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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이 파악한 18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1. 觀光과 審勢
박지원(1737~1805)은 1780년(정조 4)에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정사로 발탁된 三從兄 朴明源을 수행하여 5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5개월이 소요된 장기 여행이었다. 박지원은 중국 여행을 하는 동안 8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북경에 머물렀고, 그 중 열흘은 열하를 방문하여 청의 황제를 만났다. 조선의 사신이 열하를 방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박지원은 조선인 중에서는 청에 대한 정보가 많았던 학자였다. 조선의 대표적인 중국통 학자로 1766년에 북경을 방문한 홍대용은 그의 친구였고, 1778년에 북경을 다녀온 이덕무와 박제가는 그의 제자였다. 박지원은 1781년에 北學儀 서문을 작성했는데, 자신과 박제가가 청에서 목격한 것은 예전에 서로 토론한 것을 눈으로 확인했을 뿐이라고 했다. 박지원은 청을 방문하기 전부터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燕京에서 돌아오자 在先(박제가)이 자기의 북학의 내외 2편을 내게 보여주었다. 재선은 나보다 먼저 연경을 다녀온 사람이다. (중략) 한번 책을 들춰보니 내 일기(熱河日記)에 기록한 것과 다를 바가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내게 즐겨 보여주었고, 나도 기꺼이 사흘이나 읽었지만 싫증이 나지 않았다.
아아, 우리 두 사람이 중국을 목격하고 나서야 그렇게 되었겠는가? 일찍이 비 내리는 지붕이나 눈 내리는 처마 아래에서 연구했던 것, 술이 거나하고 등불이 사그라질 때가지 토론했던 것을 한번 눈으로 체험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박지원이 청을 직접 방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이후에도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조선 사람들이 외국을 여행하는 기회는 매우 한정된 사람이 한정된 기간 동안만 가능한 일이었기에 박지원은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이제현, 김창업, 홍대용 같은 선배들을 부러워했다.
이덕무의 淸脾錄에 ‘조선 사람으로 중국 땅을 두루 돌아다닌 사람으로는 益齋 李齊賢만한 이가 없다.’고 했다. (중략) 우리나라 시인이 사물을 표현할 때 모두 남의 글에서 빌려 쓸 뿐인데,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을 수 있었던 이는 익재 한 사람이다. 이번에 나는 古北口를 나와 옛 사람보다 낫다고 치지만, 익재에 비하면 부족한 바가 많다.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동안 국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근세의 선배로 金稼齋(김창업)와 내 친구 洪湛軒(홍대용)이 중국의 한 모퉁이를 밟아 보았다.
중국 여행을 고대하던 박지원에게 마침내 그 찾아왔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여행이었기에 그는 하나라도 더 보려고 노력했고 사람들은 그를 ‘觀光에 미친 사람’이라고 놀렸다. 실제로 박지원의 관광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우선 그는 정사의 동생인데다 공식 임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런 여건을 이용하여 그는 새벽에 다른 사람보다 먼저 길을 떠나 돌아다니다가 일행에 합류했고, 저녁에 숙소를 벗어나 청나라 사람들과 필담을 나누다 새벽에 몰래 숙소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사신단 일행이 야간에 숙소를 벗어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는데, 조선 사신을 안내하는 護行通官이 이를 감시하는 임무도 띠고 있었다. 박지원은 호행통관 雙林에게 일부러 친절함을 보였는데 혹시나 야간에 출입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박지원은 관광에 열심이었지만 그의 최종 관심은 관광을 통한 審勢, 즉 천하의 형세를 파악하는 데에 있었다. 박지원은 조선인이 중국에 들어가 賊情을 정탐하고[覘賊] 풍속을 살피기[觀風] 어려운 이유를 거론했다. 우선 적절한 안내자를 만나기가 어렵고,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충분한 의견을 나누기 어려우며, 중국 사람이 처음 본 외국인에게 혐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할 리도 없었다. 게다가 청나라 재상이나 장수의 인물됨, 풍속의 장단점, 만주인과 한인의 등용 여부, 명나라의 옛 사정과 같은 것은 아예 질문을 할 수가 없었고, 청의 재정, 군대, 산천에 대한 것도 혐의가 생길 수 있었다. 실제로 박지원은 많은 인물을 만나 활발하게 필담을 나누었지만, 화제가 당대 정치의 잘잘못이나 민심의 동향에 관한 것으로 옮겨가면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박지원은 조선인이 청나라 사람을 만나면 먼저 大國의 문화를 찬미하여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고, 현실 문제에 관심이 없는 척하여 혐의를 피하는 가운데, 그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나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나서야 그들의 의사를 알아낼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박지원은 이렇게 해서 파악한 천하의 정세를 熱河日記에 기록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조선에서 알았던 정보와 중국에서 직접 경험한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한 ‘審勢書’라고 할 수 있다.
