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석불
1983년 예산군 봉산면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사면불을 재현해 조성하였고,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을 사방에 모신 사면석불입니다.
왼쪽이 동쪽을 의미하므로 석가모니불을 기준으로 왼쪽에 약사불, 오른쪽에 아미타불이 있습니다.
남쪽 석가모니불, 동쪽 약사여래
동쪽 약사여래, 북쪽 미륵존불
정상 1.36km, 수덕사 0.53km
사면석불이 있는 이곳부터 정혜사까지 '벽초 경선(碧超鏡禪)스님의 1080돌계단'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백팔번뇌를 열 번 내려놓으라."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벽초스님은 만공(滿空)스님의 법맥을 이은 수좌로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실천하며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였으며 황무지나 다름없던 사찰 전답(田畓)을 손수 개간하여 옥토(沃土)로 만들었고, 수덕사에서 정혜사까지 이르는 1080 돌계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벽초스님이 정혜사까지 손수 만들었다는1080 돌계단, 하나씩 밟고 올라섭니다.
정상 1.36km, 수덕사 0.53km
소림초당 갈림길
정상 1.22km, 수덕사 0.67km, 소림초당 0.02km
소림초당
1920년 중반, 만공스님이 덕숭산 중턱 절벽 위에 지은 작은 암자입니다. 자연목으로 짓고 그 위에 이엉을 올린, 자연 그대로의 멋을 간직한 작은 초당입니다. 정상까지는 1.22km 오르면 되는데, 만공스님이 "저곳에 초가집 하나 지으면 참 좋겠다"하였더니 벽초스님이 지으셨다고 합니다.
입구에는 긴 대나무로 통로를 차단하고옆에는 '출입금지'라는 기왓장에 경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소림초당은 만공(滿空) 스님이 생전에 수행하던 암자로 1925년 바위 위에 지었다고 합니다.
만공 스님이 처음 거처했던 곳과 현재의 위치가 다르다고 합니다.
정상 1.15km, 정혜사 0.22km, 만공탑 0.04km, 수덕사 0.76km, 향운각 0.03km
관음보살입상
소림초당에서 돌계단을 5분 정도 오르면 관음보살입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관음보살입상이 위치한 곳에 향운각은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관음보살입상을 보고 되돌아 나와 정상을 향해 오릅니다.
소림초당입구에서 조금 더 오르면 만공이 세운 암자 향운각 인근에는 수덕사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거대한 석불이 있습니다. 1924년 만공 스님이 조성했다는 관음보살입상입니다.
자연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높이가 25척에 달합니다. 만공선사가 꿈에서 석가세존을 만난 뒤 조성했다는 미륵불 입상입니다.
덕숭산 관음보살입상은 만공스님이 1924년에 조성 봉안하였습니다. 관음보살입상은 관음보살의 덕으로 중생의 8가지 고통을 덜어주는 감로수 병을 손에 들었습니다. 머리에는 어머니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관세음보살의 상호를 모시고 있습니다.
1층기단의 하대갑석에는 '세존응화이천구백오십일년갑자동십만공계수봉안(世尊應化二千九百五十一年甲子冬十滿空稽首奉安)'이라는 명문이 보입니다.
“세존께서 응화하신후 2951년이 되는 갑자(甲子)년 겨울 10월에 만공이 공경하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려 봉안하다”입니다. 세존응화는 불기와 다른 기년법으로 북방불교의 기년법의 하나입니다. 이 설의 근원은 「주서이기(周書異記)」에 기록된 주(周)나라 소왕 26년 갑인년(기원전 1027년) 4월 8일에 부처님이 탄생하셨다는 기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1027년을 세존응화(應化) 원년(元年)으로 삼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1924년은 세존응화 2951년입니다. 계수(稽首)는 공경하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리다는 뜻입니다.
서기 2951-(기원전 1027)=1924년으로 보입니다.
가사 위에 장삼을 겹쳐 입은 형상으로 정병(淨甁)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있습니다.
삼도는 불명(不明)하고 보관에는 화불이 조성되어 있는데, 안내서의 설명에 의하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고자어머니의 상호를 형상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관음보살상의 보관에는아미타불을 묘각합니다.
향운각(香雲閣)
만공스님이 1939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조금 언덕진 곳에 만공 스님이 수행했던 향운각이 있습니다.
향운각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향운각의 이 관음보살입상은1기의 석등(石燈)과 2단으로 된 사각의 좌대 위에 조성되어 있는데좌대의 뒤쪽 면은 뒤쪽 암벽과 붙어 있습니다.
