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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여호수아 6장 1-27절
제목 : 하나님의 전쟁법
일시 : 2019년 9월 14일(9,10일)
1. 여는 말
1) 마르시온, 김용옥, 리처드 도킨스의 공통점은?
2)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잔인한 학살자, 사막의 깡패신으로 보았다.
3) 이 본문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난처하고 당혹스럽다. 우리가 알던 사랑의 하나님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질적이고 낯설다.
4) 한편으로 이 텍스트에 집중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이 본문이 자리하는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 성경을 전체적으로 훑으면서 이 본문의 의미를 말하려 한다.
2. 재고해야 할 암묵적 전제 1
1)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곧이곧대로, 일대일로 연관시키지 마라. 우리가 여호수아서의 전쟁을 읽는데 방해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저것이다. 중동의 최강 군사력을 지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원주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장벽을 건설하는 일련의 행동과 여호수아 당시의 이스라엘과 매치시키지 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그때의 가나안 사람들이고, 지금의 팔레스타인은 그때의 이스라엘이다.
2)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군사력이다. 고대사를 읽어보면, 지금 이 시대가 후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문명이 교차하는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나안은 철병기가 있던 철기 문명국이었다면, 이스라엘은 구리로 검을 만들어 싸우는 후기 청동기 문명이다. 그러니까 강철검과 구리검으로 대결하는 것이다. 싸움 자체가 불가능하다. 전쟁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이것은 증거가 많다. 사울 왕 당시, 철병기로 무장한 것은 오로지 사울과 그의 아들이자 다윗의 소울 메이트인 요나단 뿐이었다. 그리고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사용하는 농기구를 구입하고 수리하기 위해서 가나안 사람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에 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여호수아서의 이스라엘을 얼마간의 무리와 과장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가지로 비유한다. 하나는 우금치 전투에서의 동학 농민이 여호수아 당시의 이스라엘이다. 그만큼 무기가 형편없었다. 그냥 죽창 들고 총칼을 쏘고, 대포를 쏘아대는 적들과 싸운 것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3. 재고해야 할 암묵적 전제 2
1) 앞의 것이 시대사적 혹은 문명사적으로 본 것이라면, 이번 것은 윤리적인 측면이다. 먼저 창세기 15장 16절과 레위기 18장 24-30절을 꼭꼭 읽어보라. 편의를 위해서 본문을 옮긴다.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저지르면, 이것은 너희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낼 민족들이, 바로 그런 짓들을 하다가 스스로 자신을 더럽혔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땅까지 더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악한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그 거주자들을 토해 내게 되었다. 너희는 모두 내가 세운 규례와 내가 명한 법도를 잘 지켜서, 온갖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지 않도록 하여라. 본토 사람이나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 역겨운 모든 짓을 하여, 그 땅을 더럽히고 말았다. 너희가 그 땅을 더럽히면, 마치, 너희보다 앞서 그 땅에 살던 민족을 그 땅이 토해 냈듯이, 너희를 토해 낼 것이다. 누구든지 위에서 말한 역겨운 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범하면, 백성은 그런 짓을 한 그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지키라고 한 것을 꼭 지켜서, 너희보다 앞서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저지른 역겨운 풍습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따라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런 짓들을 하여, 너희가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2) 순서를 바꾸어서 레위기 말씀부터 보자. 저 구절에서는 한편으로 가나안 부족들을 진멸해야 할 이유가 나오고, 또한 이스라엘도 진멸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읽는다. 이것은 정말이지 중요하다. 여호수아 6장의 여리고 성 전투 다음인 아이성 전투의 패배와 아간의 범죄에 대한 징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도 ‘헤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얼마든지.
여호수아서 뿐만 아니라 구약에 그 증거는 차고 넘친다. 특히 예언서들인데, ‘야훼의 날’을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라고 말한 것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멸 당해 마땅한 하나님의 적이요, 원수인 것이다.
3) 창세기 본문을 보자. 저 구절은 아브라함 당대에 가나안 땅을 얻지 못했는지, 그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노예로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해야 할 이유를 간명하게 기술한다. 한 마디로 가나안 원주민인 아모리 사람의 죄이다. 그들의 죄가 차고 넘치지 않았기에, 그들의 죄가 관영해해 질 때까지 기다리고 가다렸더니 무려 400년, 광야 시대까지 합하면 440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죄가 차고 넘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그 땅에 결코 들어갈 수 없으며, 들어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 지나친 상상력이기는 하지만, 다른 땅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4) 그럼 그들의 죄란 무엇인가? 땅을 더럽힌 것이다. 그럼 땅을 더럽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공평함과 공의로움이다. 앞의 것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으로서 공평무사함, 불편부당함이고, 뒤의 것은 기울어진 운동에서 언제나 피해를 보기 마련인 약자를 편드는 당파적인 정의이다. 그러니까 저들은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았고,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마구 짓밟았다.
