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의 이중적 사역(2)/ 내적인 생명의 은사와 외적인 능력의 은사(고전 12:3-7, 8-13)
*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예수의 소문이 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많은 교파가 성령의 이중적 사역은 물론 성령세례를 부정하고 있으며, 심지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목사나 신학자가 전체의 70%에 이른다고 한다. 나는 한국교회의 이념화, 세속화, 저질화, 부패의 위기는 바로 이에 기인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외적인 은사>
주님은 승천하신 후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행 2:36). 승천하신 주님은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다. 승천하신 주님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이시며(히 8:6), 하늘에서 그분의 사역을 집행하고 계신다.
히브리서 8장 6절은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고 말한다.
이 사역의 수행을 위하여 아버지께로부터 능력의 성령을 받아 부어주신 것은 그분의 승천 안에서이며(행 2:33), 교회의 건축을 위해 은사들을 주신 것도 그분의 승천 안에서이다(엡 4:8-11). 그러므로 그분의 승천 안에서 오순절에 부어진 외적인 능력의 성령은 전적으로 그분의 사역과 일을 위한 것이다.
사도행전 2장 33절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2장 1-4절은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있었더라.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맹렬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말한다.
주님의 승천 후 오순절 날 임한 성령은 급하고 맹렬한 바람으로 상징된다. 이것은 오순절 날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있었던 제자들이 체험한 그들 위에 임한 능력의 성령이다. 호흡은 바람과 가깝다. 호흡이 강화될 때 그것은 바람이 된다.
바람이 부드럽고 잔잔하면 그것은 호흡이 된다. 호흡과 바람은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다. 한 가지 것의 두 방면이다. 생명을 위한 호흡이 강화되어 역사될 때 그것은 능력을 위한 바람이 된다. 호흡을 위한 신선한 공기는 강한 바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24장 49절은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고 말한다.
이것은 또한 위에서 오는 외적인 성령을 입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겉옷의 영은 경찰관의 제복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위임을 집행하는데 사용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의 “숨을 내쉼”과 사도행전 2장 2절의 “바람”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요한복음 20장 22절의 “숨을 내쉼”은 본질적으로 제자들의 영적 존재와 영적 생활을 위해 생명주는 영을 제자들 안에 넣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외적 은사는 원수와 싸울 때 필요한 무기이다. 마태복음 12장 28절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2장 8-11절은 성령의 외적 충만으로 나타나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방언, 통역 등 아홉 가지 은사에 대한 말씀이다.
사도행전 2장 2절의 “바람”은 이미 속에 본질의 영을 받아들인 믿는 이들 위에, 능력의 영을 부어 주기 위한 것이다. 능력의 영이 부어진 것은 믿는 이들의 영적 존재나 영적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다. 능력의 영이 부어짐은 믿는 이들의 하나님 일의 사역과 움직임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본질적인 면, 곧 내적 은사는 생활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경륜적인 면, 곧 외적 은사는 사역,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일을 위한 것이다. 숨을 내쉼은 생명을 위한 것이지만, 바람이 부는 것은 능력을 위한 것이다.
<성령의 이중적 사역>
이제 위의 내용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의 두 방면에 대한 성경의 말씀들을 묵상해 보자. 마태복음 1장 20절은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본질적인 방면, 곧 내적인 은사를 가리킨다.
그분 안의 성분은 완전히 성령의 성분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3장 16절에서 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이미 성령으로 잉태되어 성령의 성분으로 충만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실 때 그분 위에 성령이 임했다.
그로부터 예수님은 공생활의 능력 있는 사역을 시작하실 수 있었다. 구약의 예표에서 이것은 레위기 2장 1-6의 소제와 관련된다. 소제의 기록을 보면 고운 가루는 변함이 없지만 기름에 두 방면의 적용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곧 반죽 되는 것과 부어지는 것이다. 반죽 되는 것은 내적인 것을 의미하고, 위에 부어지는 것은 외적인 면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기름에 적용된 두 방면의 예표, 곧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의 예표를 볼 수 있다.
또한 제자들 역시 두 방면의 체험을 가졌다. 부활하신 날 저녁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호흡을 불어넣으셨다. 요한복음 20장 22절은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그들 안으로 숨을 불어넣으시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이때 제자들은 내적인 방면(은사)의 성령을 받았다. 그러나 요한복음 20장 22절의 내용을 오순절과 결부시키거나 애매하게 해석하면 안 된다. 그리고 10일 후 오순절 날에 승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위로부터 부었을 때 외적인 방면(은사)의 성령을 체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 자신을 제자들 안으로 숨을 불어넣으신 후에, 그분은 어디에 계셨는가? 그분은 이제 본질적인 영, 곧 내적인 은사로서 그들 안에 거하고 계셨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는 믿음에 인치신 것이다. 이것을 거듭남(중생)이라고 한다.
우리 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도 성령의 두 방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이 두 방면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합당한 체험으로 인도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의 변화를 위해서는 강한 바람의 체험이 중요하다.
강한 바람의 체험, 그것은 나의 경우, 지난날 절박했던 고난의 시기 가운데서 체험한 것으로, 나의 영적인 성장과 능력 있는 은사의 사용과 나의 신학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고난은 신비이다.
고난이란 한 면에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성령의 징계이며 축복이다. 특히 우리의 영적인 진보를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외적인 성령의 체험이 필수적이다.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거듭남과 성령세례는 다른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예수의 소문이 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많은 교파가 성령세례를 부정하고 있으며, 심지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목사나 신학자가 전체의 70%에 이른다고 한다. 나는 한국교회의 세속화, 이념화, 저질화, 부패 위기의 원인이, 바로 이에 기인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주님! 회개의 영을 부어 주옵소서! 우리 모두로 참회케 하시고,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모두를 축복하소서!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