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장 黑夜의 血戰
정말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어둠 속에 우뚝 솟아있는 산봉우리는 마치 시커먼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듯 했다.
울퉁불퉁한 기암괴석도 시커멓게 먹칠을 한 듯하고 여기저기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나무들도 검은 색으로 물들어 불어오는 밤바람에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짙은 먹구름이 덮쳐 내릴 듯한 하늘에는 한 점 별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돌연-
"으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바위 뒤에서 한 줄기 시뻘건 선혈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선혈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뒤이어 우악스런 체구의 사나이 한 명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사나이는 허공에서 두 바퀴나 돌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곤두 박혔다. 한차례 경련을 일으킨 사나이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사나이의 머리통은 땅에 곤두 박히는 바람에 골통이 으스러져 붉은 선혈이 땅바닥을 적셨다. 정녕 눈뜨고는 보지 못할 처절한 광경이었다.
이때 다시 한 줄기의 인영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마치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날아가 어느 거칠게 생긴 바위에 머리를 박고 떨어졌다. 동시에 끔찍한 비명소리가 조용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크아악!"
검붉은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바위에 머리를 박고 떨어진 사나이가 사지를 버둥거리며 죽어버리자 주위는 다시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자세히 보니 방금 한 사나이가 머리를 박고 처참하게 죽은 그 바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앉은 곳에 검은 장삼을 입은 음험하고 냉혹하게 생긴 일곱 명의 중년인이 반원형을 이루고 둘러 서 있었다.
중년인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공간에는 황색(黃色) 옷을 입은 한 사나이가 옷자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산악 같은 기세로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선비들이 흔히 입는 황색 유삼(儒衫)으로, 고상하고 우아한 기질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가을 호수같이 밝고도 시원한 눈, 알맞게 우뚝 솟은 콧날과 굳게 다문 입. 키는 훤칠했고, 체격은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아 빠르고 민첩해 보였다.
황삼인을 보고 있으면 임풍옥수(臨風玉樹)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일곱 명의 흑의 중년인들은 독수리 같은 예리한 눈빛으로 황삼인을 노려보며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방금 두 사나이가 차례로 피를 뿌리고 처참하게 죽어간 것은 마치 먼 곳에서 발생한 일인 양, 지금 주위는 무섭도록 조용하기만 했다.
돌연, 좌측에 서 있는 흑의인(黑衣人)이 비로소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콧등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가운데 있는 황삼인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팔짱을 낀 채 담담한 미소를 흘리며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을 따름이다.
이때 오른쪽의 한 흑의인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부릅뜨고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쳐라!"
그러자 왼쪽의 흑의인이 돌연 이를 악물고는 황삼인을 향해 산도 무너뜨릴 듯한 장력(掌力)을 격출하는 것이 아닌가?
꽈릉!
그의 이 갑작스런 동작이 시작되자 나머지 여섯 명도 일제히 공세를 발휘하여 황삼인을 향해 덮쳐갔다.
"으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밤하늘의 적막을 깨뜨리고 울려 퍼졌다.
먼저 덤벼들었던 흑의인의 몸뚱이가 줄이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커다란 바위에 몸을 처박고 쓰러져 시체로 변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에 또 황삼인에게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다시 장내의 형세는 아까대로 회복되어 흑의인들은 반원형을 형성하며 황삼인을 포위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여섯 명밖에 되지 않아 어딘가 허술한 데가 있었다.
황삼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은 하늘이 무너져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한 무관심이 뚜렷이 엿보였다.
잠시 살벌한 가운데 무거운 침묵이 흘러갔다.
"이얏!"
다시 한 명의 흑의인이 용기를 내어 공격을 했다가 어처구니없게도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쓰러져 사지를 뻗고 버둥거렸다.
이로써 흑의인은 다섯 명으로 줄어들었다.
흑의인들의 두목은 아마도 그 애꾸눈의 중년 사나이인 것 같았다.