2. 청이 조선을 우대하는 이유
박지원은 明=上國, 淸=大國으로 구별하고, 청이 조선을 우대하는 것은 은혜[恩]가 아닌 혜택[惠]이며, 이는 장차 조선의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청은 조선을 우대하였는데, 이는 경제적인 측면과 의례적인 측면이 있었다. 먼저 경제적인 우대로는 조선의 토산물이 아닌 金과 힘이 약한 綵馬를 조공에서 제외해 주었고, 쌀, 베, 종이, 자리와 같은 폐백의 양도 매년 감소시켰다. 또한 청에서 칙사를 파견할 일이 있어도 막대한 접대비를 고려하여 파견하지 않았고, 조선의 정식 사신이 바치는 正貢을 제외하고는 別使가 바치는 方物을 완전히 폐지시켰다. 다음으로 의례적인 우대로는 조선 사신이 열하로 가는 길에 軍機大臣을 특파하여 마중을 나왔고, 조회를 할 때에는 조선 사신을 청나라 대신의 반열에 서게 했으며, 萬壽節의 연극 구경에서도 대신들과 함께 구경하도록 배려했다. 박지원은 이러한 우대가 전례가 없을 뿐더러 명나라 시절에는 있을 수도 없었다고 했는데, 과연 조선 정부에서는 청의 優禮에 감사하는 사신을 별도로 파견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명의 은혜는 영광이지만 청의 혜택은 오히려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명은 上國, 즉 中華의 나라로 조선의 역대 국왕들이 명의 책봉을 받았고, 신종 황제는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파견하여 조선의 위기를 구해주었기 때문에, 명 황제가 하사한 것은 사소한 물건이나 단 몇 줄의 편지라도 큰 영광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청은 힘으로 우리를 굴복시킨 大國일 뿐이지 中華가 아니며, 조선의 국왕을 처음으로 봉한 나라도 아니었다. 박지원은 청이 조선을 우대하는 이유를 전략적 측면에서 파악했다. 그는 청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지만 결국은 본거지인 영고탑 지역으로 복귀할 것이고, 다시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과도한 부담을 요구할 것을 걱정했다.
저들은 중국에 기거한지 백여 년이 되었지만 중국 땅을 지나가는 객지로 생각하고 우리나라를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지금 四海가 평화로운 시절에 암암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절함을 보이는 것이 많다. 두텁게 대우하는 것은 德을 베푸는 것이요, 결속을 강화하는 것은 방비를 해이하게 하려는 것이다.
훗날 저들이 본 고장에 돌아가 국경을 눌러 타고 앉아 예전 君臣간의 예의를 따지면서, 흉년이 되면 구제할 것을 요청하고 전쟁이 있으면 원조하기를 바란다면, 오늘의 자잘한 경제적 해택이 훗날 큰 희생과 진주, 寶玉을 요구하는 미끼가 되지 않은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걱정거리가 되지 영예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박지원은 청이 조선인의 머리 모양과 복식을 그대로 둔 것도 조선의 文弱함을 유지하게 하려는 전략으로 해석했다. 청이 건국된 후 북경을 방문했던 조선인들은 변발 머리에 소매가 좁은 여진 복장을 착용한 중국 사람을 보면서 문명국 출신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 자신들이 상투 머리에 갓을 쓰고 소매가 긴 도포를 입는 것이 중화 문화를 가진 문화국 사람으로서의 표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함께 대화를 나누던 漢人들이 조선인의 衣冠에 관심을 보이거나 입어보기까지 하면 그런 자부심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박지원은 조선인의 衣冠이 반드시 古制에 맞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도포, 갓, 띠로 구성되는 조선의 의관 제도는 중국의 승려와 비슷한데, 이는 신라시대에 당나라로부터 불교를 들여오면서 승려의 복장도 함께 들어온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의 부인복은 원래 띠가 있고 소매가 넓은데다 치마도 길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 공주가 시집을 오면서 몽고 제도를 따르게 되었고, 당시 기생의 복장이 오히려 古制를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은 청나라 사람의 衣冠은 전쟁을 수행하기에 편리한 것으로 판단했다. 중화문화라는 상징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말을 타고 활을 쏘기가 용이하다는 전략적 관점에서 의관을 보았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後金이 조선을 정벌했을 때 조선인에게도 변발을 강요할 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후금의 汗은 조선인들이 禮義에 구속되어 文弱함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자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이 때문에 조선인의 머리모양을 그대로 두었다고 했다. ‘東方禮義之國’이라며 유교적 의례를 중시하는 조선인에게 厚禮로 우대하되 예의에 구속되어 强國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 것, 그것이 청이 조선을 우대하는 이유라고 박지원은 판단했다.
