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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읽기(11.5.) 자료입니다.
경철초고와 비슷한 문제의식, 자본론, 공산당선언의 밑그림 같기도 합니다.
F. 엥겔스: [잉글랜드 노동 계급의 처지], 김보영 역
서 문
노동계급의 처지는 현재의 모든 사회 운동들의 실제적 지반이자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현존하는 사회적 비참함의 가장 높은, 가장 적나라한 정점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처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는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자 공산주의가 생겨났고, 간접적으로는 푸리에주의와 잉글랜드 사회주의 및 독일의 교양 있는 부르주아지의 공산주의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이론들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이론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에 확고한 토대를 부여하고, 찬성과 반대를 막론하고 모든 몽상들과 환상들을 끝장내자면 프롤레타리아의 처지에 대한 인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선집1,127)
그런데 프롤레타리아의 처지는 대영제국, 특히 본래의 잉글랜드에서만 고전적인 형태로 완결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잉글랜드에서만, 필요한 자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주제를 빠짐없이 서술하기 위하여 필요한 만큼 완전히 모여 있고, 필요한 만큼 완전히 공식적인 조사를 통해 확인된다.(선집,127)
나는 나의 관점뿐만 아니라 본서에서 밝혀 놓은 사실들에 대한 여러 측면으로부터의 공격을 각오하고 있는데, 특히 내 책이 잉글랜드 인의 손에 쥐어졌을 경우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포괄적인 주제들과 그러한 주제들의 광범위한 전제들을 다룰 경우에 잉글랜드 인조차도 피할 수 없는 사소한 오류를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입증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 그것도 잉글랜드에서조차 나의 책처럼 모든 노동자들을 다루는 책이 한 권도 없으니만큼 더욱더 잘 입증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잉글랜드 부르주아지들에게 요청한다: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어쨌든 의의를 가지고 있을 단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라도 나의 오류를 입증해 보라고−[단] 내가 인용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믿을 만한 예증을 가지고서 입증하라고.(선집1,128)
독일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는 다른 어떤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보다도 더 많이 이론적 전제들로부터 출발하였다; 우리 독일의 이론가들은 현실적 세계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기 때문에 현실적 관계들이 직접 이러한 ‘조악한 현실’을 개혁하라고 우리에게 추궁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러한 개혁의 공공연한 주창자들 중에서 포이어바흐에 의한 헤겔의 사변의 해체에 의하지 않고서 공산주의에 다다른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다.(선집1,128)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실적 생활 상태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오늘날 우리의 부르주아지가 사회 문제를 엉터리로 다루고 있는 저 선의의 ‘노동계급 향상 협회’조차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한 가소롭기 그지없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견해를 내놓을 정도이다.(선집1,128)
그리고 비록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태들이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태처럼 고전적인 형태로까지 성숙되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북해 저편의 사회 질서가 이미 도달한 것과 동일한 정점에 빠르건 늦건 간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국민의 통찰이 사회 체제 전체에 새로운 토대를 부여하는 방책들을 제때에 내놓지 못한다면−그러한 사회 질서를 가지고 있다. 영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빈곤과 억압을 야기하였던 것과 동일한 기본 원인들이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고, 또 장기간 동일한 결과들을 낳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분간은, 확인된 영국의 빈곤이 우리에게 우리 독일의 빈곤을 확인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며, 그 빈곤의 범위와 이 측면으로부터 독일의 직접적 안녕을 위협하는 위험−오늘날 슐레지엔과 뵈멘의 소요에서 나타나고 있는−의 규모를 잴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할 것이다.(선지1,128-129)
나는 중간계급(Mittelklasse)이라는 말을 계속적으로 영어의 middle-class(혹은 거의 언제나 사용되는 말로는: middle-classes)라는 의미에서 사용하였는데, 이는 프랑스어의 부르주아지와 마찬가지로 유산계급, 특히 소위 귀족과 구별되는 유산계급을 의미한다−[이들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는 직접적으로 독일에서는 ‘여론’으로서 간접적으로 국가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계급[이다].(선집1,129)
나는 대부분의 인용에 있어서 나의 보증인들의 당파를 밝혔는데, 그 까닭은 거의 대체로 자유주의자들은 농업 지역의 빈곤은 두드러지게 주장하나 공업 지역의 빈곤은 부인하려 하는 반면에서, 거꾸로 보수주의자들은 공업 지역의 궁핍은 인정하나 농업 지역의 궁핍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공업 노동자들의 묘사에 있어 공식 문서가 부족한 경우에는, 언제나 자유주의적 증거 서류를 인용하였는데, 이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 자신의 말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는 대개, 나 자신의 관찰로 사실의 올바름을 알았을 경우에나, 혹은 나의 전거들이 저자로 보나 문헌적으로 보나 진술의 진실성을 납득시킬 수 있을 때에만, 토리 당원이나 차티스트들을 증인으로 끌어냈다.(선집1,129)
