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문명의 자존심 -
그리스(Greece)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 문화와 서양
서구란, 제법 잘나간다는 서유럽 강대국을 비롯해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을 아우르는 말이다. 서양이란 말의 역사적 이면에는 가톨릭 교권과 소크라테스,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등 그리스․로마 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데 있다. “우리가 진리임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믿음 그것이 바로 악마다”움베르토 에코(1932~2016)가 한 경고의 말이다. 서양인에 의해 기록된 서양 중심의 세계사를 바라보면서 그들의 맹목적 우월주의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심한 비약일까. 그것이 맞다면 현재진행형인 인종차별도 그의 연장선에 있다. 백인은 물론이고 흑인, 간혹 히스패닉계 조차 동양인을 비하하는 데 가차 없는 요즘이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경험한 며느리가 지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우리나라 옛말이 있다. 차별도 받아본 놈이 하게 마련이라는 비아냥거림이 그들 스스로 지구촌 약자의 가련한 지위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법칙이 있다. 서구에 무한한 동경을 보내는 시각이다. 스스로를 무시하면 타인도 나를 무시하는 법이다. 맹자가 말했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후에 남이 업신여기게 된다. 집안도 스스로 망가뜨린 후에 남이 망가뜨린다” 무척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국가 역시 이 같은 철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주인에게 홀대받는 견공조차도 밖에 나가면 힘을 쓰지 못한다는데,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라. 그리고 자신을 마치 기계처럼 분석해보자. 아무리 인간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하지만, 스스로 나약하거나 무시하면 링에도 오를 기회조차 없다. 서구사회가 과연 우리가 환상적인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과연 이슬람문명, 흰두문명, 중화문명, 동방정교문명과 비교해 찬양받을 만한 것이 뭐 그리 많은가. 국경을 맞댄 이웃끼리 반목과 갈등, 문명의 충돌은 독선이 원인이다. 우리와 다른 문명을 타자화하는, 그들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행위는 한낱 호기심을 넘어 오리엔탈리즘, 즉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인식의 태도일 뿐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즉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는 시각이자, 찬란한 동방문화에 대해 의도적으로 낮추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역사적 승자의 기록에 길들어진 우리는 서양 중심의 세계사에 익숙한 나머지 백인에 대해 열등감이 내 혼을 덕지덕지 덮고 있지 않은지 감정이라곤 단 일도 없는 알파고처럼 분석해볼 일이다.
따져보면 서양이 동양을 앞서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때마침 1776년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면서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하고, 유럽에 산업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다투어 해외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릴 때다. 해가지지 않은 대영제국을 중심으로 제3세계의 값싼 원자재확보와 이를 가공해 되팔기 위한 시장개척을 위해 다투어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신흥열강들의 충돌이 시한폭탄처럼 다가오고 있던 때다. 산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가공할 무기의 발전을 가져왔고, 경쟁적 팽창주의는 결국 세계 제1차 대전의 서막을 열었다. 이 전쟁에 의해 누구는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또 어떤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며 방대하던 국토가 갈기갈기 갈라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제국이 사라져가고 또 새로운 제국이 탄생하는 과정이다.
