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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下情人 1 - 여강 최재효
달빛이 한여름 밤의 산길을 회색으로 물들이고 그 회색 길을 숨을 몰아쉬며 두 여인이 걷고 있었다. 앞서 걷는 젊은 여인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자주 소매로 훔치며 이지러지는 달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달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 밤에는 달이 마치 자신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듯 자주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다가 다시 젊은 여인에게 나타나곤 했다.
나이가 가 좀 들어 보이는 여인은 종종걸음으로 젊은 여인 뒤에 바짝 붙어서 걷고 있었지만 나이 차에서 오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쉬어가자고 할 수도 없었다. 두 여인은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자주 뒤를 돌아 보았지만 자신들을 따라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주막에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고 계룡산의 험준한 골짜기를 쉬지 않고 걸었다. 앞서가던 젊은 여인이 뒤를 돌아보며 헉헉거리며 뒤 따라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등짐을 지고 보퉁이를 끌어안고 뒤따르는 여인이 측은해 보였다.
“유모, 저기 바위에서 잠시 쉬었다 가요. 무척 힘들어 보여요.”
“마마, 쇤네는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아직도 한참을 가야하고 밤도 꽤 깊은 것 같은데요.”
땀으로 목욕을 한 것처럼 유모라 불리는 여인은 위 아래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말은 괜찮다고 하면서 메고 있던 짐을 얼른 바위에 내려놓았다.
“유모, 이제는 마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아기씨라고 불러요.”
“공주마마, 어찌 감히 아기씨라는 여염집 호칭을 부를 수 있겠나이까?”
“나는 이제 공주가 아냐. 아버지의 명에 의해 폐서인 된 마당에 공주는 무슨 공주. 괜찮으니 아기씨라 불러요.”
“마마, 어찌......”
“유모, 난 괜찮으니 그냥 아씨라고 부르래도요.”
“......”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달이 다시 얼굴을 내보였다. 옷은 비록 여염집 여인들이 입는 치마저고리를 걸쳤어도 젊은 여인의 얼굴은 감히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이 어려 있었다. 산길 주변 숲 속에서 소쩍새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잠시 눈을 감고 며칠사이에 자신에게 일어났 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세희야, 이 밤으로 대궐을 빠져나가야 한다. 안 그러면 내일 너는 이승의 목숨이 아니야. 이 어미가 사람을 시켜 네가 어디 먼데 가서 평생 숨어 사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금은보화를 마련해 놓았다.”
어머니인 정희왕후(貞熹王后)는 당돌하게도 아버지의 패덕을 고한 딸이 안쓰러우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통탄하고 있었다.
‘아, 어미로서 딸 아이 목숨 하나 보전치 못하니, 내가 어찌 어미라 할 수 있으리오.’
“어마마마, 소녀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아버님의 눈 밖에 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소녀 이 궁궐에서 죽겠습니다. 그러니 더는 아무 말씀 하지 말아 주세요.”
“네가, 네가 정녕 이 어미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 제발 부탁이다. 이 어미의 청대로 오늘 밤 이 궁궐을 나가 멀리 계룡산 동학사로 떠나거라. 내 사람을 보내 그곳 주지 스님께 연통을 넣을 터이니 이 어미 말대로 하거라. 그것만이 너와 내가 이승에서 모녀지간의 연을 이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다. 제발 이 어미의 청을 들어 주거라.”
“어마마마. 으흐흐흐흐…….”
“언니, 어마마마의 말씀대로 하세요. 그것만이 우리 동기간이 정을 이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부디 어마마마의 청을 물리치지 마세요.”
왕비 윤 씨의 곁에 있던 세희공주의 동생 의숙공주는 중전 윤 씨를 거들었다. 평소 언니 세희공주의 학식과 미모에 눌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던 동생이었다. 그러나 언니 세희공주가 임금의 자리에 앉은 아버지 수양(首陽)에게 전 왕을 폐위시키고 권좌에 앉은 패덕(悖德)을 고했다가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죽음에 이르자 언니가 한편으로는 측은해 보였다.
“어마마마, 소녀 잘못한 것이 없사온데 야반도주를 하시라니요? 소녀 아버님의 손에 궁궐에서 죽겠습니다.”
“이것아, 네가 이 어미가 죽기를 원하는 것이냐?”
“언니, 어마마마 뜻에 따르세요. 먼 훗날 아버님의 노여움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 다시 입궐하면 되잖아요.”
세희공주는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 수양이 자신을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바마마, 하늘에는 해가 하나여야 하옵니다. 헌데 조선의 하늘에는 해가 둘이옵니다. 아버님은 해가 아니옵니다. 찬위한 금상을 상왕(上王)에게 돌려 주시옵고 아버님 손에 목숨을 잃고 구천을 헤매고 있는 억울한 원혼들을 달래주세요. 그것만이 아바마마께서 천대만대에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방도입니다. 부디 소녀의 청을 뿌리치지 마소서.”
수양은 딸의 간언(諫言)을 처음에는 그냥 넘기려 하였으나, 점점 그 도가 지나치자 서서히 노여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희는 들어라. 너는 아비의 일에 대하여 이 시간 이후로는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아녀자는 아녀자의 길을 걸으면 되느니라. 아무리 아비라 하지만 더는 너의 말을 듣고 싶지도 않거니와 이미 토설한 내용도 참기 어려우니 이 아비의 마지막 충고를 깊이 새길지어다.”
수양은 딸 세희 공주의 영민함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행적에 대하여 비수를 들이대는 딸이 미웠다.
“아바마마, 아직 늦지 않았나이다. 피비린내 나는 왕위를 돌려주시고 그간의 잘못을 참회하소서. 소녀, 죽어도 뜻을 굽히지 않겠나이다.”
“어허, 네가 무얼 안다고 감히 이 아비를 가르치려 드느냐? 방자한 것 같으니라고.”
수양은 노발대발하면서 마시던 술잔을 세희공주를 향해 집어 던졌다. 옥으로 된 술잔이 공주의 머리를 맞고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 났다. 사색이 된 내관이 얼른 달려와 깨진 잔 조각을 치웠다. 세희공주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그러나 세희공주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아버지 수양을 똑바로 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님은 세종 할아버님 이후로 태평성대를 구가해온 왕실과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백성들에게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역모를 핑계로 안평숙부를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김종서 대감과 황보인 대감 등 내로라 하는 이 나라의 충신들을 척살하셨습니다. 역모를 꾸민 세력은 안평숙부와 충신들이 아니라 칠삭둥이 한명회와 권람 등 기생충 같은 자들과 아바마마 아니옵니까?”
“뭣, 뭐라고. 네 이년! 아무리 너와 내가 부녀지간이라 하나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느니라. 네 년이 아무리 공주의 신분이라 하나 너 역시 아비의 신하이니라. 여봐라, 이년을 당장 하옥시켜라. 날이 밝는 대로 국문을 열어 죄를 엄히 물으리라.”
수양은 주안상을 엎어버리고 큰 딸, 세희공주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금방이라도 박살낼 태세였다. 지밀전 상궁들과 내관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 하고 있을 때 중전 윤 씨가 왕의 침전 안으로 들었다.
세희공주가 상감의 침전에서 아버지 수양에게 그간의 잘못을 간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왕비 윤씨는 상감의 침전 밖에서 부녀지간의 언성이 오가는 것을 듣고 있었지만 침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상감의 언성이 높아지자 중전은 더 참지 못하고 상감이 침전으로 들었다.
“상감, 참으세요. 어린 아이가 무얼 알겠어요. 그냥 상감을 위하는 뜻에서 한 말이니 노여움을 거두세요.”
“세희공주는 어서 물러나 중궁전으로 가 있어라.”
수양은 다시 큰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노여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갑자기 수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눈이 빨갛게 충혈 되면서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중전도 짐에게 따질 일이 있으신 게요?”
“상감, 따질 일이라니요? 세희가 그만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한 말이니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밤이 깊었으니 그만 침수 드시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자식 농사를 잘못 진 게 틀림없나 봅니다.”
“상감, 무슨 말씀이세요?”
“몰라서 묻는 게요? 어찌 딸년이 아비에게 두 눈 똑바로 뜨고 대들 수 있단 말이오? 어떻게 아이들을 훈육하시었기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 아이를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치죄(治罪)해야 겠습니다.”