서 설
프롤레타리아트는 잉글랜드에서만 그 모든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그 모든 측면에서 연구될 수 있다.(선집1,133)
요컨대 그 당시 잉글랜드의 산업 노동자들은 독일의 여기저기에서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생활상의 처지에 있어 어떠한 정신적 활동도 심한 동요도 없이 격리되고 은둔한 채 살아가고 사고했다. 그들은 거의 글을 읽을 줄 몰랐고 쓸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갔고 정치 이야기 같은 것은 하지 않았으며, 음모를 꾸미지도 않았고, 사색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체적 단련에 흥겨워했고, 타고난 신앙심을 가지고서 성경 봉송을 경청하였으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겸허함을 갖춘 까닭에 사회의 명망 있는 계급들과 완전히 조화롭^게 지냈다.(선집1,135-136)
그들은 자신의 조용한 식물적 생활 속에서 안온함을 느꼈으며, 산업혁명이 없었더라면 아주 낭만적이고 정취 있는, 그러나 또한 인간에게 가당찮은 이러한 생활로부터 빠져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며, 단지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어 왔던 소수의 귀족에게 봉사하는 노동하는 기계들이었을 뿐이다; 산업혁명 역시 이 사실의 귀결을 관철시켰을 뿐인바, 산업혁명은 노동자들을 완전히 단순한 기계로 만들고 그들의 독립적인 활동의 최후의 찌꺼기까지 그들의 손에서 빼앗아 감으로써 그렇게 관철시켰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산업혁명은 노동자들을 사고하도록, 그리고 인간적 지위를 요구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이해(利害)에 대한 무감각 속에 함몰해 있던 마지막 계급들을 역사의 소용돌이로 잡아 끌어넣었던 것이 프랑스에서는 정치였던 것처럼 잉글랜드에서는 부르주아 사회 일반의 운동과 산업이었다.(선집1,136)
제니방적기: 이제 직조공은 자신이 앉아 있는 직조틀에서 더 많이 벌어들일 수 있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농경일을 점차 내버려두고 오로지 직조에 매달리게 되었다. (…)^ 그리하여 농사를 짓던 직조공 계급은 점차 완전히 소멸하고, 신흥계급, 즉 임금만으로 살아가며, 아무런 소유도 없고, 차지라는 명의만의 소유조차도 없는,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가 된 단순 직조공계급으로 용해되었다.(선집1,136-137)
아직 지극히 불완전한 최초의 기계와 더불어 이미 공업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했던 한편으로, 바로 그 기계는 농업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생에도 동인을 주었다.(선집1,137)
이 와중에도 공업의 운동은 여기에서 멈춰 서지 않았다. 개별 자본가들이 제니 방적기들을 커다란 건물에 설치하고 수력으로 작동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노동자들의 수를 줄일 수 있게 되었고 순전히 손으로 기계들을 움직이는 개별 방적공들보다 더 값싸게 실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제니 방적기의 개량은 계속 진행되었으므로, 매순간 어떤 한 기계는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어 개조되거나 아예 한구석으로 밀쳐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선집1,138)
제니 방적기와 케텐슈툴의 특성들을 결합하여 피어우드(랭카셔)의 사무엘 크롬튼이 1785년 뮬 방적기를 완성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에 아크라이트는 소면기와 시방기를 발명하였고, 이러한 발명들에 의해 면방직에 있어서 공장제도가 유일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기계들은 1764년에 발명되고 1785년 이래로 방적기의 운전에 사용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을 통하여 그 중요성이 배가되었다. (선집1,138-139)
그 후 해마다 개선된 이러한 발명들에 의해서 잉글랜드 공업의 주요 부문들에 있어서 손노동에 대한 기계 노동의 승리가 결정되었으며, 그 때부터 잉글랜드 공업의 주요 부문들의 전체 역사는, 어떻게 손 노동자들이 기계에 의해 한 지위에서 다른 지위로 내쫓겼는가를 알려 줄 뿐이다. 이로부터의 결과들은 한편으로 모든 매뉴팩처 상품들의 급속한 가격 하락, 상업과 공업의 번창, 보호되지 않은 거의 모든 외국 시장들의 정복, 자본들과 국부의 급속한 증가 등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더 급격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증가, 노동 계급에 있어서의 모든 소유 및 벌이의 모든 안정성의 파괴, 퇴폐, 정치적 소요 등의, 잉글랜드 유산자들의 비위를 너무나 거슬리게 하는 모든 일들이었던바, 우리는 이에 대해 본론에서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선집1,139)
이 기계들의 양모 방적업으로의 차용은 최고의 성과를 거두며 수행되었다. 이제 양모 공업 지역에서도 우리가 면 공업 지역에서 본 것과 같은 급속한 발전이 나타났다.(선집1,141)
린넨 공업에서는 진보가 더 이후에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공업에서는 원료의 자연적인 속성이 방적기의 사용을 매우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잉글랜드의 린넨 공업은 급속히 확장되었다.(선집1,142)
잉글랜드 인들은 명주의 가공에서도 동일한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에서 잉글랜드 인들은 완전히 방적된 남부 유럽산 원료 및 아시아 산 원료를 입수하였으며, 주요 작업은 가는 실들을 꼬는 것(연사)이었다.(선집1,143)
일단 주어진 자극은 공업 활동의 모든 부문들로 확장되었으며. 지금까지 언급된 발명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많은 발명들이 일반적인 운동과 때를 같이 하여 나타난 관계로 그 중요성이 배가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공업에서 기계적 힘이 지닌 엄청난 의의가 일단 실제적으로^ 증명된 이제는, 이 힘을 모든 방면에서 사용하고, 또 개개의 발명가와 공장주의 이익이 되도록 이용하기 위하여 또한 모든 것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이미 기계, 연료 및 가공 재료에 대한 수요가 대량의 노동자들 및 영업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배가시켰다. 증기기관은 잉글랜드의 광대한 석탄층에 최초로 의미를 부여했다; 기계제작이 이제 비로소 발생하였으며, 또한 이와 더불어 기계용 원료를 공급하는 철광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겼다; 증대된 양모 소비는 잉글랜드의 목양업을 번창시켰고, 양모, 아마 및 명주의 수입 증가는 잉글랜드의 상선대(商船隊)를 거대화시켰다. 무엇보다도 철생산이 번창해졌다.(선집1,143-144)