3. 청의 문화정책과 江南 漢人
중국의 강남 지역은 조선인이 중시하던 주자학이 탄생한 근거지이고, 17세기 후반 ‘三藩의 난’이나 鄭成功으로 대표되는 抗淸 운동의 거점이었다. 따라서 강남에 거주하던 漢人은 학문적 우수성이나 明朝에 대한 의리에서 조선인과 ‘氣脈’이 통하는 사이였고,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인들은 강남 한인을 만나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박지원은 청나라 황제의 南巡과 대대적인 출판 사업이 바로 강남 한인의 저항 정신을 억누르려는 전략적 의미가 있는 조치로 판단했다. 박지원은 중국을 여행하면서 청 황제의 巡幸에 관한 기록에 유의하면서 그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박지원은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강희제가 1711년(강희 50) 6월 하순에 작성한 글을 발견했다.
나는 여러 차례 양자강의 둑을 돌아 남방의 수려한 경치를 잘 알았고, 두 번이나 秦(섬서)과 隴(감숙) 지역을 여행하며 서쪽 지방의 묵은 지식을 밝혔다. 북으로는 龍沙(흑룡강)를 지나가고, 동으로 장백산까지 유람하여 산천과 인물을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상에서 보듯 청 황제의 巡幸은 동서남북 사방에 미쳤으며, 이를 각각 東巡, 西巡, 南巡, 北巡으로 구분한다. 청 황제는 그중에서도 강남을 방문하는 南巡을 여러 차례 실시했는데, 강희제가 총 6번 강남 지역을 방문했고, 건륭제도 박지원이 만날 때까지 5번째 강남을 방문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강남은 중국에서 가장 開明한 지역으로 천하에 사건이 일어난다면 제일 먼저 이곳에서 발생하게 되므로, 강희제와 건륭제의 남순은 이곳 호걸들의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서라고 해석했다. 박지원은 청 황제가 문화정책을 통해 강남의 한인을 통제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는 먼저 주자학 숭상하는 청 정부의 정책이 주자학을 존중하는 천하 사대부의 마음을 위로하고 주자학을 정통으로 하는 청 황실을 오랑캐라고 부를 수 없게 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皇明 말년이 되자, 천하의 학자들은 朱子를 종주로 하고, 陸學(양명학)을 하는 이는 줄어들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중국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면서 학술의 宗主가 어디에 있는지, 당시의 추세가 어디에 있는지를 은밀히 살폈다. 이 때 대중을 따라 朱子를 十哲의 반열에 올려 제사할 것을 힘써 주장하고, 천하에 ‘주자의 道는 바로 우리 帝室의 家學이라’고 호령했다. 이렇게 되자 천하에는 만족하여 기꺼이 따르는 자도 있고, 세상에 드문 일이라고 수식하는 자도 있었는데, 陸學은 거의 멸절되기에 이르렀다.
아아, 저들이 어찌 정말 주자학을 알아서 그 정통을 얻었겠는가. 천자의 존엄함으로 겉으로 사모하는 것 같지만, 그 의도는 중국의 大勢를 살펴 이를 먼저 차지하고 천하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 감히 자기를 夷狄이라고 부를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다.
