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말래 고개에 뭍어둔 사연
남쪽으로는 밤나무들이, 동쪽으로 잿말래고개 서쪽은 덕절리 가는 한길을 건너면 빨래터
가는 말 웃물, 북쪽으로 보이는 동네가 성녁말, 그 앞으로 넓은 논과 밭, 들판이 펼쳐져있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쳐 마치 삼태기 안에 동네를 담은 것 같았던 마을 버렴, (벌음리)
북쪽을 향해 60여 호 초가집이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모여 살던 나에 살던 고향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개발의 바람을 타고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우리 집이 동네 한 가운데 있어 집 앞길을따라 내려가면 동네 앞 가게가 있는 한길이 나온다
그러나 잿말래고개로 나가면 가게에서 한참이나 내려온 한길에 도착하기에 어른들이 장에
갈 때, 학생들이 학교에 갈 때도 꼭 잿말래고개를 넘어 다녔다
산이 나지막한 야산이라 해도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숨이 차서 쉬어야한다
내가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며 고무신을 신고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동구 밖을
나서던 잿말래고개 마루엔 아기자기한 추억의 열매들이 내 기억 속에 무수히 남아있다
우리 집 마루에서도 잿말래고개가 보였다 당숙 아저씨 집을 지나 성당이 있고 고개입구로
들어서면 서씨 문중의 묘와 묘석들이 많이 있었다. 묘 옆을 조금 걸어올라가면 여기서 부터가
잿말래고개, 소나무와 참나무 아카시아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고 여름이면 주민들이 올라와
쉬고 나도 초등학교 일학년을 나무 밑에서 거의 공부해서 큰 나무 밑마다 땅이 반들반들했다
그래도 한길로 내려가고 올라오는 길목에는 뱀이 우굴 거리고 각종 새들이 알을 낳아
남자들은 새알을 찾으러 다녔다 아버지는 풀을 한 짐 지고 엄마는 바구니에 가득 감자며 김치꺼리를 머리에 이고
나는 오이 하나를 들고 뒤를 따라 오르다 고갯마루에서 짐을 내려놓고
잠시 땀을 식히며 동쪽의 먼 산을 바라본다 아버지도 못 가본 쌍봉산의 유래도 그때 들었다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을 때 호미를 들고 가 나무 옆에 뭍어주던 일, 엄마한테 혼나고 속상해서 고갯마루에
올라가 우는데 이웃 남자동무가 지나가며 웃고 놀리던 일,
아버지는 쌀자루지고 엄마는 계란 꾸러미 들고 장에 가신 장날, 동생 데리고 고갯마루에 손잡고 앉아 한없이
기다리던 곳도 잿말래고개다
아침 학교 가기 전 아버지는 먼동이 트면 들에 나가 한 바퀴 돌고 집에 들어오신다.
“해가 중천에 떴다. 어여들 일어나!” 엄마는 벌써 일어나 부엌에 계시고 나는 부스스 일어나 이불개고
방비를 찾아 방부터 마루며 앞 마당 문간까지 청소를 한 다음 밥 먹고 학교에갔다 조금 커서는
학교 가기 전에 아버지 따라 들에 가서 풀 뽑고 있으면 책가방 든 친구들이
하나 둘 보일 때 집에 와 급히 밥 먹고 학교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