토지 소유가 다른 소유자와 경작자의 손으로 넘어갔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방식으로도 농업은 영향을 받았다. 대차지인들은 토지 개량에 투자하였고 불필요한 울타리를 무너뜨렸으며, 배수를 하고 기름을 주고 더 개량된 기구를 사용하였고 계통적 윤작을 도입하였다. 또한 과학의 진보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H. 데이비 경은 화학을 성과적으로 농업에 적용하였으며, 기계 공학의 발전은 대차지인들의 손에 많은 이익을 쥐어 주었다. 게다가 인구 증가의 결과로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매우 급증하였기 때문에 1760년에서 1834년까지 6,840,540 잉글랜드 모르겐의 황무지가 개간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곡물 수출국에서 곡물 수입국이 되었다.(선집1,146)
동일한 활동이 교통의 정비에 있어서도 이루어졌다.(…) 지방에 있는 주민들은 단번에 문명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하일랜드 지방의 주민들은 지금까지는 대부분 밀렵꾼이나 밀수꾼이었다; 이제 그들은 부지런한 농부이자 수공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게일어 학교가 그곳 언어의 보존을 위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게일⋅켈트족의 관습과 언어는 잉글랜드 문명의 진출 앞에서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아일랜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선집1,146)
국가는 거의, 혹은 전혀 이 일에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일도 역시 잉글랜드 내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민간 공업의 업적이다.(선집1,146)
오늘날 운하들은 사방팔방으로 건설되어 강에서 배가 나릴 수 있게 되었다.(…) 이 건조물들도 철도 및 국도와 마찬가지로 거의 모두가 사적 개인들과 회사들의 업적이다.(선집1,147)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지난 60년 동안의 잉글랜드 공업의 역사인바, 이 역사는 인류의 연대기에서 그와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역사이다. 60년, 80년 전에는 다른 모든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소도시들, 몇몇^ 안 되는 단순한 공업, 빈약하긴 하나 그래도 비교적 많은 농업 인구를 가진 한 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어떤 나라들과도 달리 주민 250만 명의 수도, 거대한 공장 도시들, 전세계를 관장하며, 복잡하기 그지없는 기계로 거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공업, 부지런하고 지적이고 조밀하게 퍼진 인구−그들 중 3분의 2가 공업에 의해서 요청되고 있고, 완전히 다른 계급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로 그 당시와는 다른 관습과 다른 욕구를 가진 전혀 다른 국민을 형성하고 있다−를 가지고 있는 한 나라가 있다. 산업혁명은 프랑스에 대하여 정치혁명이, 독일에 대하여 철학혁명이 가지는 것과 같은 동일한 의의를 잉글랜드에 대하여 가지고 있다.(선집1,147-148)
그러나 이 산업상의 변혁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잉글랜드 프롤레타리아트이다.(…) 공업의 급속한 확장은 일손들을 필요로 했다; 임금은 상승하였고 그 결과 노동자들의 무리가 농업 지역들에서 도시들로 이동했다.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는데, 그 모든 증가는 거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수를 증대시켰다.(선집1,148)
그리하여 대영제국의 공업 대도시들 및 상업 대도시들이 발생하였는바, 그곳에서는 최소한 인구의 3/4이 노동자계급에 속하고, 소부르주아지는 소상인들과 아주 극소수의 수공업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공업이 도구들을 기계들로, 작업장들을 공장들로 변화시킴으로써−또 이를 통해 노동하는 중간계급을 노동하는 프롤레타리아트로, 지금까지의 대상인들을 공장주들로 변화시킴으로써−비로소 중요해졌던 것과 똑같은 일이, 그리하여 이미 여기서 소중간계급이 밀려나고 주민이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대립으로 환원되었던 것과 똑같은 일이 좁은 의미의 공업의 영역 바깥에서, 즉 수공업에서 그리고 상업에서조차 일어났기 때문이다.(선집1,148)
예전의 장인들과 직인들의 자리를 대신해서 대자본가들과 자신의 계급을 극복할 전망을 전혀^ 가지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출현했다; 수공업들은 공장식으로 운영되었고, 분업이 엄격히 관철되었으며, 대기업과 경쟁할 수 없었던 소장인들은 프롤레타리아계급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노동자는 지금까지의 수공업 경영의 폐기로 인하여, 소부르주아지의 절멸로 인하여 스스로 부르주아들이 될 모든 가능성을 빼앗겨 버렸다.(…) 오늘날 노동자로 태어난 사람은 한평생 프롤레타리아로 머무르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전망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자적인 운동들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선집1,148-149)
어제 번 것을 오늘 다 써서 없애며, 자신들의 발명들과 노동으로 잉글랜드의 위대함을 창조하였고, 나날이 더욱더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게 되고, 나날이 더욱더 절박하게 사회 조직의 이익에서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이 수백만 무산자들은 어찌되어야 할 것인가−이 문제는 개혁 법안 이후로 국민적인 문제가 되어 있다.(선집1,149)
의회의 매회기마다 노동계급은 자기 기반을 가지면서 진출하고 있고, 중간계급의 이해는 중요성을 잃고 있다.(선집1,149)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중간계급과 특히 노동자들의 궁핍 덕분에 직접 부유해지게 된 제조업자들은 이 궁핍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국민을 대표하는 강력한 계급이라고 느끼는 이 계급은 잉글랜드의 치부를 세계의 눈앞에 발가벗겨 놓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빈곤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 유산의 공업계급이 이 빈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선집1,150)
