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부 밀양 천황산 /4]
밀양 부내로부터 60리.
밀양과 울주의 군계를 이룬 천황산의
수려한 능선을 발견한 것은 일행이 산음을 떠나온 다음날 밤중이었다.
그러나,
시각도 시각이려니와 길이 초행인 일행은 쉬 빙곡을 찾지 못한채,
오히려 지름길을 찾는다는 것이 가지산
줄기를 가로질려 석남재를 방황하다가
표충사로 찾아 들고서야,
밤중에 깨어 나온 사미승으로부터
얼음골의 정확한 위치를 전해듣고
사자평 고원을 타넘었다.
얼음골에 이른 시각이 별자리로 어림잡아 오경.
마치.
백골의 더미인양 유난히도 횐 바위가
널브러진 골짜기는 과연 들어서면서
부터 섬뜩한 냉기가 끼쳐왔고,
그것은 산속 새벽의 한기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미 서천 높이 뜬 달빛이 가파른 계곡의 동쪽 비탈을 파랗게 비추고,
맞은편 달그림자 속에선 부엉이 소리가
마치 버려진 아이의 피를 토하듯한
울음소리로 심산의 정적을 강조하고
있었다.
"오기는 제대로 온 듯하오만,
집도 절도 보이지 않으니 이 사람이
어디쯤에서 기다리는지 짐작할 길이
없구먼."
발밑으로 오싹오싹 기어오르는 냉기에
자꾸만 옷깃을 여미던 김민세가 입을
열었다.
"일기는 말짱한데 저건 안개인가
구름인가?"
하고,
안광익이 골짜기 위쪽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과연,
골짜기를 타고 어디서부터 퍼어나는지
자욱한 안개가 감돌며 다가오고 있었다.
"입구가 여긴 듯하니 좀더 올라보시지요."
터져나간 신들메를 다시 죄어묶으며
허준이 말했다.
다가온 안개가 세 사람을 감싸고 흐르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속 같다가 문득,
눈앞이 다사 트이고 그 자욱한 안개의
물방울들이 허준의 이마와 목덜미에
생물처럼 휘감겼다.
"정말 기이한 장소군!"
안까 속에서 김민세의 소리가 났을
때였다.
"저기 불빛이 있습니다."
허준이 가리키는 골짜기 안에 횃불 하나가 마치 귀화처럼 소리 없이 타고 있었다.
"지세로 보아 암벽 사이에 암자라도
하나 있는 게로군."
안광익의 대꾸였다.
그러나,
횃불을 앞세워 세 사람이 널브러진
바위틈을 비집으며 머리 위의 횃불을 찾아 올랐을 때,
그곳은 두어 채 초가집이라도 들어앉을
듯한 거대한 바위굴 입구였고 암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눈길을 끈 횃불은 굴 입구에
타고 있었고,
또다른 횃불 두 개가 굴벽에 꽃혀 물기가 번들거리는 암벽을 비추고,
그 아래 한 사내가 느긋이 왕골자리를 깔고 그 위에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누워 있네."
"스승님올시다."
안광익의 말에 허준이 대답했다.
"사람이 장난이 우심하구먼!"
그것이 한눈에 유의태임을 알아챈
김민세가 웃음을 물며 앞장서 다가가다
흠칫 섰다.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피냄새였다.
허준도 안광익도 그 냄새를 맡고 걸음을 세웠다.
누워 있는 것은 분명 유의태 였다.
그리고 그 모습!
마치 술취한 자가 제 집 안방에 드러눕듯
두 팔 벌려 큰 대자로 누운 그 왼손이
대야에 담겼는데,
그 손목히 담긴 대야가 온통 피였다.
김민세가 유의태를 부둥켜 일으키며
소리쳤다.
"이보시게! 이보시게!"
"스승님!"
허준도 뛰어들며 외쳤고,
안광익이 물통 속에 담긴 유의태의 피투성이의 손을 잡아챘다.
예리한 칼날이 손목의 동맥을 잘라낸
모진 상처 자국이 보였고,
피는 아직도 배어들고 있었다.
"이 사람이 자진했어!"
김민세가 숨이 떨어진 그러나,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유의태의 시체에
눈을 부릅떴다.
식지 않은 건 체온뿐이 아니었다.
체내의 피를 쉬 뽑아내기 위하여 대야에
담은 물 또한 아직 다 식지 않은 채
따뜻했다.
"미쳤어!"
안광익이 일변 유의태의 허리춤에 손을
넣었으나 멎어 있는 심장에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허준이 절규하며 유의태의 가슴 위에
무너졌다.
자결한 유의태의 의도는 곧 알게 됐다.
유의태의 머리맡에는 그가 미리 준비해온 물건들이 여러가지 있었다.