그리고 여호수아서로 좁혀 보면, 여호수아서 후반부의 땅의 분배라는 주제를 여기로 끌어오면, 그들은 땅을 독점하고 땅 한 뙈기 없는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좀 더 보완할 것] 이것은 6장의 ‘나팔’과 관련되어 있다. 그때 보도록 하자.
4. 재고해야 할 암묵적 전제 3
1) 원래는 두 가지이었는데, 이것을 여기에 포함시켜야겠다. 가슴 아픈 말이지만, “전쟁은 원래 그렇다.” 그래서 전쟁을 하면 안 되는 거다. 전쟁 자체가 잔인하다. 물론 이것으로 본문 설명에는 미흡하지만, 전쟁은 당위(ought)가 아니라 존재(is), 곧 그냥 그러함이고, 있는 일이다.
이 말을 하는 것은 당대와 현대에 이르러 수 많고 많은 전쟁이 있어왔는데, 하필이면 성서의 일부 전쟁에 대해서 너무 정색하고 진지하게 따져 묻는 것은 ‘선택’ 윤리가 아닐까?
2) 그것은 당대의 일반적인 전쟁 양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주변 국가들의 전쟁을 기념하는 전승비를 보면 뚜렷하다. 이스라엘이 유별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했다는 점에서 어느 국가와 다를 바 없고, 헤렘 전쟁을 했다는 것만으로 잔인한 사람과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침소봉대이다.
3) 물론, 이것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5. 여리고 전투를 읽기 위하여
1) 지금부터는 여리고 전투의 놀라운 특징을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이럴 때는 일일이 구절(verse)을 풀어내는 방식 보다는 큰 덩어리로, 굵직굵직하게 툭툭 치고 가는 것이 좋다.
2)
6. 첫째, 여리고 전투는 제의이었다.
1) 여호수아 6장을 전쟁/전투라는 관점으로 읽어보라. 아니, 그냥 읽었을 때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 드는가? “뭐야 이거. 이게 전투야? 뭐 이딴 식으로 싸워? 장난하는 거야?”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무장한 군인이 앞서고 뒤서기는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성 주변을 돌기만 한다. 신라시대 때 불국사 주변을 돌며 신랑 신부 점지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과 뭐가 다른가? 탑돌이하는 것과 똑 같아 보인다.
이런 식으로 전쟁해서 이긴가?
2) 그렇다. 이건 전쟁이 아니다. 제의이다. 즉 예배이다.
3) 첫 번째 증거는 여호수아 5장이다. 길갈에서의 할례 사건.
4) ‘7’이라는 숫자가 유독 많다. 이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를 찾으라면, ‘7’ 그리고 ‘나팔’ 마지막으로 전멸과 희생제물일 것이다. 주석들을 뒤지면, 몇 회 나왔는지 다 적혀 있다. 되도록 각자 표시하면서 읽어보라. 6장 전체가 붉게 물들 것이다. 색깔을 달리 했다면 울긋 불긋하다. 그만큼 중요한 키워드이고, 이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문이 열릴 수도 있고, 닫힐 수도 있다.
일곱(7) 제사장을 중심으로 나팔 일곱(7)개를 불며 칠(7)일 동안 성 주변을 뱅뱅 돈다. 마지막날은 찬양과 승리의 함성을 내지른다.
5) ‘7’의 의미
일단, 창조의 수이다. 혼돈과 공허, 흑암이 사로잡고 있는 수면 곧 바다를 하나님이 질서와 충만, 광명으로 단장한 바로 그 창조 말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그 창조 이야기를 다시 쓰고 있다. 혼돈과 공허가 여리고 성 전부를 장악하고 있다. 그것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고, 재창조하여야 한다.
다음은 제사의 의미이다. 누군가의 논문을 읽었는데(가물가물하구나)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와 동일하다고 한다. 여섯 발걸음 걷고 제사하고. 그에 따르면, 하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 들어가듯이, 하나님을 모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의 의미에 관해서 그의 논문에서 인용할 만한 가치 있는 글귀가 있었다. 그것을 직접 인용으로 처리할 것.]
그러니까 이 사건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땅임을, 공평과 공의로, 정의와 평화가 있어야 할 땅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다시 한 번, 길갈에서의 할례를 기억하라.
7. 둘째, 여리고 전투는 해방 전쟁이었다.
1)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정말 많다. 하여간에 요지는 약자가 약자를 구원하는, 물론 하나님이 하신 거지만, 전쟁이라는 것이다.
2) 해방 전쟁이라는 것을 확실하고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이다.
3) 하나는 ‘나팔’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쓰기 위해 읽게 김지찬 교수의 논문에서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김서택목사의 여호수아 6장 설교를 비판한다. 그 설교가 사사화, 심리화의 오류에 빠져 있는데, 그것은 한국교회에 유행하는 QT 수준의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여기서 나의 관심은 QT가 아니고, 그것에 대한 반박은 곧 출간할 나의 책, <모든 사람을 위한 성경 묵상법>(SU)의 12장에서 다루었으니 그걸 보기 바란다.