인간 내면, 삶과 죽음, 인생은 무엇인가? 등 선험적이고 형이상학적 이상을 치열하게 고뇌해 세련된 논리로 제시한 소크라테스와 공자, 석가모니가 다르지 않았다. 인간본연 존재에 대한 충실한 철학적 사고는 어쩌면 동서양이 동시대에 기반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서양 중심의 세계사는 훗날 승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서, 특히 에드워드기번 같은 편율된 시각의 사학자들이 쓴 역사서가 어떠한 여과기도 거치지 않은 채 정독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검증되지 않은 자긍심은 바로 그리스 문명, 즉 그리스 철학과 문학과 유물유적으로 시작된다. 그리스가 15세기부터 계속된 오스만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이 전개 되었을 당시, 그리스를 돕기 위해 유럽 각국에서 전쟁비용 모금은 물론 청년들까지 자발적으로 의용군에 입대해 전투에 참여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유럽에 광풍처럼 불었던 낭만주의가 ‘그리스 사랑운동’으로 번지면서 고대 유럽의 뿌리인 그리스 독립을 외친 것은 그들로서는 진정 처음 맛보는 정의로써 가슴 뛰는 벅찬 행동이었을 것이다.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이자, 친 그리스주의자 바이런도 전투에 참전했지만, 결국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
그리스는 스펀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 서방, 즉 서양의 가치 중심에 서게 된다. 기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크라테스가 서구에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했으면 좋겠다. 세계의 배꼽, 유럽의 관문, 민주주의를 제정한 민족, 서양철학의 근원, 그들 스스로 신을 창조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 재창조에 스토리텔링을 가미하면서 그것을 중심에 둔 채 근거 없는 정의감과 우월감에 태생적 출처도 모호한 책임감이 더해지며 폭력을 정당화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참고로 서유럽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소개된 것은 12세기의 아랍 철학자 이븐 루슈드(라틴식 이름 아베로스)의 저서가 에스파냐를 통해 전달된 때부터라고 한다. 비록 소설이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서유럽 수도사들이 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매우 낯설게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구의 영웅이라 일컫는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을 말이다. 사실 더 넓게 유럽이라는 개념 자체도 18세기 말 역사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혁명을 경험한 19세기에 와서 명확해졌다. 유럽은 지리적 개념에 고대 그리스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 중세에 기독교권이 정립된 공화국의 이념, 그리고 18세기 문명의 개념이 역사적 사고방식으로 총합되면서 생겨났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 역사 개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그리스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고? 부드럽게 발음되는 국명 그리스는 정말 엉뚱한 곳에서 생겨났다는 뜻이다. BC 1,000년쯤 그리스인들이 지중해 여러 지역에 식민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리스 보이오티아에서 온 그라이아(Graia)인들이 남부 이탈리아 키메에 그라케라는 식민도시를 건설했는데 그것을 로마인들은 고대 지중해 세계의 국제 언어였던 라틴어로 그라이키아 라고 불렀다. 무슨 연유에선지 이 말이 그리스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 되고, 이후 이탈리아어의 그래키아(Grecia)가 오늘날의 국제어인 영어 발음으로 그리스(Greece)로 변했다. 이집트 한 시장에서 발견된 아르메니아 고원의 히타이트 점토판 설형문자에 의하면 미케네 시대에는 아카이오이(Achaioi)로 알려졌고, 몇 세기 후의 인물인 호메로스 역시 그렇게 불렀다. 그렇다고 그리스인 모두를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지역에 따라, 고전적 방언의 분류에 따라 다나오스인, 아르고스 인, 이오니아인, 도리스인으로 불렀다. 물론 이들도 원래 지금의 그리스 땅의 원주민이 아니다. BC 6천년경에 신석기 시대부터 살았던 사람들과 소아시아계 민족이 살던 곳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물밀 듯 밀려오면서 아주 간단하게 박힌돌을 뽑아냈다. 그리스 신화의 시작인 제우스 형제들이 크로노스와 티탄족을 물리쳤다는 신화는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뽑아낸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다.
어찌되었던 간에 발칸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간직한 그리스는 진정 신성의 땅이었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 결혼 수호신이자 바람둥이 제우스의 아내 헤라, 태양의 신 아폴론, 지혜와 전쟁의 신 아테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바다의 신 포세이돈, 달과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 등을 비롯해, 아레스, 디오니소스, 헤파이스토스, 판 등 이외에도 곁가지까지 연결하면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이들이 엮어내는 신화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 에게 문명
그리스는 산악지형으로 본토를 비롯해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BC 3,000년부터 BC 2,000년 동안 에게해를 중심으로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문화의 선주문명으로 중기 청동기 크레타 섬에 크레타(일명 미노아문명)문명과 뒤이어 그리스 본토에서 발현된 미케네문명, 즉 에게해를 둘러싸고 형성된 이 두 문명을 에게문명이라고 한다.