겉에 먹점 하나도 찍지 않은 두툼한
서찰은 유서였고,
상화에게 지어오게 했다는 상자 속에는
유의태가 직접 챙겨온 부술에 사용할
허준이 오늘날까지 듣도 보도 못한,
작고 가느다란 톱,
그리고 십여 가지가 넘는 여러 형태의
칼들이 어린아이의 기저귀와 같은 헝겁에 일일이 싸져 있었다.
그밖에 치험록이라 적은 네 권의 두터운 책 그리고,
장부도와 12경락과 침혈을 그린 신체도
외에 팔뚝만한 황초가 십여 개가 들어
있었다.
"이미 늦었어.
아마도 우리가 골짜기 입구에 들어서는 걸 보고서야 일을 저지른 듯하이..."
죽음의 고통을 이기려는 의지였을지
아직도 허공을 카악 지켜보고 있는
유의태의 눈꺼풀을 조용히 쓸어주며
안광익이 탄식했다.
김민세가 유의태가 남긴 봉서의 알맹이를 꺼내 읽다 말고,
소스라치듯 허준을 돌아보았다.
"읽게. 그대에게 보내는 것이네."
허준이 떨리는 손으로 유의태의 서찰을
받아들었다.
낯익은 글자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날,
병사에서 병자들의 처방을 휘갈겨쓴
그 글자들과는 다른 한자 한자 혼과 기백이 담긴 힘이 어린 행서체의 정자들이었다.
"허준은 보아라.
내 죽음을 누구보다 서러워할 사람이
너임을 알고 유의태는 허준에게 이 글을
쓰노라!"
허준의 눈이 붉어왔다.
눈을 부릅뜨며 허준은 계속 읽어갔다.
"나는 내게 닥쳐오는 죽음을 보았고,
기꺼이 그 죽음을 맞이하려 했을뿐 ...
그건 모든 생명의 예정된 길이라 어찌
서러운 일만이리..."
57년 전에 태어난 갓난아이가 바로
이 유의태의 모습이요!
57년이 지난 오늘 죽어가는 자가 또한
이 늙고 병든 유의태라는 생사윤회의
법칙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겪어야 할 죽음은 곧 태어나던 때 이미 결정된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 아니리.
운다 하여 어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운명일 것이리요!
그 운명이라는 것...
소리없이 서서히 어김없이 닥치는
그 죽음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더니라.
60평생을 살다 가는 나 같은 자에게야
더 이상 무슨 여한이 있을까마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로부터 이 세상에
유용한 젊은이,
평생 타인을 위해 덕을 쌓은 귀한 인물,
평생 호강을 모르고 고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측은한 인생까지 마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만병의 정체를 캐고 밝혀서
남을 해치고 악업을 일삼는 자가 아니거든 그들로 하여금 천수가 다하는 날까지
무병하게 오래오래 생명을 지켜줄 방법은 없을까 하고....
이는 의원이 된 자의 본분이요!
열 번 고쳐 태어나도 다시 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소망이
아니리....
하나 나 또한 내 몸속에 불치의 병을 지니게 되었으니,
병과 죽음의 정체를 캐낼 여력이 이미
없다.
이에 내 생전의 소망을 너에게 의탁하여
나의 문도 허준이가 세상의 어떤 병고도
마침내 구원할 만병통치의 의원이 되기를 빌며,
병든 몸이나마 너 허준에게 주노라!
이에 너 허준은 명심하라!
염천 속에서 내 몸이 썩기 전에 지금 곧,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어 사람의 오장과 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똑똑히 보고,
확인하고,
사람의 몸속에 퍼진 삼백예순다섯 마디의 뼈가 얽히는 이치와 머리와 손끝과
발끝까지 퍼진 열두 경락과 요소를 살피어 그로써 네 정진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노라!
읽기를 마친 허준은,
복받치는 감동과 비통함이 다시 유의태
에게 엎드려 울부짖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사오리까.
버려진 시체가 있다 하기 기대한 것이옵지 어찌 그것이 스승님인 줄 알았으 ....
리 ... .까...."
무너진 허준의 손에서 안광익이 유의태의 유서를 뽑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허준은 가슴이 터질 듯했다.
'유의태! 유의태!'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스승의 손목을 움켜쥐고 허준은 숨이 막힐 듯했다.
지난날,
그가 아들 도지에게 말했던 비인부전
이라는 말이...
이제야 새삼 허준의 가슴 복판에 마치
불덩이처럼 되살아나 뜨겁게 뜨겁게 담금질하고 있었다.
배워서 흉내내는 재주도 아니며,
한 권 책 속에 담긴 지식도 아니다.
스승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죽여
자기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내일 계속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