그런 까닭에 이 계급은 그들의 발밑에서 허물어지고 있으며 언제라도 전복될 수 있는 기반 위에서 우스꽝스러울 만큼 태평하게 살고 있는 것인바, 머지않아 이 기반이 붕괴함은 마치 어떤 수학 법칙이나 역학법칙만큼이나 확실한 것이다;(선지1,150)
그러나 그러한 까닭에 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착취하고 그런 다음 그들을 인정사정없이 운명에 내동댕이치는 부자들에 대한, 글래스고우에서 런던에 이르는 노동자계급 전체의 깊은 증오는−그리 오래지 않아−이 시^간은 거의 계산될 수 있다−혁명으로 분출될 것이며, 이 혁명에 비하면 제1차 프랑스 혁명과 1794년은 어린아이 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선집1,150-151)
공업 프롤레타리아트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여러 부분들을 고찰해야 할 순서는 전술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생사로부터 자연히 도출된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은 공업에 속하였으며 공업을 통해 직접 생산되었다. 그러므로 공업 노동자들, 즉 원료의 가공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맨 먼저 우리의 주의를 끌게 된다.(선집1,151)
공업 재료, 원료 및 연료의 산출 자체는 공업의 격변의 결과 비로소 중요해졌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탄광 및 금속 광산의 노동자들. 공업은 세 번째 단계에서 농업에, 네 번째 단계에서는 아일랜드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에 따라 이에 속한 프롤레타리아트 부분들에게 각각의 지위를 지정해 줄 수 있었다.(선집1,151)
또 우리는 아일랜드인들을 제외한다면, 다양한 노동자들의 교양 정도가 그들의 공업과의 연관과 정확히 비례한다는 점을, 따라서 공업 노동자는 자신의 이해에 대해 가장 잘 계몽되어 있고 광산 노동자는 훨씬 그에 뒤떨어져 있으며 농업 노동자는 거의 전혀 계몽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공업 노동자들 사이에서조차 이러한 서열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며, 공장 노동자들, 산업 혁명의 이 맏아들들이 어떻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노동자 운동의 핵심이 되어 왔는가를, 또 어떻게 그 외의 노동자들이 공업의 격변에 의해 그들의 수공업이 장악된 것과 꼭 같은 정도로 운동에 결합하게 되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선집1,151)
공업은 대자본을 요구하며, 이 대자본으로 거대한 공장 시설들을 설립하여 수공업적 소부르주아지를 파탄시킨다. −그리고 대자본으로 자연력들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어 개별 손 노동자를 시장으로부터 내몬다. 분업 그리고 수력, 특히 증기력의 이용 및 기계 메카니즘−이것이 3가지의 커다란 지렛대로, 이를 이용하여 공업은 지난 세기 중엽부터 세계를 그 접지점으로부터 들어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소공업은 중간계급을 만들어 내었고 대공업은 노동자계급을 만들어 내었으며, 중간계급에서 선발된 소수의 사람들을 왕좌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는 다만 후일에 그들을 더욱 확실히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당분간은, ‘좋은 옛시절’의 무수한 소 중간계급이 공업에 의해 파멸되어 한편으로는 부유한 자본가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노동자로 해체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인 것이다.(선집1,152)
인구도 자본과 마찬가지로 집중된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공업에 있어 사람, 즉 노동자는 자신을 공장주에게 내맡겨 쓰게 함으로써 임금이라는 명목으로 이자를 지불받는 한 조각의 자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업의 거대한 공장시설은 한 건물 안에서 함께 일할 많은 노동자들을 요구한다. 그들은 함께 거주하여야 한다. 이미 그들은 웬만한 공장 옆이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욕구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욕구들의 충족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수공업자, 재봉사, 구두 수선공, 제빵업자, 미장이, 가구 제조업자 등이 모여든다.(선집1,152)
도시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더 이주로부터 오는 이점들이 많아진다: 철도, 운하, 국도^가 있다; 숙련 노동자들을 뽑을 기회가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건축업자들과 기계 제조업자들을 바로 가까이에 두고 있고 또 그들 각각의 사이에 경쟁이 있기 때문에, 건축재⋅기계⋅건축업자들 및 공장 노동자를 우선 수송해 놓아야 하는 후미진 지역에 비해 저렴하게 새로운 공장 설비가 설치될 수 있다; 시장도 있고 구매자들이 몰려드는 거래소도 있다; 원료를 공급하거나 완제품을 사들이는 시장들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선집1,152-153)
대도시들에서 소유의 집중은 최고점에 달한다; 이곳에서 좋았던 옛 시절의 관습과 관계들은 아주 철저하게 파괴된다; 이곳에서 세상은 너무나 변하여 사람들이 행복한 구잉글랜드라는 이름에서 전혀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되었다.(선집1,153)
그리하여 또한 이곳에서는 날이 갈수록 소부르주아지가 점차 사라져 가기 때문에 단지 부유한 계급과 빈곤한 계급만이 존재하게 될 뿐이다. 예전에는 가장 안정적이던 계급인 소부르주아지가 이제는 가장 동요하는 계급이 되었다; 소부르주아지는 이젠 단지 지나간 시대의 얼마 남지 않은 잔존인들과 재산을 모르려고 하는^ 약간의 사람들, 즉 완전한 신사 사기꾼과 투기꾼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나머지 99명은 파산하고, 이 99명 중에서 절반 이상은 단지 파산된 채 살아갈 따름이다.(선집1,153-154)
노동자 운동들
노동자들은 이러한 동물적인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보다 나은 인간적인 지위를 얻고자 노력해야 하는바, 바로 노동자들의 착취를 그 본질로 하는 부르주아지의 이해(利害) 그 자체에 대항하여 투쟁하지 않고서는 이를 성취할 수 없다; 그런데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재산과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국가 권력을 통해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능력들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옹호한다. 노동자가 현재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자마자 부르주아는 노동자의 명백한 적이 된다.(선집1,154)
