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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리다
사도행전 9:36-43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행 9:36-43 / [도르가가 살아나다]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신도가 살고 있었다. 헬라 말로 도르가, 곧 `사슴'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 여자는 언제나 남에게 친절을 베풀며 살았는데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37) 그런데 바로 그 무렵에 도르가가 병이 들어 죽었다. 그의 친구들은 시신을 씻어 2층방에 눕혀 놓았다. 38) 그리고 때마침 베드로가 가까운 곳인 룻다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욥바로 급히 와달라고 청하였다. 39) 베드로가 쾌히 승낙하고 곧 그들과 함께 욥바로 오자 신도들은 도르가의 시신이 안치된 2층방으로 안내하였다. 그 방에는 도르가가 살아 있을 때 친절을 베풀어 준 과부들이 가득 모여 앉아 울면서 도르가가 자기들을 위해 만들어 준 겉옷과 속옷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었다. 40)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방에서 나가게 한 후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다. 그리고 시신을 향해 돌아앉아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자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 여자를 일으켜 세우고 나가 있던 신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도르가를 보게 하였다. 42) 이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43) 베드로는 얼마 동안 욥바에 머물러 있으면서 피혁공 시몬의 집에 묵었다.
베드로가 서서히 편견을 버리고 이방인 고넬료가 있는 이방의 지역으로 서서히 접근합니다.
베드로의 욥바 사역(36-42) 베드로의 사역이 룻다에서 욥바로 확장되었습니다. 룻다의 기적은 욥바에까지 알려졌을 것입니다. 욥바는 룻다에서 도보로 세 시간 거리입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이방의 지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최종 목적지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입니다. 여전히 이방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베드로의 편견을 주님께서는 서서히 무너뜨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욥바에서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다비다(아람어)나 도르가(헬라어)나 모두 ‘영양’을 뜻하는 이름으로 그녀의 아름다운 봉사의 삶에 잘 어울립니다. 다비다를 아끼는 사람들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다비다의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예수님의 회복의 방법을 재현한 베드로의 실습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을 때 보여주셨던 모습을 베드로가 재현한 것입니다(막 5:38-43). 예수님은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다비다굼(다비다야 일어나라)이라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역할을 재현하였고, 그 결과 죽은 다비다의 시체가 살아서 일어났습니다.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현장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목격하였습니다. 애니아의 치료 사건 때처럼 이번에도 기적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무두장이의 집에 머문 베드로(43) 한편, 사역을 마친 후 베드로는 무두장이인 시몬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랍비의 계율에 따르면, 무두장이는 도살된 짐승의 가죽을 다룬다는 이유로 성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약혼녀가 약혼자의 직업이 무두질과 관련된 것임을 알았을 경우 파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가 머물렀다는 것은 율법적 편견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편견 없이 온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보자기(행 10:11; 11:5) 같은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적 용 :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에 사로잡혔던 베드로의 편견이 점진적으로 깨어졌습니다. 오늘 나에게도 깨져야 할 편견이나 선입견은 없을까요?
복음 전도가 중요한 만큼 선한 행동을 함께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금식을 명한 것은 우리가 복의 통로로 선행을 해야 한다는 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의식주를 얻고 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땅에 굶주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이들을 생각하며 금식을 하고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고 그들의 결박을 풀어 줘야 합니다. 금식은 경건 생활의 한 부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설 교 >
다비다야 일어나라
다비다
본문은 베드로의 사론 지역 순방의 두 번째 사건입니다. 장소는 욥바이고 주인공은 다비다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6)
다비다(Tabiqav)는 히브리식 표현이고, 도르가(Dorkav)는 헬라식 표현입니다. 단어의 뜻은 영양(gazelle)이란 뜻입니다. 영양은 노루처럼 생긴 날씬한 짐승입니다. 몸이 우아하고 섬세하며 눈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이름에 많이 붙이는 이름입니다. 다비다는 외모보다 행적이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비다에 대해서 두 가지 특징적인 언급을 합니다.
