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인물들 78 - 여류시인 황진이
여류시인 황진이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16세기는 이름 있는 여류시인들이 많이 나온 시기입니다.
이 시기로 말하면 ‘남존여비’의 봉건적 구속에서 여인들은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없었고 오직 집안에 갇혀 문밖출입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여성들은 이것을 박차고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드러내었고 자기들의 가슴을 헤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멀리 거슬러 올라 고조선의 여옥이 9세기 설요매, 고려시기 남원기생 우돌과 평원기생 동인홍들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이조시기에 와서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그리하여 허란설헌과 신사임당, 이매창, 황진이들을 기록했습니다.
16세기 여류시인들 중에서 황진이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는 봉건사회에서 천한 기생이었으므로 가족주위 환경에 대한 기록은 극히 일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황진이는 1516년 개성에서도 이름난 황진사의 첩이었던 진현금의 딸로 출생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을 매우 귀하게 여기었고 부러운 것 없이 길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직접 딸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영리한 황진이는 8살에 벌써 4서3경을 다 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와 음악에도 남다른 재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이가 들면서 용모 또한 뭇 총각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15살에 접어들면서 그의 아리따운 자태에 한동네에서 살던 총각이 반하여 사랑을 고백하려 했지만 처녀의 도고한 태도에 끝내 말을 떼지 못하고 자리를 펴고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가까이에 이르자 말뚝처럼 굳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안 황진이가 그를 동정하여 자기의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주었는데 그제야 상여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황진이는 죽을 때까지 말 한마디 못한 그 총각이 하도 가여워서 자신은 이제 더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후 황진이는 자기의 맹세대로 결혼을 하지 않고 어머니가 그 토록 말리는데도 기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황진이는 개성의 이름난 기생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기생이란 직분이 원래 노래와 춤을 기본으로 하기에 그들은 예술적 소양이 높았으며 따라서 시도 많이 창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기생의 시들을 보면 대체로 양반의 노리개로 되어야 하는 자기들의 기막힌 처지에 대한 한탄이었고 사랑을 빼앗기고 사랑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애달픈 감정의 표현이 있습니다.
황진이의 용모와 지각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10년 동안이나 천마산에 들어가 도를 닦으며 생불이라고 자처하던 지족선사도 그를 본 후에는 불교의 계율을 어기었다고 합니다.
황진이는 비록 이조봉건사회에서 가장 ‘천한’ 계층이었던 기생이었지만 중세유물론철학자였던 서경덕의 고결한 인품에 탄복하여 그를 스승으로 삼고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당시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3절’(세 가지 뛰어난 것)로 이름이 높았던 황진이는 시조에서도 격식을 깨뜨리고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를 높은 시 형상으로 노래한 것으로 해서 시조 분야에서 이채를 띠었습니다.
그는 주로 남녀간의 애정을 질은 서정으로 섬세하면서도 자유 분망하게 노래한 시조작품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요 녹수는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 고
이 시조는 자신의 뜻을 확고부동한 청산에 비기고 님의 정은 흐르는 물에 비겨 비록 님의 정이 변한다 하더라도 자기의 믿음과 사랑은 언제나 청산과 같이 드팀 없으리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시들을 보면 부패 타락한 양반통치배들이 심심풀이로 읊어대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조국강산에 대하여 크나큰 긍지를 가지고 소리높이 자랑했습니다.
그 대표작으로 우리나라 명승의 하나로 알려진 ‘박연폭포’에 대한 시가 있습니다.
한줄기 긴 냇물 구렁에 내리꽂혀 백길 용소에서 물살이 솟구치네.
하늘의 은하수가 거꾸로 쏟아 진 듯 흰 무지개가 비껴 드리운 듯
물소리 골 안에 우뢰를 일으키고 물방울 공중에 구슬을 흩뿌리네.
여산이 좋다고만 말하지 마오. 천마산의 이 폭포 누리에서 으뜸이요
(여산은 중국의 이름난 산인데 여기서는 여산의 폭포를 말한다.)
황진이는 비록 기생이었지만 성격이 매우 개방적이고 활달한 것으로 해서 시에서도 주저가 없이 내리엮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시 ?박연폭포?에서도 골짜기를 울리며 쏟아지는 폭포의 드세 찬 물줄기와 소용돌이치는 용소, 아름답고 웅장한 폭포의 경치를 비유와 과장의 수법으로 생동하게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여산만 산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것은 안중에도 없는 양반들의 낡은 관점에 대한 은근한 타격이며 자신이 나서 자란 고향에 대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인 것입니다.
황진이의 시에서는 이처럼 자연을 그리는 데서도 비판적 기백이 강한 것이 특징입니다.
시조 ?내 언제 신이 없어?는 남녀간의 애정문제에 대하여 노래한 성과작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황진이와 관련해서는 많은 일화들이 있는데 여기에 재상의 아들이 기생의 노복으로 되었던 이야기가 있다.
