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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현장에 나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우리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마 tv가 볼 만할 것 같아요. 저도 아까 한참 개표 방송을 잠깐 보고 왔는데 궁금한 데도 많고 아마 또 기도 제목인 데가 많아서 tv를 보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또 오늘은 이 시간을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으로 기억하고 예배하죠.
오늘부터는 제가 이제 수요일날 저녁에 큰 주제 설교를 가지고 제가 말씀을 전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 안에 우리가 그냥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어떤 말 또는 어떤 생각들에 대한 이제 퀘스천 좀 교정하는 시간이라고 생각을 하려고 하는데요.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이 시편 73편의 내용을 함께 나누면서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까라고 하는 그 질문으로 한번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여쭤볼게요. 예수님 믿으면 복 받습니까? 네 왠지 함정이 담겨져 있는 질문 같죠? 근데 아멘 아멘이 맞죠? 예수님 믿으면 복 받아요 그래서 신앙인들 가운데 전도할 때 이걸 마치 캐치 프레이즈처럼 이야기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아요 예수 믿었더니 아이가 성적이 쭉쭉 올라가지고 좋은 대학 들어가서 지금 아주 좋은 데 취직했다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했는데 예수 믿고 나니 우리 집 주변에 재개발이 이루어져서 또 이렇게 뭔가 잘 이루어졌다고 예수 믿었더니 나를 짓누르던 질병들이 나를 벗어났다고 여러분들 이런 간증들 들어본 적 있으시죠? 그런 간증들을 들으면서 야 나도 저런 복 받고 싶다 그런 우리가 사모하는 심령을 갔던 그런 모습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또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요. 근데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복을 우리가 다 받게 되는 걸까요? 보통 우리가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는 말을 보통 이렇게 전도할 때 많이 사용했던 단어인데 여기서 말하는 복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말하는 복이라는 개념과 듣는 이들에게 들릴 때의 복이라는 개념은 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복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북이 영화를 이야기합니다. 꼭 북이 영화가 아니라 할지라도 좀 부자가 되고 또 결혼 잘하고 아이들 잘 되고 하고자 하는 일들이 형통하고 물론 죽고 난 이후에 그 하나님의 나라를 가게 되고 이런 것들까지도 근데 중요한 건 여기서 복의 포인트가 어디에 있냐면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의 현장, 내가 살아있는 동안 만사 형통 더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게 되는 것 이걸 보통 우리가 복이라는 개념으로 많이 가지고 있어요.
이런 복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이런 복들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여러분들의 삶에도 이런 복이 있기를 소망해요.
근데 여러분 이런 복에 대한 예로 드는 예화의 아주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아실 거예요. 록펠러라고 하는 사람이 있죠. 록펠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예수님을 잘 믿으면 저런 사람같이 우리도 복받을 것 같아라고 하는 그런 인물 중에 한 인물입니다. 이 록펠러라고 하는 인물은 세계 최대의 갑부였어요. 현존 지금 미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빌 게이츠보다도 3배 정도가 넘는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람하고 비교할 정도의 사람이 없을 정도죠. 록펠러가 죽음을 맞이할 당시의 재산이 미국 전체 부의 1.53% 한 사람이 미국이라고 하는 전 세계의 가장 큰 나라에 1.53%의 불을 독차지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냐고 어떻게 하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냐고 궁금해하고 질문을 던졌을 때 이가 남겼던 유명한 답 때문에 우리가 이 사람에 대해서 굉장히 존경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했죠.
저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를 고수해 오고 있습니다. 아주 가난할 때부터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십일조를 했죠. 예배 때마다 빠지지 않고 맨 앞줄에 앉아서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자는 일에는 대부분 거의 순종했고, 목사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록펠러가 운영하는 사업체에 십일조만을 따로 계산하는 그런 담당 직원이 수십 명이 있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굉장히 우리에게는 신앙적인 이야기로 많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물론 록펠러의 말에는요. 중요한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들이 담겨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근데 정말 록펠러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 그런 식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런 복을 받아서 지금 세계적인 부호로서 알려진 사람이 됐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좀 퀘스천 예수님을 잘 믿으면 그러면 다 이런 사람처럼 되는 걸까요? 그러면 이 사람은 제일 잘 믿어서 이런 복을 받은 걸까?