중전 윤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던지 상감의 노여움을 풀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몸에서 난 딸 세희공주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잔병치레가 많던 공주였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하고 서책(書冊)을 늘 곁에 두고 지내는지라 모르는 것이 없어 할아버지 세종대왕은 손녀인 세희공주를 특히 귀여워했다.
“상감, 아무리 세희가 상감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해도 상감의 딸 아닙니까? 소첩이 별도로 불러 훈육시킬 테니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중전은 누구의 편이요?”
“상감, 누구 편이라니요? 지아비와 자식사이에 무슨 편을 들고 말고 할 일이 어디 있답니까?”
“나는 그 아이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상감, 그 아이는 몸도 성치 않고, 성격이 상감을 닮아 한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하고야 하는 성격이잖아요. 며칠 말미를 주세요. 소첩이 단단히 타일러 상감께 용서를 빌도록 할 테니까요.”
“필요 없어요. 난 딸자식 하나 없는 셈 칠 테니 그리 아세요.”
“상감......”
중전도 노여움이 극에 달한 수양을 어쩌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아아, 이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더냐?’
중전 윤 씨는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지아비 수양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 준 야망이 큰 여인이었다. 윤 씨는 지아비 수양이 대권을 쥐는데 일조한 여인으로 시아버지 세종임금 밑에서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시아주버니인, 붕어한 문종(文宗) 임금은 아우인 수양대군의 야망을 간파하고 수양의 식솔들이 궁궐에 출입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숱한 우여곡절과 피를 뿌린 광풍이 휘몰아 친 뒤 조카를 허울뿐인 상왕(上王)에 앉히고 금상의 자리를 차지한 지아비 수양이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했다지만, 중전의 마음은 늘 좌불안석이었다. 언제 상왕을 지지하는 숨어있는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 자신의 혈육인 세희공주가 분란을 일으킨 것이다. 천근만근 같은 걸음으로 중궁전으로 돌아 온 중전은 세희공주를 타일러보려고 하였지만 고집불통이었다.
반달이 막 모습을 감춘 밤, 경복궁의 동쪽 문이 열렸다. 이미 중전의 밀지를 받은 궁궐수비대장은 어둠을 틈타 두 여인과 한 남자를 안전하게 궁궐 밖으로 빠져 나가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평민복장으로 갈아입은 세희공주와 30후반의 유모, 철릭을 걸친 젊은 무장(武將)등 세 사람이 조용히 대궐문을 나섰다. 한양의 밤거리는 칠흑 같은 어둠에 고요했다.
종종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올 뿐이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재빨리 경복궁을 빠져나와 육조(六曹) 거리를 지나 광통교(光通橋)를 건넜다. 한양의 밤하늘은 낮아 손을 뻗으면 동서를 길게 흩 뿌려져있는 은하수가 잡힐 듯 했다. 세 사람은 말없이 걷기만했다. 칼을 찬 무장이 앞서서 걷고 공주와 유모가 뒤 따라 걸었다.
대부분의 상가들은 문이 굳게 닫혀있고 만취한 주정꾼들이 골목길 아무 곳에서 소피를 보는 모습이 보였다.
자시(子時) 이후에는 통행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지라 백성들의 발걸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종종 긴 창을 든 서너 명의 순라꾼들이 지나가곤 했다. 그때 마다 젊은 무장은 얼른 두 사람을 골목길로 안내하여 몸을 숨기도록 했다.
세희공주는 아버지 수양이 권좌에 오르기 전 궁밖에 살았기 때문에 한양의 번화가를 자주 구경 다니곤 했다. 비록 달이 없는 어두운 밤거리지만 가리가 눈에 익었다. 한 식경 후 멀리 숭례문이 보였다. 무장이 품속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숭례문을 지키던 무장에게 보여주자 경계를 서던 군관이 군호를 붙이며 깍듯하게 경례를 하였다. 세희공주 일행은 쉬지 않고 남쪽을 향해 걸었다.
앞서 걷던 무장이 공주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땅 바닥만 쳐다보고 걷던 세희공주는 서서히 멀어지는 경복궁 쪽을 돌아보았다. 공주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있었다. 공주가 뒤를 돌아보자 등짐을 지고 보퉁이를 끌어안고 걷던 유모가 얼른 수건을 꺼내 공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공주마마, 힘드시면 잠시 쉬어 갈까요?”
“아니야, 유모. 난 괜찮아요. 쉴 곳도 없는 데요.”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쉴만한 장소가 눈에 뛰지 않았다. 새벽이라 모든 집뿐만 아니라 상가들의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어쩌다 마주친 주막도 문을 닫아 세 사람이 쉴만한 장소는 없었다.
“공주마마, 날이 밝기 전에 강을 건너셔야 합니다. 중전마마의 지엄한 분부가 계셨습니다. 힘드시더라도 참으셔야 하옵니다. 소인은 공주마마께서 무사히 강을 건너도록 도와 드릴 것입니다.”
젊은 무장은 세희공주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중전의 뜻을 전했다. 공주는 생전 이렇게 오래 밤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몸이 허약해 그동안 어머니 중전 윤 씨의 지극한 간호를 받고 있었다. 엊저녁에도 상궁이 가져온 보약을 마셨었다. 세희공주는 한기(寒氣)를 느끼며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그래, 이제 나는 조선국의 공주도 아니고, 이 한양하고는 오늘로 인연을 끊는 거야. 영원히 나는 아바마마와 모녀의 인연을 정리하는 거야. 오늘 밤을 마지막으로......’
“공주마마, 추워 보이세요?”
“유모, 이제 난 공주가 아니야.”
“네에?”
“이제부턴 일개 여염집 아녀자로 살아가야 돼.”
“공주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
공주는 대답 대신 한숨만 쉬었다. 멀리 흥인문 쪽으로 별똥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감추었다. 개들 짖는 소리도 잠잠해 졌다. 저녁나절 비가 온 탓으로 움푹 파인 길에는 물이 고여 있어 헛디디면 신발이 모두 빗물에 적었다.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세희공주는 이를 악물었다.
‘아아, 어찌하다가 내 신세가 이리 되었단 말인가? 일국의 공주가 어쩌다가 야반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더란 말이더냐? 으흐흐흐......’
세희공주가 절룩거리며 흐느끼자 유모는 가슴이 미어졌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손에서 자라온 공주였다. 비록 자신이 몸에서 나온 자식은 아니었지만 유모는 공주의 눈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공주마마, 울지마셔요.”
유모와 젊은 군관에게 들킬까 걱정되어 속으로 흐느끼던 세희공주는 유모가 속내를 알아버리자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으흐흐흐 흐흑......”
“공주마마, 울지마셔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유모.”
“네에, 공주마마.”
“차라리, 내가 왕실이 아니라 여염집 여식으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그렇다면 이렇게 야심한 밤길을 걷는 일도 없을 테니까요.”
간신히 말을 마친 세희공주는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공주마마, 마마께서는 아직 이 조선국의 공주이십니다. 누가 뭐라해도 조선국의 상감마마의 장녀 이십니다.”
“공주가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이렇게 아바마마의 눈을 피해 야반도주하는 처지인걸요.”
“상감마마께서 언젠가는 공주마마를 다시 부르실 겁니다. 아시다시피 상감마마께서는 성정이 불같으면서도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언젠가는 꼭 공주마마를 다시 부르실 겁니다. 그때까지 옥체 보존하시고 계시면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공주마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난 이제 공주가 아니에요. 영원히 아바마마와 인연의 끈을끊고 살 겁니다.”
“공주마마,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기다리셔야합니다.
세월이 약이랍니다. 그저 모든 것 잊고 사시면 반드시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마마,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날이 밝기 전에 노량진에 도착해야 하옵니다.”
무장이 고개를 반쯤 숙이고 세희공주에게 아뢰었다. 세희공주가
다리가 아파 절뚝거리자 젊은 무장은 난감해 했다.
“공주마마, 소신이 마마를 업고 가겠습니다. 소신에게 업히십시오.”
무장이 공주 앞에 꿇어앉으며 등을 내보였다. 여염집 처자도 아닌 한 나라의 공주체면에 생전 처음 보는 젊은 남자에게 업힌다는 것은 도저히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주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몸은 무엇이든지간에 의탁하고 싶었다.