청 황제가 주자학을 존숭하는 것이 이처럼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이라면, 청조 치하에서 주자학을 공격하는 사람은 청 황실의 정책에 저항하는 義人일 수도 있었다. 박지원은 毛奇齡처럼 주자학을 공격하는 학자를 한인들이 ‘주자의 충신’ ‘주자의 도를 수호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청 황실이 주자학을 사상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에 저항하는 抗淸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의 선비들은 가끔 주자를 논박하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았던 毛奇齡에 대해, 어떤 사람은 ‘주자의 忠臣’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道를 수호한 공로가 있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恩人에게 원수를 맺었다’고 한다. 이것에서는 모두 그들의 은미한 뜻이 드러난다.
아아, 주자의 도는 중천에 떠오른 해와 같아서 사방의 萬國이 모두 우러러보는 바인데, 황제가 사사로이 숭배한들 주자에게 무슨 累가 되겠는가? 그런데도 중국의 선비들이 이처럼 부끄러워하는 것은 일부러 높여서 세상을 제어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데에 격분했을 따름이다. 이 때문에 (모기령이) 가끔 集注의 한두 군데 오류를 빙자하여 100년 동안 번민하고 원망했던 기운을 씻으려는 것이므로, 지금 주자를 논박하는 자는 과연 예전에 陸學(양명학)을 하는 사람과 다른 것이다.
박지원은 18세기 古今圖書集成 四庫全書의 편찬과 같은 대대적인 문화사업도 결국은 강남 한인들의 입에 틀어막고 사상을 통제하는 의도를 가진 정책으로 해석했다. 고금도서집성은 1706년(강희 45)에 ‘古今圖書彙編’이란 이름으로 편집이 완료된 이후 1726년(옹정 4)에 인쇄된 총 1만권의 백과사전이고, 사고전서는 1773년(건륭 38)에서 1782년 사이에 완성된 총 3,503종 79,337권의 방대한 총서였다. 두 종의 서적은 강희제와 건륭제의 문화정책이 집약된 것으로 18세기의 청나라를 문화국가로 이미지화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고금도서집성은 1777년 조선으로 수입되어 조선의 출판문화와 과학기술의 수준을 제고시키고 세계지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들 사업에 담긴 청 황제의 정치적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비판했다. 박지원은 청나라 擧人인 王民皥로부터 사고전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顧炎武, 毛奇齡, 錢謙益의 문집 등 수많은 책들이 禁書로 지목되어 폐기되었음을 확인했고, 명나라가 천하의 서적을 수집하여 永樂大典을 편찬하면서 학자들이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한가한 틈이 없었는데 청나라도 이런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의심했다. 박지원은 청 황실이 대대적인 편찬 사업을 통해 저항의식을 가진 강남의 학자들을 평생토록 교정 사업에만 몰두하게 하고, 천하의 도서를 수집한다는 명목으로 청조에 저항적인 학자들의 서적을 없애버리고 있으며, 그 폐해는 결국 秦의 焚書坑儒보다 더 심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편으로는 몰래 중국의 학자들을 약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드러내놓고 文敎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 秦나라처럼 학자를 파묻어 죽이지는 않았지만 校讎하는 일에 썩게 하며, 진나라처럼 책을 불태우지는 않았지만 聚珍局에서 갈가리 찢어버렸다.
아아, 천하를 어리석게 하는 기술이 교묘하고도 깊으니, 이른바 ‘책을 모아들이는[購書] 화가 책을 불태우는[焚書] 것보다 더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박지원은 청 황실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킨 忠臣들을 꾸준히 표장하는 조치에 대해서도 유의했다. 청은 이미 順治帝(世祖) 때에 명나라 崇禎帝를 따라 죽은 范景文 등 20명을 표창했고, 1775년(건륭 40) 11월에는 명조를 위해 죽은 충신을 장려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1782년에 다시 명조의 충신 1,600여 명에게 忠愍 愍節 등의 시호를 내리는 조치를 시행했다. 이러한 조치들을 보면서 박지원은 끝까지 명조에 대한 의리를 지킨 淸陰 金尙憲의 사적이 청 태종의 實錄에 나오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는데, 이는 조선의 대명의리론이 청조에 의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청 황실이 명조 충신에 대한 표장을 계속한 것은 바로 한인들에게 청조에 대한 충절을 요구하는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한편, 박지원은 일본이 중국의 강남지역과 교역하는 상황을 주목했다. 18세기에 들어와 일본은 나까사키(長岐)를 통해 강남과 직교역을 함으로써 강남의 우수한 학문 정보를 수입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는데, 박지원이 이를 주목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뱃길로 강남의 재화와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헌에 캄캄하며, 명말 三王(福王, 桂王, 唐王)의 사적을 몰랐던 것도 전부 이 때문이다. 일본은 강남 지방과 통하기 때문에 명나라 말의 골동 기물, 서화, 서적, 약재가 長岐島에 폭주하고 있다. 지금 蒹葭堂 주인인 木弘恭은 字가 世肅인데, 3만권의 서적을 소장하고 중국 名士와 친교도 많다고 한다.