크레타 사회는 지금으로부터 5000년경 전부터 크레타인들에 의해 시작된다. 이들은 오리엔트, 특히 이집트의 강력한 왕권에 입각했으면서도 비교적 자유와 평등한 사회구조에서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이룬다. 오리엔트세계, 특히 예술과 과학이 발달되면서 상형문자까지 창제한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크레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으로서 더욱이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와 넓은 평야가 펼쳐있어 사람이 살아가기에 매우 적합했다. 밀과 올리브, 포도는 질이 매우 높았고, 바다를 통해 교역이 활발했다. 점차 해양기술이 발달되면서 지중해 무역권을 손에 넣는다.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우의 미로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지었다는 크노소스궁전이 있는 신화의 현장이다. 그리고 전설 속에서만 존재했던 이야기가 1900년 영국인 고고학자 아서 존 에반스에게 발견된 후 신화가 역사가 뒤섞이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기에 이른다. 궁전을 지은 다이달로스 도움을 받은 테세우스가 실타래를 달고 들어가 반인반우 미로타우로스를 죽이고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를 구출하는 신화의 탄생지다. 태양 가까이 올라가 밀납이 녹아 바다로 떨어진 이카로스의 전설도 이곳에서 시작한다.
크노소스 궁전에는 하수도시설과 호화로운 목욕탕은 물론, 수세식 화장실까지 발견된다. 지하에 큰 항아리들이 보관된 창고가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 항아리에 포도주를 채우면 무려 19,000갤런(1갤런:약 4리터)을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화려했던 크레타 문명은 BC 1400년경 티라, 즉 산토리니 화산의 대폭발과 지진, 해일 등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설상가상 그리스 본토에서 기세를 떨치던 미케네의 침략으로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크레타 문명에게 결정타를 가한 미케네 문명에 대해 알아보자. 크레타 보다 조금 늦은 그리스 본토에는 미케네 문명이 발달하고 있었다. BC 2,000년부터 중기 청동기에 발칸반도 북쪽에 살던 아카이아인이 남하하면서 자연스레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둥지를 튼 이들은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주위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앞선 크레타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미케네는 BC 1,500년 전부터 강력한 해양기술을 바탕으로 지중해 동부 해상교역권을 장악하며 승승장구 한다. 이들은 기존 청동기문명과 전사적인 성격이 융합한 웅장한 성채를 구축하는 등 여러 왕국을 세우며 위세를 떨쳤다. 미케네는 크레타를 약탈하는 등 침략하면서 문화를 흡수하는 이중적인 형태를 보였다. 당시 고대 그리스 주요 지역은 미케네를 비롯해 아테네, 테베, 티린스, 테살리아, 필로스 등이 있었으나 미케네가 가장 번성했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에서 트로이와 전쟁을 일으킨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이곳 미케네의 왕이었다. 물론 신들의 대리전으로 번지게 묘사된 이 대서사시는 다만 전설 속 이야기였다. 아가멤논의 동생이자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나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납치되면서 전쟁의 불씨가 된다. 이 이야기에는 여신들의 시기와 질투의 사연이 숨어 있었다. 신화에 의하면 바다의 님프, 즉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의 결혼식 날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신 에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쓴 황금사과 하나를 연회석에 던진다. 헤라가 가장 먼저 나서서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자, 아테나가 반기를 들며 응당 자신이 차지해야 한다며 나섰다. 그러나 영원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골치가 아파진 제우스는 당시 목동이었던 파리스에게 판결을 맡겨버린다. 세 여신은 파리스에게 자신을 선택하라며 솔깃한 제안을 했다. 헤라는 세계를 거머쥘 수 있는 권력을,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지혜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인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안겨주겠다고 약속한다.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안 파리스는 권력도, 지혜도 필요치 않았다. 그는 결국 아프로디테를 선택했고, 그의 도움으로 헬레나를 얻는다. 그러나 헤라와 아테나가 그냥 있었을까. 때마침 욕망의 화신이었던 미케네의 아가멤논은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심히 기다리던 바였다” 하면서 그리스 연합군을 꾸려 트로이 원정에 나선다. 아가멤논이 그리스 원정과 관련된 신화 하나가 떠올라 잠시 돌아서 가기로 한다. 아가멤논은 사냥을 할 때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도 나처럼 활을 잘 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해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산다. 트로이 정벌을 떠나기 위해 그리스 바다에서 배들이 출정하려 했지만, 역풍이 불어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때 예언자가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으로 인해 그런 것이니 아가멤논의 외동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했다. 아가멤논은 딸에게 아킬레우스와 결혼을 시키려한다고 속여 데리고 온다. 이때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뛰어와 울면서 사정한다. 그 내용이다. “당신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며 뭐라고 기도할래요? 수치스런 출발에 걸맞은 비참한 귀향을 빌래요? 내가 당신을 위해 복을 빌어주기를 바라세요?”그러나 결국 이피게네이아는 제단에서 머리에 화관을 쓰고 예언자 칼카스의 칼을 받았다. 그녀 역시 아버지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때가 되기도 전에 저를 죽이지 마세요. 햇빛을 보는 게 저는 달콤해요. 땅 밑을 보도록 저를 강요하지 마세요.”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다. “햇빛을 보는 게 저는 달콤해요.” 오래도록 이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 재물이 되지 않으면 그리스 군사들에 의해 도륙을 당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결국 호메로스가 천재다.
