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 치하에서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인한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유대 땅은 광범위하게 헬레니즘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지만, 안티오쿠스 4세와 대제사장인 야손(요수아를 헬라식 이름으로 바꿈)과 메네라우스에 의해서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의식은 이교도의 우상숭배의 자리로 대체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참람한 상황들을 말세 전에 나타나는 징조로 보았다. 에드워드 로제 지음, 박창건 옮김의 『신약성서배경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를 타자 쳐서 올린다.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Antiochus) 3세(기원전 223-187)는 첫 번째의 시도를 실패하고 나서 3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팔레스틴을 이집트인들로부터 빼앗는 데 성공하였다. 톨레메우스의 군인들은 퇴각하고 그 땅을 시리아인들에게 양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대인들은 적시에 세력 판도가 시리아인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전쟁 동안에 시리아의 편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후 시리아인들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다. 전투 중에 예루살렘이 입은 전쟁 손해를 복구하려고 하였으며 지금까지의 권리에 보다 더 큰 특권을 받았다. 즉 성전 의식에 드는 비용들은 일정한 한도에 이르기까지 국고에서 지불되었으며, 장로회의의 회원들과 서기관들에게는 면세의 특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적인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시리아를 다스리던 세로이키덴(Seleukiden)은 헬라주의화의 열렬한 대변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헬라주의 문화를 장려함으로써 나라 안에 있는 여러 다른 민족들을 밀접하게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광범위한 유대인회는 이러한 정책에 대립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사제권에서는 많은 헬라주의화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대제사장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로서 시리아 왕의 법률과 명령이 철저히 시행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또한 부과된 세금을 정확히 거둬들이는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인들이 돈을 더 많이 거둬들이려고 할 때 그들은 대제사장에게 그 문제를 부탁하곤 하였다. 기원전 175년에 안티오쿠스 4세가 시리아의 통치권을 계승하였을 때 예루살렘에는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사람 오니아스(Onias)가 대제사장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사제들 사이에 반대자들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의 동생 요수아(Josua)와 헬라주의화의 추종자들이 그의 반대자였다. 요수아는 그의 이름을 야손(Jason)이라고 희랍식으로 바꾸었으며 세금을 인상하여 거둬들인 거액의 금액을 시리아에 바쳤다. 결국 오니아스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아 그 자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대제사장직의 교체가 빼앗긴 측의 항거 없이 이루어졌다. 오니아스는 몇 년 후 안디옥에서 살해되었으며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은 이집트로 도망가서 기원전 160년 경 톨레메우스의 원조로 레온토폴리스에 성전을 세웠다. 이 성전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본을 따라서 희생 의식이 집행되었으며 기원후 7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이 성소의 중요성은 미미하였다. 왜냐하면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 사회 역시 계속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는 야손이 율법의 규정에 상응하게 성전 의식을 집행하였으나 그는 강력하게 헬라주의화를 추진하였다. 운동장이 건설되고 거기에서는 젊은이들이 옷을 벗고 운동을 하였으며 사제들도 거기에 참가하였다. 희랍인들이 할례를 비웃자 유대인들은 할례를 부끄럽게 여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하여 이를 제거하였다(막카베어 I서 1:15). 이는 바울 시대에도 유대인들 사이에 자주 있었던 태도이다(참조, 고전 7:18). 야손이 3년 동안 직무를 수행하였을 때 메네라우스(Menelaus)라는 사람이 예전에 야손이 그렇게 하였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을 시리아 왕에게 주고 야손 대신 대제사장이 되었다. 대제사장의 직위는 매매할 수 있는 정치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동양에서도 군사적 ·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로마인들은 이집트를 다스리는 톨레메우스 왕조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으나 시리아의 안티오쿠스에게는 적대적이었다. 안티오쿠스가 이집트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로마가 그에게 중지하도록 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좌절되어야 했다. 이집트에로의 진군이 실패한 후 예루살렘에서는 안티오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직위에서 쫓겨난 야손이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무력으로 메네라우스를 몰아내고 대제사장직에 즉위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안티오쿠스가 이러한 사건을 알고 매우 분노하여 쳐들어 와서 다시 메네라우스를 복직시켰다. 메네라우스는 시리아 왕의 지지에 의해서만 그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기원전 169년 안티오쿠스가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하였을 때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성전의 값비싼 기물들, 즉 번제 제단과 일곱 촛대 그리고 젯상 등을 안디옥으로 가져갔다(막카베어 I서 1:20-24).
