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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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 제156굴 남쪽 벽 <장의조출행도> 중 '무악'
장의조가 하서 지역을 수복한 것은 돈황 역사의 큰 사건이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막고굴 제156굴에 거대한 역사화
<장의조출행도張議潮出行圖>(약칭)를 그렸다. 156굴은 사주자사 장회심이 숙부인 장의조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석굴이다.
주실 남쪽 벽과 동쪽 벽의 입구 남측 하단에 걸쳐 그려져 있다. 그림의 전체 길이는 8.2미터, 폭 1.03미터이다. 의장을 갖
추고 출행하는 주제 부분의 길이가 약 6미터다. 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이 모두 114명이고, 말 80마리, 노새 2마리, 낙타
2마리 등이 보이며, 그 외에도 사냥개와 양 등도 있어 출행의 진용이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질서 있게
운행하는 구도는 엄숙하면서도 열렬한 기세를 느끼게 한다. 그림 솜씨도 비범하여 만당 시대 벽화 중 걸작으로 손꼽힌다.
중국회화사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 작품이다.
제156굴 남쪽 벽 <장의조출행도> 중 '정절(旌節)'
막고굴 제156굴 남쪽 벽 <장의조출행도> 중 '장의조'
막고굴 제156굴 북쪽 벽 <송국부인출행도> 중 '우역(郵驛)'
막고굴 제156굴 북쪽 벽 <송국부인출행도> 중 '차승(車乘)'
막고굴 제156굴 북쪽 벽 <송국부인출행도> 중 '송국부인'
막고굴 제9굴 남쪽 벽 <노도차두성변>
막고굴 제9굴 남쪽 벽 <노도차두성변> 중 '금강격보산(金剛擊寶山)'
막고굴 제9굴 남쪽 벽 <노도차두성변> 중 '외도귀의(外道歸依)'
막고굴 제98굴 동쪽 벽 입구 남측 <이성천과 조씨 부인> 유림굴 제16굴 <조의금 초상>
막고굴 제61굴 서쪽 벽 <오대산도>(부분)
막고굴 제61굴 서쪽 벽 <오대사도>(부분)
막고굴 제61굴 동쪽 벽 입구 남측의 여성 공양인 초상화
막고굴 제55굴 내부
막고굴 제55굴 불단의 천왕상
막고굴 제427굴 굴침
막고굴 제454굴 내부
막고굴 제61굴 동쪽 벽 북측 우전공주 이씨
막고굴 제263굴 중심탑주 동편 감실 안의 채색소조상
막고굴 제237굴 전실 서쪽 벽 입구 상단 남측 <수월관음도>
막고굴 제61굴 통로 남쪽 벽면 <치성광불다라니경변도>
막고굴 제465굴 내부
막고굴 제465굴 천장 동쪽 경사면 <기악공양보살상>
막고굴 제3굴 내부
막고굴 제3굴 남쪽 벽 <천수천안관음도>
왕원록 도사
청나라 말기, 줄곧 불교 승려가 관리해왔던 막고굴 석굴 사원에 王道士라는 사람이 새로 왔다. 본명은 왕원록,1849~1931이고
하북성 마청 사람이다. 광서 23년1897년에 돈황 막고굴에 와서 삼청궁을 지었다. 지금은 막고굴하사莫高窟下寺다. 그는 매일
같이 탁발을 하여 석굴을 정돈하고 수리한다. 그러나 그의 수리 행위는 막고굴의 역사 문물을 심각하게 훼소하는 결과가 된다.
광제 25년 1899년 5월 어느 날, 왕도사와 그가 고용한 몇 명의 농민들이 모래를 청소하던 중 입구 부근의 벽면이 갈라지면서
벽면의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벽돌을 치우고 조그만 석굴 안을 살펴보니 천주머니, 불상, 법기 등이 가득했다. 이것
이 나중에 장경동이라 불리는 석굴이다. 이 우연한 발견이 중국역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장경동 유물은 모두 5만여 개
이며, 곧바로 외부로 흘러나가 지금은 유물의 태반이 세계 각지의 박물관 및 도서관, 개인 소장가의 소유가 되었다.