파리스의 황금사과 이야기는 훗날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림의 주제로 등장한다. 더없이 좋은 얼굴로 다가와 반목과 갈등을 조장하기를 즐기는 인간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기 마련이다. 불화의 신이라니? 에리스가 인간의 역사의 한 줄기에 큰 원인제공을 한 셈이다.
이처럼 《일리아스》 속 미케네는 그저 전설로서 회자되는 이야기일 뿐이었으나, 이 또한 크레타처럼 신화를 동경하던 한 인간에 의해 신화, 혹은 문학 속 이야기가 역사로 재탄생되는 기적을 일으킨다. 흔히들 하는 말로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몇 천 년을 땅 속에서 잠자고 있던 미케네를 발굴한 이는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고고학의 아버지, 도굴범, 문명의 파괴자 등 정반대로 엇갈리지만, 결론적으로 하인리히가 집착했던 호메로스의 세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고고학이나 고고학자가 흔치 않던 시절에 그의 노력으로 신화가 벗겨지고, 일곱 곳의 고대도시와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원시시대 인간의 터전 두 곳까지 찾아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받아야 한다. 물론 철썩같이 믿었던 미케네 유적에서 발굴된 아가멤논 마스크를 비롯해 황금수의는 당시보다 4세기 전의 것으로 밝혀졌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이렇게 찬란했던 미케네도 BC 1,100년경 북쪽에서 철기문명으로 무장한 도리아인이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운명에 종지부를 찍는다. 달마티아, 알바니아 지방에서 그리스 본토로 몰려들기 시작한 이들은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섬들에 스파르타 등 여러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소아시아는 물론 이탈리아와 인근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기염을 토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철제무기로 무장한 이들을 향해 헤라클레스 자손의 귀환이라고 했던 도리스인의 남하는 미케네에 살던 사람들을 그리스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후 그리스는 암흑의 시대가 대략 300여 년간 지속이 된다. 사실 기록이 없어 사가들은 암흑이라고 기록하지만, 이들 도리스인들은 거대한 돌기둥에 세로줄의 홈이 있는 도리아 양식을 발전시켰고, 훗날 로마인들의 건축에 모태가 된다. 실용적이며, 튼튼한 구조로 인정받는 콜로세움 아래층 기둥도 도리아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특히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로 인정받는 파르테논신전만 봐도 금방 이해가 된다.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에게해와 코린트만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미케네 유적은 현재 조금이라도 그리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는 단골 탐방지역이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처럼 화려하거나 웅장한 모습을 상상했다면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만들어진 역사와 신화가 버무려진 현장이라고 생각하면 대번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유적 가운데 우뚝 솟은 정상에서 바라보는 시원한 눈맛도 좋지만, 넓게 펼쳐있는 들판은 적의 침략을 감시하기에 알맞은 지형이며, 더구나 천혜의 요새다. 궁전 왼쪽은 프로피티스 일리아스이고 오른쪽은 사라산이다. 이 지형 중간에는 깊은 계곡으로 형성되어 함부로 건널 수 없었다. 왕궁을 자연조건을 활용한 요새처럼 만들어 천년 왕국을 꿈꿨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지형과는 많이 달랐을 법하다. 혹여 더 깊은 골짝을 이루고 있지는 않았을까. 우리나라 속담에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하물며 4,000년이 지난 후인 지금 무어라 입을 댈 것인가.
