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그역사를 찾아]16.친일 매국노된 동학 지도자, 이용구
경기일보 입력 2014-06-15 오후 3:10
애국을 가장한 ‘민족 배반’… 일제에 농락당한 ‘바보’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이완용(李完用)’이라고 답할 것이다. 개인의 출세를 위해 조국을 팽개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을사늑약(1905)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1910)에 서명한 이완용을 매국노의 대명사로 일컫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이완용은 ‘가장 고마운’ 한국인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일본에서 이완용만큼이나 고맙게 생각하고 인지도가 높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이용구(李容九)라는 인물이다.
동학 지도자로 포교에 힘쓰다
이용구는 186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름은 검암ㆍ우필ㆍ상옥ㆍ만식 등으로 불리다가 30대 후반에 이르러 용구로 개명하였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하여 이사를 자주 하였는데, 안성ㆍ직산(지금의 천안)ㆍ청안(지금의 괴산)ㆍ충주 등을 전전하였다. 또한 한때 학문에 뜻을 두기도 하였으나, 조부와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그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충주군 외서면 황산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던 이용구는 23세(1890년) 때 동학에 들어감으로써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았으며, 3년 동안 10만명에게 포교하는 등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1893년에는 이천군수와 토호가 동학교도를 탄압하자 교인 수천 명을 이끌고 항의한 끝에 붙잡힌 교인을 석방시키고, 빼앗긴 재산도 돌려받게 하였다. 또한 이듬해 9월에 최시형의 총궐기 명령이 내려졌을 때 이용구는 손천민과 함께 청주에서 동학군을 일으켰다.
손병희가 총지휘하는 북접(호서군)의 동학군 부대에서 이용구는 우익(右翼)을 맡았고, 이들은 괴산ㆍ보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이용구 부대는 충주∼괴산∼청주∼보은∼은진을 거쳐 논산에서 남접(호남군)의 전봉준 부대와 만났다. 수만명에 달하는 동학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지만 훈련이나 전투장비에서는 관군ㆍ일본군을 당하지 못하였다.
결국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전봉준은 쫓기다가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한편 이용구는 공주 봉황산전투에서 오른쪽 허벅지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었고, 계속 패주한 끝에 동학군을 해산하고 충주로 피신하였다. 1898년 체포되어 4개월간 이천감옥에서 복역하였으며, 최시형 사후에는 황해ㆍ평안ㆍ함경 등 주로 북쪽 지방을 순회하면서 동학 포교에 앞장섰다.
동학에서 이탈하여 시천교를 만들다
1900년 동학 제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동학교도의 재수습에 나서는 한편 동학을 세계에 알리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이듬해 피신을 겸하여 세상의 대세를 살펴보고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손병희와 동행했던 이용구는 손병희의 명을 받고 먼저 귀국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러일전쟁(1904)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이용구에게 운영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동학농민전쟁을 겪은 바 있는 조선정부는 진보회가 동학세력임을 간파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강력히 탄압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송병준이 친일단체를 조직하라는 일제의 밀명을 받고 귀국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었다.
이렇게 되니 이용구의 진보회와 송병준의 일진회는 서로 상충되는 고민이 생겨났다. 즉 진보회는 자칭 1백만의 회원을 거느렸다지만 국가에서 금지한 동학조직이었고, 일진회는 일제의 보호와 지원을 받는 조직임에도 전국적인 기반이 없는 실정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용구는 당당히 세상에 나오기 위해, 송병준은 지방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용구와 송병준의 협상 내지 의기투합은 쉽게 이루어졌다. “정부가 동학세력을 소탕하려는 마당에 진보회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일진회와 합치는 수밖에 없다”는 송병준의 제안에 이용구가 망설이지 않고 응하였다. 진보회는 일진회에 흡수되었고, 이용구는 처음에 지방회원 통솔을 위한 13도 지방총회장에 임명되었다가 1년 뒤에는 일진회 회장이 되었다.
이용구가 일제에 매수되어 친일 앞잡이가 되자 손병희는 동학교도의 재조직에 착수하여 1905년 12월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는 동시에 이용구 등 동학 지도자 62명에게 출교처분을 내렸다. 이에 이용구는 1906년에 동학에서 분리하여 시천교(侍天敎)를 창시하였다.