황진이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지극히 사랑하여 많은 명승고적들을 유람했습니다.
어느 해 봄 황진이는 금강산이 천하에 다시 없는 명승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보려고 했는데 함께 갈 사람이 없어 찾던 중에 어느 재상의 아들인 이생원을 적임자로 찍어 그에게 청을 내었습니다.
“내가 들으니 중국 사람은 ‘내가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았으면 한이 없겠다.’는 시구까지 전하고 있다는 데 하물며 이 땅에 태어나 이날 이때까지 자라서 지척에 명산을 두고도 실경을 보지 못했으니 될 말입니까? 지금 내가 그대를 우연히 만났으니 같이 한번 명승을 찾는 것이 즐겁지 않을까요?”
이생원은 그의 말에 쉽게 동의해 나섰습니다.
그들은 기분좋게 송도를 떠나 걸어서 금강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넘어 며칠이 지나자 식량이 떨어져 그들은 밥을 얻어먹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림 같은 절경에 빠져 그런대로 지냈으나 또 며칠이 지나자 그들은 금강산의 한 정자 앞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주위를 살피니 그들이 앉은 맞은 편에서는 촌선비들이 모여앉아 술 놀이를 한창 벌리고 있었습니다.
황진이는 그들 앞에 나서 인사를 하고는 권하는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희한했던지 선비들은 술잔을 들고만 있었습니다.
술과 안주를 마음껏 대접받은 황진이는 그들에게 청을 했습니다.
“저에게 한 노복이 있어 허기증에 걸렸으니 청컨대 남은 음식을 좀 가져갈 수 없을까요?”
취기에 오른 선비들은 좋은 노래까지 들은지라 어서 그렇게 하라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름난 재상의 아들인 이생원은 한순간에 천한 기생의 노복이 되어 남들이 먹다 남은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한심한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만 놓고 보더라도 황진이의 개방적인 성격이 안겨오며 또한 양반들을 큰 존재로가 아니라 자기가 데리고 다니며 노는 한갓 노리개로 여겼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황진이는 대체로 자연을 통하여 자기의 감정을 노래했는데 그의 시 ?반달?이 유명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곤산옥 다듬어서 직녀빗 뉘 만들든고 견우와 이별 후에 단장은 해 무엇하리
허공에 내던졌더니 반달인가 하노라 …
그의 시와 관련해서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황진이가 송도의 옛날 활 쏘던 장소의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오가는 길손들도 많지 않은 고요한 밤에 백마에 올라앉은 어떤 위엄 있는 무관이 여기에 발을 멈추더니 그 옛날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 땅에 대하여 감회깊이 회고하면서 이렇게 읊었다는 것입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어데 갔뇨 두어라 고국흥망을 물어서 무엇하리
시를 마친 무관은 비장한 눈물을 팔소매로 씻더니 금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훗날 사람들은 이 시를 무관이 쓴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던 황진이 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증되지 않았으나 많은 측면에서 황진이가 썼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또한 황진이의 창작에서는 시로써 양반들을 조소하고 폭로한 흔적들을 다분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청산리 벽계수?에 대한 시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말아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리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시조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푸른 산골안의 맑은 물아 거침없이 흐른다고 자랑을 말아 네 한번 푸른 바다에 이르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라 밝은 달빛이 저 산에 가득하였으니 쉬어감이 어떠리
당시 서울에는 벽계수라는 이름을 가진 임금의 친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찌나 교만한지 친구들도 그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거만한 태도에 대해 은근히 불만을 품고있던 친구들이 이 자를 한번 골려주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이런저런 한담 끝에 개성의 이름난 기생인 황진이를 화제에 올렸습니다.
황진이는 당시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인물맵시 잘 나고 노래 또한 명창이며 시재주가 좋아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터였습니다. 특히 그는 양반들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으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황진이가 입에 오르자 친구들은 그를 한갓 기생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며 용모와 재능에 대하여 찬사를 늘어놓으면서 은근히 한번 만나서 즐기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저만 저라고 뽐내며 우쭐거리는 교만한 벽계수는 코웃음을 치며 큰 소리를 쳐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 눈썹 한 오리 움직이지 못할 거네. 기생이면 기생이지 선녀라도 되겠나.”
“아닐세. 자네 모르는 소리네. 직접 만나보면 생각이 달라진다고. 이름난 선비들도 저저마다 말하던데.”
선비들은 벽계수에게 부추겨댔습니다. 그러자 원래 잘 난체 하기를 좋아하는 벽계수는 그 길로 하늘소에 올라 큰기침을 하면서 개성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하늘에는 별무리 총총히 흐르고 동산에 밝은 달이 떠올라 산천을 비치는데 벽계수는 흔들거리며 개성이 바라보이는 산굽이를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한데 이때 어디서인지 구슬 같은 목소리로 한자 한자, 또랑또랑 시조를 읊조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그의 귀가에 닿았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정말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가 바로 황진이었습니다.