이 밖에도 노동자는 부르주아지가 그를 하나의 물건처럼,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룬다는 것을 매순간 깨닫는데, 바로 이 때문에도 노동자는 부르주아지의 적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다. 나는 현재의 상황에서 노동자가 오로지 부르주아지에 대한 증오와 폭동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인간성을 구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수많은 예로 입증하였고 또 다른 예를 들어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다. 노동자가 매우 강렬한 열정으로 소유자들의 학정에 항거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교육받은 때문, 아니 오히려 그가 교육받지 못한 때문이고 잉글랜드 노동자 계급에게 흐르는 아일랜드 인의 매우 뜨거운 피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노동자는 더 이상 잉글랜드 인이 아니며 그의 이웃인^ 유산자처럼 타산적인 수전노도 아니다. 그는 풍부하게 발전된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타고난 북방의 냉담함은 자유분방함에 의해서 메꾸어졌는바, 이 자유분방함 속에서 그의 열정이 생겨 나왔고 이 열정은 냉담함을 지배하게 되었다.(선집1,154-155)
잉글랜드 부르주아의 이기적인 성향을 그토록 두드러지게 발전시켰고 이기심을 부르주아지의 지배적인 열정으로 만들었으며 감정의 모든 힘을 금전욕이라는 한 지점으로 집중시켰던 이성적인 교양은 노동자에게는 없는 것이기에 노동자의 열정은 외국인만큼이나 강하고 대단하다. 잉글랜드적 민족성이 노동자에게는 말살되어 있다.(선집1,155)
그의 생활 처지 전체에 대해 반항하는 것 이외에 노동자의 인간성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반항 속에서 노동자들이 가장 숭고하고 가장 고귀하며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모든 힘, 모든 활동이 이러한 한 지점을 향하고 있으며 그 밖의 인류의 교양을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들조차도 모두 이 지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선집1,155)
잉글랜드에서 사회 전쟁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점, 평화라는, 심지어는 박애라는 허울 아래에서 이러한 전쟁을 위선적으로 이끌고 나가는 것이 부르주아지의 이해라면, 오로지 진정한 상황의 공개와 이러한 위선의 분쇄만이 노동자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점;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와 그 종복들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가장 폭력적인 적대행위조차도 부르주아지가 암암리에 그리고 음흉하게 노동자들에게 가한 것들을 공개적으로 숨김없이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들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선집1,155)
이러한 폭동의 아주 조야하고도 무익한 최초의 형태는 범죄였다. 노동자는 궁핍과 빈곤 속에서 살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잘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필 왜, 부유한 게으름뱅이보다 사회를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하는 자신이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고통받아야 하는지가 노동자의 지성으로는 납득되지 않았다. 게다가 궁핍은 대대로 전해 내려 온, 소유에 대한 존경심을 압도해 버렸다−그는 도둑질을 하였다.(선집1,155-156)
범죄자들은 도둑질을 함으로써 단지 개별적으로만, 단지 개인으로서만 기존 사회질서에 항거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회의 권력 전체는 모든 개인을 덮쳤으며, 그들 각각을 압도적인 힘으로 짓눌렀다.(선집1,156)
공업 운동의 시작과 동시에 발생한 기계 장치의 도입에 폭력적으로 반항하였던 그 때에야 비로소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반항을 전개했다. 아크라이트 등등의 초기의 발명가들이 이미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그들의 기계들은 파괴당하였다;(선집1,156)
이러한 종류의 반항도 역시 산발적인 것들일 따름이었고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현존 관계들의 한 측면만을 겨냥한 것이었다.(선집1,156)
1824년에 통과된 이 법률은 지금까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단결하는 것을 금지시켜 왔던 모든 법령들을 폐기하였다. 노동자들은 지금까지 단지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것이었던 자유로운 결사의 권리를 획득하였다. 물론 노동자들의 비밀 단체들은 지금가지 늘 존재했었다.(선집1,156-157)
그러나 모든 것을 행할 때마다 붙어 다니던 이 비밀성은 그 조합들의 발전을 위축시켰다. 이와는 반대로 1824년 노동자들이 자유로운 결사의 권리를 얻게 되자마자 곧 이 조합들은 잉글랜드 전역으로 확대되어 강력해지게 되었다.(선집1,157)
그것들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임금을 확정하는 것, 여럿이 함께, 즉 세력으로서 고용주들과 교섭하는 것, 고용주의 이윤에 따라 임금을 조절하는 것, 적절한 시기가 오면 임금을 인상시키는 것, 각각의 개별적 업종 안에서는 어디서나 임금을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 그런 까닭에 이 조합들은 일반적으로 준수되어야 할 임금표와 관련하여 자본가들과 교섭하고 이 임금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모든 개별 자본가들에게 파업을 선포하곤 하였다. 더 나아가, 견습공의 고용을 제한함으로써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를 늘 활발하게 하고 이를 통하여 임금을 높게 유지하는 것, 새로운 기계들과 도구들 등등의 도입을 통한 공장주들의 교활한 임금 삭감을 가능한 한 저지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직한 노동자를 금전적으로 원조하는 것.(선집1,157)