애꾸눈의 사나이는 얼굴이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도록 깡말랐고 눈썹은 숱이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적었다. 더구나 입술을 달싹거릴 때마다 두 개의 뻐드렁니가 보기 싫게 드러났다.
그의 하나 남은 왼쪽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어 그가 극도로 분노해 있음을 어렵지 않고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전개한 방식대로라면 이번에는 역시 맨 좌측에 있는 텁석부리 사나이가 공격할 차례였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입술을 꼭 다문 채 눈에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망설임의 빛을 띤 채 움직일 줄 몰랐다.
황삼객은 조용히 그 탑삭부리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애꾸눈도 악이 받친 독사 같은 눈으로 그 사나이를 노려보자, 텁석부리 사나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몸을 움찔했다. 돌연,
"이야압!"
텁석부리의 사나이는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몸을 꺾으며 묘한 자세로 황삼객을 향해 매섭게 덮쳐갔다.
황삼객은 차갑게 웃더니 나머지 네 명이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두 손을 뒤집어 맹렬히 떨쳐냈다.
순간, 사나운 기세로 덮쳐가던 텁석부리 사나이는 앞서 죽어간 동료들과 같이 실이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가 피를 뿌리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또 한 생명이 황삼인의 손아래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제 남은 사람은 네 명.
그 인원으로는 다시 반원형의 포위 태세를 갖출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렬로 선 채 비지땀을 흘리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의 눈에는 놀라움과 절망의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황삼인은 옷소매를 가볍게 떨치며 구름이 잔뜩 낀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모습은 흡사 가을날 창연한 하늘을 바라보며 시상(詩想)에 잠긴 유생(儒生)같았다.
하나 그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순간, 인영이 번쩍이며 다시 한 사람이 솟구쳐 덮쳐왔다. 때를 같이하여 나머지 세 사람도 제각기 다른 각도에서 공격을 가해왔다.
제일 먼저 덮쳐든 사나이가 피를 뿌리며 뒤로 날아가는 동시에 황삼인의 장세(掌勢)는 여전히 나머지 세사람을 노리고 날아갔다.
쿠루룽!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집어엎을 듯한 무시무시한 장력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몰아치자 세 사람 중 두 사나이는 간신히 황삼인의 장력을 피해서 뒤로 자빠져 물러났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애석하게도 그런 행운을 잡지 못했다.
그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황삼인의 오른손에서 뻗쳐 나온 칼날 같은 장력이 그의 목 줄기를 스쳐가고 있었다.
그저 살짝 스쳤을 뿐이었으나 그의 동맥이 터지며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크아악!"
사나이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것은 실로 눈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황삼인은 아무 일 없었던 양 다시 제 자리에 아까와 같은 자세로 선 채 하늘을 우러러보며 가볍게 탄식을 하는 것이다.
이제 흑의인들은 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애꾸눈과 그의 동료 한 사람은 불쌍하리만치 비통하고 공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애꾸눈과 흑의인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황삼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섯 그루의 고송(古松)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내하산(奈何山)은 정말 처량하고 음산하구나."
그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나직한 울림을 담고 있어 묵직하고 장중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음성을 듣자 흑의인들은 몸을 오싹 떨며 자신들도 모르게 다시 뒤로 세 걸음씩 물러나서는 겁먹은 눈빛으로 황삼인을 주시했다.
황삼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산의 이름은 아무래도 좋지 않아. 두 분은 황천(黃泉)으로 가는 길에 내하교(奈何橋)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애꾸눈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곡철(曲鐵), 넌 정말 악독한 놈이구나!"
황삼인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천만에, 난 악독하지 않소. 사람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자체가 고통이오. 무한한 고통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시 죽는 게 아니겠소?"
애꾸눈의 눈에서 갑자기 흉광이 번쩍이더니 이내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때 황삼인은 칼날 같은 눈썹을 살짝 치키며 몸을 솟구쳐 두 흑의인을 향해 번개같이 덮쳐갔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먼저 공격을 취한 것이었다.