그곳에서 김지찬은 이 숫양 나팔이 문자적으로는 나팔이기는 하지만, 그냥 나팔이 아니라고 한다. 희년을 알리는 나팔이라는 것이다. 와우~~
[이에 관해서는 좀 더 설명을 덧붙이기로 하고, 요점만 쓴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나온 책 <여호와의 날개 아래 약속의 땅을 향하여>를 읽고 추가할 것. 이 책은 논란이 되었던 <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의 전면 개정판이다.]
희년(禧年)이라는 말은 기쁜 해 인데, 저 히브리어 요벨은 자유, 해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희년은 알다시피 7x7=49 그리고 그 다음해인 50년째인 해를 말한다(학자들에 따라서 49년을 희년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잃었던 땅과 집, 토지를 되찾고/되돌려주고, 노예로 팔려갔던, 종살이하던 이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희년을 알리는 나팔이 6장의 그 나팔이다.
앞에서도 몇 번 말했고, 앞으로도 계속 강조할 것이 땅이다. 땅 없는 자들, 땅을 빼앗긴 자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땅을 돌려주시는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이다. 그러니 쾌지나 칭칭 났네!!
4) 라합의 구출이다.
진멸시켜 희생제물을 바친다는 말들 속에서 그 못지 않게 강조되는 것이 ‘라합을 보호하라, 라합을 구출하라’이다.
진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적을 제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일차적 의미는 적의 영향(정치, 군사, 그리고 문화와 무엇보다도 종교)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걸 놓치면 안 된다. 달리 말하면,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일이다. 헤렘을 통해서 이방의 문화와 관습, 세계관이 이스라엘 내부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그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위의 것이 소극적인 것이라면, 적극적으로는 구원을 위한 것이다. 누굴 구원? 바로 라합이다. 라합과 같이 하나님을 자신의 존재와 목숨을 내걸고 고백하는 이들, 여리고 체제 하에서 고통 받는 창녀/기생인 라합과 같은, 억압받는 이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번에 여호수아서를 공부하면서 깜짝 깜짝 놀라는 것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라합이다. 어느 학자에 따르면, 여호수아 정복전쟁을 기록한 1-12장에서 라합, 아간, 기브온이 정확하게 47%의 분량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헤렘 전쟁, 진멸하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은 누군가를 구원하는 일이고, 이스라엘 안에 악한 것을 성별하고 도리어 타격하는 내용이다. 아간과 기브온은 다음에 나올 것이니 그때 다루도록 하자. 아무튼 구원 이야기라는 것, 그것 하나는 명확히 짚고 넘어가자.
5) 정리하자. 희년과 라합 구출 사건을 통해서 여리고 전투는 구원과 해방 전쟁이다.
8. 셋째, 여리고 전투는 하나님의 전쟁이다.
1) 이제 마지막이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다. 정확하게는 ‘야훼의 전쟁’이다. 때로는 거룩한 전쟁 혹은 성전(聖戰)이라고도 말해왔던 그것인데, 강사문교수에 의하면, ‘야훼의 전쟁’은 ‘왕들의 전쟁’과 다르다. 왕들의 전쟁은 통상적인 국가를 확장하고 보호하기 위한 일련의 전쟁이고, 그것에 대한 기록이 구약에 많다.
그러나 나 또한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이고, 주의해야 할 것은 ‘진멸’ ‘헤렘’ 전쟁은 여호수아서에 제한된다. 그 다음 부터는 거의 왕들의 전쟁이다. 일부가 사울과 다윗 시기에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야훼의 전쟁, 전쟁을 거룩한 것으로 표명한 것은 여호수아서에 국한된다.
2) 제의로 보는 것과 야훼의 전쟁은 직결되어 있다. 야훼의 전쟁을 수행하는 일련의 과정과 법칙이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폰 라드의 책을 요약 설명할 것.
3) 한 가지만 강조할까 한다. 적어도 여리고 전투는 홍해 사건과 직결된다는 것이고, 인간의 노력과 수고를 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만히 있어 너희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라고 모세가 말했듯이, 지금 여호수아는 가만히 침묵할 것을 말한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홍해에서의 승리 이후에 미리암이 노래를 하였다면, 여기서는 승리하기 전인, 7일째에 큰 함성을 내지른다. 무엇보다도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는데 인간이 기여한 것은, 1도 없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이다.
4) 이것의 의미 : 인간의 전쟁과 하나님의 전쟁을 구분하라. 나의 적을 하나님의 적으로 착각하지 마라. 그러다가 네가 죽는다.
9. 닫는 말
1) 외부의 비방과 내부의 의문과 달리 여호수아서의 전쟁, 특히 6장의 전쟁은 물리적이기 보다는 영적이고, 종교적이고, 약자를 구원하고 해방하는 하나님의 전쟁이다.
2) 의미는 위의 세 가지를 말할 때마다 마지막에 말했던 것들이다.
3) 말 같지도 않는 전쟁이었는데, 말 같지 않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어 있다.
4) 좀 더 보완할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