❶ ‘여제자’(maqhvtria)란 칭호입니다. 교인을 가리키는 칭호가 많습니다. 교인, 성도, 신자, 그리스도인 등등. 교인이란 칭호는 교회에 속한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 정도의 칭호입니다. 신자라는 칭호는 믿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도라는 칭호는 거룩한 추종자란 뜻입니다. 주로 천국 시민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제자라는 칭호는 스승을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상과 삶을 가장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이 바로 제자입니다. 다비다는 여성으로서 제자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지도자나 가르치는 역할은 남성이 담당했습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딤전 2:11-12)
그러나 여제자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가장 가까이 따르고 머물렀던 사람들은 여성들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장 먼저 달려간 것도 여성이고,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것도 여성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절대 다수 구성원도 여성입니다. 아마 다비다 같은 여성에서부터 최초의 여집사가 세워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❷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입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다비다는 남편과 일찍 사별한 과부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우울하게 지내거나 허송세월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삶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이고 활동적이었습니다. 선행과 구제는 참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다비다의 선행은 생시보다 오히려 죽은 후에 더 많이 드러났습니다. 평소 나팔을 불지는 않았지만 주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진정한 구제였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다비다의 구제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의 자비량 구제입니다. 요즘 자선단체도 많지만 주로 남의 돈을 가지고 구제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자선은 자기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선을 행하기 위해 부자 되려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다비다는 친히 옷을 만들어서 구제에 사용했습니다.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39절) 옷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다 남을 위해 옷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다비다의 선한 마음이 그의 재능을 빛나게 했습니다. 자선을 위해 자기 손으로 수고하는 봉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본문의 사건은 다비다의 죽음에서 시작됩니다.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37) 다비다가 왜 병이 들었는지, 무슨 병이 들었는지, 혹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아마 다비다의 죽음은 예상치 않은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유대인의 장례법에는 죽은 당일 장사하도록 되어 있었고, 사정이 있는 경우 사흘까지 허락되었습니다. 다비다는 시신을 묶지도 않았고 그냥 다락에 놔 둔 것을 보면 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들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다비다의 죽음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요? 바로 그 점이 본문의 관심사입니다.
다비다 주변의 사람들
다음으로 관찰할 것은 다비다와 함께 했던 주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다비다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습니다.
▶ 다비다 주변의 사람들은 두 종류입니다.
❶ 다비다와 함께 한 성도들, 즉 교회 공동체원들입니다.
❷ 다비다의 도움을 받았던 과부들, 동료들입니다. 이 과부들 중에는 신자도 있고 불신자도 있었을 겁니다. 이들은 다비다가 평소 만들었던 옷을 입고 있기도 했고, 혹은 남겨 놓은 옷들을 보여주며 슬퍼했습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39)
▶ 성도들의 장례는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❶ 슬픔을 당한 가족들과 함께 슬퍼하는 위로적 차원의 의미입니다.
❷ 부활을 내다보게 하고 소망을 주기 위한 신앙적 의미입니다.
▶ 다비다 주변의 사람들은 두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❶ 다비다의 시신 정돈입니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37) 시신을 깨끗하게 씻는 것은 동서양의 풍속입니다. 유대인의 풍속이나 중동 지방의 풍속, 동양의 풍속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비다의 경우 특별한 것은 시신을 더 이상 처리하지 않고 다락에 안치한 것입니다. 대개 무덤에 장사지내기 위해서는 나사로처럼 시신을 천으로 싸거나 동여매는 절차가 필요한데 다비다는 평상복 차림으로 놔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계율보다는 뭔가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절차를 밟기 위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
❷ 베드로 사도를 청했습니다.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38)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베드로 사도를 청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가 룻다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친 소식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두 사람을 베드로 사도에게 보냈습니다. 급히 와 달라는 전갈과 함께.
그러면 왜 베드로 사도를 청했을까요? 과연 이들은 다비다의 부활 소생을 기대하고 있었을까요?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사도가 누구를 살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의 믿음이 거기까지 이르렀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면 왜 사도를 초청했을까요? 이들이 원한 것은 사도의 위로였습니다. 특히 다비다 같이 착하고 선한 일에 열성적인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 어떤 해석이 필요합니다. 왜 하나님은 악하고 남에게 피해만 주는 사람은 살려두시고, 꼭 필요한 사람을 데려가실까요? 사랑하는 성도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듣고 싶었습니다.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은 물론, 온 성도들을 위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목회자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내 삶에서 목사님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목사님이 여러분 곁에 있습니까? 결혼, 장례, 특별한 행사 주의 종을 부르셨습니까?
다비다가 속한 교인들은 베드로 사도를 부르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습니다. 가장 먼저 주님의 종을 청한 것! 그것이 다비다가 속한 욥바 교인들이 행한 가장 잘 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그 말씀과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기도하고 명령하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가 나타나서 한 일이 뭡니까?
❶ 기도하는 일입니다. 사도나 평신도나 해결책은 기도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인생 문제의 해답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귀신 들려 병든 환자를 고치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사도행전은 보통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 사도행전은 기도행전이기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모든 중요한 순간들이 기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맛디아 사도를 뽑는 일(1장), 초대 교회 성도들의 일과(2장), 오순절 성령 강림(2장), 일곱 집사를 세울 때(6장), 사마리아 성도들이 성령 받을 때(8장), 회심한 사울이 한 일(9장), 고넬료의 행적(10장), 베드로 사도의 일상(10장), 베드로 사도가 투옥되었을 때(12장), 안디옥 교회가 최초로 선교사를 보낼 때(13장), 빌립보 성에서 귀신을 쫓아 낼 때(16장),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장 가족을 구원할 때(16장) 등등, 모든 일이 기도에서 비롯됩니다.