황색 그림자가 유성처럼 허공을 가르는 순간, 애꾸눈과 또 한 명의 뚱뚱한 흑의인은 깜짝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으나 상대방의 몸은 바로 그들의 눈앞에 다가왔다.
두 흑의인은 황급히 좌우로 흩어지며 일제히 쌍장(雙掌)을 후려쳤으나 그들이 공격한 것은 다만 황삼인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그들이 초식을 바꾸기도 전에 황색 그림자가 번쩍였다. 순간,
"아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뚱뚱한 흑의인은 입으로 선혈을 뿜으며 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져 흉악한 형상으로 사지를 뻗고 말았다.
그 처절한 비명소리를 듣자 애꾸눈은 앞뒤 가릴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몸을 솟구쳐 줄행랑을 놓으려 했다.
하나 그때 황삼인은 괴상하게 몸을 회전시키며 솟구치려는 애꾸눈의 두 다리를 절묘하게 낚아채 잡았다. 애꾸눈은 허공에서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 쳤으나 도저히 상대방의 막강한 힘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황삼인은 그의 다리를 뒤로 약간 당겼다가 힘껏 던져버렸다.
쾅!
애꾸눈의 몸뚱이는 낙엽처럼 날아가 커다란 바윗돌에 부딪쳐 피가 사방으로 튀기며 골통이 으스러졌다.
실로 무서우리만큼 독랄하고 절묘한 수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삼인은 순식간에 아홉 명의 흑의인을 모두 처치하고는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숨을 헐떡거리는 애꾸눈 옆으로 걸어갔다.
애꾸눈은 내장이 터져 나오고 머리가 으깨져서 전신이 완전히 피로 물든 채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미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몰골이었다.
황삼인은 핏덩이가 된 애꾸눈을 내려다보며 냉랭하게 내뱉었다.
"고고(古固), 무척 고통스럽지? 그러나 그 고통은 곧 사라질 것이다."
고고라 불리운 애꾸눈은 몸을 심하게 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승에서... 너를 기다리겠다... 권포구룡(圈抱九龍)... 우리 아홉 형제는... 모두 네놈을... 기다리고 있겠다..."
음성의 여운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아직도 감돌고 있건만 말을 내뱉은 사람은 격심한 경련을 일으킨 후 다시는 움직일 줄 몰랐다.
저승으로 가고 만 것이다.
황삼인은 묵묵히 서서 산마루에 우뚝 서 있는 여섯 그루의 고송을 돌아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가을밤은 깊어 온 천지가 쓸쓸하기만 한데, 달도 없는 가을하늘 아래 퉁소소리를 들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슬퍼했다."
이윽고 그는 몸을 날려 산 아래로 향했다.
흡사 한 가닥 담담한 황색무지개처럼 아롱거리며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는 모습은 밤하늘을 가르고 떨어지는 유성(流星)과 같았다.
몇 번인가 어둠 속에서 황색 그림자가 번쩍거리더니 그의 모습은 이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내하산은 여전히 늙은 곰 같은 침침한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산(山)은 생명(生命)의 의미를 모른다. 인간 세상의 비애(悲哀)도 모른다.
인생의 무상함을 모르는 산은 어둠 속에 말없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가벼운 바람에 황색 옷자락을 나부끼며 구름에 달 가듯 천천히 넓은 관도(官道)를 따라가는 한 명의 황삼인이 있었다.
관도 양쪽에는 백양나무가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멋대로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한 줄기의 맑은 개울물이 몇 그루의 버들강아지를 옆으로 끼고 안으로 굽이치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황삼인은 개울 옆에 앉아 조용히 흐르는 개울물을 응시했다.