때때로 단일 업종의 회원들이 잉글랜드 전역에 걸쳐 단일의 거대한 조합으로 뭉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고 또한 수차례에 걸쳐 −최초로는 1830년에−각각의 모든 업종들에 걸쳐 있는 특수한 조직들을 자체 안에 포괄하는 전국 단위의 노동자 총연합으로 뭉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체들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으며 또한 잠깐 동안이라도 결성되는 일이 드물었다. 왜냐하면 오로지 유례없는 일반적인 격앙이 있어야만 그러한 조합이 가능하고도 효과적이게 되기 때문이다.(선집1,158)
부분파업, 총파업: 그러나 조합에 가입하지 않거나 부르주아들에 의해 제공된 목전의 이익에 의해 조합으로부터 탈퇴하려는 노동자들이 생기자마자 이러한 합법적인 수단들은 아주 허약한 것으로 된다.(선집1,158)
이러한 조합들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 몇몇 승리들을 제외하고는 노동자들의 패배의 연속이었다. 이 모든 노력들이 경제법칙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 임금은 노동시장에서의 공급에 대한 수요의 관계를 통해 결정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이러한 조합들은 이 수요공급 관계에 작용하는 모든 큰 원인들에 대해서는 무력하다;(선집1,159)
대중적이고 한데 뭉친 반항의 기미가 노동자들에게서 엿보이지 않을 때에는, 공장주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계속해서 임금을 점차 더욱더 인하하려 들 것이다; 그가 다른 공장주들에게 지지 않아야 하는 경쟁투쟁은 그로 하여금 임금을 점차 더욱더 인하하도록 강요하여 임금은 곧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선집1,159)
조합들은 노동시장을 변화시키는 보다 중요한 원인들에 맞서서는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들에 있어서 굶주림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노동에 복귀하도록 노동자들을 내몬다. 처음에 몇 명이 다시 발을 들여 놓게 된다면, 조합의 힘은 파괴되고 만다.(선집1,160)
도대체 무엇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 수단이 전혀 무익하다는 것이 명약관화한 그러한 경우들에도 파업을 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간단히 말해서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에 맞서서 그리고 이러한 임금 삭감의 필연성에 맞서서 저항해야만 하기 때문이며, 인간으로서 노동자들은 상황에 자신들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자신들에게, 인간들에게 맞추어져야 한다고 선언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침묵은 이러한 상황의 승인, 호경기에는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불경기에는 노동자들이 굶주리게 내버려두는 부르주아지의 권리의 승인이 되기 때문이다.(선집1,160)
독일의 이론가들은 자신들의 항의가 적당하게 조서에 기록되고 서류 속에 보관되어 그 속에서 항의자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편안하게 잠들자마 자기도 편안한 수면을 취하러 가는 사람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영국인의 실제적인 항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항의는 부르주아지의 탐욕을 일정한 범위로 제한하며 유산계급의 사회적⋅정치적인 전능함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항을 생기 있게 유지한다.(선집1,161)
이러한 조합들과 이 조합들로부터 생겨난 파업들에 독자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들이 경쟁을 지양하려는 노동자들의 최초의 시도라는 것이다. 결사와 파업은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오로지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에 근거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 개별적인 노동자들 상호간의 대립으로 생겨난 프롤레타리아트의 분열에 근거한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사와 파업은 비록 이것들이 단지 일면적이고 제한된 방식을 뿐일지라도 경쟁 및 오늘날의 사회 질서의 중추 신경을 겨냥하고 있다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결사와 파업은 이러한 사회 질서에 대해서 그토록 위협적인 것이다.(선집1,161)
노동자들 사이의 이러한 경쟁이 교란되고 모든 노동자들이 더 이상 부르주아지에 의해 착취받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소유의 왕국은 끝이 난다. 지금까지 노동자들이 자신이 사고파는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을 감수하여 왔다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임금은 수요 공급 관계에, 노동시장의 우연적인 상황에 의존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더 이상 사고 팔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노동의 가치란 본래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노동자들이 노동력 외에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서 등장한다면, 오늘날의 국민경제학과 임금법칙들 전체는 끝장나게 될 것이다.(선집1,161)
공장방화, 폭파, 공장주 살해, 파업파괴자 폭행, 살해: 이러한 사실들은 영국에서는 1843년 말과 같은 호경기에도 사회 전쟁이 포고되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충분한 전거들이다.(선집1,163)
유산계급, 특히 노동자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제조업 분야의 유산계급은 이러한 조합에 가장 맹렬히 반대하며, 국민 경제학적으로는 옳은 것이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어떤 점에서는 그릇된 것이며 따라서 노동자들을 납득시키는 데는 하등의 효과를 거둘 수 없는 논거들을 들어 끊임없이 조합의 무익성을 노동자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선집1,165)
전쟁에서는 한편의 손실이 다른 편의 이익으로 되는 법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공장주와 전시 체제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머리채를 거머쥐고 싸우기 시작할 때에 그것은 고귀한 군주들이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선집1,165)
이러한 파업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사회 전쟁이 이미 잉글랜드에 엄습하였음을 아주 잘 증명하는 것이다. 단 한 주일, 아니 거의 하루도 쉴 새 없이 여기저기서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선집1,167)