‘그냥 체면이고 뭐고 다 팽개쳐 버리고 업힐까?’
서너 식경을 쉬지 않고 걸어 온 공주의 발목은 시큰거리고 한기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늑한 궁궐 생각이 간절했다. 어마마마와 상궁들의 보살핌 속에 온갖 호사를 누려온 공주는 하룻밤 사이에 도망자의 처지가 된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공주의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지고 절룩거리는 정도가 심했다.
“공주마마, 소신의 등에 업히소서. 더 이상 무리하시면 옥체 상하실까 걱정되옵니다.”
젊은 무장이 공주 앞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냥 모른 체 하고 업힐까?’
“공주마마, 소신의 등은 바위덩이같이 단단하고 안전하나이다. 안심하시고 업히소서.”
공주가 주저하자 젊은 무장은 공주를 안심시켰다.
‘아, 이렇게 편한 것을......’
젊은 무장은 감히 공주를 업었다는 사실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밤길을 걸었다.
공주의 하체에서 따뜻한 온기가 젊은 무장의 손에 전해졌다. 무장은 묘한 감정에 몸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감히 지존이신 상감마마의 혈육인 공주마마를 자신의 등에 업었다는 사실에 감격해했다. 무장은 힘든 줄 모르고 혼자 걸을 때 같이 빠른 속도로 노량진 맞은편 강나루를 향해 달렸다.
두 식경을 걸었어도 젊은 무장은 전혀 지친기색이 없었다. 용산 쯤 왔을 때 하늘이 다시 컴컴해지기 시작했다. 무장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날이 새기 전에 공주를 한강을 건너 노량진까지 안전하게 모셔야 했기 때문이다. 대궐을 떠나기 전 중전 정희왕후의 지엄한 명이 무장의 귓가에 맴돌았다.
"세희공주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날이 밝기 전까지 한강을 건너야 하오."
"소신, 중전마마의 지엄한 명을 한 치 어긋남 없이 수행하겠나이다. 안심하소서."
대궐 수비군 중에서 가장 무예에 뛰어나고 발 빠른 무장은 힘을 내 걷기 시작했다. 공주 일행이 골목길을 지날 때 마다 개들이 짖어댔다. 거의 강에 다다른 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무장의 이마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을 식혔다.
"잠시 쉬어가시지요? 힘드실 텐데……."
세희공주가 자신을 업고 뛰다시피 걷는 무장에게 속삭였다.
"아니옵니다. 공주마마. 어서 강을 건너야 하옵니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
'아니 무슨 남자가 저리 힘이 좋단 말인가? 쉬지도 않고 서너 식경을 걸어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으니…….'
유모는 뒤뚱거리며 무장의 뒤를 따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렵게 강에 도착한 공주일행은 나루터가 아닌 곳에 도착하여 수풀이 우거진 곳에 몸을 숨겼다. 강가에 세 사람이 탈 배는 없었다. 젊은 무장은 공주와 유모를 안심시킨 뒤 강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젊은 무장은 두 사람이 겨우 탈수 있는 쪽배를 구해왔다.
“공주마마, 어서 타소서. 간신히 나루터에 매어져있는 배를 가져왔나이다.”
"어머나, 그럼 주인 몰래 훔쳐왔단 말이 예요?"
"공주님을 무사히 건네 드리고 다시 그 자리에 배를 가져다 놓으면 됩니다. 잠시 빌린 것이지요."
무장이 공주의 옥수(玉手)를 잡고 공주가 안전하게 배에 타도록 하였다.
몸집이 큰 유모가 앉고 세희공주를 안도록 하였다. 무장이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하자 쪽배는 잔잔한 한강의 물살을 갈랐다. 안개가 자욱하게 강 위에퍼져 한치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쪽배가 강 중간쯤 건너자 바람이 불었다. 파도가 약하게 일어도 쪽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를 탄 세희공주는 욕지기를 느끼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유모, 토할 것 같아요.” “마마, 조금만 참으셔요. 배 멀미를 하시나 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노량진이옵니다.” 유모는 공주의 등을 다독거려주었다.
‘아아, 어지럽고 속이 미식 거려 죽겠는데, 남정네 앞에서 토할 수도 없고......’
“공주마마, 송구하옵니다. 소신이 얼른 배를 저어 강을 건너겠습니다. 조금만 참고 견디세요.”
강바람이 불어 올 때 마다 배가 흔들렸으나 세희공주는 욕지기를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름 강바람은 시원하면서도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얼굴에 물방울이 생기게 하였다. 건너편 노량진에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곳은 한양을 방비하는 군사들이 있는 곳이어서 그쪽으로 배를 댈 수 없었다. 무장은 노량진에서 양화나루 방향으로 한참을 더 내려가 수풀이 우거진 곳에 배를 댔다. 공주 일행이 배에서 내리자 서쪽 하늘에서 천둥이 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공주마마, 부디 옥체를 보존하옵소서. 소신 더 이상 공주마마를 모시지 못한 죄 두고두고 속죄하겠나이다. 부디, 부디 옥체를......”
젊은 무장은 비록 잠깐이지만 공주와의 인연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세희공주는 경복궁에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모시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소임을 다한 젊고 헌헌장부인 무장이 고마웠다. 욕심 같아서는 멀리 동학사까지 자신의 긴 여정에 동행토록 하고 싶었다.
“무사님, 고마워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황공하옵니다. 공주마마.”
무사는 공주에게 큰 절을 올렸다. 공주는 끼고 있던 옥가락지를 빼어 무장에게 건넸다.
“이것은 무사님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인연이 닿으면 먼 훗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마마. 부디 옥체 보존하소서. 소신 공주마마의 은혜를 죽을 때까지 잊지않겠나이다. 조금만 더 가시면 주막(酒幕)과 민가(民家)가 나타날 것입니다. 마마께서 밤새 걸으시느라 많이 피곤하실 것입니다. 좀 쉬었다 가시옵소서.”
젊은 무사는 감격하여 다시 세희공주에게 큰 절을 올렸다.
“공주마마, 아니 아기씨, 어서 가세요. 혹시 상감께서 보낸 병사들이 뒤쫓아 올지도 모릅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그래요. 유모. 어서가요.”
공주와 유모가 강 언덕을 향해 오르려고 할 때 갑자기 뇌성벽력이 쳤다. 공주는 다시 강을 건너는 무장이 걱정되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배는 이미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잠시의 인연이었지만 잘 생긴 무장의 얼굴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세희공주가 지니고 있던 것이 가락지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노여움으로 보아 다시는 대궐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 같으면서도 먼 훗날 자신이 궁궐로 돌아올 경우 무장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옥가락지를 뽑아 주었다.
“제발 무사님이 무사히 강을 건너가셔야 할 텐데. 나무 석가모니불.”
공주는 두 손을 합장한 채 비바람에 파도가 일렁이는 강을 속으로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아기씨,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 무장님은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 나갈 늠름하고 강한 사내입니다. 다시 대궐로 돌아가 중전마마께 공주마마의 무사 탈출을 고할 것입니다. 이제부터가 걱정이옵니다.”
새벽이었지만 세차게 내리는 비와 바람으로 한치 앞도 나갈 수 없었다.
세희공주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언덕 위로 기어올라 풀이 무성하게 자라 길을 분간 할 수 없는 강둑길을 걸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걷다가 멈추고를 반복하면서 양화나루를 향해 걸었다. 한식경 쯤 걸으니 저 앞에 시커먼 물체가 나타났다. 빗속에 보이는 물체는 자그마한 초가집이 분명했다. 앞서가던 유모가 소리쳤다.
“아기씨, 저기 민가가 보입니다요. 민가가 분명해요. 얼른 발걸음을 옮기세요. 저 집에서 잠시 쉬어가야 겠어요.”
콰쾅-
“어머나”
천둥소리에 겁에 질린 세희공주가 유모의 허리를 껴안았다. 여느 때 같으면 지금 쯤 나인들의 궁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푹신한 비단금침 위에서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각이었다. 공주는 물에 빠진 생쥐 같은 자신의 몰골에 그만 울음이 나왔다.
“으흐흐 흐흐......”