일진회장으로서 친일 매국에 앞장서다
일진회는 일본군 북진을 위한 수송대 조직, 러시아군 비밀 정탐,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 무보수 동원 등 노골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섰다. 또한 을사늑약 체결 직전에는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일진회원들의 방자한 행동과 망언은 국민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이는 일진회원 구타ㆍ감금ㆍ살해 및 사무소 습격사건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던 중 1907년에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났다. 평소 고종이 재위하고 있는 동안에는 한일 병합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일제는 이 사건을 고종을 물러나게 할 좋은 기회로 여겼다. 일제의 압력을 받은 이완용ㆍ송병준은 고종이 특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강요하였고, 일진회원들은 궁궐 밖에서 고종의 양위를 촉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국 고종이 물러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에 따라 한국군대가 강제 해산된 것을 계기로 전국적인 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 일진회는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하여 의병진압에 나서는 반민족적 행위에 앞장섬으로써 일진회원은 일본인 이상으로 의병의 표적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1907년 7월부터 10개월간 의병으로부터 입은 일진회 회원의 피해는 사망 9천260명, 부상 140명, 불탄 가옥 360호, 재산 손해 5만501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제는 의병항쟁을 한국 병합의 마지막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1909년부터 호남지역을 시작으로 무자비한 ‘남한대토벌작전’(의병 진압)을 감행하였다. 그런 다음 병합을 계획대로 추진하면서 외형적으로는 한국인이 청원하는 형태를 빌어 ‘합방’의 명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 역할을 한 것도 역시 일진회였다. 일진회는 합방상주문ㆍ합방청원서를 이용구와 1백만 회원의 이름으로 고종ㆍ이완용ㆍ조선통감에게 제출하고, 성명서는 국민에게 발표하였다.
‘우리 민족을 가엽게 여겨 일제의 무궁한 은혜를 입도록 해줄 것을 머리 숙여 소원합니다’라는 일진회의 망언과 망동은 당연히 국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용구는 자객을 두려워하여 하루 저녁에 세 번이나 잠자리를 옮기거나 일본인 상점에 숨어 지내야만 하였다. 심지어 동경에 유학하던 학생이 이용구를 암살하러 귀국했다가 체포되는 일도 일어났다. 그 와중에서도 이용구는 몇몇 단체를 매수하여 일진회의 합방성명을 지지하도록 사주하는 등 반민족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일제에 농락당한 ‘바보’, 쓸쓸히 지다
이용구는 ‘합방’ 후 일진회 회원을 간도에 이주시켜 집단 정착지를 마련함으로써 장차 만주와 몽골 침략을 위한 첨병 역할을 자청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회원 이주비용으로 300만원을 요구하였고, 일제는 1천만원도 흔쾌히 주겠노라고 약속했지만 ‘합방’ 후 일제가 준 것은 이용구에게 은사금 10만원, 조직 해산비용 15만원이 전부였다. 일제 입장에서 이용구나 일진회의 존재는 애초에 관심대상 밖이었다. 다만 ‘합방’을 한국인에 의한 청원으로 위장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하고 이용했을 뿐이다.
이용구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처참하였다. 일본 고베에서 1년 넘게 폐질환으로 요양하던 그는 오랜 친구 송병준을 만나도 누운 채로 손을 내밀어 악수할 힘도 없었고, 양쪽 볼은 깎은 듯하였으며, 끓어오르는 가래를 능히 뱉을 기운조차 없고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그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갔고, 유언에 따라 한 조각 연기로 흩어졌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한때 외세 배척을 부르짖었던 동학 지도자 이용구가 거꾸로 외세(일제)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도록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이용구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이 일제에 농락당한 ‘바보’였음을 토로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결코 사리사욕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한국과 일본이 ‘동등하게’ 병합하는 것을 주장했는데, 일제가 배신했다고 항변하고 있다.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그는 애국을 가장하여 민족을 배반하였다. ‘매국노’ 이용구의 삶은 우리에게 올바른 가치를 저버리고 현실의 권력을 좇는 순간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절실히 깨닫게 해준다.
김명우(문학박사, 경기문화재단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