미케네 궁의 입구 유럽의 관문이라 부르는, 머리 부분이 사라지고 없는 사자 두 마리가 서로 마주한 채 한자로 들‘入’자 형태를 한 채 어서들 오라 맞는다. 아마 머리가 온전하다면 기울기로 보아 암수 사자 두 마리가 서로 입술을 맞대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쓸데없는 상상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사자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수혈묘의 흔적이 나타난다. 슐리만은 이곳을 발견하면서 전설의 아가멤논이 지배하던 미케네라고 확신했다. 왕가의 무덤군으로 왕과 왕비, 그 자녀들의 유해와 수많은 부장품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유해에는 황금옷과 황금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금은으로 만든 용기들을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환관, 보석 호박 등 호화로운 부장품들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집트에서 처음 만들어진 전차가 조각된 부조, 슐리만이 당대 도시의 약탈자로 불리던 아가멤논의 마스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황금마스크도 출토되어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궁전위로 올라갈수록 사방이 훤하게 들어난다. 이방인주제에 가장 높은 터에 올랐다. 주위를 둘러봐도 이리저리 쌓여 있는 돌의 부재들, 어렴풋이 짐작만할 뿐인 한계의 상상력은 마냥 화려했던 당시의 상상복원도에 의존해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호메로스가 황금이 흘러넘치는 곳이라고 했던 미케네는 지금 황금 대신 하층민과 노예의 채찍이 만들어 낸 크고 작은 돌들만 가득할 뿐이다. 물론 필자가 이곳에 발을 디딘 것이 십여 년이 되어간다. 당시만 해도 출처와 용도를 알 수 없는 흔적들이 마치 버려진 듯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물론 한쪽에서는 발굴과 복원작업이 간간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에 정보를 검색하다가 폐허가 된 돌무더기였던 당시와는 무척 달라 놀랐다. 아가멤논의 무덤은 상상도 할 수 없었었거늘….
궁전 정상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록 현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멀리 북쪽으로는 고린트만이 보였을 것이고, 동남쪽으로 에게해가 호전적 정복자들을 부추겼을 것이다. 중앙궁전에는 가운데 화로를 둔 장방형의 방(메가론)을 두고, 동쪽으로 열주 형식의 흔적들이 죽순처럼 솟아 몇 천 년의 세월의 격차를 두고 희미하게 속삭인다. 호기심만 가득한 무지한 필자에게 “더는 알려고 하지 마라”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곳까지 간 시간과 경비, 등 본전생각에 근거 없는 의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순서 없이 돌아다녔다. 아가멤논도 되어보고, 희대의 악녀(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겠지만)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정부와 짜고 전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살해하는 장면까지 상상했다. 하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외동딸까지 희생시킨 인간의 말로로서는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러다 4,000년 전에 만들어진 우물을 찾았다. 사면을 큰 돌로 쌓았고, 입구 바깥 태양빛을 빌어서 본 모습을 보자 미로에 빨려들어가는 음습함이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르내렸을까. 돌계단이 반질반질하다. 이리저리 꺾인 석굴을 탐사하는 기분이었다. 힘겹게 물을 이고지고 날랐던 노예, 혹은 하인들의 발길이 무수히 닿았을 흔적이다. 대략 40여m 들어가자 우물바닥이 드러났다. 18m 깊이의 우물이었다곤 하지만, 세월과 함께 말라버리고, 맨바닥을 속살로 드러내고 있다. 궁전 터의 정상에 어디서 어떻게 스며든 물이 고여 우물이 될 수 있었을까. 자연과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작품이자 유물유적이었다. 둘레 대략 1km 미케네 유적은 다음을 기약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가까이 있는 코린트 유적을 찾아서….
-계속-
첫댓글 훗! 신화.
지금 우리나라의 답사라고 하면 문화재의 미시적 분석이 주류인데,
신화적 상상력이 더해져야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는데....
토르나 오딘의 북유럽신화나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도 기다릴께요.
ㅎㅎ 토르, 길가메시 신화 정말 재미있지.
그런데 핀이 안 맞아서.
나중에 다뤄볼까 하려고 생각만 하고 있지.
우리나라 신화나 기타 비쓰무리한 걸로 디릿따 섞어서^^*..
보내준 심행수묵 잘 읽고 있습니다
한권의 책이 저에게는 많은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고맙습니다
미천한 책입니다.
예전에 써놓은 글 급하게 제 손으로 한글파일 편집해서 출판한 것이라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정말 심심하실 때, 혹은 잠들지 못하는 시간에 펴들면 잠 잘올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