퀘스천 좀 혼란스러움이 있죠 어떤 분들은 그래 나도 저 예화를 듣고 나도 십일조 생활도 하고 열심히 예배생활에서 나도 뒤돌아보며 이런 복을 받았어 이렇게 말씀하는 분들도 간혹 계십니다.
그런데 또 때로는 나는 또 그렇게 했는데 나는 그 복을 누리지 못해 나는 왜 나는 그런 복이 없지라고 하는 분들도 분명히 계셔요.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으려고 더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하는데 오히려 내 생활이 더 어려워지고 뭔가 더 경직되고 그런 느낌을 받을 때 혹시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러면 내 신앙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요?
이런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한 사람들 막 죄를 지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잘 되고 부해지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또 퀘스천을 갖게 됩니다.
아니 저 사람은 믿는 사람이 복을 받아야 되는데 믿지도 않고 악을 행하는데 저 사람이 왜 저렇게 복을 받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전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또 혼란스러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73편에 아삽이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랑 이런 비슷한 혼란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편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3절 말씀을 보면 그가 얼마나 혼란스러움을 지금 겪고 있는지를 그려주고 있어요. 쉬운 성경으로 제가 좀 읽어드리면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이 아삽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정직한 자, 정결한 자, 그런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신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가 실상 보는 것은 악한 사람들이 더 잘 살고 번성하는 것을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그들이 평안하게 죽는 그 모습을 보면서 거의 넘어갈 뻔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공의가 지금 이 상 가운데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4절에서 15절까지는 이제 그들이 행하는 그 악인들이 누리는 그런 삶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렇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그걸 한번 좀 읽어보시고요. 한마디로 그들은 성공을 누리고 평안함을 누리고 그리고 삶의 윤기가 흐르는 모습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삽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 정직하게 살았고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왔고 또 깨끗하게 살아왔는데 이것이 헛된 일이 아닌가 의롭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회의감에 빠졌다는 거예요. 내가 바보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14절에 보면 주님께서 온종일 나를 괴롭히셨으며 아침마다 나를 벌하셨습니다. 온종일 이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는 거예요.
야 세상 사람들 다 저렇게 그렇게 지혜롭게 살아가지고 그렇게 다 누리고 사는데 왜 너는 바보같이 이렇게 사니?
그렇게 말하려고 하는 순간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근데 이 혼란이 이제 우리가 오늘 함께 봉독했던 교독했던 16절 17절 부분에서 이제 점점 깨닫고 이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17절에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서에 들어가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삽이 나름대로 자기 신앙으로 이거를 풀어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도무지 풀리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한계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신앙적으로요. 내가 아무리 내가 답을 찾으려고 해도 내 경험으로 내 지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의 한계가 있다는 건 우리는 인정해야 돼요. 우리는 보이는 것을 이해하고 보이는 것 안에서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것들이 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 마침내 성서에 들어가 깨닫게 됐다는 거예요. 여기서 그냥 예배당에 들어갔다고 하는 개념으로 성서에 들어갔다는 말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더니 지금까지 가졌던 그 마음들이 혼란스러웠던 마음들이 한순간 해결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새롭게 깨닫게 된 말씀이 18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이에요. 제가 좀 쉬운 성경으로 읽어드립니다. 18절
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19절
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20절에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님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 아삽이 깨달은 건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죽음이라는 것은 늘 인식하고 살아가잖아요. 우리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을 볼 때 간절히 소망함이 우리 마지막 죽을 때 잠자듯이 갔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나름대로 우리는 신앙 안으로 들어가서 죽음을 그래도 극복하고 우리는 죽음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생각을 하며 살아가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해서 그냥 무시하려고 하기도 하고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합니다.