개울물은 그를 희롱하는지 아니면 위로해 주려는지 물방울을 수면에 만들어내더니 뒤에서 밀려오는 물줄기에 의해 홀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황삼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몽롱한 눈동자에는 꿈을 꾸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 영상이 펼쳐졌다. 그의 낯빛은 아주 차분하고 부드러웠으나, 그 차분한 가운데 은은히 쓸쓸함과 적막함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크윽...!"
돌연 멀지 않은 곳에서 비통에 가득찬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신음소리는 비록 짤막했으나 그 속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억울함과 비통함, 처절한 분노가 담겨 있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게 했다.
황삼인은 즉시 신음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있는 개울가에서 멀지 않은 백양나무 숲속에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서 있었고, 한 사람은 바닥에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신음소리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 사나이는 구레나룻이 자욱했고, 거무틱틱한 피부에 두 눈은 왕방울같이 컸다. 그런데 그의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머리카락은 까치집을 방불케 할 정도로 헝클어져 있었다.
쫘악!
갑자기 싸늘한 음향과 함께 하나의 시커먼 가죽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사나이는 반쯤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그의 등에는 시뻘건 채찍자국이 종횡무진으로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쓰러진 그 사나이의 뒤에는 붉은 홍삼(紅衫)을 입은 이십 대 후반의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아홉 자 가량 됨직한 시커먼 채찍을 쥔 채 흡사 개를 두들겨 패듯 구레나룻 사나이를 채찍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쫘악! 쫙!
그의 채찍을 휘두르는 솜씨는 매우 탁월하여 가볍게 손목만을 이용해서 아주 효과적으로 구레나룻 사나이의 전신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있어다.
구레나룻 사나이는 신음을 토하며 안간힘을 다해 몸을 비틀어 채찍을 피하려 했다. 하나 채찍이 날아오는 속도가 워낙 빠르고 날카로워서 그는 조금도 피하지 못하고 거의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고 있었다.
순식간에 구레나룻 사나이는 전신이 단 한 곳도 상한 데가 없이 유혈낭자하게 변해 버렸다. 그러나 구레나룻 사나이는 이를 악문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홍삼청년은 입을 비쭉거리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네가 언제까지 견디나 보자."
짜짜짝!
홍삼청년은 다시 질풍처럼 손을 휘둘러 눈 깜짝할 새 서른 여섯 번이나 구레나룻 사나이의 몸을 채찍으로 후려쳤다.
구레나룻 사나이는 채찍에 맞을 때마다 온 몸을 세차게 떨며 마구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옷자락은 이미 피로 물들어 걸레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그제서야 홍삼청년은 손을 멈추고 독사같이 차가운 눈으로 구레나룻 사나이를 쏘아보며 냉랭하게 소리쳤다.
"안립(晏立), 도망칠 때는 기세등등하더니 벌써 힘이 다 빠졌느냐?"
구레나룻 사나이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필사적으로 바닥에서 기어 일어나려 했다. 하나 결국 몸을 뒤집은 채 다시 바닥에 눕고 말았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피로 물든 눈으로 홍삼청년을 올려다 보았다.
"위우(魏宇)... 너는 너무 악랄하구나... 과거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네가 나에게 이럴 수는 없다..."
홍삼청년은 싸늘하게 웃으며 음흉하게 말했다.
"흐흐... 안립, 너도 나이 삼십이 넘은 놈으로 쌍룡방(雙龍幇)에서 굴러먹은 지도 십 년이 넘었거늘 배은망덕해도 분수가 있지, 감히 방주(幇主)의 애첩과 사통(私通)을 해? 그러고도 살기를 원하느냐?"
안립이란 사나이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위우는 수중의 채찍을 어루만지며 냉랭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쌍룡방 홍기(紅旗) 직책으로 너를 벌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방에 돌아가면 방주를 배반한 천한 계집과 너를 함께 묶어 불에 태워 죽일 것이다. 자, 어서 일어나라!"