“마마, 울지마셔요. 앞으로 이보다 더한 고난이 많을 거예요. 독하게 마음잡수셔야 해요.” 간신히 민가의 처마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렸다. 주막도 아닌 민가를 비가 내리는 새벽에 여자들이 문을 두들긴 다는 것은 큰 용기를 내야 했다. 유모는 차갑게 식어 덜덜 떨고 있는 공주를 꼭 껴안아주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난 유모가 굳게 문이 닫힌 민가의 허름한 문을 두들겼다.
쾅쾅쾅- 쾅쾅쾅-
아무리 대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인기척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 사는 집으로 보기에는 집이 너무 작아보였다.
“유모 추워요. 너무 추워서 못 견디겠어요.”
공주의 이마를 만져본 유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공주의 이마가 펄펄 끓고 있었다.
‘아아, 큰일이로다. 공주마마께서 몸이 편찮으시니 이일을 어찌한담? 그래, 주인이 있든 없든 우선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봐야해.’
“아기씨, 잠시만 참으세요. 쇤네가 들어가 볼게요.”
“남의 집을 주인 허락도 없이 어떻게…….”
유모가 용기를 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 비를 피하기에는 더없이 아늑한 공간이었다. 가운데 무슨 가마 같은 것이 있었지만 유모는 개의치 않았다.
“아기씨, 어서 안으로 드셔요. 안에 아늑하니 비 피하기 딱 좋아요.”
쿨럭, 쿨럭-
세희공주는 기침을 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 온 두 사람은 더듬더듬 거리며 캄캄한 안에 지푸라기 어지럽게 널려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마, 아니 아기씨, 이리 누우세요. 옷이 비에 젖어 물기를 짜야 하겠어요.”
유모는 캄캄한 집안에서 고쟁이만 입은 채 옷을 벗어 물기를 짜내고 공주의 저고리와 치마도 벗게 하여 물기를 짜냈다. 유모는 공주의 차가운 몸을 안아주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 된 두 사람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선잠에 들었던 유모가 이상한 냄새에 눈을 떴다. 공주는 유모의 품에 안겨 잠이 들어 있었지만 냄새에 민감한 유모는 냄새가 너무 심해 잠시도 누워있을 수 없었다. 공주를 살며시 눕혀놓고 유모는 냄새나는 곳으로 손을 더듬거리며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만져지는 가마같이 생긴 것은 상여(喪輿)였다.
헉-
머리칼이 쭈뼛 선 유모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하며 다시 공주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려고 손을 옆으로 뻗자 먼가 물컹하고 이상한 것이 손에 잡혔다. 인골이었다. 반쯤 썩은 시신에서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아악-
유모의 비명소리에 공주는 눈을 떴다.
“유, 유모. 왜 그래?”
“고, 공주마마. 여기서 얼른 나가셔야 합니다. 이곳은 곳집입니다.”
“곳집?”
“상여를 보관하는 고, 곳집입니다. 그리고 썩어가는 송장도 있습니다요. 마마.”
유모는 덜덜 떨면서 말도 하지 못했다.
“송장?”
“어, 어서. 이곳을 나가셔야 합니다. 어서요. 잘못하다간 역병에 걸릴 수도 있어요.”
“역병?”
공주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몸이 굳어 버렸다. 유모는 간신히 공주를 부축하여 곳집을 나와 강둑길을 걸었다.
“아기씨, 많이 놀라셨지요?”
쿨럭, 쿨럭-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비도 그치고 강은 안개에 쌓여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했다. 공주를 부축하여 두 식경 쯤 걷자 나루터가 나타났다.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사공들이 간밤에 내린 비에 배에 찬 물을 퍼내기도 하고 육지에 끌어 올린배들을 다시 강으로 내리기도 하였다. 주막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벌써 손님을 받는 것 같았다.
“아기씨, 저기 주막이 있네요. 어서 저 주막에 들어 쉬셔야 겠어요.”
유모가 주모를 찾자 아직 잠이 덜 깬 삼십 후반의 여인네가 눈을 비비며 부엌에서 나왔다. 주막 마당에는 서너 명의 뱃사공으로 보이는 축들이 모여 간밤에 내린 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공들은 비에 흠뻑 젖은 두 여인을 보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주모, 우리 아가씨가 비를 많이 맞아 신열이 있는데 빈방 있으면 주세요."
"어쩌나, 빈방은 없는데. 저쪽 방이 크긴 한데 남정네 두 명이 조금 전에 들었는데……."
'남정네 둘?'
유모는 남정네가 들어있는 방이라도 공주를 편하게 쉬도록 해주고 싶었다.
"주모, 방삯은 두 배로 줄 테니 방 좀 마련해 줘요. 보시다 시피 우리 아기씨가 신열이 있어 좀 쉬어야 하거든요. 두 남정네를 다른 방으로 가도록 해봐요. 우리 아가씨는 한양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지체 있는 집안의 딸이거든요."
"기다려 보슈."
유모는 이미 남자들 둘이 들어 있다는 방을 향해 갔다.
"유모, 남녀칠세부동석이거늘 어찌 모르는 남자들하고 한 방을 써요?"
"마마, 아니 아기씨, 방이 없다는데 그럼 어쩌겠어요. 방 한쪽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길을 떠나야지요.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염려마세요. 쇤네가 아가씨를보호할 테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생면부지의 남정네들과……."
"남자들은 다른 방으로 들게 했으니, 방값은 두 배로 주세유."
주모가 어려운 일을 했으니 그만한 보상은 받아야 하겠다는 눈치다.
"알았습니다. 고마워요. 내 방값은 두 배로 줄 테니 안심하시고 우선 국밥 두개를 말아 주시구려."
대궐에서 백성들이 먹는 국밥을 구경한 적 없는 공주에게 거친 음식을 올려야 하는 유모는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을 간단히 해결한 공주와 유모는 곧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결에서도 공주는 무장이 무사히 대궐로 돌아갔는지 몹시 궁금하였다.
'무사히 돌아가셔야 할 텐데…….'
신열이 가라앉고 예전의 상태를 회복한 공주는 유모에게 길을 재촉하여 남행을 시작하였다.
2
세희공주를 무사히 탈출시킨 중전 윤씨는 상궁을 시켜 한양에서 젊은 여인이 죽은 상갓집을 수소문하였다. 다행히 흥인문 근처에서 신병을 비관하여 음독자살한 젊은 여인의 상갓집을 찾아냈다. 중전은 내관들을 은밀히 불러 죽은 여인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대궐로 운반해 오도록 했다.
“너희들은 오늘 있었던 일을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간 후에도 절대 발설하여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중전 윤씨는 공주가 궁궐을 빠져나간 일과 여염집 처자의 시신을 궁궐로 운반해온 사실을 알고 있는 상궁 나인들과 내관들을 불러 놓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김상궁은 여염집에서 반입한 여인의 시신에 세희공주의 옷을 입히고 예쁘게 화장을 한 뒤 공주방에 눕혀 놓거라. 누구도 이일을 알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음날 아침, 간밤에 세희공주의 일로 술을 많이 마신 상감은 내관으로 부터 세희공주가 음독(飮毒)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뭐라고, 세희가 음독하였다고?”
“네, 전하. 방금 어의가 공주마마의 옥체를 살피고 왔나이다.”
“아아, 내가 또 살인을 저질렀구나. 앞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내손에 묻혀야 한단 말이냐? 여봐라, 내 직접 공주의 시신을 봐야겠다. 어서 앞장 서거라.”
상감이 막 침전을 나가려 할 때 중전 윤씨가 초췌한 얼굴로 상감의 침전에 들었다. 밤을 꼬박 샌 중전의 얼굴은 푸석푸석해 보였다.
“상감, 세희공주가 간밤에 음독을 하였습니다. 상감에게 호되게 질책을 받고 상심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으흐흐흐......”
중전 윤씨는 눈물을 흘려가면서 상감의 반응을 살폈다.
“그래서 내 공주 궁에 가보려하오.”
“아니 되옵니다. 외명부의 일은 소첩이 알아서 처결할 사안이옵니다. 이미 어의를 불러 검시(檢屍) 한 뒤 입관까지 마쳤습니다. 상감은 간밤에 세희에게 치죄를 하신다고 한 성심을 거두어 주세요.”
“나는 그 애를 용서할 없소.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자식이라 해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오. 그 아이가 죽었다고 하여도 용서할 수 없소.”
