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송정마을 광산노씨 경평공파 문중을 찾아서
광산노씨(光山盧氏) 시조 노수(盧穗)의 첫째 아들 노해(盧垓)는 당나라에서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신라로 와서 광산백(光山伯)에 봉하여졌다. 후손들이 중시조 노서(盧恕)를 계통으로 광산노씨 세계를 이어왔다.
노서의 후손은 노숭(경평공)의 다섯 아들을 파조로 하여 분파되었는데, 큰아들 노상인은 양근공파, 둘째 아들 노상의는 참의공파, 셋째 아들 노상례는 사간공파, 넷째 아들 노상지는 경력공파, 다섯째 아들 노상신은 판관공파 파조가 되었다.
송정마을은 동래·양산·울산으로 통하는 큰 길목에 있어, 계곡의 노송과 팽나무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정자나무가 되고, 점차 정자나무 아래로 주막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인접한 고을의 관원들이 배웅을 할 때 이 정자나무까지와 배웅을 하였다고 전한다. 또는 광산노씨 문중에서 완만한 백사장이 내려다보이고 해송림이 울창한 언덕에 송호재(지금의 보라카이모텔 일대)를 지은 것에서 연유한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대학자이자 좌, 우, 영의정을 역임한 정치가 노수신(盧守愼)이 을사사화에 휩쓸려 1547년(명종 2) 파직되고 순천 진도로 귀양을 갔다. 사색당파 싸움에 언제 멸문을 당할지 몰라 노수신의 두 가족과 동생 노극신 가족 등 종족을 보존하기 위하여 1690년경 경상북도 상주 화녕에서 울산 서생으로 이주하였다. 1700년경 노극신의 손자 노사원이 울산 서생에서 기장현(송정)으로 이거하여 광산 노씨 대재공파 송정 입향조가 되었다. 노수신의 후손 노영경(1845~1929)은 1877년(고종 14) 문과별시에 급제하여 경주 부윤, 울산 부사 겸 병마절도사, 좌부승지를 역임하고 1905년(고종 42) 향리로 돌아와 송정에 송호재를 짓고 경학에 전심하였다.
노영경은 선조(宣祖) 대에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盧守愼)의 후손으로 어머니는 김성구(金聖玖)의 딸이다. 노영경(盧泳敬)은 동래 출신으로, 1877년(고종 14)에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기주관(記注官)으로서 임금을 호위하여 궁 후원(後苑)으로 모셨고, 왕명을 받들어 반란 군졸들을 설득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임금이 환궁할 때는 홍문관 부교리로서 호위하였다.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고, 1888년(고종 25) 안변 부사로 나갔다. 1890년(고종 27) 경주 부윤으로 옮겼으며, 1892년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었다. 그해 가의대부 특진관(嘉義大夫特進官)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후 여러 차례 조약을 폐기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고향에 내려가 은거하며 경학(經學) 연구에 몰두하였다. 공은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작위를 거절했다. 그리고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전 노무현재단 유시민(柳時敏)이사장이 공의 외고손이다.
지금도 송정마을에는 광산노씨가 살고 있다. 송정마을 조상 산소는 동부산 관광 단지 부지로 편입되어 서생 선영 도산소로 하린 하수 상원 식문 흥문 광묵 선조 내외가 이장되었고, 광오 선조의 일파는 반송 실로암 공원묘지에 선유당(납골당)을 조성하여 영위를 모시고 있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