환조(丸彫)로 조성된 이 석조 관세음보살입상의 크기는 7m로자연암벽을 깎아 조성되어 있습니다.
만공탑
「예산 수덕사 만공탑」은 만공스님(1871~194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7년에 세운 석탑으로 전통적 승탑 형식을 탈피한 근대적 기념탑입니다. 육각의 지대석 위에 원형의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세 개의 기둥을 평면 Y字형태로 세운 후, 그 위에구체(球體)를 올려놓았습니다.
기둥 세면의 빈 공간에오석(烏石)으로 면석을 조성한 후, 정면에는 ‘만공탑’, 좌우측면에는 ‘世界一花’(세계일화), ‘百艸是佛母’(백초시불모)를 비롯한 만공스님의 친필과 행장(行狀), 법훈(法訓) 등을 새겼습니다.
진여문(眞如門)
정혜사 진양문(眞楊門)
정혜사 진양문(眞楊門)
진양문(眞楊門) 편액은 송원 설정(松原 雪靖 1941~ ) 스님의 글씨입니다.
정혜사(능인선원) 출입이 제한되고 있습니다. 5백년 이어진 숭유배불정책으로 조선시대의 불교는 그야말로 근근히 그 맥을 이어오다가 조선조말 경허 선사의 등장으로 홀연 불교중흥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900년대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북(北) 오대산에 방한암이 있고, 남(南) 덕숭산에 송만공이 있다“는 말이 든든한 버팀목처럼 회자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대산의 한암 스님과 덕숭산의 만공스님은 당시 우리 불교계를 상징하는 두 거목이셨습니다.
진여문(眞如門)
정혜사 선수문(善修門)
정혜사는 599년 지명법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능인선원은 만공스님이 주석하며 선풍을 진작시킨 정진처입니다. 매년 철마다 수십 명의 스님들이 용맹 정진하는 우리나라 대표 선원입니다.
외부인 출입을 금한다기에 열려있는 문틈과 담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습니다.
선수문(善修門) 편액은 덕숭총림 수덕사 4대 방장을 지내신 송원 설정(松原 雪靖) 스님의 글씨입니다.
두 개의 탑이 보입니다.
정혜사 능인선원(定慧寺 能仁禪院)
능인선원(能仁禪院) 편액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 글씨입니다.
정혜사 일광문(日光門)
일광문(日光門) 편액은 덕숭총림 수덕사 4대 방장을 지내신 송원 설정(松原 雪靖) 스님의 글씨입니다.
정상 0.91km, 수덕사 0.98km
덕숭산 정상
전월사 0.02km, 정상 0.53km, 수덕사 1.38km
전월사 입구
전월사를 들려볼까 했는데 출입금지입니다.
입차문내(入此門內) 막존지해(莫存知解)
이 문 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세속에서의 생각이나 지혜에 의지하지말라...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전월사
전월사(轉月舍) 편액
정혜사
사면석불
수덕사 화소대
화소대(花笑䑓) 편액
화소대라는 이름은 부처와 마아가섭이 한송이 연꽃으로 주고 받는 '염화미소'에서 온 말입니다.
백운대(白雲䑓) 편액
뒤돌아본 화소대
해탈문
양 기둥에 쓰인 주련과 해탈문이라는 편액을 보지 못하면 가정집 대문과 별로 구별이 되지 않는 형식의 대문을 통화하여 선수암 경내로 들어갑니다.
해탈문(解脫門) 편액
선수암 대광전
선수암에는 3채의 건물이 있는데 가운데 있는 것이 대광전, 우측에 있는 것이 동별당, 좌측에 있는 것이 서별당입니다.
대광전(大廣殿) 편액
편액은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글씨쓴 이의 서명, 관지에 동그라미가 있어서 금방 알아봤습니다.
법호 원담(圓潭)에서 둥글 원(圓)자를 동그라미 하나로 대신했습니다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불로 모시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불
선수암 동별당
종무소겸 부속법당으로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선수암(善修庵) 편액
동별당(東別堂) 편액
편액은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법호 원담(圓潭)에서 둥글 원(圓)자를 동그라미 하나로 대신했습니다.
서별당
서별당(西別堂) 편액
편액은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선수암은 사방을 꽃으로 장식한 아기자기한 경내 암자입니다.
심연당
불이문
불이문(不二門) 편액
백운당과 황하정루
백운당(白雲堂) 편액
편액 좌측에 법정(法定) 관지가 보입니다.