“상감, 너무 하십니다. 세희는 상감의 여식이옵니다. 이미 이승에 없는 여식을 치죄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여봐라, 어의를 들라하라.”
상감은 공주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중전이 공주와 짜고 죄를 피해볼 요량으로 자신을 속일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너는 세희공주의 시신을 검시했느냐?”
“전하, 공주마마께서 음독한 사실이 틀림없사옵니다. 소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검시하였습니다.”
상감은 어의가 감히 자신을 속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공주 궁으로 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도승지를 들도록 하였다. 상감은 날이 밝으면 자신이 직접 치죄를 하여 적절한 벌을 내리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희공주가 더욱 미웠다. 죽은 자식에게 측은할 법도 하였지만 아비에게 상처를 남기고 홀연히 자신의 곁을 떠나간 딸이 얄미웠다.
“오늘부로 세희공주를 폐서인하고 왕실족보에서 삭제토록 하시오.”
무서운 일이었다. 차라리 공주의 죄를 묻고 치죄한다면 왕실의 족보에 기록되어 이름은 남을 수 있지만 상감은 딸 세희공주가 얼마나 얄밉고 미웠는지 왕실족보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했다. 중전 윤씨는 딸의 목숨을 구했지만 왕실호적에서 이름이 삭제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조정에서는 세희공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말들이 많았지만 상감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면 대군과 공주의 신분일 지라도 가차 없이 치죄(治罪)하는 상감의 권위에 누구도 세희공주의 일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1453년 계유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은 휘하의 용맹무쌍한 양정(楊汀)과 임운(林芸)등에게 밀명을 내렸다. 밀지의 내용은 자신의 대권(大權)을 가는 길에 가장 큰 걸림돌인 영의정 황보 인(皇甫 仁)과 좌의정 김종서(金宗瑞)를 척살하라 임무였다. 문종(文宗) 임금은 죽기 전 자신의 보위를 물려받을 노산군(魯山君)의 안위를 부탁 할 정도로 두 사람은 문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 문무(文武)를 겸한 수양대군은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아우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역시 야망이 크기는 수양에 버금갔지만 그의 수하에는 한명회(韓明澮)와 권람(權擥)같은 모사(謀事)꾼이 없었다.
수양은 자신의 앞날에 훼방꾼으로 등장한 김종서와 황보인만 제거하면 탄탄대로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양대군은 상감에게 김종서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기에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로 우선 죽였다고 아뢰고, 왕명을 빌어 대신들을 소집한 다음 홍윤성(洪允成) 등을 시켜 황보인,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등을 죽였으며, 정분(鄭苯)과 조수량(趙遂良) 등은 귀양 보내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다. 수양의 예측대로 상감을 보필하던 두 거물과 중신들이 제거되자 조정에서는 감히 수양대군에게 맞설 자가 없었다.
역적으로 몰린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金承珪)가 죽임을 당하고 김승규의 처(妻)와 딸은 수양의 편에 섰던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된 정인지(鄭麟趾)에게 하사되어 하루아침에 당당했던 사대부가의 아녀자에서 권신(權臣)의 성욕의 제물로 전락했다. 김종서 일족이 몰살되는 과정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났던 때 김종서의 손자는 멀리 집을 떠나 있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충청도 어느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반역의 잔당을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전국 방방곡곡에 숨어있던 김종서를 비롯한 역신(逆臣)으로 몰린 혈족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가는 곳마다 간신히 도망쳐 목숨을 건진 역신들의 혈족들의 얼굴을 그린 방(榜)이 붙어있었다. 충신들의 혈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점점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지난 가을부터 이십 초반의 훤칠한 장부(丈夫)가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동학사 뒤편 남매 탑에 나타났다. 장부는 끝없이 속으로 염불을 외며 남매 탑을 돌고 돌았다. 장부의 탑돌이는 어느새 주지스님을 비롯해 모든 스님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두 손을 합장한 채 밤이슬을 흠뻑 맞고 달이 서산에 기울 때 까지 청년은 쉬지 않고 탑을 돌았다. 마침 잠이 안 와 맑은 공기를 쐴 겸 주지스님이 동학사 뒤편 암자에 올라갔다. 지나가려고 하는데 한 청년이 기진맥진 한 채 겨우 발걸음을 떼며 탑 주위를 돌고 있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
청년은 모든 기력을 다 쏟아 낸 듯 이마와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이 광경을 주지스님은 멀리서 몸을 숨기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은 발걸음조차 떼기가 힘든 듯 장승처럼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달이 거의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렸고, 이따금 늑대 울음소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남매 탑을 돌기 시작하다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저런- 주지스님이 달려가 쓰러진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은 감은 상태였지만 숨을 몰아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주지 스님이 맥을 집어보니 가늘게 맥박이 뛰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몸으로 탑돌이를하였을꼬?”
주지 스님은 상좌승을 불러 청년을 주지 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로 옮기도록 하였다. 주지스님이 청년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산촌에서 막 자란 사람 같지 않았다.
“으음……, 기골이 장대하고 골격으로 보아 보통집안의 자손이 아니로다.
무슨 사연이 있어 이 야심한 시각에 탑돌이를 하고 있었을까?”
주지스님은 청년의 상의를 벗기고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청년의 몸에서는 땀에 절은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초췌한 것으로 보아 제대로 먹지못한 듯 했다. 그러나 반듯한 외모는 기품이 있어 보였다. 청년은 이틀이 지나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 제가 어떻게 여기 누워있는것인지요?" "나무관세음보살. 처사께서 남매 탑을 도시다가 그만 쓰러지셨습니다. 부처님의 가호가 있기를 천만다행입니다. 큰일 날 뻔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지만 현기증세가 있는 것 같아 주지스님은 그냥 자리에 눕도록 했다.
"보아하니 처사는 이곳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스님이 청년의 얼굴 뚫어지게 바라보며 청년의 입에서 어떠한 대답이 나올지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러나 청년은 눈을 지그시 감고 괴로운 듯 헛기침만 하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으음, 분명 말 못할 곡절이 있는 게 분명하군.'
주지스님은 괜한 물음으로 청년이 번뇌에 쌓이게 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말씨로 미루어 한양에서 왔다고 판단한 주지스님은 이 청년이 혼자멀리 계룡산까지 들어와 탑돌이 하는 사연에 대하여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다.
'혹여, 이 청년이 지난 계유년에 한양에 분 피바람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
그렇다면 충신의 혈육이 분명할 터. 청년의 눈동자에 알 수없는 슬픔과 원한이 서려있는 것으로 보아 가슴에 맺힌 한이 깊은 것 같기도 한데…….'
"스님."
청년이 조용히 주지스님을 불렀다. 주지스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말씀하세요."
"인생이란 무엇인지요?"
"인생?"
"네에, 인생이 무엇인지 몇 달을 두고 생각해보아도 도무지 해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소승은 이 적막강산 같은 절에 있을 까닭이 없지요."
"그래도 스님은 많은 공부를 해오셨고, 천지만물의 생멸(生滅)에 대하여 도통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허허허허허허. 그리 보아주셨다면 소승,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스님, 알려주세요. 인생이 무엇인지요?"
"나무아미타불."
스님은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듯 했다. 청년은 스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스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사는 세상을 얼마나 사시었소?"
주지스님께서 청년에게 나이를 물었다.
"올해로 십팔 년을 살았습니다."
"그래 십팔 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소?"
"……."
스님의 물음에 청년은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천정만 바라보았다.
"스님, 지금까지 저는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으음- 아주 확실한 답변이구먼."
"나무관세음보살. 송구합니다. 스님."
그때 동자승이 차를 끓여 내왔다. 스님은 누워있는 청년에게 차를 권했지만 청년은 나중에 마시겠다고 했다. 차를 다 마시고난 스님은 청년에게 법문을 시작했다.
"나무아미타불. 요즘은 인생에 대해서 가르치려 하는 사람도 없고 배우려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대부분 인생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간답니다. 인생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 동안 겪게 되는 과정을 인생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고명한 학자나 고승대덕도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그 속에 인생의 모든 의미와 존재 가치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네는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주어진 인생의 굴레 속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고 목적지를 정한 후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진정한 삶을 모르고 사는 것과 같으며 삶의 의미와 결과가 애매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오늘날 사바세계가 점점 어두운 이유는 중생들 각자 나름대로는 정도를 걷는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실과 동떨어진 일을 하고 살아가고 있기에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랍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청년은 주지스님이 법문을 설하는 사이 일어나 앉아 물 흐르듯 이어지는 주지스님의 법문을 경청하고 있었다. 주지스님은 잠시 설법을 멈추고 청년의 안색을 살피더니 빙그레 웃으며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스님의 법문은 계속 이어졌다.