기도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40) 베드로 사도가 주위 사람들을 다 다락방에서 내보낸 일입니다. 기도하는 근처에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직 하나님과만 대면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자리에 구경꾼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와 하나님과만 만나는 자리에 가족이나 친지조차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그렇게 하셨습니다.(막5:30)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릴 때에도 그렇게 했습니다.(왕상17:23) 기도와 관련한 또 한 가지는 무릎을 꿇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무엇이나 맡겨 놓은 것처럼 요구할 일이 아닙니다. 특히 죽은 사람의 생명을 되돌리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생명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셨고, 하나님만이 생명을 가져가시고, 하나님만이 생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무릎 꿇어야 합니다.
❷ 시체를 향하여 명령한 일입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40) “Tabiqav ajnivsthmi”(다비다야 일어나라!)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 하신 말씀, “소녀야 일어나라!”(달리다굼) 하신 것을 베드로 사도가 흉내 냈을까요? 주님은 자신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 누구도 죽은 시체를 향해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는 무슨 뜻에서 이런 명령을 했을까요?
주석가들은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① 베드로 사도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베드로는 간절히 기도했고 주님은 어떤 형태로든지 베드로 사도에게 다비다를 살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확신을 가지고 시체에게 명령을 한 것입니다. ② 사도적 증표로써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당시는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입니다. 복음의 도리나 교리를 몰랐습니다. 누가 진정한 사도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오늘날처럼 베드로 사도의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안다고 해도 이름만 알 뿐입니다. 가짜 베드로가 돌아다녀도 진짜와 구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만 특별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바로 기적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능력을 사용하여 다비다를 살렸을 거라는 얘깁니다.
베드로가 명령하자 즉시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사람은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환자가 치유되는 모습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다비다가 살아나는 과정이 몇 단계로 나타납니다.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40-41)
①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② 일어나 앉았습니다. ③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켰습니다. ④ 완전히 소생된 것을 확인하고 사람들을 불러들여 보게 했습니다. 욥바의 교인들, 다비다 주변의 불신자들까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들 생애에 금시초문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는 권세를 가지셨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신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복음입니다.
앞서서 애니아가 중풍병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보셨지요? 애니아의 치유는 예수 안에서 죄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예수님은 죄에서 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정죄와 심판,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제 죄에서 해방되는 단계에서 나아가 죽음을 이기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믿은 최종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망을 이기는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부활 능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매여 종노릇 하지 마세요. 죽음을 과도하게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죽음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죽음을 이긴 사람답게 담대하고 용기 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욥바에 복음이 전파되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욥바에 복음이 전파된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욥바, 룻다, 가이사라 지역은 헬라 문화 속의 도시들입니다. 혈통은 반 유대인이요, 종교는 이교적입니다. 땅은 유대 땅이지만 예루살렘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사도행전 초반에 복음이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절반의 유대인인 사마리아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이교적인 욥바와 가이사라로 퍼져 나갑니다. 말하자면 욥바는 이방으로 복음이 수출되는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행 9:42-43)
욥바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욥바의 현재의 이름은 japha, jaffa, yafa 등으로 불리웁니다. 위치적으로 욥바는 가이사라 남쪽 약 30마일 48km 지점,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60km 지점에 있습니다. 욥바는 사도 시대 당시 예루살렘에서 바다를 통해 이방으로 향하는 관문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욥바는 계속 그런 역할을 해 왔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두로와 시돈에서 목재를 운반하는 항구였습니다. 왕국 시대, 에스라 시대에도 욥바는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요나가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탄 곳도 욥바였습니다. 욥바는 현재에도 만 명 넘는 인구가 거주하는 시가지로 남아 있으며, 이 욥바 부근에서 발전하여 세워진 현대 도시가 바로, 이스라엘 최대 도시인 텔아비브입니다. 사도 시대에 욥바는 복음이 유대에서 이방으로 수출되는 항구가 되었습니다. 다비다 사건은 욥바에 복음이 퍼지게 했고, 그 복음이 이방을 향하게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무두장이(피장이) 시몬의 집에 머문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두장이, 혹은 피장이란 말은 가죽 제품을 만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죽일은 죽은 시체를 만지는 일이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부정한 직업에 속합니다. 유대인의 미쉬나에 보면 가죽 일을 하는 남편과는 이혼해도 좋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렇게 부정한 직업을 가진 시몬의 집에, 또 한 명의 시몬, 사도 베드로가 머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통적인 유대인입니다. 그가 비록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해도 그는 할례를 받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유대인 사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제는 유대인이 부정하게 여기는 음식을 먹고,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과 몸을 맞대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 자신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의 장벽을 넘어서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복음이 이방인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였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연 것은 베드로 사도입니다. 다음 장면, 10장과 11장에서 이방인 고넬료가 구원받는 장면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애니아의 치료를 통해서처럼, 다비다의 소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목표는 이방인의 구원입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목표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죽음에서 건짐 받은 분들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왜 우리의 병을 고쳐주셨을까요? 왜 내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을까요? 주님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내게 나타난 기적을 통해서 영적 이방인인 가족들,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들을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이방인들이 나 때문에 구원 받는 통로가 되시기 바랍니다. 욥바와 같은 불신앙적이며 이교적인 내 주변이 모두 주님을 알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