근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음 이후에 공의로운 심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로움은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부분적으로 그 공의가 시행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완전한 공의가 시행되는 거예요. 한마디로 지금 우리의 이 삶의 현장 가운데는요. 하나님의 공예가 잠시 유보된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온전히 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잠시 유보된 거예요.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를 직접 드러내 보이시는 장면들도 우리는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불의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소극적인 악을 또는 적극적인 악을 행할 때가 있는데 우리는 심판의 날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악은 뭘까요? 실질적으로 의식적으로 내가 가지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것, 내 이익을 위해서 내가 더 부자가 되고 더 높은 위치에 차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밟아서는 것, 그건 적극적인 악입니다.
그런데 소극적인 악도 있어요.
세상이 다 그렇게 사는데 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건 자본주의 세계야 어쩔 수 없어
라고 생각하면서 악한 그러한 제도, 악한 세상의 문화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독려되어버리는 겁니다.
근데 여러분 분명한 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분명히 온전한 공의의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발견하고 나니까 이 아삽이 위로가 갑자기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1절 22절에 이런 말을 고백합니다.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파도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혼란스러운 아삽이었지만 무의미하게 느꼈지만 유혹까지 받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봤더니 나는 한 마리의 짐승과도 같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요. 자기가 노동한 것에 걸맞지 않은 결과를 얻는 것을 지혜롭다고 이야기합니다. 투기의 투기성이 농후한 방법으로 부를 늘리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돈으로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에 대하여 한탄합니다. 재력으로 돈을 돈을 가지고 자녀들을 잘 키우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지 못하는 걸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세상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때 자기는 한 마리의 짐승과도 다를 바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이 시인의 고백이 이제 변하기 시작하는데요. 23절과 24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늘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잡아주십니다.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이게 바로 성서에 들어간 사람의 변화예요. 여전히 부족합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오른손으로 붙들어주시고 주의 교훈으로 나를 가르쳐 주실 것이기에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실 그때에 우리는 주님의 영광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고백입니다.
바로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거예요. 지금 잘 나가는 사람들, 이번에 아마 내일 새벽이 되면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된 것처럼 다 누리고 있는 것처럼 이제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근데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또 4년 뒤에는 심판의 시기가 온다는 거죠. 마치 우리 인생에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이런 걸 보면서 교육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25절 26절에 정점에 이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가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의 든든한 반석이시오.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아멘 시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받은 엄청난 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복이 뭐예요? 하나님이 바로 나의 몫입니다. 이 몫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헬라키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전쟁이 끝나고 나면 나눠지는 분깃을 이야기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받는 유산을 의미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시인은 나에게 돌아올 몫이 바로 그 분깃이 하나님이십니다고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27절 28절에 이 고백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정절을 버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나에게 복이니 내가 주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을 전파하렵니다.
아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은요. 우리의 교양을 넓히고 우리 마음의 수양을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신앙생활하는 게 아니라고요.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최고의 목, 최고의 트로피, 최고의 상급이십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전부이십니다. 이 시편 기자는 거의 실족하여 악인의 흉내를 낼 뻔할 정도까지 그렇게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음에 돌이킴이 일어난 이유는 성서에 들어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종말론적인 시각을 회복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과 함께함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진정한 복임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믿을 때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에서 돈을 잘 벌고 성공하고 아이들이 잘 되는 것 이거는 그 복 받은 이후의 부산물 같은 것들이에요. 이거는요. 이런 것들을 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 과정 속에서도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면 그게 복인 거예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 같은 작은 피조물에게 오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몫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관계에도요. 무언가 얻어내려고 목적을 가진 관계는요. 오래 가지 못합니다. 결혼을 실패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유가 뭘까요? 상대방을 통해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그 결혼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한 후에도 상대방에게 뭔가를 요구하기보다 당신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당신이 내 결혼의 이유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뭔가를 받으려고 그게 목적이 되어버린다면 그 관계는 깨질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우리는 넘어지니까요.