"인생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알고 모든 혼란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은 무의미한 돌덩어리가 아니라 완전한 신성에서부터 나타난 것이며 완전한 이법과 뜻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들이 보고 듣고 활동하는 현실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신성한 근원과 높은 차원의 의식이 존재하는 초월계(超越界)와 잘못 된 영혼들이 가는 지옥계(地獄界)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움직임 속에는 그 질서를 완전히 유지하기 위한 순환의 법칙과 인과의 이치가 존재하며 이러한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을 부처님은 정견(正見)이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명의 완성에 이르러 신성과 하나 되신 성자(聖子)들이 지혜의 눈으로 분명히 밝혀 놓으신 일인데 지금은 진리가 흐려지고 사대부중의 마음이 어두워져 이것을 느끼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삼라만상은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나타나며, 원인이 있는 것은 반드시 결과가 따르는 것이 우주의 영원한 법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한 생을 마쳤다고 해서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다시 태어나 끝없이 자신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끝없이 계속되는 순환의 과정 속에서 각자의 영혼은 자기가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각자 다른 운명의 근원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개개인이 각기 다른 삶을 산 결과를 자신의 영혼 속에 담아 태어나기 때문에, 똑같은 사물을 보아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는 것이 다 다르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청년은 속으로 계속해서 부처를 찾고 있었다. 주지스님은 차를 한잔 마시고 다시 법문을 이엇다.
"사람의 의식은 자기 속에 자기가 지은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의식이 변화하는 현상을 살펴보면 각각 보고, 듣고, 겪었던 일들이 자기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것이 쌓여 의식의 변화를 가져 오게 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어둡고 잘못된 것이 들어가면 그만큼 잘못된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지고, 밝고 좋은 것이 들어가면 그만큼 맑고 좋은 의식의 근원이 만들어져 그 미래의 운명이 결정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사실로 존재하는 이치 즉 진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모두 자기 속에 남게 되며, 잘못된 모든 원인이 자신의 미래를 불행하게 하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는 이치를 이해한다면 다시는 어둠을범하지 않을 것이며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아무렇게 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이 이렇게까지 어두워진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진리와 실상의 모습을 알지 못하여 함부로 행동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기때문이며, 진실에 대하여 바른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자가 무지한 생각에 옳지 않은 일을 해서 재물을 모았다고 한다면 그 재물은 오히려 그 사람을 더욱 괴롭히는 원인이 되어 온갖 시비와 불행을 불러올 것이며, 갈등과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생은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이유를 깊이 사색하며 찾아내고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면 성현(聖賢)의 말씀을 따르며 끊임없이 사색을 함으로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어쩌면 인생은 그 이유를 찾다가 소진해 가는 촛불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이 꺼지기 전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이유를 알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면 해탈(解脫)하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소승이 알고 있는 인생이란 이 정도 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주지스님의 긴 법문이 끝났다. 청년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간신히 후들거리는 자세로 일어나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그럼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그리된 것도 어떤 원인이 있어 그리되셨단 말씀인가? 아냐, 두 분은 매사가 정정당당했고 조금도 잘못된 일은 하지 않으셨어. 그런데도 수양대군한테 목숨을 빼앗기셨어. 법문대로라면 두 분이 이미 잘못될 운명을 타고나셨단 말씀인가?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청년은 머리를 감싸더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스님, 한 가지 여쭤도 되겠는지요?"
"나무관세음보살. 말씀하세요."
"저의 관상을 보아주시겠는지요?“
"허허. 관상이라?"
"네. 저의 관상을 좀 보아주세요."
"나무아미타불. 양이 있으면 반드시 음이 있게 마련이지요."
"네에? 무슨 말씀이신지요?"
"빈도는 관상공부를 하지 않아 관상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관상이 뭐 별거겠습니까? 사람의 얼굴이나 신체 골격 등 신체의 외면을 보고 그 사람의 과거나 미래의 또는 현재의 운수를 점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요."
"스님, 저의 미래를 살펴주세요."
"나무아미타불. 불자로서 소승은 감히 사바의 인연에 대하여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님, 전 지금 제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 쫓기고 있는 처지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죽고 사는 것은 본인이 지은 업에 따르는 것입니다."
"스님."
"처사는 천수를 누릴 것이오. 그대의 혈육들은 이미 다른 세계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대만큼은 주어진 이승의 시간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은 듯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스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너무 집착하면 아니 됩니다. 인연은 선연이나 악연으로 변질 될 수 있습니다. 악연은 또 다른 악연을 낳을 뿐입니다. 삼라만상의 인연에의해 태어났다가 인연에 이해 소멸 될 뿐 입니다. 제행무상이지요.나무아미타불."
주지 스님은 이미 청년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스님, 저의 할아버지는 ……."
"나무관세음보살. 처사는 아무 이야기하지 마시고 여기서 몸과 마음을 맑게 하세요. 지금 처사께서 하실 일은 그것이 최선입니다. 처사께서 이곳 동학사에 발길을 닿은 것도 인연이고 앞으로 또 다른 만남도 이미 지어진 숙연입니다."
'아아, 스님은 이미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구나. 어쩌면 나의 미래까지도…….'
“스님, 이 어리석은 중생, 스님께 의탁하여 평생 부처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
“스님, 평생을 부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
“스님, 지나간 세월을 모두 잊고 불법에 귀의코자 하옵니다만......”
“......”
“스님, 이놈을 제자로 받아 주실 수 없으신지요?”
“......”
“스님,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전 이제부터 오로지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따르면서 사바와의 인연을 끊고 불법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스님, 스님, 허락해 주세요.”
“......”
청년의 간청에 주지스님은 눈을 감고앉아 잘 여문 밤알만한 염주 알을 굴리면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방안에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청년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청년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혔다. 청년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멀리서 늑대 울음소리와 이름 모를 산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노스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합장을 한 채 속으로 비명에 간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많은 혈육들의 왕생극락을 위하여 기도를 하였다. 이 년 전 악몽이 떠올랐다.
청년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과거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보름 동안의긴 여정(旅程) 끝에 한양에 거의 도착할 무렵인 시월 중순경 청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수양대군의 칼날에 무참하게 척살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발길을 남도(南道)로 돌려야 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전전하던 청년은 어디를 가도 역적의
무리를 소탕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룻밤도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낮이면 허름한 절간이나 폐가에 숨어들어 잠을 청하고 밤이면 정처 없이 유랑의 길을 걸어야 했다. 하삼도(下三道)를 거지처럼 떠돌다가 겨우 찾아든 곳이 계룡산 자락이었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4대 명산 중 하나로 일컬어왔으므로 주변에 백제 유적과 고찰 등이 많이 있었다. 계곡마다 소(沼)와 폭포가 절경을 이루고, 삼국시대부터 큰 사찰(寺刹)이 창건되어 동쪽으로는 신라 경덕왕 때 회의(懷義)가 창건한 동학사(東鶴寺), 북서쪽에는 갑사(甲寺) 남서쪽에는 신원사(新元寺)가 삼림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이성계가 조선의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신도안(新都內)이 위치하고 서쪽의 용문폭포, 동쪽의 은선폭포, 갑사의 구곡(九曲), 동학사 계곡 등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토속신앙을 비롯한 유사종교가 번성한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동학사는 주위에 여러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나무지장보살마하살. 부디 할아버님과 아버님께서 극락왕생하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아니 되오.”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노스님이 갑자기 방안의 정적을 깼다.
“스님, 아니 된다니요? 무엇이 아니 된다는 말씀이신지요?”
“나무아미타불. 처사는 불자의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스님, 불자가 될 수 없다니요? 무슨 뜻인지 저는 전혀 못 알아듣겠습니다.”
“......”
“스님!”
“......”
“제가 불자가 될 수 없다면 세상을 살아갈 방도가 없습니다. 부디 불자가 되도록 허락해 주세요. 스님.”
“......”