사천왕문
금강문
환희대(歡喜臺)
수덕사 환희대는 이 사찰의 중요한 부속 암자로, 비구니 스님들이 기거하며 수도 정진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신여성이자 문인인 김일엽 스님(金一葉, 1896~1971)이 수도정진하다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녀의 본명은 김원주로 최초의 대중가요인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 최초의 근대 여류화가였던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의 대명사로 꼽히던 인물입니다.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주창하는 등 늘 이슈의 중심에 있었으나 이후 결혼에 실패하고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껴 1933년 출가를 단행한 후 30여 년간 수덕사 견성암에서 입승을 맡아 치열한 수행을 이어갔고 만공 스님으로 부터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만년에 절필했던 붓을 다시 들어 '청춘을 불사르고', '어느 수도인의 회상',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 등의 수필집을 발간한바 있습니다.
원통보전은 덕숭총림 초대방장이신 혜암선사께서 증명하시고, 2대 방장이신 벽초선사께서 터를 잡으시고, 3대 방장이신 원담선사께서 불사를 직접 진두지휘 하셔서 도편수 장영근 거사가 건축한 전각입니다.
원통보전 편액
원담 진성(圓潭 眞性 1926~2008)스님의 글씨입니다.
법호 원담의 둥글 圓(원)자 대신 동그라미를 그렸던 서명을 옮겨 새겼습니다.
원통보전 전각의 내부는 삼면이 모두 탱화로 되어 있으며, 내부는 화려합니다.
현세의 관세음보살
보궁형의 닫집도 법당의 장엄함을 더욱 정교하게 빛냅니다.
관세음보살
원통보전 법당 내의 관세음보살은 빼어난 조형미와 수려한 장엄으로 제11회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제전(1985년)에서 입상한 수작으로써 약3m의 거대한 통원목으로 4년간 건조, 3년간 조각, 3년간 개금하는 총 10여년의 세월을 통해 조성되었습니다.
아랫편에는 비구니 승방으로 쓰이는 보광당(普光堂)
보광당(普光堂) 편액
원담 진성(圓潭 眞性 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법호 원담의 둥글 圓(원)자 대신 동그라미를 그렸던 서명을 옮겨 새겼습니다
난초 蘭(난)에 달래 茖(각)자 쓴 난각(蘭茖) 편액
비구니들이 머무는 곳답게
난과 달래꽃을 엮어 이름 붙인 듯합니다.
덕숭총림 3대 방장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송풍나월루(松風蘿月樓) 편액
편액은 원담 진성(圓譚 眞性 1926~2008)스님의 글씨입니다.
법호 원담(圓潭)에서 둥글 원(圓)자를 동그라미 하나로 대신했습니다
송풍나월(松風蘿月)은 소나무의 사이로 부는 바람과 담쟁이덩굴 사이로 비치는 달이라는 뜻으로, 운치 있는 자연 경치를 이르는 말입니다.
보광당(普光堂)
이니보탑
환희대 입구에 다보탑 모양을 본떠 만든 이니(二尼)보탑이 있습니다.
이니는 두명의 비구니를 뜻하며, 이니보탑은 환희대에서 수도정진했던 월송(月松) 스님과 정진(淨眞) 수님의 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석탑입니다.
선미술관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일제강점기 때 나혜석이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1944년에 고암 이응노 화백이 수덕사로부터 구입했으며 이후 파리로 떠난 뒤 화백의 본처 박귀희가 홀로 남아 여관을 운영하다가 2001년에 사망하자 19대 주지(2003~2007 역임)였던 운경 법정 스님이 여관을 다시 매수하였고, 이어 20대 주지(2007~2011 역임)였던 옹산 법광 스님이 개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1969년 동백림 사건 이후 옥고를 치르고 난 뒤, 이응노 화백이 수덕여관에 머물며 암각을 제작했다고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수덕여관 옆에는 이응노 화백이 '영화롭고, 마르고, 성하고, 쇠함' 즉, 모든 물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 불교의 '제법무상'의 의미인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표현한 추상화 암각화와 이 화백이 한글 자모 문자 추상화 암각화가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1960년대에 이응노 화백은 문자추상화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修德寺禪美術館 顧庵古宅(수덕사선미술관 고암고택)
감로당
감로당(甘露堂)이라고 하는데 수덕사 템플스테이 숙소로 사용키 위해 근래 지었다고 합니다.
감로당(甘露堂) 편액
수덕사근역성보관
일주문이 보이는 오른편에 위치한 근역성보관은 수덕사 및 말사의 불교유물 4000여 점을 전시하기 위하여 2023년 건립되었으며 10시부터 입장 가능하며 무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