이 무렵 나까사키는 일본과 중국 강남의 교역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和蘭(네덜란드)의 商館이 설치되어 일본과 유럽의 교역을 가능하게 한 지역이었다. 박지원이 和蘭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허생전」에서 허생이 변산의 도적떼를 데리고 들어간 섬이 沙門과 長岐 사이에 있었고, 長崎는 일본에 딸린 섬으로 31만 戶가 있으며 이곳에 조선의 곡식을 팔았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제적인 교역 거점으로서 나까사키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 박지원은 청의 황제가 南巡, 주자학 존숭, 대대적 출판 사업과 같은 문화정책을 통해 강남 한인들의 저항 정신을 누르고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에서 청조에 대한 저항운동이 나타난다면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 바로 강남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박지원은 일본이 강남지역과 직교역을 통해 청의 학문과 문물을 직접 도입하는 것에 유의했다.
4. 蒙固․西藏을 견제하는 피서산장
북경에 도착한 박지원은 관광길에 나섰다가 이내 열하로 떠가게 된다. 조선 사신에게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명령이 전해졌을 때, 박지원은 북경에 남아 있으려고 했다. 먼 길을 오느라 피로가 회복되지 못했고, 황제가 조선 사신을 위한다고 열하에서 곧장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오랫동안 기대해 온 북경 유람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사 박명원은 조선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열하를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설득했다. 결국 박지원은 열하를 방문함으로써 당대의 형세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박지원은 청 황제가 열하에 避暑山莊을 지어놓고 매년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몽고와 서장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로 판단했다. 박지원 일행이 몽고인을 처음 만난 것은 瀋陽에 이르렀을 때였다. 몽고인의 수레 수천 대가 벽돌을 싣고 심양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심양을 지나면서 몽고인들은 수시로 보였는데, 박지원은 말 위에서 조느라 낙타를 볼 기회를 두 번이나 놓치고 몹시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인에게 있어 몽고인과 낙타는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병자호란 때 몽고군은 청의 군대와 함께 조선을 침략하여 엄청난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고, 명과의 宋山․杏山 싸움에서는 청 군대의 선봉이 되어 큰 전공을 세웠다. 북경을 장악한 청은 몽고의 공적을 인정하여 몽고 48部의 족장을 모두 王으로 책봉해 주었다.
그런데 박지원은 청과 몽고가 충돌할 가능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小凌河를 건너면서 박지원은 몽고인이 이곳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강은 몽고와의 국경에서 50리 떨어진 지역으로 지난해에 강변에 거주하는 수백 호 주민들이 몽고인의 습격을 받아 처자를 잃고 이주를 했고, 며칠 전에도 몽고군 수백 명이 강변으로 몰려왔다가 수비병을 보고는 달아나 버렸다는 것이었다. 북경에 도착한 조선 사신이 한밤중에 갑자기 열하로 길을 떠나면서 숙소가 소란해졌다. 놀란 사람들이 연유를 묻자 박지원은 ‘황제가 열하에 나가있고 북경이 비워진 틈을 타서 몽고 군사 10만 명이 쳐들어왔다’고 했는데, 이는 청과 몽고의 충돌 가능성을 염두에 둔 농담이었다.
열하에 이르기 전, 박지원은 요동과 심양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했다. 요동 벌판은 천리에 이르는 평원 지대라 지키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이곳을 내버려두면 오랑캐들이 이곳을 차지하고 중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었다. 박지원은 심양을 중국 동북지역의 전략적인 거점 지역으로 파악했는데, 청이 명을 공격할 때 심양을 차지하여 조선과 열하를 누르고 서쪽으로 향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양은 청조가 처음 일어난 곳으로, 동으로 寧古塔에 닿고, 북으로 열하를 누르며, 남으로 조선을 어루만지면서 서쪽으로 향하자 천하가 감히 꿈틀하지도 못했다. 그 근본을 튼튼히 한 점에 있어서 역대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열하를 방문하면서 열하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했다. 박지원은 만리장성을 넘어가면서 古北口가 몽고에 이르는 요해처임을 파악했다. 이어 열하에 도착해서는 청이 북으로 몽고, 서쪽으로 서장과 국경을 맞댄 상황에서 열하가 몽고와 서장을 견제하는 거점이 된다고 보았다.