호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채찍이 빗발치듯 텁석부리 사나이 안립의 등에 떨어졌다. 안립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한바탕 뒹굴었다.
바로 이때, 난데없이 싸늘한 음성이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날아들었다.
"당신도 아마 채찍을 맞는 맛이 별로 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위우는 급히 채찍을 거두어들이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예리한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누런 황삼을 입고 키가 훤칠한 사나이 하나가 백양나무 아래 우뚝 선 채 차가운 눈으로 위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위우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눈앞에 나타난 황삼인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인물임을 느꼈다.
위우는 오른 발을 앞으로 내밀고 왼발은 옆으로 벌려 정(丁)자를 취한 후, 두 주먹을 모아 단전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쌍룡방이 바깥사람에게 방의 이름과 내력을 묻는 자세였다.
황삼인은 눈썹을 치키고 차가운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알고 있소. 당신이 쌍룡방의 친구라는 사실을."
위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도 역시 무림 인물 같은데... 그렇다면 쌍룡방의 배신자를 처벌하는 일에 당신이 상관할 필요는 없지 않소?"
황삼인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며 이상한 눈초리로 위우를 쳐다보았다.
"상관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나는 상관해야 되겠소."
위우는 터질 것 같은 분노를 억제하며 싸늘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보아하니 값싼 동정으로 끼어들려 하는 것 같은데, 당신은 당신의 이런 부질없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 알기나 하오?"
황삼인은 앞으로 다가서며 태연하게 말했다.
"알고 있소. 알아도 아주 똑똑히 알고 있소."
위우는 그 자리에 선 채 수중의 검은 채찍을 사납게 떨쳤다.
쉬악!
채찍은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황삼인의 목을 노리고 후려쳐 갔다.
한데 황삼인의 몸이 갑자기 허깨비처럼 그 자리에서 꺼져 버렸다.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그의 몸이 돌연 연기와 같이 사라지자 위우의 채찍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 말았다.
위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정신이 아찔했다.
다음 순간, 그의 채찍을 쥔 손이 갑자기 저려 오는 동시에 허공에서 난데없이 발 하나가 툭 튀어나와 그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퍽!
"큭"
위우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도 못한 채 상대방의 발길질에 채어 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의 채찍은 어느새 황삼인의 수중으로 들어가 있었다.
위우는 쌍룡방의 홍기로서, 일신 공력이 매우 심후했다. 그런데도 황삼인이 도데체 무슨 수법으로 자신의 채찍을 피하며 자신을 쓰러뜨렸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땅에 떨어지자마자 이를 갈아붙이며 맹렬히 진기를 끌어올려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가 몸을 솟구치려는 순간,
휙!
느닷없는 바람소리와 함께 황삼인은 어느 새 다시 그를 걷어차 쓰러뜨렸다. 도무지 피할 수조차 없는 엄청나게 빠른 발길질이었다.
황삼인은 그의 등허리를 짓밟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위우, 돌아가서 너의 두목 삼목수사(三目秀士) 선순(宣順)에게 전해라! 이 사람은 내가 데려 갔다고 말이야."
간신히 고개를 든 위우의 얼굴은 온통 흙투성이었다. 그는 이를 갈며 날카롭게 외쳤다.
"이 졸장부야, 너도 사내라면 썩 이름을 밝혀라!"
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돌연 등어리가 가벼워짐을 느꼈다. 등을 짓밟고 있던 황삼인의 발이 벌써 치워졌던 것이다.
위우는 고개를 들어 황삼인의 종적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나 황삼인의 신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안립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위우가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휘둘러보고 있을 때, 아득히 멀리서 차가우면서도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파도는 일렁이며 구름은 하늘에서 떠돈다. 비바람은 모질고 처량한데 외로이 피어오르는 한 줄기의 연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위우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황룡(黃龍)...? 황룡 곡철...?"
그의 음성은 텅 빈 허공에 외롭게 퍼져나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