이 파업들은 아직 어느 것도 결정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파업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결전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이러한 파업들은 노동자들의 군사학교이다. 이 학교에서 그들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대전투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파업들은 개별 노동 부문이 하나의 거대한 노동자 운동에 합류하였다는 것을 밝히는 선언이다.(선집1,167)
잉글랜드 노동자들은 용감한 점에서 어느 민족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들은 프랑스인만큼이나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단지 [프랑스인들과] 다르게 투쟁할 뿐이다. 철저하게 정치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인들은 사회적 악에 맞서서 투쟁할 때에도 정치적 방법으로 투쟁한다; 그러나 잉글랜드인들에게 있어서 정치란 이해관계를 위해서만, 부르주아 사회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정부에^ 맞서는 대신에 직접 부르주아지에 맞서서 투쟁하는 것이다.(선집1,167-168)
잉글랜드 노동자가 유산계급의 멍에 아래 굴복하는 대신에 차라리 감수하는 모든 것, 즉 기나긴 기아, 기아에 굶주리는 가족들의 모습을 매일매일 목격하는 것, 부르주아지의 장래의 보복의 확실함 등에 비한다면 프랑스 혁명가가 겪게 되는 사형이 다 무엇이며 갈레선이 다 무엇인가?(…) 단 한 명의 부르주아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이만큼 인내하는 사람들은 부르주아지 전체의 권력도 분쇄할 수 있게 될 것이다.(선집1,168)
물론 부르주아지에게 법률은 신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법률이란 부르주아 자신이 만든 것이며, 자신의 보호와 이익을 위해 자신의 승인을 얻어서 발표된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설사 어느 개개의 법률이 특별히 자신에게 해가 된다 하더라도 전체로서의 입법은 자신의 이익을 지켜 준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률의 신성함, 즉 사회의 한 부분의 적극적인 의사 표명과 다른 부분의 소극적인 의사 표명에 의해서 일단 확립된 질서의 불가침성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의 가장 강력한 지주라는 것을 알고 있다.(선집1,170)
노동자에게 있어서 법률이란 노동자를 위해서 부르주아가 마련한 채찍임을 노동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또 너무나 자주 체험해 왔다. 그리고 노동자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법률에 호소하지 않는다.(선집1,170)
프롤레타리아트가 제출한 이러한 법률이 곧 인민헌장인데, 이것은 그 형식으로 보면 완전히 정치적이며 하원을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 세울 것을 요구한다. 차티즘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반항이 집약되어 있는 형태이다. 조합과 파업의 경우에는 이 반항이 언제나 개별적인 채로 있었다. 즉 개별 노동자나 개별 노동자 분파가 개별 부르주아를 상대로 투쟁하였다; 투쟁이 일반적인 것으로 되어도 이것이 노동자측의 의도인 경우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도에 따라 행해졌을 경우에는 그 근저에 차티즘의 의도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차티즘에 있어서는, 부르주아지에 맞서서 봉기하고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 부르주아지가 자기 둘레에 쳐놓은 법률의 장벽을 공격하는 것은 전체 노동자계급이다. 차티즘은, 전세기의 80년대에 프로레타리아트와 동시에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에서 발전한 민주주의적 당파로부터 발생한 것인바, 이 당파는 프랑스 혁명 시기 동안에 세력을 얻었고 평화 회복 후[1815] ‘급진적인’ 당파로서 등장하여 그 본거지를 당시에는 버밍엄과 맨체스터에, 그 이전에는 런던에 두었었다. 이 당파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연합하여 구의회의 과두 정치가들로 하여금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하였으며 그때부터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노동자 당파로서 갈수록 강화되어 나갔다.(선집1,171)
잉글랜드 차티스트는 모든 나라의 공화주의적 당파들에 동감하면서 자신을 즐겨 민주주의자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공화주의자 이상이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선집1,172)
스티븐스: “벗들이여, 차티즘은 여러분이 선거권을 획득하는 일 등등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가 아닙니다; 차티즘, 그것은 곧 나이프와 포크의 문제이며, 헌장이란 좋은 집과 음식과 좋은 벌이와 짧은 노동 시간을 의미합니다.”(선집1,173)
노동자들은 곡물법의 폐지가 자신들에게는 별로 이롭지 않고 부르주아지에게는 당연히 매우 유리함을 곧 간파^하게 되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이 계획은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1842년에 공황이 일어났다. 1839년과 마찬가지로 선동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이 공황으로 인하여 타격을 받고 있던 부유한 제조업 부르주아지도 이 선동에 가담하였다. 반곡물법 동맹−맨체스터 공장주들이 발기한 단체가 오늘날 이렇게 불리고 있다−은 매우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선집1,173-174)
1842년 8월 초: 일은 시작되었으나 노동자들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잇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동자들 모두는 곡물법을 폐지하려는 공장주들을 위해서 총살에 처해질 수는 없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일치를 보았지만, 기타 문제에서는 어떤 사람은 인민헌장을 관철시키는 것을 바란 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은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단지 1840년의 임금률을 강제하는 것만을 바랐다. 이와^ 같은 의견의 불일치에 부딪혀서 폭동 전체는 실패로 돌아갔다.(선집1,175-176)
