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인 시내버스다. 차가 멈출 때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소리가 크다. 두 정거장 지나서 또 들린다. 기사 아저씨다. 그는 차에 오르내리는 사람을 향해 매번 깍듯이 인사한다. 승객들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라고 회답하지만, 묵묵부답인 사람들이 많다. 바빠서 혹은 귀찮아서 일 것이다. 그럴수록 그는 더 목청을 높인다. 종일 운전하는 것도 힘들 텐테 손님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안쓰럽다.
목욕탕에 다녀온 남편의 입이 벙글해졌다. 옆에 앉은 젊은이가 마음대로 등밀이가 되지 않아 끙끙거리더란다. 보기가 딱해 “좀 밀어줄까?” 했더니 “그래주면 고맙지요, 제가 먼저 씻어 드릴게요.”했다. 자신은 밀었다 하고 그의 등을 씻어 주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다 입어 갈 즈음 젊은이가 급하게 뛰어나오더니 “어르신 고맙습니다.” 하면서 음료수를 사서 내밀었다. 남편은 목욕탕에 가서 때만 씻은 게 아니라 마음의 먼지까지 다 비우고 왔다고 했다.
오래전 은행에 갔을 때다. 창구 앞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차례가 오지 않아서 살폈더니, 오는 이마다 기계에서 번호표를 뺐다. 그제야 일어나 표를 뽑자 뒤에 앉은 청년이 “일찍 오셨는데 늦게 온 제가 뒷번호를 가져야지요.” 하면서 바꾸자고 했다. 창피스러워서 손사래를 쳐도 기어이 떠미는 통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촌의 튼실한 나무를 떠오르게 하는 멋진 청년이었다.
친구들과 무궁화 열차를 타고 경주에 갔을 때도 잊지 못한다. 역 건너편 성동시장에 갔더니 특이한 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반찬들을 수북이 담아 놓은 시장 뷔페였다. 예전의 엄마 손맛과 비슷해 친정에 온 듯 실컷 먹었다. 안압지와 반월성과 첨성대를 거쳐 천마총을 두루 살핀 후 역으로 오니 아직 기차 시간이 멀었다. 다시 시장으로 가서 구경하다 깨끗한 산나물을 한 봉지씩 사 들고 와서 대합실에 앉았다. 열차를 기다리며 담소 중인데 뒷자리의 낯선 아낙이 다가왔다. 우리가 들고 있는 봄나물을 자기도 사고 싶단다. 시장에 다녀오려니 짐이 많아서 힘들다며 잠깐 맡아주었으면 한다. 이곳이 내 고향이라 이웃을 만난 듯, 선 듯 그러라고 했다.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산나물 봉지 외에도 생수 한 병이 들려 있었다. 갑갑하던 참에 넷이서 시원하게 들이켰다.
우리는 바쁜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각자 처한 환경에 따라 꿈을 꾼다. 태어나 몇 해만 지나면 어린이집을 시작으로 이곳저곳의 학원에 보내진다. 학교에 들어가면 여러 과외 수업까지 받으며 공부와 시험에 매달려야 한다. 놀이나 취미는 뒷전이고 지식을 익히는 인간 기계가 돼 버린다. 취업할 때가 되면 안정된 직장 구하기에, 취직이 되면 업무와 승진에 온 힘을 쏟는다. 아니 강요받는다는 게 맞을 것이다. 사방이 해야 할 일들로 꽉 차서 정신이 없다. 그러니 평소에 좋아하던 취미생활이나 자기계발은 부담이 되기도 한다.
녹록지 않은 삶이다. 빠른 자는 추월하려 들고, 느린 사람은 가로막으려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남의 잘못으로 요행수를 바라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많아서일까, 휘게(Hygge)라는 생활방식이 관심을 받고 있다. 덴마크어로 안락함을 뜻하며 소소한 행복을 말한다.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혼자서 순간의 편안함을 만끽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누거나 밥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다 서로를 챙기는 것도 아늑한 삶이다. 목련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맑을 것이고, 장미 향 머금고 대한 현실은 향기로울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듣는 것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잊는 것 같지만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앞의 온갖 대상들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마음으로 기다리면 노력의 결과가 꿈꾸는 삶 속으로 들어온다.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가끔 퇴색된 추억들을 떠올려 본다. 어렸을 때 개울에서 멱 감던 일과 낯설던 초등학교 입학식, 동무들과 걷던 먼지 날리는 신작로…, 이것들은 마음의 고향이라 평안을 느끼게 한다. 가식 없는 이야기가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목욕탕에서 음료수를 대접하던 젊은이, 은행에서 차례를 챙겨주던 청년, 처음 본 사람을 믿고 짐을 맡기던 아주머니를 생각하니 사람의 향기가 마음속까지 스며든다.
버스에서 내리며 기사 아저씨에게 곰살갑게 인사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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