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니고데모
설교 중심 사상: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람은 신비로운 과정을 통해 잉태되고 탄생합니다.
오보영 시인의 '탄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아내 수고 많았소
참 장하외다
훌륭한 인내로 당신 오늘
생명의 신비를 베끼시었소
열 달 전 찾아든 많은 고통들
당신은 잘도 참아내었소
일어서면 생겨나던 어지러움도
고개 돌려 피해내던 비린내음도
움직일 때 몰려오던 큰 숨가쁨도
열 달 긴 시간 당신 잘 견디었소
온몸 부서지는 아픔
하늘 땅 갈라지는
태초
생명 터지는 큰 고통까지도
귀한 생명 위해 잘 참아내었소
우리 둘 소산 위해 잘 견뎌내소
사랑하는 아내여
당신 참 장한 일 했소."
이처럼 사람이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남도 매우 신비로운 과정입니다.
A. 거듭나야 할 필요성
산헤드린 회원 중에 니고데모라는 경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예수님이 오시기로 약속된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 이후,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체면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잠든 밤중에 감람산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니고데모의 진리를 찾는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한 자리가 보장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자신이 변화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간적으로 화가 났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 셋이 있는데, 강철, 다이아몬드 그리고 자아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는 강철과 다이아몬드가 단단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단단한 것이 바로 자아에 대한 인식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깨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편견을 없애기 어렵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의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B. 거듭나는 방법
그래서 니고데모는 풍자 섞인 말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논쟁하지 않으시고, 그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엄숙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대의 소망」 172페이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옛 것을 변경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은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목적과 동기를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돈을 벌고 결혼을 하며 자녀를 키웁니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돈을 버는 목적이 다르고 결혼을 하며 자녀를 양육하는 동기도 달라집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삽니다. 이러한 거듭남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으며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거듭난 삶을 설명하기 위해 바람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3: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그 결과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통해 바람이 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성령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듭난 사람의 삶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한 여집사님이 SNS에 한 증언의 말씀을 올렸습니다. "알려진 죄를 고의로 하는 것은 성령의 증거 하시는 음성을 눌러버리고 영혼을 하나님과 분리시킨다." 이에 한 장로님이 "이런 겁주는 글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라는 부정적인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러나 여집사님은 논쟁하지 않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 글이 장로님께 겁을 주었다면 죄송합니다. 전 오히려 주를 바라보게 되는데 말입니다. 저는 회개하라 하는 말씀을 보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주님이 필요하다는 의미니까요.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면 눈물 나요. 주님께서 죄 때문에 오셨으니까요. 제가 뭘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앞으로 나아가게 하니까요 ...." 그 여집사님은 부정적인 댓글에 논쟁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의 믿음을 아름답게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사람의 모습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시대의 소망」 173페이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생애가 변화된다. 죄악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 사람이 거듭나면 죄악적인 생각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악한 행위를 멀리하게 됩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분노 대신에 사랑이, 시기 대신에 겸손이, 분쟁 대신에 화평이, 슬픔 대신에 기쁨이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니고데모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거듭남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니고데모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사 64:6)다는 말씀이.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는 기도가 그리고 에스겔서의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겔 36:26)라는 약속이 모두 거듭남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깨끗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고, 거듭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3-14).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높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이 예수님을 쳐다보고 살아날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십자가에 희생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사랑의 예수님을 알게 되어 사람에게 새로운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이 필요했듯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개인과 가정, 교회의 많은 문제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거듭나는 방법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을 한 번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가끔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매일, 매 순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운전할 때 전방을 주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전할 때 앞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잠시라도 소홀히 하면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음의 시야에서 놓칠 때도 큰 위험이 따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일상 속에서 깨달은 바를 종종 글로 보내 주는 한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이런 글을 보내왔습니다. "유리컵이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습니다. 물을 버리면 컵은 빈 것일까요? 눈에 보이진 않지만 공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성령님이 빠져 나가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이와 같이 악에서 멀어지는 방법은 성령님을 매일 채우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 글을 읽고 저는 '엄지 척' 이모티콘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알면서도 안 되서 이런 글을 쓰게 되는 거 같습니다." 맞습니다.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찬미가 383장 <예수만 바라보세>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예수만 바라보세. 예수만 쳐다보세. 믿음의 주 되신 예수만 바라보세. 예수만 생각하세 예수만 신뢰하세. 믿음의 주 되신 예수만 바라보세. 예수만 품어보세. 예수만 모셔보세. 믿음의 주되신 예수만 바라보세." 이 가사는 예수님도 바라보라고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가능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자꾸 생각하게 되고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비록 니고데모가 그것을 3년 동안 마음에 감추어 두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는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두려워하던 제자들을 격려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복음 사업을 위해 바쳤습니다. 예수님이 3년 전에 뿌린 진리의 씨앗이 드디어 발아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거듭남의 이야기는 니고데모에게도 중요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났더라도 이 과정은 매일 반복되어야 합니다. 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248페이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매일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존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될 것이다." 우리는 거듭나야 하며, 그 거듭 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한 재림 신자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제 속마음에는 전혀 새로운 동기와 기쁨이 자라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신다는 수많은 증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경험하고 난 후로 이 세상에서 소중하고 아까운 것들이 없어졌습니다. 불필요한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우리도 거듭남을 통해 이러한 고백을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육의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듭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 상태를 진지하게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사람은 거듭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 특히 그분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장면들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은 거듭남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마음과 목적, 동기를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거듭남의 축복 속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