봉기의 성과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주 단호하게 부르주아지와 갈라서게 된 것이었다. 차티스트들은 지금까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심지어는^ 혁명을 통해서라도 헌장을 관철할 것이라는 것을 별로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일체의 폭력적 변혁이 자신들의 지위에 위험함을 별안간 깨닫게 된 부르주아지는 이제는 ‘물리적 폭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단지 ‘도덕적 폭력’−마치 도덕적 폭력이 물리적 폭력에 대한 직간접의 위협이 아닌 것처럼−만으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 하게 되었다.(선집1,176-177)
곡물법의 폐지에 관심을 보인 것은 급진 부르주아지였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었다. 따라서 종전의 차티스트 당은 두 개의 당파로 분열되었다. 이 양 당파의 정치 원칙은 말로는 완전히 일치하였지만 [사실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고 일치할 수 없었다.(선집1,177)
급진 부르주아지는 충돌이 일어나면 언제나 차티스트들에 적대하여 자유주의자들의 편을 들었으며, 일반적으로, 잉글랜드 인에 있어서는 자유 경쟁의 문제인 곡물법의 문제를 그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선집1,178)
자유 경쟁의 대표자인 부르주아들은 노동자들의 공공연한 적이다. 노동자는 경쟁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는 것에 의해서는 손실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지금까지의 노동자의 요구들인 10시간 법안, 자본가에게서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 정당한 임금, 지위의 보장, 신 구빈법의 폐지 등 이 모든 것들은 적어도 ‘6개 조’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차티즘에 속하는 것이며 자유경쟁과 무역 자유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다.(선집1,178)
“정치권력은 우리의 수단이고 사회 행복은 우리의 목적이다.” 이것이 현재 확실하게 언명되고 있는 차티스트들의 표어이다.(선집1,178)
[차티즘의] 사회주의로의 접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상공업의 현재의 활황에 뒤이어 늦어도 1847년까지는 일어날 것이며 필시 내년에는 일어날 것임에 틀림없는 다음의 공황, 격렬하고 맹위를 떨친다는 점에서 이전의 모든 공황들을 뛰어넘을 이 공황은 빈궁 때문에 점점 더 노동자들을 정치적 구제 수단 대신에 사회적 구제 수단으로 이끌 것이다.(선집1,179)
잉글랜드의 사회주의자들은, 공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교육을 향유하는 이삼천 명 정도로 이루어진 ‘홈 콜로니’에서 재산의 공유제를 점차적으로 도입할 것−이혼을 용하게 할 것,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성적 정부를 수립할 것, 형벌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범인을 이성적으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들이 그들의 실천적 제안들^이다.(선집1,179-180)
이 사회주의는 공장주인 오언으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이 사회주의는 사실상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을 뛰어넘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식에 있어서는 부르주아지에 대해서 매우 관대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는 매우 불공평하다. 이 사회주의는 대단히 온건하고 평화적이다. 그들은 공개적인 설득 이외의 어떠한 방법도 거부하는 한에 있어서, 현존 관계들이 아무리 나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승인한다.(선집1,180)
그들도 노동자들이 왜 부르주아지에게 분개하는가를 알고 있긴 하지만, 노동자들을 전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이 분노를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잉글랜드의 현재에 대해서 훨씬 더 무익한 자선과 박애를 설교하고 있다.(선집1,180)
차티즘을 경과하고 부르주아지의 요소를 척결한 진정한 사회주의는 물론 생성하고 있으며, 가까운 장래에 잉글랜드 인민의 발전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선집1,181)
노동자들은, 신앙이란 그들 자신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유산계급에게 순종하고 충실하도록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이라는 것을 점점 인식해 나가고 있다.(선집1,181)
사회주의와 차티즘의 융합, 즉 잉글랜드적 방식에 의한 프랑스 공산주의의 재생산은 극히 가까운 장래의 일이며 부분적으로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것이 실현될 때에 비로소 노동자 계급은 실제로 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선집1,181)
합쳤다 갈라졌다 하는 이러한 다양한 노동자 분파들−노동 조합원들, 차티스트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정신적 교양을 높이기 위해 자신들의 독자적 힘으로 학교와 독서실을 설립하였다. 모든 사회주의 단체들 그리고 거의 모든 차티스트 단체들은 각각 이러한 시설을 가지고 있고, 개별 조합들도 마찬가지로 많은 시설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어린이들은 부르주아지의 어떠한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교육^을 받으며 독서실에는 전적으로, 혹은 거의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 신문과 책자만 있다.(선집1,181-182)
이제 더 이상 걸치기도 무엇할 만큼 너덜너덜해진 빌로드 저고리를 입은 노동자가 교양있는 허다한 독일 부르주아지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학식을 가지고서 지질학, 천문학 및 기타 주제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나는 자주 들었다.(선집1,182)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 날카로워질수록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은 더욱 발전하고 더욱 날카로워진다.(선집1,183)
(1844년11월 중순부터 1845년 3월 중순에 쓰여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