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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 (9)
신앙의 홀로서기
왕하 11:1-8
I. 서론
페리 노블이 쓴 책 <삶의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에 보면, 자신이 처갓집에 가서 겪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엄격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아내에게 부모님의 말씀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곧 법이었습니다. 그 중에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 ‘침대 위에서 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집의 법 가운데 하나도 ‘침대 위에서 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딸은 침대 위에서 절대 뛸 수 없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말입니다. 처갓집에 가서 겪은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처갓집에 도착한 우리는 장모님과 함께 우리가 묵을 이층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곳에는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딸 아이가 그 침대를 보자마자, 깍 소리를 지르면서 그 위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만! 침대 위에서 뛰면 못쓴다고 했지?’ 장모님이 옆에 계셔서 사태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장모님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습니다. ‘그냥 놔둬라~! 보기 좋은데 뭐.. 괜찮아’ 아내는 접시만큼 눈이 똥그래졌습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장모님께 물었습니다. ‘내 엄마 맞아?’”
엄마와 딸의 관계,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는 전혀 다른 세계인가 봅니다. 저도 한국에서 살 때 장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았는데 딸을 대하는 모습과 손녀를 대하는 모습이 전혀 다름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가 한국에서는 추석이어서 흩어져 있던 많은 가족이 모일 텐데, 페리 노블의 가정처럼, 딸에게 엄격했던 어머니도 손녀에게는 부드럽게 대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시면, 페리 노블 가정과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II. 본론
1. 주요 세 인물
1) 먼저, 할머니 아달랴입니다.
1~2절,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였으나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빼내어 그와 그의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게 한지라”
1~2절에 보시면,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달랴, 여호세바(혹은 여호야다), 그리고 요아스입니다. 이들 모두는 아하시야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달랴는 아하시야의 어머니이고, 여호세바는 아하시야의 누이이고, 요아스는 아하시야의 아들입니다.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할머니 아달랴가 손자들을 모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1절: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였으나, 2절: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
아댤랴는 누구입니까? 아달랴는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달랴가 남 유다 왕 여호람(혹은 요람)과 결혼을 해서 남 유다에 바알 우상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아달랴가 아하시야를 낳았는데, 이 아하시야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예후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아달랴는 자신이 왕권을 잡기 위해서 남아 있던 왕자들을 모두 죽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 역사에 있어서 상당히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달랴는 여자였고, 다윗의 후손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남 유다에 속한 자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달랴가 6년 동안이나 유다를 통치한 것입니다.
영국 트리니티 대학의 마이클 윌콕(Michael Wilcock) 교수가 아달랴에 대해서 한 마디로 평가를 했습니다. “그녀의 남편 여호람과 그녀의 아들 아하시야의 통치 내내 계속된 유다의 쇠락을 이제 가장 낮은 지점에 이르게 하였다.”
2) 둘째, 여호세바(혹은 그녀의 남편인 여호야다)입니다.
3~4절, “요아스가 그와 함께 여호와의 성전에 육 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일곱째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에게 여호와의 성전에서 맹세하게 한 후에 왕자를 그들에게 보이고”
여호세바와 그녀의 남편 여호야다는 목숨을 걸고 요아스를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아달랴가 왕으로 재임한 지 일곱째가 되던 해에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다윗의 자손 요아스를 왕으로 삼기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야다는 이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4절을 보시면, 백부장들과 언약을 맺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백부장은 유다 군인을 말합니다. 여호야다는 쿠데타가 성공하기 위해서 군인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유다의 군대는 처음에 아달랴 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달랴가 왕자들을 멸절시킬 때 동조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달랴가 통치한 지 6년이 지난 지금, 군인들은 더 이상 아달랴를 지지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야다는 이 틈을 타서 군인들을 설득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요아스가 왕이 된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여호야다는 어린 요아스를 대신하여 실제적으로 남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가장 먼저, 남 유다에 바알의 신전을 허물고, 제단을 뒤엎었으며, 신상들을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처형했고, 백부장과 레위 사람, 그리고 족장들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그의 사역이 얼마나 선하고 탁월했던지, 여호야다는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후 왕의 무덤(다윗의 묘실)에 장사되었습니다.
