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렁구시렁
볕은 아직 한창인데 제법 차가운 비가 내리니 거리 경치에 한기가 든다.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예보가 있는 으스스한 오후나 반쯤 개어가는 연회색 하늘을 인 풍경들이 담겨있는 오늘 같은 날들을
나는 참 좋아한다.
날씨의 맛에 취하여 한참을 넋 놓고 있노라니 쇼윈도 밖으로 온몸을 목발에 의지하며 한 여인이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한발자국 옮길 때마다 겉보기에도 두 다리에 힘이 전혀 없어 보인다.
문득, 바닥에 내려앉았다가는 자력으로 일어설 수 없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도 많이 보이고 또 위생상 권장하기도 하는 쪼그려 앉는 변기는 무용지물이 아닌가, 만약 긴박한 상황이라도 맞닥트리면 어떻게?...
지은 죄 없이 고통만 깔린 로드킬 장면에서 차마 고개를 돌려 버리듯 그 여인에게서도 재빨리 시선을 떼어내기는 했지만 몰라서 모르고 사는 희비 서린 삶의 현장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해가 지고 난 후에 저 멋진 구름은 보이지 않아 보는 이 없는데 어떤 모양을 만드는 낙으로 존재의 의미를 품으려나?
튼실한 몸통에 생으로 구멍을 뚫어 노란색 영양제 병을 꼽고 가는 시청 직원을 가로수 플라타너스는 고마워할까?
연분홍 카페의 출입문 틈새로 피어난 들꽃보다 더 작은 들꽃아.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코스모스가 양탄자처럼 깔린 언덕에 홀로 피어난 찔레 장미 한 송이의 뒤늦은 사연은 무엇일까?
봄 언덕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진달래 한 송이를 차마 꺾어 들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은 소중하며 존재의 의미는 각각 지대할진대, 우리는 대체로 우리와 나만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불공평하고 죄스럽기 때문이다.
컴퓨터 위에서 윙윙대는 왕파리 한 마리를 파리채로 때려잡고 보니 오글오글 애벌레가 기어 나온다. 작게 몸서리치며 쓸어내 버리려는데 내 귀로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여보, 나 이번만 다녀와서 아기 낳을 테니 준비하고 있어요’.
‘조심해서 다녀오구려, 요즘 사람들은 인정머리가 없어서 임산부도 안 봐준다니깐, 특히 파리채를 조심해요.’
어디서 읽었을까?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인다는 한 줄 글이 떠오르며 심란해진다.
키 큰 사람은 작은이의 눌린 아픔을 모른다. 반대로 키 작은이는 크다는 이유 하나로 서늘한 설움을 모른다. 남자는 여자를 모르고 여자는 남자를 모른다. 몸이 고된 식당 사장님은 한가로워 보이는 꽃집 주인을 부러워하고, 꽃집 사장님은 돈이 되는 식당 주인을 부러워한다. 맏이는 책임감 없을 막내를 부러워하고 막내는 대우받는 맏이를 부러워하듯이 우리는 모르고 사는 것이 너무나 많기에 늘 부러워하며 늘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진정 무엇으로 행복해해야 하나? 나름대로 답안지를 작성해보자면 자기 위주의 생각 주머니를 홀라당 뒤집어 안과 밖을 바꿔보는 것이다. 어느 신부님이 그러셨다든가, 제사상에 숟가락을 내 앞으로 돌려놓으라고 하셨듯이 누구든 언제까지 어디까지 견주어 이길 수만은 없다. 어려운 상황들을 대할 때마다 물질로 힘으로 정신으로 거들어, 그 보람으로 그 뿌듯함으로 그 땀으로 내주머니를 채워 행복해하는 것이 정도(正道)가 아닐까 싶다.
만만찮은 나이임에도 가끔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생각이 외길로 빠져들 때가 있다. 한껏 돌려놨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탄성은 믿을만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이래서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면 거리를 서성이는 이들이 많은가 보다. 오늘도 빗소리가 온종일 들려온다는 이유로 심하게 유체이탈 되어 있던 싸이코성 넋을 불러들이면 스르르 수더분한 주부로 되돌아온다. 그리곤 곧바로 ‘상관없는 것에 무심하지 않기’ 다짐하나를 수확하고 주방으로 바삐 달려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