古北口는 몽고가 중국에 드나들 때 그 목줄기가 되므로 겹겹으로 관문을 설치하고, 그 목을 눌러서 틀어막았다. 熱河는 황제의 行在所이다. (중략) 강희제부터 항상 여름철이 되면 이곳에 머물면서 피서지로 삼았다. 거처하는 궁전은 그리 화려하지 않고 이름도 ‘피서산장’이라 하여, 황제는 이곳에서 독서로 소일하고 산수를 흥취로 여기며, 천하의 밖에서 항상 평민의 생활에 취미를 두는듯했다. 그러나 실상인즉 험악한 지세를 이용하여 몽고의 목줄을 틀어쥐고 국경 밖에 깊숙이 자리 잡아, 이름은 비록 피서라 했지만 실은 천자 자신이 오랑캐를 방어[防胡]하고 있는 셈이다.
열하에 머무는 동안 박지원은 곳곳에서 몽고의 위력을 경험했다. 박지원은 당시의 몽고 부족은 당시 48部가 강성한데 청의 황제는 그중에서도 吐番과 그 서북쪽의 오랑캐를 두려워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열하의 술집을 들어갔을 때는 손님의 절반이 몽고인이었고, 班禪을 만나러 가는 길에 몽고군이 강가에 장막 수천 개를 치고 주둔하고 있었다. 또한 班禪이 거처하는 札什倫布를 지키는 군대도 몽고군이었고, 반선의 자리 양옆에는 몽고왕 2명이 앉아 있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박지원은 몽고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박지원은 열하에서 西番, 즉 西藏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았고 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박지원은 사방에서 傳聞한 바를 「黃敎問答」 「班禪始末」 「札什倫布」 등으로 정리했는데,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서장은 몽고와 함께 청을 위협하는 세력이라는 것이 요점이었다.
현재 몽고의 48부가 강하다고 하지만 이들은 서번을 가장 무서워하고, 서번의 여러 나라도 活佛(班禪)을 가장 무서워한답니다. 서번의 여러 나라들이 이 敎에 열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여러 부족들도 이 교를 믿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本朝의 정치 교화가 위로 요순시대에 비길만하며, 황제의 가르침이 미치는 곳이 모두 평화스러워, 국경 밖의 정세가 항상 조용합니다. 싸우고 죽이고 침략하고 도적질하는 것은 서번의 풍속도 꺼리는 것이므로, 황교가 중국 성인의 교화에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하지요.
이상은 山東都事인 郝成(志亭)과 大理寺卿인 尹嘉銓(亨山)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서장과 몽고가 黃敎라는 종교를 신봉하며 그 우두머리는 살아있는 부처라 불리는 班禪(額爾德尼)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청의 황제는 반선을 초청하여 화려한 궁에서 스승으로 모시며 극진히 우대하는데, 이는 황교를 통해 서장과 몽고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었다. 서장과 몽고의 武力을 비교할 때, 박지원은 서장이 몽고보다 우세한 것으로 보았다. 청의 황제가 서장의 반선을 몽고의 왕들보다 훨씬 우대하는 이유가 무력의 차이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몽고가 元의 遺風을 가진 나라로 중국에 대항할 만한 典章과 文物을 가지고 있으며, 몽고 48부의 왕들은 각자가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박지원은 청의 서북방에 몽고와 서장이 있는데, 청이 몽고를 제압하지 못하면 몽고가 요동을 차지하여 소란해 질 것이고, 요동이 흔들리면 서쪽에서 서장이 일어나 청의 섬서, 감숙 지역을 위협할 것이라 판단했다. 이렇게 본다면 열하의 피서산장은 청이 몽고와 서장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이었고, 몽고군이 열하를 수비하는 것은 오랑캐인 몽고가 오랑캐인 서장을 방어하게 하려는 고도의 전략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열하의 지세를 살펴보니 천하의 정수리이다. 황제가 북쪽으로 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정수리를 눌러 몽고의 목줄을 틀어잡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다면 몽고는 이미 매일 일어나 요동을 쥐고 흔들었을 것이다. 요동이 한번 흔들리면 천하의 왼쪽 팔은 잘려진다. 천하의 왼쪽 팔이 잘려지면 河湟은 천하의 오른쪽 팔인데, 한쪽만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西番의 여러 오랑캐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隴(감숙)과 陝(섬서)을 엿볼 것이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바다의 한쪽 구석에 붙어있어 천하의 일과는 무관하고, 나는 지금 백발이 되었으니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30년이 못되어서 천하의 근심거리를 근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내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할 것이다. 