성소에 대하여 행해진 이러한 첫 번째의 만행이 있은 후 곧 두 번째의 더욱 가혹한 침해가 뒤따랐다. 몇몇의 저항에 부딪치기는 했으나 확고하게 기반을 구축했던 예루살렘과 유대의 헬라주의화는 이제는 강제로 시행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유대인 공동체의 독자적인 생활은 끝장이 났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졌으며 옛 다윗 도시의 언덕 위에는 폭군의 성(Akra)이 세워졌다. 안식일을 지키고 자녀들에게 할례를 베푸는 행위가 유대인에게 사형의 협박으로 금지되었다. 왕의 감독관들이 이러한 명령이 준수되고 있는지를 감시하기 위하여 나라 곳곳에 파견되었다. 예루살렘의 번제 제단이 있던 자리에 이교도의 제단이 세워졌고 거기에서 최고의 신, 즉 올림피아의 제우스에게 희생 제물이 드려졌다 (기원전 167년). 또한 돼지들이 희생 제물로서 봉헌되었다. 희랍인들이 이러한 행위를 모든 의식(儀式)에서는 궁극적으로 한 분 하나님이 경배 받게 된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야웨의 이름이 불려지든지 하늘의 바알이나 제우스가 불려지든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소의 모독은 비참한 폐허의 전율을 의미하였다(참조, 단 11:31, 12:11). 이러한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때의 표징을 보았으며 그 이후에도 언제나 이 시대의 종말에 바로 앞서 드러나는 사건으로서의 폐허의 전율을 말했다(막 13:14). 이러한 과정들로 인하여 매우 위험한 위기가 유대교에 닥쳐와서 유대교가 끝장이 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선조들의 신앙을 버릴 수는 없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곤궁에 빠진 공동체에 대하여 위로하는 책으로 기록되었다. 여기에는 박해와 고난이 하나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곧 종말이 와야 하는 마지막 때의 표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복종을 거부하고 기꺼이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였다 (막카베어 Ⅱ서 7장).
지방의 주민들은 헬라주의 문화와 문명에 스스로를 개방하였던 많은 도시인들 보다 더욱 집요하게 선조들의 신앙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시리아 정책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릿다에서 멀지 않은 모데인(Modei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돌발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외국 지배권에 대한 봉기가 불붙었다. 왕의 감독관들은 이곳에 와서도 유대인들에게 이방 제물을 봉헌하도록 강요하자 마타디아스라는 늙은 제사장-그들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하스모네어(Hasmonäer)라고 불리는 가문의 가장(家長)이 제단 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려고 준비하던 한 유대인을 죽이고 희생 제물을 드리도록 강요했던 왕의 관리도 쳐죽여버렸다. 이 행위가 커다란 소란을 야기시켰다.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도망하여 유다 광야의 산골 속으로 숨어야 했다(막카베어 Ⅰ서 1:15–28). 여기에서 투쟁의 의지에 불타는 유대인 군중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모여 들었다. 처음에는 광야에서 여기저기 나타나 나라 안 도처에 세워졌던 이방 신전을 파괴하거나 배교한 유대인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군사 행동을 하였다. 그 후 얼마 뒤에 늙은 제사장 마타디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가 전사(戰士)들의 지휘권을 이어 받았다. 그는 별명을 “막카베어”(Makkabäer)라고 하였다. 막카베어는 “망치와 같은 자”를 뜻하는 듯하다(아람어의 makkaba는 망치를 뜻한다). 그는 유능한 투사로서 그의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적들로부터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더 이상 소규모의 게릴라 활동이나 습격을 못하게 하고 시리아에 대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므로 시리아인들은 방어하기에 급급하였다. 동방에서 파르테르(Parther) 유목민과 전투를 하고 있던 안티오쿠스 왕은 그의 장군 리시아스(Lysias)를 팔레스틴으로 보냈다. 유다는 그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시리아인들을 쳐부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개선 입성하여 더렵혀진 성소를 탈환하고 율법의 규정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였다. 기원전 164년 키스레브(12월) 25일에 제단이 새롭게 봉헌되고 일주일 동안의 축제로써 율법에 합당하게 예배가 다시 드려졌다. 이때부터 유대교는 매년 성전 봉헌(히브리어: 하눅카, 요 10:22 참조) 축제에서 이 사건을 기억하며 암흑과 어둠이 빛에게 쫓겨나야 한다는 표징으로 등불에 점화를 해야만 한다.
첫댓글 에드워드 로제는 2016년 이후 판에 에두아르트 로제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신약학에서 나름 성과를 보인 학자로 보입니다.
외국어 표기 때문에 영어를 독일어 식으로 표기만 해도 상당히 낯설어지는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안티오쿠스3세
안티오코스 3세 대왕(그리스어: Ἀντίoχoς Μέγας, 기원전 241년경 ~ 기원전 187년, 재위 기원전 222년 ~ 기원전 187년)은 셀레우코스 2세의 차남로 기원전 223년에 약 18세의 나이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6번째 임금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안티오코스는 야심찬 군주였다. 초기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 전쟁을 벌이다 패하였으나, 이후에 안티오코스는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이후 가장 성공적인 군주임을 입증하였다. 자신의 이름에 붙는 전통적인 표현인 '메가스'(Μέγας, '위대한')은 동방 정복 이후에 붙은 별명이었다. 또 코엘레 시리아를 정복한 뒤에는 전통적인 페르시아의 군주 칭호인 "대왕"(Βασιλεύς Μέγας)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그리스인이지만 페르시아를 지배한 것이군요. 그리스가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기에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베 그렇군요. 공감합니다.