벽계수가 서울을 떠나 개성으로 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황진이는 그를 시험해보기 위해 산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벽계수도 많이 들었던 터이므로 그가 황진이라는 것을 제꺽 알 수 있었습니다.
황진이 읊는 ‘청산리 벽계수’란 푸른 산골짜기의 맑은 물을 가리키며 이와 함께 벽계수란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고 ‘명월이 만공산’이란 온 산을 덮은 밝은 달빛이라는 뜻과 함께 황진이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다시 풀어 음미하면 이런 것입니다.
“그대 벽계수여, 미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자랑하지 마시라. 한번 이 순간을 놓치고 나면 다른 기회를 얻기 어려우리니 그대 여기 아름다운 곳에서 황진이를 만나봄이 어떠한가.”
벽계수가 그의 시조를 거듭 생각해보니 그저 기생으로만 볼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굽인 돌이를 돌아서니 달처럼 환하고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조용히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미인도 자기 마음만은 흔들지 못한다고 우쭐대던 그의 마음은 한 순간에 날아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황진이는 자기의 시적 재주로써 양반들을 골려댔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진이는 천한 기생이므로 어차피 양반 놈들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제일 싫었습니다.
어느 날 황진이가 금성고을을 돌아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할 일 없는 고을 원이 큰 잔치판을 벌려놓고 흥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잔치판을 둘러보니 보기에도 역겨웠습니다.
양반이라는 것들은 없는 재간을 뽐내느라 야단들이고 기생들은 그 턱밑에서 아양을 떠느라 야단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골려댈 것인가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난 황진이는 고을 원이 앉은 앞자리로 한발 척 나서더니 노래 한 곡조 부르겠다고 청했습니다.
있는 재간이라 그의 가야금소리와 고운 목소리에 양반들은 물론 그곳에 앉아있던 기생들까지도 아연해졌습니다.
그런데 황진이는 가야금을 뜯던 것을 한 순간 멈추더니 손을 옷 속에 훌쩍 넣어 아무렇게나 벅벅 긁어대더니 이인 듯 한 것을 두 손가락으로 끄집어내어서는 양반들 앞으로 마구 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 행동에 그래도 ‘점잖다’고 하는 양반들은 깜짝 놀랐고 좌중은 완전히 일이 글러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황진이가 그들을 골려주기 위하여 꾸며낸 계교였습니다.
황진이는 양반들이 놀라건 말건 또 여인들이 곱지 않게 쳐다보면서 외면하거나 일어서건 말건 제멋대로 다시금 가야금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윽고 사람들은 황진이의 안속을 알아 차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들을 돌이켜 보면서 주섬주섬 잔치 집을 빠져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황진이는 기생이라는 신분이었지만 자기의 시와 재능으로 양반관료들의 행위를 대담하게 조소한 참다운 예술가였습니다.
이 시기 여류시인들이라면 대체로 양반계급 출신들이었지만 황진이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때문에 자기의 신분과 관련하여 애절한 감정이 많았고 양반들에 대한 조소와 야유가 기본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황진이는 또한 명필이었는데 박연폭포의 소 옆에 있는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는 한자 시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을 머리 태를 잘라서 만든 달비로 쓴 것이라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글씨는 초서인데 매우 신묘한 경지에 이른 필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황진이라 하면 화담, 벽계수 그리고 박연폭포를 생각나게 합니다.
황진이는 옛 고려의 수도인 송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송도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남아 있는 몇 편 안 되는 황진이의 시 중에 두 편이 송도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 나라 고려를 그리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滿月臺懷古 (만월대회고) 만월대를 생각하며 <황진이>
古寺蕭然傍御溝 (고사소연방어구)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夕陽喬木使人愁 (석양교목사인수) 저녁 해가 교목에 비치어 서럽구나 煙霞冷落殘僧夢 (연하냉락잔승몽) 연기 같은 놀(태평세월)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歲月?嶸破塔頭 (세월쟁영파탑두) 세월이 가파름은 깨진 탑머리에 어렸어라 黃鳳羽歸飛鳥雀 (황봉우귀비조작) 황봉은 어디가고 참새만 날아들고 杜鵑花發牧羊牛 (두견화발목양우)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神松憶得繁華日 (신송억득번화일) 송악의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豈意如今春似秋 (기의여금춘사추)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松都 송도를 노래함 <황진이>
雪中前朝色 (설중전조색) 눈 가운데 옛 고려의 빛 떠돌고 寒鐘故國聲 (한종고국성) 차디찬 종소리는 지난 나라의 소리 같네 南樓愁獨立 (남루수독립) 남루에 올라 수심 겨워 홀로 섰노라니 殘廓暮烟香 (잔곽모연향) 남은 성곽에 저녁연기 피어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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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인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백두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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