“스님, 부탁드립니다.”
주지스님은 다시 장고(長考)에 든 듯 다시 두 눈을 감고 염주 알만 굴리고 있었다.
‘아아, 스님께서 나의 가력(家歷)을 아시고 내가 불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 걸까?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세속에 미련을 떨치고 새로운 세상을 살고 싶은데 왜 아니 된다고 하시는 걸까?‘
“처사, 잘 들으세요.”
주지스님은 청년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법문(法門)을 시작하였다.
“처사는 이미 숙연(宿緣)을 맺은 귀인(貴人)과 인연의 끈이 닿아 있습니다.
머지않아 그 귀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네에? 곧 귀인을 만나게 된다고요?”
“세속에서는 사람이 한번 태어나 죽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처사께서 오늘과 같이 혈혈단신이 된 것도 이미 정해진 운명이고 새로운 인연의 고리가 맺어지게 될 일도 모두가 삼생(三生)에 걸쳐 이어진 업(業)의 질긴 끈 때문입니다.
‘업의 질긴 끈?’
청년은 생전 처음 듣는 업이라는 생소한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업이란 사바의 사대부중(四大府衆), 즉 우바이, 우바새, 비구, 비구니들이 살아 생전 행하는 것으로 사람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 타인의 여인을 범하는 등의 육체로 짓는 행위의 신업(身業)과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 시키고,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악한 말을 하는 등의 말로 짓는 행위의 구업(口業)과 욕심내고, 성내고, 진리를 믿지 않는 마음으로 짓는 행위의 의업(意業) 등 세가지 업으로 구분하는데 여기에는 인과응보의 철저한 원칙이 따릅니다.
즉, 선한 행위에는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고, 악한 행위에는 나쁜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작은 선(善)이라도 기꺼이 받들어 행하고, 비록 작은 악(惡)이라할지라도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나아가 육도의 윤회의 사슬을 끊고자 한다면 선도, 악도 업(業)이므로 그 두 가지를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향은 다 타서 사라진 뒤에도 향기가 옷에 배어들어 오래오래 남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생전에 지은 업(業) 속에 남은 어떤 흔적이나 세력은 무의식적 존재 속에 머물러 있다가 기회가 오면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할뿐더러 존재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래를 만드는 원천이 된답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진 것을 오늘에 놓고 미래에 갈 것도 오늘에 놓아야하며, 과거에 진 업을 오늘에 놓는다면 미래에는 업이 붙을 일이 없게 되지요. 현재에 붙을 것이 없다면 어찌 미래에 붙을 것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 놓고 들어가면 놓는 대로 지옥고가 찰나찰나 무너져 내려 업도 윤회도 없게 된답니다.“ 주지스님은 더욱 알쏭달쏭한 말씀으로 청년의 마을을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렇게 무참히 돌아가신 것도 업을 쌓은 결과란 말인가? 아아, 무섭다. 무서운 일이로다. 그런데 숙연(宿緣)을 맺은 귀인(貴人)이 이미 이곳에 와 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가 없도다.‘
청년은 점점 알 수 없는 법문을 펼치는 노스님이 수수께끼 인물 같아 보였다. "처사는 이곳에 유하면서 잠시 마음을 평온케 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청년은 하는 일 없이 동학사에 머물며 소일하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 마당을 쓸고 식사를 준비하는 스님들 일을 돕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계룡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며 스님의 법문을 수백 수천 번도 넘게 되뇌며 곧 만나게 될 귀인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다.
어느 날 늦은 밤 청년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동학사에 나와 동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달이 중천에서 밤길을 밝혀주었다. 늘 쉬어 가던 바위쯤 내려왔을 때 청년은 얼른 나무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너럭바위에 웬 여인이 앉아 있었고 옆에 약간 뚱뚱해 보이는 중년 여인이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두 여인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청년은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몸을 숨길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나무 뒤에 서서 여인들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바위에 앉아있는여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청년의 시야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은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귀한 티가 나보였다. 분명 여염집 여인은 아니듯 했다.
'이상하다. 이 야심한 밤에 절에 오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일로 여인들이 절을 찾아오는 걸까? 다가가서 말을 붙여볼까?'
청년이 혼자 말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절 쪽에서 내려오는 불빛이 보였다.
청년은 얼른 나무 뒤에서 나와 도랑 아래로 몸을 숨겼다. 등불이 가까이 다가왔다.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주지스님과 동자승이었다.
"지금쯤 오실 때가 되었는데……."
"스님, 이 밤에 누가 오신다고 마중을 나가시는 것인가요?"
앞서서 걷던 동자승이 주지스님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아주 귀한 분이시란다."
"귀한 분이요? 스님, 누군데요?"
"너는 알 거 없느니라. 어서 앞서 가기나 하거라."
수수께끼 같다고 생각했던 주지스님은 동자에게 더욱 알쏭달쏭한 말만 했다.
"스님, 저기 웬 사람들이 있어요. 저기 바위에 ……."
"오오, 그래, 저기 오셨구나. 오셨어."
"스님께서 말씀하신 귀한 분이 바로 저기 있는 여자들인가요."
"쉿, 조용히 하거라. 아주 귀한 분이시란다."
주지스님은 달빛을 받고 너럭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들도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불빛을 보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등불 뒤에는 분명 스님이었다.
'아, 어마마마께서 미리 연통을 보내셨구나.'
젊은 여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스님을 향해 합장을 하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나무관세음보살. 공주마마,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크셨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소녀, 스님을 뵙습니다."
"스님, 그 귀하다고 하신 분이 바로 공주마마님이셔요?"
주지스님 곁에 있던 동자승은 공주마마란 말에 깜짝 놀라며 주지승에게 물었다.
"쉿, 지금부터 너는 방금 네가 보고들은 바를 누구에게도 절대로 발설하여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네에. 스님. 명심하겠습니다."
다행히 도랑에 있던 청년은 주지스님과 여인들이 주고받던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못했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바람소리와 풀벌레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저 여인들과 주지스님은 알고 있는 사이로 구나? 어떤 사이기에 주지스님이 마중을 나오셨을까? 혹시 저 여인이 며칠 전 주지스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그 귀인 아닐까?'
청년은 밤늦게 동학사를 찾아 온 여인의 정체가 더욱 궁금했다.
"스님, 부탁이 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말씀하세요. 마마."
"지금부터 소녀를 그냥 아기씨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이미 아바마마에게 버림받은 자식입니다. 그냥 여염집 소녀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냥 아기씨라고 불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중전인 정희왕후로 부터 공주의 전후사정에 대하여 전갈(傳喝)을 받은 주지스님이지만 호칭을 여염집 처자처럼 아가씨로 불러 달라는 세희 공주의 부탁을 듣고 당황하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아미타불. 마마, 잘 알겠습니다. 그리 부르겠습니다. 어서, 요사채로 드시지요. 먼 길 오시느라 몹시 피곤하실 텐데요."
"그런데 스님, 달님이 밤길을 환하게 비춰주시는데 왜 등불을 드셨어요?"
"나무관세음보살. 등불은 어두음을 비추는 존재입니다. 비록 달이 떠있다고는 하나 귀한 분이 오시는데 어찌 등불을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소승은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닌답니다. 또한 이곳 계룡산은 너무나 험하고 깊은 산이라 산짐승들이 많습니다."
"네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고맙습니다 스님. 이리 마중을 나와 주셔서요."
"나무관세음보살."
주지스님은 공주와 유모를 모시고 산사로 돌아갔다. 청년은 멀찌감치 네 사람과 일정 간격을 두고 뒤를 밟았다.
동학사에 온 뒤로 세희공주는 두문불출했다. 하루 종일 요사채에 들어 앉아 오로지 아미타경(阿彌陀經)과 지장경(地藏經)을 읽으며 아버지 수양의 손에 비명횡사한 수많은 영혼들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궁궐에 있을 때부터 공주는 늘 불경을 접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아랫사람들의 웬만한 흠은 덮어 두거나 모르는 체 하여 보이지 않는 자비를 베푸는 등 궁녀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보살로 통하였다.
딸의 독실한 불심에 어머니인 정희왕후 역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다.