일부만이 중국 국내 박물관, 도서관에 있으며, 유물의 일부는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한 실정이다.
막고굴 제16굴 통로, 장경동 외부
장경동의 필사본 불경
왕도사탑
마크 아우렐 스타인 후난성 출신이 장효완
가장 먼저 돈황에 와서 보물을 약탈한 사람은 영국인 탐험가 마크 아우렐 스타인이었다.
장요한은 중국어 통역사 겸 조수 역할을 했다.
스타인이 찍은 제16굴 통로 사진 《서역고고기(Serindia)》
영국이 소장한 돈황 문서
스타인이 네 번의 중앙아시아 탐험에서 얻은 돈황 유물은 런던의 대영박물관, 영국도서관,
인도 사무부의 도서관 및 뉴델리의 인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영국이 소장한 돈황의 비단 그림 <인로보살引路菩薩>
스타인은 본인의 고고학 보고서 및 여행기를 출간한 것 외에도 《천불동 : 중국 서부 둔황 석굴 사원의 고대 불교 회화》
라는 책을 썼다. 그는 고고학 탐사에서 놀라운 발견을 하고 대량의 진귀한 자료를 취득한 공로로 영국 정부의 훈장을 받았으며
왕립지리학회에서 수여하는 금질상, 영국 여왕의 기사 서훈도 받았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1943년 여든한 살의 스타인은 아프가니스탅의 수도 카불 근처의 고고학 발굴지에서 사망했다.
프랑스 폴 펠리오 고고학 탐사단
스타인에 이어 막고굴에 또 다시 외국 손님이 찾아왔다. 1908년 돈황에 도착한 프랑스인 폴 펠리오의 고고학 탐사단이다.
1900년 펠리오는 유물 및 도서 등을 구입하러 북경에 갔다. 그때 의화단운동이 한창 격렬한 때였으나 그는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청동기, 경태람 도자기, 한문 및 티베트어 등의 고문헌, 회화 작품 등 각종 유물을 대량으로 입수했다.
이때 가져간 중국의 보물들은 프랑스 파리 국가도서관 및 루브르 박물관에 나누어 소장되었다.
펠리오가 장경동 경전을 조사하는 모습
1908년 2월 12일, 펠리오 일행이 막고굴에 도착했다. 이때 장경동의 문은 잠겨 있었고, 왕도사는 막고굴에 없었다.
펠리오는 왕도사를 기다리면서 막고굴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진행했다. 그들은 석굴에 번호를 붙이고 측량을 했으며
사진을 촬영하고 각종 문자로 된 제기를 기록했다. 대부분의 석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사진도 풍부하게 찍었다.
이 기록은 나중에 여러 권으로 출간된 《돈황석굴》등 펠리오의 저서에 담겼으며, 막고굴 연구의 중요 자료로 자리매김 했다.
펠리오는 장경동의 어둑어둑한 불빛 아래서 매일 1천 권씩 살펴보는 속도로 장경동의 경전을 다 살펴 보았다.
그리고 이 경전을 두 무더기로 분류했는데, 그중 한 무더기가 그가 보기에 최고의 가치를 가진 문헌들이었다.
펠리오는 왕도사에게 비빌을 엄수하기로 약속한 다음 은자 500냥을 주고 장경동의 6,0002여 권 문헌을 받았다.
이 수량은 스타인이 가져간 것보다 적지만 장경동 문헌의 정수 중의 정수였다.
장경동의 돈황 문서 중 《법화경》
프랑스에 소장돈 돈황의 비단 그림 <보살>
오타니 탐험대는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1876~1848)가 파견한 중앙아시아 탐험대다.
오타니 탐험대는 세 번째 중앙아시아 고고학 탐사 때 돈황에 와서 문헌 유물을 가져갔다.
