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한사전의 추억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문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외면당하거나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것들을 보면 그렇다. ‘스마트 폰’이라는 문명의 이기(利器)로 사람들 손에서 이미 떠났거나 떠나고 있는 몇 가지를 떠올리면 공중전화, 신문, 책 등을 들 수 있다. 모두들 스마트 폰에 몰입되어서 일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책을 읽는 승객이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종이신문을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외면당하고 있는 책 중에서도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특별한 것이 있다면 영한사전이다. 사전에 실린 단어나 숙어의 뜻과 이름난 문장을 노트나 연습장에다 옮겨 적다보면 단순한 독서보다 상상의 폭과 깊이를 훨씬 더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전이 학생들로부터 영영 멀어져버렸다. 고물(故物)로 취급되어 폐지 상(廢紙商)에 팔려지는 사전을 생각하면 마치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십년 가량 되었을 성 싶다. 도서관이나 독서실에서 영한사전을 뒤적이며 영어 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마지막으로 본지가. 이제 사전은 가정이나 도서관의 책장에 장식용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책장이 비좁아 내다 버리거나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가정도 있을 것이다. 사전에 수록된 내용보다 훨씬 풍부한 내용이 들어 있는 스마트 폰의 등장으로 구닥다리처럼 여겨진다는 이도 있다. 손주 세대에 이르면 그들에겐 골동품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요즘 학생들이 스마트폰으로 영어 낱말을 찾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쯤 될까. 이전 세대가 사전을 이용하여 낱말을 찾는데 걸렸던 시간에 비하면 절반가량의 시간으로도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모르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으려면 짧게는 십여 초 길게는 일분가량 걸리기도 했다. 찾으려는 단어가 실려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부분을 양손 엄지손가락을 이용하여 펼쳐도 바로 그 단어가 나오지 않아 앞뒤로 몇 쪽을 넘겨야 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고교 시절, 영어공부를 위해서는 교과서와 사전 외에 노트나 연습장을 꼭 지참했어야 했다. 포켓용 간이 사전을 지니고 다닌 학생들이 있었다. 열차나 버스 통학을 하면서 그 사전을 들여다보며 공부를 하는 학생도 있었다. 사전에 실린 단어를 모조리 외우려 드는 공부의 미치광이도 있었다. 실린 단어수가 적게는 이천에서 많게는 사천 정도 되는 사전이라도 노력과 열정을 가진 학생들에겐 가능했다. 낱말, 숙어, 어휘 등이 빈약하다며 두껍고 무거운 사전을 늘 가방에 넣어 다니는 학생도 있었다.
전자 사전이 보급되었던 90년대 방송대 재학시절에도 나는 책 사전을 지참했다. 영어는 거의 매일 공부해야 했기에 사전도 매일 갖고 다녔다. 크기야 교과서에 비해 작았지만 부피와 무게는 훨씬 더 나갔다. 두툼한 사전을 가방에서 꺼내면 가방의 무게와 부피가 줄어 홀가분함을 느낄 적도 있었다. 그런 사전을 무려 5년 넘게 사용하였다. 거의 매일 만지다보니 손때가 묻고 종이가 낡아 찢어 없어지기까지 하였다. 한번 찾아본 단어는 붉은 볼펜이나 가는 싸인 펜으로 밑줄을 쳤다. 단어와 관련된 중요한 숙어나 문장도 밑줄을 긋고 노트에 옮겨 적었다. 단어와 숙어를 암기하기 위해 연습장에다 연필이나 볼펜으로 몇 번이나 써보곤 하였다.
영문으로 표기된 격언(格言)이나 명언 등 삶의 귀감이 될 만한 속담(俗談)은 사전을 들여다보며 통 채로 외워버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비슷한 뜻을 담은 속담(‘Roma was not built in a day’와 ‘There is no royal road to learning')을 놓치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다. 철학적 사유를 담은 문장을 익히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고가 깊어지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일이 십 대 시절, 또래의 학생들은 미련스럽게 공부했다. 한권의 사전을 무려 10년 가까이 사용했던 학생도 있었다. 내 또래와 이전의 세대들은 사전 한 장 한 장을 일일이 넘기면서 뜻을 찾는 수고로움을 참으며 인내를 길렀다. 또 노트에 또박또박 옮겨 적는 버릇에서 정확함을 체득했다. 열네 살 중학시절부터 고교를 졸업하기까지, 그리고 40대 방송대학 시절, 중간에 쉬기도 하였지만 무려 십 수 여 년 동안 영한사전을 가까이 했다. 지금 체력과 순발력은 그 시절에 비해 몹시 떨어졌지만 좋은 문장을 필사하려는 의욕은 살아있다. 노욕이며 객기(客氣)일지모르지만 사전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쓰고 익혔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한사전을 뒤적였던 젊은 시절이 힘들었지만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2017. 4. 15
첫댓글 옛 날을 생각하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그 시절엔 다 그렇게 익히며 공부했나 봅니다
옛 날을 돌아볼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