중전 전에 불상을 모시고 밤낮으로 지아비와 자식들의 안녕을 빌었다. 사남매 중에서도 가장 똑똑하여 종종 형제간에 부왕의 정사(政事)나 국가의 대소사를 놓고 언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세희공주를 무사히 야반도주 시킨 중전은 공주가 무사히 동학사에 도착하였는지 몹시 궁금하였다. 공주를 야반도주 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내금위(內禁衛) 소속 위장(衛將)을 중전은 총애하여 중전이 궁궐 밖으로 행차를 하거나 궁궐 내 행사가 있을 때면 위장에게 자신을 호위토록 하였다. 세희공주가 대궐을 떠난 지한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밤 중전은 위장을 중궁전으로 은밀히 불렀다.
“중전마마, 신 박경언, 대령하였습니다.”
“오오, 어서 오세요. 박 위장, 별고 없지요?”
“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위장께서 계룡산 동학사에를 좀 다녀오셔야 겠어요. 세희가 잘 도착하였는지 몹시도 궁금하고, 그 애 건강은 상태는 어떤지 또 하루 밥 세끼는 차려 먹는지 여러 가지가 걱정이 되는구려.”
중전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한숨을 쉬었다.
“중전마마, 너무 걱정하지마소서. 소장이 동학사엘 다녀오겠나이다."
"고맙구려. 내 그대의 충심에 언젠가 꼭 보답하리다.“
“황공하여이다. 중전마마.”
“그럼, 내일 아침 다시 들려주세요. 위장 편에 전할 것이 있어요”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중전마마.”
“그대가 동학사를 다녀오는 일을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절대 아니 되오. 명심하세요.”
조정에서는 한명회와 권람이 김종서와 황보인을 따르던 세력들과 완전히 잡히지 않자 김종서와 황보인의 친인척들의 잡아들이라는 명을 전국 팔도에 내렸다.
지방의 수령들은 공을 세우기 위하여 산속 깊이 있는 사찰과 암자, 동굴, 화전민들까지 이잡 듯 수색을 하였다. 심지어 전라도와 경상도 제주도등 섬 지방 까지 병사들을 파견하여 충신들의 혈족들을 잡기 위하여 혈안이었다. 이 소문은 곧 동학사에 숨어있던 청년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아아, 여기 숨어 있다가 관군에게 잡히는 거 아닌가? 그러나 절보다 숨어 지내기 좋은 곳도 없는데. 여길 떠나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리고 곧 만나게 된다는 귀인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며칠 전 이곳에 온 그 여인은 나와 숙연이 닿았다는 귀인은 아닌 것 같은데......’
청년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 청년의 사정을 잘 아는 주지스님은 청년에게 가급적 낮에는 경내를 돌아다니지 말고 새벽 일찍 천황봉이나 연천봉 또는 깊은 계곡에 은거하고 있다가 밤에 내려오라고 하였다. 어느날 청년이 새벽에 용문폭포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밤이었다. 늘 다니던 동학사 뒤편 암자를 지나려고 하는데 암자 앞에 있는 남매 탑을 돌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상현달이 산봉우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염주를 손에 감고 합장한 채 여인을 속으로 경전을 읊고 있었다. 청년은 멀리서 여인이 탑돌이 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졌다. 자신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청년은 능인보전(能人寶殿) 앞 석탑에서 탑돌이 하던 여인이생각났다.
'그래, 그때도 묘령의 여인이 보름달 뜨는 초저녁이면 나타나 나의 관심을 끌곤 했었지. 그 처자는 지금쯤 극락왕생했을까? 나에게 잘 대해주었는데…….'
청년이 공부하다 머리가 무거울 때면 능인보전에 들어 부처님의 상호를 바라보며 멀리 한양에 있는 부모님을 생각하거나 부처님께 천배를 올리며 과거급제를 할 수 있도록 자비를 기대하곤 했다.
우연히 보름달 뜨는 어느 초저녁 청년은 묘령의 여인이 능인보전 앞에서 탑돌이 하는 여인을 보게 되었고 청년은 그 여인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여인은 상당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자주 함께 탑돌이를 하면서 자연히 인사를 건네는 사이가 되었고 오래지 않아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여인은 유점사 근처 마을에 살고 있는데 얼마 전 역병으로 지아비를 잃고 부처님께 귀의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청년의 설득으로 마음을 접고 하산하게 되었고 이후로 여인은 자주 유점사에 들려 청년의 옷가지며 보약을 지어와 청년에게 전해주곤 하였다.
청년의 여인의 정성에 감복하여 종종 유점사를 내려와 여인과 함께 밤을 지새우곤 했다. 여인은 대 저택에서 몸종과 둘이 살며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후 청년이 과거공부를 마치고 유점사에서 나와 한양으로 가는 길에 잠시 그 여인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서방님, 저는 세상을 살아갈 희망이 없습니다. 저와 이곳에서 천년만년 함께 살면 아니 되겠는지요?"
청년은 며칠을 두고 고민하였지만 한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과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여인의 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청년과 마지막 밤을 보내던 날 새벽 청년이 막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여인은 대들보에 목을 매었다.
혼비백산한 청년은 가슴을 치며 후회하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누가 볼까 겁이나 청년은 여인의 시신을 반듯하게 이불위에 누이고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와 한양으로 향했다.
'서방님, 저는 세상을 살아갈 희망이 없습니다.'
"아, 그때 내가 며칠만 더 머물었어도 그 여인이 죽지 않았을 것을......."
청년이 중얼거리며 탑돌이 하는 여인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청년은 그때 그 여인과 비명에 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혼을 달래주고 싶은 마음에서 탑돌이를 하고 싶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
‘아, 저 여인이 반야심경을 읊고 있구나.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 야심한 시각에 탑돌이를 한단 말인가?’
청년은 또 다른 자신을 보는 듯 한 착각에 빠졌다.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뒤를 따르면 반야심경을 외우며 탑돌이를 하였다. 장소와 시간이 다를 뿐 자신이 금강산 유점사 능인보전 앞에서 탑돌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여인의 얼굴이 궁금했다. 염불을 외면서 큰 기침을 하고 인기척을 냈지만 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계속 탑을 돌고 있었고 청년도 여인과 십여 발짝 간격을 유지하며 탑을 돌고 있었다. 여인의 염불이 잠시 멈추면 청년은 여인의 뒤를 이어 염불을 이어나갔다. 달빛 아래 여인의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며칠 전 밤 우연히 본 그 여인이 틀림없었다.
'꽤 지체가 있어 보이는 가문의 여식(女息)같아 보였는데. 이 밤에 잠도 못자며 탑돌이 하는 여인과 나와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냐, 우연이겠지. 몸이 아파 휴양차 이곳엘 왔거나 주지스님과 예전부터 무슨 관계가 있어서 왔을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저 여인에게서 알 수 없는 기가 느껴지지? 마치 나를 잡아끄는 이상한 힘이 느껴져.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참으로 이상해…….'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도대체 저 남자는 누구이며, 어째서 내 뒤를 따르며 같은 반야심경을 읊고 있는 것 일까? 내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내 뒤를 이어 염불을 하다니 참으로 기이하구나. 궁금한데 누굴까? 이 밤에......’
공주는 갑자기 자신의 뒤를 따르며 염불을 하는 청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야심한 밤에 우연히 같은 염불을 외며 탑돌이를 하게된 기이한 인연을 공주는 이미 예정 된 인연 같다고 생각했다. 공주와 청년은 쉬지 않고 탑을 돌았다.
이승에서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친혈육들이 깊은 밤,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탑돌이를 하는 기연(奇緣)에 대하여 부처님만이 그 깊은 사연을 아실 것 같았다. 그때멀리서 주지 스님이 남녀의 탑돌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스님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 반야심경을 읊고 있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아, 참으로 기이한 숙연이로다. 두 사람은 이미 마음이 통하였구나. 부처님께서 두 사람의 연을 잇고 계시구나. 사람의 인연 또한 맺어지면 언젠가는 끊어지게 마련이고 그 질긴 인연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반복 되는 것인데.
나무관세음보살. 나무 석가모니불. 저 두 남녀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있어야 할 텐데…….'
달이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너무 어두워 탑돌이 하기에는 무리일 듯 했다. 그러나 공주와 청년은 쉬지 않고 반야심경을 읊으며 탑돌이를 계속하였다. 종종 별똥별이 앞산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멀리서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공주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유모가 남매 탑을 향해 올라 오다가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