본문의 세로이키덴은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보입니다. 이 제국의 6대 임금이 본문에 나오는 안티오쿠스 3세입니다.
셀류시드라고 쓰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고유명사는 외래어 표기가 제각각이라 독자들이 조금 불편한 것 같습니다.
네. 흔히 영어식으로는 셀류코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코람데오 네, 알겠습니다. 좋은 포스팅 올려 주셨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에는 기원전 323년부터 기원전 60년까지 30명의 왕이 있었다. 이 통치기 동안 지배계층은 헬레니즘 문화와 풍습을 잘 계승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을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꽃피웠다. 하지만 관용을 베풀어서 수많은 호평을 받았던 아케메네스 왕조와는 다르게 심각할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해서, 피지배계층의 문화를 탄압하고 그리스화(化)만을 강요해서 피지배민족과 잦은 갈등과 반란 진압을 겪어야 했고 날이 갈수록 제국의 동방 지배는 약해져 갔다.
제국의 6대 왕인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자주 해외 원정을 벌였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및 마우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했으나 파르티아 등 제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동방 민족들을 상대로 원정을 벌여 승리해 많은 영토를 회복하였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의 재대결에서도 승리해 우위를 확립했다. 그러나 제국이 다시 살아날 무렵 안티오코스 대왕은 로마과 충돌했고, 3번의 전투 끝에 완전히 패하면서 제국의 군사력과 패권이 사라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안티오코스 대왕이 동방 재원정 중 암살당해 제국은 더욱 위기에 빠졌다.
이후 제국은 끝없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8대 왕인 안티오코스 4세는 제국의 재확장을 꾀했으나 로마의 견제에 계속 가로막혔고, 지나친 그리스주의 정책으로 유대인들이 독립 전쟁을 벌여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우는 등 영토는 계속 줄어들었다.
결국 동방에서 강성해지던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동방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시리아만을 가진 소왕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후 대다수의 왕들이 살해당하는 혼란기가 찾아왔고, 결국 기원전 1세기에 로마에게 합병당해 멸망했다.
왕으로는 셀레우코스 1~7세, 안티오코스 1~13세, 알렉산드로스 발라스, 알렉산드로 2세 자비나스, 데메트리오스 2세 등이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5%80%EB%A0%88%EC%9A%B0%EC%BD%94%EC%8A%A4_%EC%A0%9C%EA%B5%AD
@장코뱅 포스팅 된 본문과 함께 읽으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장코뱅 보충자료를 올려주셔서 더 폭넓게 역사 공부가 되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본문의 모데인 지명이 천주교 성경과 공동번역에는 등장을 합니다. 안티오파쿠스도 나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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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베오상 2:15
안티오쿠스 왕은 유다인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이교 제사를 드리게 하려고 자기 부하들을 모데인 시로 보냈다.
마카베오상 2:23
마따디아의 말이 끝났을 때 어떤 유다인 한 사람이 나와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왕명대로 모데인 제단에다 희생제물을 드리려 했다.
이게 흔히 말하는 외경이군요. 역사 공부할 때는 참조할 부분이 조금 있는 것 같아요.
본문의 국명 하스모네어는 위키백과에 하슈모나이 왕국으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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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슈모나이 왕국(히브리어: חַשְׁמוֹנַּאִים, Ḥashmona'im) 또는 하스모니안 왕국(라틴어: Hasmonean)은 고대 유다 지방과 주변 지역의 지배 국가였다. 기원전 140년과 기원전 116년 사이에 셀레우코스 제국은 유대인들을 반식민지 상태로 통치했다. 기원전 110년부터 셀레우코스 제국이 해체되면서 왕조는 완전히 독립하여 사마리아, 갈릴레아, 이투레아, 페레아, 이두메아 등의 인접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 시기를 이스라엘 독립 왕조 시기라고 부른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C%8A%88%EB%AA%A8%EB%82%98%EC%9D%B4_%EC%99%95%EA%B5%AD
묘하게 다른 지명, 국명을 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신교가 외경으로 보는 마카베오기에 나오는 시몬 마카베오에 대한 소개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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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마카베오(히브리어: שמעון התרסי)는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정경으로 분류하고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하는 마카베오기 상권과 하권에 등장하는 헬레니즘 시대 유대인들의 4대 저항 지도자이다. 전 유대인의 저항 지도자 마타티아스의 아들로 그의 형 유다 마카베오, 요나단과 함께 오랫동안 이민족들과 전쟁을 치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AA%AC_%EB%A7%88%EC%B9%B4%EB%B2%A0%EC%98%A4
나름 유대인 사이에서는 영웅이겠어요. 첨부 링크 잘 읽었습니다.
이번에도 좋은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