1912년 1월 26일 돈황에 도착해 요시가와 고이치로와 만났다. 돈황에서 두 사람은 왕도사 및 다른 사람들에게서
돈황 문서를 입수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오타니 탐험대의 세 차례 탐사 활동으로 수집한 유물은 주로 고베 근교의
고타니 고즈이 별장에 보관했다. 일부는 제국 교토 박물관(오늘날 교토 국립박물관)에 소장했다. 1914년 도타니 고즈이가
니시혼간지의 법주에서 물러나면서 그의 소장품도 여기저기로 분산되었다. 일부는 오타니 고즈이의 별장과 함께 일본 재벌
구하라에게 팔렸다. 구하라는 이 수집품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지금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러시아 탐험가 세르게이 올덴부르크
러시아 발굴조사단
올덴부르크의 중국 서부 지역 고고학 조사 활동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연구위원회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때 가장 중요하고도 떳떳하지 못한 역할은 카스에 있는 러시아 영사관이 맡았다. 조사단의 작업은 돈황이 가장 추울 때
진행되었다. 1915년 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중국이 참전한다는 소식에 조사단은 당황했다. 발굴 조사를 급히
마무리하고 1915년 1월 26일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천불동에서 측량한 443개 석굴의 평면도와 2천여 장의 사진과 더불어
막고굴의 석굴을 정리, 발굴하면서 찾아낸 각종 유물 및 돈황 현지에서 입수한 경전, 문서들도 가져갔다.
석굴에서 뜯어낸 벽화, 채색 소조상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 발굴조사단이 막고굴에서 유물을 운반하는 모습
.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및 그 이후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이 유물 중 회화
작품은 세상에 공개된 적이 드물다. 하지만 최근 차차 공개되고 있다. 올덴부르크의 조사일지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문서고에 숨겨져 있어서 올텐부르크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장경동 문헌을 손에 넣었는지는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러시아에 소장된 돈황 채색 소조상 러시아에 소장된 돈황의 비단 그림 <보살>
미국의 탐험가 랭던 워너 워너가 가져간 막고굴 제328굴 소조보살상
랭던 워너는 미국의 탐험가다. 1924년 1월 워너는 돈황 막고굴에 도착했다. 이때 장경동의 문헌은 다 흩어진 뒤였다.
워너는 은자 70녕을 왕도사에게 주고 제328굴 성당 시대의 정교한 채색 공양보살상을 가져갔는데, 지금은 하버드대학
아서 M. 새클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워너는 특수 제작한 접착제가 발린 테이프를 벽화 표면에 붙여서 막고굴
제335굴, 322굴, 329굴, 323굴, 320굴 등의 당나라 벽화 26점을 가져갔다.
그 밖에도 워너는 돈황 문서 중 《묘법연화경》일부를 가져갔다.
워너가 벗겨내어 가져간 막고굴 제323굴 벽화 자리
1941년 유림굴에서 장다첸
장다첸이 모사한 돈황 벽화 <대범천부회도(大梵天赴會圖)> 장다첸이 모사한 돈황 벽화 <길상천녀(吉祥天女)>
돈황에서 보낸 시절은 장다첸의 회화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돈황 예술의 영향을 받은 장다첸의 화풍은 크게 변화하여 인물화, 수묵화에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 절정을 이룬다.
왕쯔윈
왕쯔윈이 그린 <돈황천불동전경도>
서북 조사단 루산췬이 모사한 돈황 벽화
관산웨가 모사한 돈황 벽화
한낙연이 모사한 돈황 벽화
파리 유학 시기의 창수홍
창수홍의 유화 <D부인의 초상>
창수홍 <설조한작雪朝寒雀> 창수홍 <9층 누각을 새로 짓다>
창수홍, 1940년대, 돈황예술연구소(막고굴 중사)
석굴에서 모사 작업 중인 창수홍
석굴에서 모사 작업 중인 돤원제
1940년대 둔황예술연구소의 모사 작업
1950년대 훠시량, 어우양린 등의 모사 작업
1952년 돈황문물연구소 연구원 단체
석굴에서 모사 중인 리치충
1960년대 막고굴 벼랑 강화 작업
1960년대 막고굴 보강 작업 현장
돤원제가 모사한 <시비왕본생>
인용: 둔황연구원 · 판진스 편저 / 강초아 옮김 『실크로드 둔황에서 막고굴의 숨을 역사를 보다』
막고굴 (4)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