이 아삽의 초반에 있는 내용처럼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주어지는 복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복입니다.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에게 더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의 삶을 짓누르는 일들이 사소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커 보였던 문제가 죽을 것 같은 문제가 그냥 지나가는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사소한 문제로도 보일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얻게 되면 크게 보이던 세상의 문제는 작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에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를 가지고 자적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심판이 유보되어 있다. 이걸 오늘 이 저녁에 기억하길 원합니다. 자기의 몫을 넘어선 탐욕의 결과는요. 하나님의 심판 대상입니다.
아까 제가 록펠러라고 하는 인물을 잠깐 예를 들었잖아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예화를 통해서 록펠로를 굉장히 신앙의 멋진 사람 이렇게 우리가 여겨왔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그를 따라서 십일조 생활 예배 생활 뭘 열심히 해가지고 뭔가를 얻으려고 했던 것 그것도 지금까지 있었던 모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록펠러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를 우리가 좀 그 내면을 살펴볼 필요도 있는데요. 록펠러가 1870년대에 석유 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이라고 하는 걸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이 석유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서 입법부를 매수하고 그리고 철도업자들과 비밀 거래로 운임을 할인받고 그리고 뇌물을 써서 경쟁자들을 철저히 무력화시키고 나중에는 이제 정유업의 물동량의 거의 100% 가까운 것을 이 회사가 차지합니다. 그러니까 독점해버리니까 이제 가격은 점점 상승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경쟁이 완전히 차단됐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점점 떨어졌습니다. 노동자들이 이 기업을 좋아할 수 있었을까요? 이 기업은요 록펠러라고 하는 인물의 이름값이 올라가는 만큼 이 기업에 대한 이 미국 사람들의 증오가 아주 극심하게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기업이 너무 횡포를 부리니까 소비자들과 중소기업의 원망 때문에 1911년에 미국 연방 대법원이 이 기업을 34개의 소기업으로 분할시켜버렸어요. 너무 나라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그리고 1913년에 러드로 학살이라고 하는 참혹한 일이 있었는데 콜로라도주에 9천 명 정도의 그 탄광 노동자들이 너무 작업 환경이 열악하고 너무 힘들어서 이렇게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 파업을 막는 과정 속에서 무장한 병력, 그들이 이들이 머물던 곳을 불지르고 또 총을 난사해가지고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비롯해서 5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어요. 미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잔혹한 운동으로 기록된 게 이 장면인데 이것도 역시 록펠러의 소유였다라고 합니다.
또 의료 부문에도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되는 데 가장 막강한 이 지장을 준 사람이 이 사람 록펠러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독과점 노동자 탄압, 탄압, 그리고 문어발식인 확장, 주가 조작, 정말 엄청난 그러한 악행들이 이 록펠러를 따라다닌 거예요.
그런데 인생의 말년에 그가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이제 미화되기 시작한 거예요. 위대한 자산가라고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이 록펠러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가 선행을 얼마나 하든지 재산을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러분 이렇게 돈을 버는 거 이게 하나님의 축복일까요? 만약에 이게 정말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아삽의 표현처럼 우리가 미끄러질 뻔하였습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그렇게 못 살고 있으니까 우리 지금 신앙적으로 우리는 연약한 것밖에 안 되잖아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직의 문제도 마찬가지고 성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이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도 된다. 아니죠. 진짜 복을 얻은 사람은요.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을 자족하며 이 복을 가지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섬길 줄 알고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진짜 복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은요 기도하면서 배워가야 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몫이 되셨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삶의 분깃들이 자족하게 여겨지고 그래서 더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일부를 떼어 누군가와 나눌 줄 아는 그 삶이 진정한 복이지 또 이 복은 예배를 드리며 배워가는 것입니다. 마치 이 아삽이 성서에 들어가서 깨닫게 된 것처럼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예배가 하나의 어떤 율법처럼 가기 싫고 부담스럽고 지루한 시간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이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의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예수님을 바로 믿고 진짜 복을 받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기적인 우리의 탐욕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그러한 종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믿음으로 우리가 얻을 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몫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갈 방법을 배워가며 실천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의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더 힘 있고 능력 있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