영국 트리니티 대학의 교수인 존 빔슨(John J. Bimson)은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여호야다와 여호세바는 왜 다윗의 많은 후손들 중에서 1살밖에 되지 않은 요아스를 선택하여 구원해 주었을까요? 아마도 여호세바가 한 살짜리 요아스를 선택한 이유는 아이가 너무 어려서 바알을 숭배하는 할머니로부터 아직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요아스입니다.
그렇다면 요아스는 어떻게 성장했을까요? 요아스는 고모인 여호세바와 고모부인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6년간 성전에서 양육되었고, 7세 때, 아달랴의 악정에 반기를 든 여호야다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유다 8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40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성전을 수리하고, 선하게 통치를 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에는 180도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수 차례 경고를 했지만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직접 꾸짖었지만, 요아스는 오히려 스가랴를 돌로 쳐죽였습니다. 요아스의 이런 행동이 얼마나 악했던지 예수님께서도 스가랴의 죽음을 신약에서 언급하셨습니다.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참고로, 본문에 나오는 바라갸는 사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를 의미하고, 스가랴와 사가랴는 같은 인물을 말합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자신을 죽음에서 살려준 여호야다를 봐서라도 그의 아들인 스가랴에게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요아스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의 아들까지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스가랴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바른 말을 한 죄밖에 없습니다.
결국 요아스의 말년은 좋지 않게 끝났습니다. 아람 왕 하사엘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치욕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하에 의해 살해당해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 등장한 세 명의 주요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 손자들을 살해했고, 딸은 어머니 몰래 조카를 숨겨줬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요아스는 처음에는 선정을 했으나 나중에는 악정을 행하고만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2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2. 주요 두 이유
1) 첫째, 출발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출발은 잘못된 결혼이었습니다.
이 모든 가정의 비극, 이 모든 나라의 비극은 남 유다 왕 여호람이 북 이스라엘 여인 아달랴와 결혼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달랴가 여호람과 결혼하게 된 것은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이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을 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결혼은 반드시 믿는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런 예외를 거론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결혼의 조건은 사랑이 아닙니까? 결혼한 후에 남편이나 아내가 믿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몇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1)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과 영적으로 결혼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께 정절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절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여 결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후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를 전도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이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믿음을 바꿀 수 있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노력으로 누군가의 믿음을 바꿀 수 있다면, 모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의 배우자가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2)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것은 같은 음으로 조율이 되지 않은 악기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기 전에 한 가지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악기들의 음을 같게 조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오케스트라의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큰 규모의 오케스트라의 경우 바이올린은 16~24명이 연주를 합니다. 만약 이들의 악기가 조율이 안 된 채로 연주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음악을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음을 맞추는 것에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연주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결혼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음이 다른 악기로 같이 연주를 하여 음악을 완성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약 유다 왕 여호람이 아달랴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달랴가 유다에 바알 우상이 가지고 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살해 당하는 비극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달랴가 왕자들을 모두 멸절시키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요아스도 우상 숭배에 빠지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2) 둘째, 과정이 잘못되었습니다.
요아스가 고모부 여호야다 사후에 하나님을 떠난 이유는 신앙의 홀로서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아스가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한 것은 여호야다의 신앙이었을 뿐입니다. 요아스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6년 동안 성장했지만,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혼자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신앙은 반드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신앙으로 내 신앙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레이 존스톤(Ray Johnston)이 쓴 책 <Help! I’m a Sunday School Teacher!>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워드 핸드릭스가 엘로우스톤 국립공원에 갔을 때였습니다. 그 곳에서 자주 ‘곰들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라는 푯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원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이 푯말에 대해서 물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관리인이 다름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공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죽은 곰의 시체를 공원에서 빼내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곰들은 관광객들이 주는 먹이에 습관이 생겨서 더 이상 음식을 스스로 찾아서 먹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굶어 죽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단순한 설교나 강의에 의존하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정답을 외우고는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서 그 진리를 확신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온 요아스가 이런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고모부 여호야다가 먹이를 줄 때까지는 잘 받아 먹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가 세상을 떠나자, 스스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어리석은 말을 듣고, 우상을 섬김으로 결국 하나님을 떠나고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지식으로만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들은 말씀을 진정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의 부모님이나 우리의 신앙 멘토를 떠나더라도, 우리 스스로 신앙 생활을 잘 영위할 수가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환경에서 살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잘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우리 모두 신앙의 홀로서기를 잘해서 주님께 영광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