울음이 보도에 출렁인다
어름사니 발끝처럼 앞코를 들고
나 잠깐만 죽을게
어둡고 고요한 숨결이 거죽으로 엉켜
되돌아오는 모든 것들이 단전에 포개진다
어제와 오늘을 순식간에 관통하는 바람은
두려움과 길이 무릎이 돼
물음을 산란한 초록으로 도착한다
작품3. 작품명< 못>
못
흰 벽장에선 다년생 풀처럼 자랐다
부재는 단죄의 기준
수직으로 깊이를 제어한다
빠르다는 말이 아프다로 들릴 때
한번은 밀어 넣고
한번은 잡아당겨보는
헐렁한 품만 남은 셔츠를 어깨에 꽂는다
툭, 불거진 옹이를 담담하게 뚫는다
멈춰진 채로 작동하는 것이 당신이 인내하는 방식
계절은 어느 쪽으로 쓸리다 바다에 맞닿을까
꽉 물고 놓지 않는 성정
엘프 귀를 한 채 침묵에도 뼈가 있다 말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진 틈을 오므린다
쇳내 함부로 생식하던 기억이
아직도, 라는 완고한 집을 틀 때
거울에 밑 없는 다리를 놓았다
한발 뒤에서 바라보는 흔들림
죽은 뒤에도 목을 꺾지 않는 바람을
정중앙에 맞춘다
작품4. 작품명<화분의 역사>
화분의 역사
공장 곳곳에 이름 모를 꽃이 피었지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지문이 닳아버린 폐타이어들
감은사지 3층 석탑처럼 차곡차곡 쌓여
결가부좌한 노승의 자세처럼 빈틈이 없었지
집을 잃은 거미가 햇빛으로 가는 실을 토해내고
주린 배를 부여잡고 집나간 어미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작은 새들은 폐타이어 속에 둥지를 틀었지
튼실한 석탑 위로 세상의 모든 쓸모없음이
쓸모 있는 것들로 환하게 어화둥둥 달무리를 지면
돌아앉은 저 산과 강도 느릿하게 뒤돌아보겠지
새벽이면 낮은 자세로 숨을 곳을 찾던 연무가
닳은 지문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었겠지
어디로 갈지 몰라 작은 바람에 몸을 실은 작은 씨앗들
아무려나, 먼지가 잔뜩 쌓인 옆구리에 부딪혀
모닥모닥 울고 있으면 그제야 빗방울이 떨어졌지
떨어진 빗물이 허방을 만들고 그 허방 위로 다시 튀어 오른
흙들이 작은 씨앗들을 따듯하게 보듬어 주었겠지
그리하여, 순이 돋고 이파리들이 나부끼고
이름 모를 꽃들이 길을 잃은 바퀴들 속에서 손을 흔들었지
사람들은 이 둥글고 검은 거대한 화분 앞에서 허릴 구부렸지
작은 새들이 낳은 더 작은 새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지
작품5. 작품명<π>
π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날에는 새들이 깨어나기 전이면 좋겠어요
꿈속에서 몸집 눌린 채
형체를 숨겨 어디론가 달려가요
겨울을 물고 늘어진 등뼈 없는 당신
어둠을 물집처럼 틔워
도착하지 못할 날들을 그림자로 세워요
입술을 닫고 몸 움직일 뿐이죠
겉과 속 어긋날 땐 어깨를 들썩이며
바람을 자전해요
허공에서 쓸어 모은 한숨이 실가지처럼 뻗어 나올 때
적막은 울음을 반목으로 가졌죠
혀에 갇힌 무심한 말들이 사방 메꽃으로 피어요
계절을 따라 도는 햇살은 누구의 몸속에서 나오는 기억들일까
비췄다 흩어지고
비췄다 사라지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둥근 시간
시간 너머를 응시하면
죽지 않는 이름은 쇠박새를 불러 모으고
스스로 배회하는 무수한 고백들
보이지 않는 곳을 전망하다
어떤 말의 얼굴은 똑바로 걷기엔 무서운 자유
밀고 당기는 기운으로 광활해진 사막
당신과 내가 하나였던 수(數)처럼 비밀은 사방으로 튀어 오르죠
π는 얼마에 파나요
작품6. 작품명<검정2>
검정2
떠있는 섬, 눈알이 사위를 두리번거릴 때마다
돌기둥이 된 내 표정
첫 안부를 묻는 두꺼운 입술로 그가 웃을 때면 앞니도 함께 웃었다
조용히 보이지 않는 사람을 견디는 노을의 발톱 길어지고
숨길 수 없는 것들로 목이 탄다
굳은살 박인 손짓은 사선으로 튕겨나간다
이곳은 어디인가 표정은 어디까지 커질 수 있나
하늘을 잃은 해바라기처럼 마른 표정으로
기분에 몸을 기대고 있다
식은땀을 흘리는 한낮의 전등 빛
헛손질에 능란해진 습관으로 그가 헛손질을 다시 했다
천장이 흔들리고
볼이 남천의 가지처럼 붉어졌다
긴 혀가 온몸을 대신하듯 내게로 왔다
자칫하면 어둠은 설정으로 알겠어요
밤마다 구르는 돌, 사람을 동심원처럼 뒤흔드는 몽환
때로는 익숙한 목소리가 감싸 쥔 얼굴에 들어가 있다
그는 밤을 너무 자주 만났다
아주 높은 곳에서 가본 적 없는 길을 내려다 볼 때
어깨에 겹겹 쌓인 사소한 대화들
멈추지 않는 물끄러미,
빛 없는 빛이란 말은 발목일까 비탈일까
당돌하고 질긴 장막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사라졌다
LED가 켜진 내 족적은 막막함으로 창백했다
작품7. 작품명<미러볼>
미러볼
죽은 자를 불러내기 좋은 곳
얼굴을 꺼내보는 벽은 한쪽 눈만 지녔다
눈빛은 어쩌면 벼랑
울퉁불퉁 솟구치는 이름
왈츠를 추는 날렵함의 뒤태를 곧추세운다
누가 만든 빛일까 흔들지 않아도 용해된다
멈췄다가 연신 돈다
길게 초인종을 누르는 습관으로 혼잣말을 읊조린다
남자의 흔적이 붉은빛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리 와서 앉아봐
밤만 되면 나랑 대화를 하겠다니
늑골 사이에 역광이 능선처럼 걸린다
가늘고 흰 손을 가로저으며 대화가 떠다닌다
간절함의 보폭 따라 사이드스텝을 밟는다
어떤 침묵은 눈꺼풀을 깜박여야 진심을 안다
망막에 가는 실처럼 엉킨 빛
스킨 향 잔뜩 품고
열리다 바로 닫힌 실루엣이 붉은 점으로 반사된다
인상과 인상 사이에 번진 주문
부재 속에서 기웃거리던 바람의 목록들
악몽은 내내 위엄을 고수하였지만
앙금 없는 눈물로 닫힌 울타리를 텄다
밤새 그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만세처럼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