천하의 근심거리는 항상 북쪽 오랑캐[北虜]에 있으며, 그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강희제 때부터 열하에 궁성을 쌓고 몽고의 重兵을 주둔시켰다. 이는 중국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오랑캐로 오랑캐를 방비하는 것[以胡備胡]이다. 이렇게 하면 군비는 절약되고 국경 방어는 튼튼해지며, 지금 황제는 몸소 국경을 방어하고 있는 셈이다. 서번은 억세고 사나우나 황교를 매우 두려워한다. 따라서 황제는 그들의 풍속을 따라 직접 이를 믿고 그 法師를 받들어 모신다.
(서번에 대해서는) 궁실을 성대히 장식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하고, (몽고에 대해서는) 왕이라는 명목을 나누어 봉하여 그 세력을 분리시키는 것, 이것이 청나라 사람이 사방의 나라를 통제하는 수단이다.
5. 중국에서 만난 외국인들
서양인에 대한 박지원의 관심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는 북경에 도착한 직후 宣武門 오른편에 천주당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미처 들리지 못하고 열하로 떠났다. 열하에서 그는 王民嘷에게 서양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나라는 맨 동쪽에 있고 구라파는 맨 서쪽입니다. 極東에 있는 사람이 泰西의 사람을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이번에 갑자기 열하에 오느라 아직 천주당을 보지 못했고, 이곳에서 칙명을 받들어 우리나라로 돌아간다면 다시 황성에 들리지를 못합니다. (중략) 이번에 서양 사람이 황제를 따라와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르침을 받고 싶으니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를 받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박지원은 열하에서 서양인을 만나지 못했고, 북경으로 돌아온 즉시 천주당(西堂)을 찾았다. 박지원이 북경을 방문한 시기에 중국의 카톨릭은 쇠퇴 일로에 있었다. 예수회는 중국의 조상숭배를 인정함으로써 천주교 포교에 방해를 받지 않았지만, 타 교단이 이를 비난하면서 로마 교황이 조상숭배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에 대응하여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 이외의 선교를 금지시켰고, 말년에는 카톨릭의 선교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다. 이후 서양의 선교사들은 전문 기능인, 즉 천문 역법을 다루는 과학자나 황제의 초상화를 그리는 예술가로서의 업무에만 종사할 뿐이었다.
박지원이 천주당을 방문한 첫 번째 관심은 風琴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김창업의 연행록을 읽었고, 홍대용으로부터 상세히 들었던 풍금 제도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1769년에 천주당이 헐렸기 때문에 풍금이 남아있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천주당 다락에서 망원경과 천문 관측을 위한 기구를 보았지만, 짧은 시간이라 제대로 살피지를 못했다.
천주당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서양 그림이었다. 박지원은 천주당의 벽과 천정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서 그 사실적인 묘사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박지원은 그림 속의 인물들이 자신의 가슴속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느꼈고, 천장에 그려진 그림이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박지원은 欽天監 관상대로 가서 청동으로 만든 관측기구를 보았다. 기구의 이름을 알 수 없었지만 이 역시 그에게는 충격을 주었고, 관상대 위쪽에 설치된 기구를 올라가 보려고 했으나 그러지를 못했다.
박지원은 서양인이 曆法에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지만 천문 역법은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그는 열하에서 王民嘷에게 김석문의 三大丸浮空說과 홍대용의 地球地轉說을 이야기했지만, 이는 자신이 들은 것을 옮긴 것일 뿐 독자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홍대용과 鄭石痴가 밤을 새며 천문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은 알아듣기 어려워 잠이 든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렇지만 박지원은 북경에 있는 利瑪竇의 무덤까지 찾아감으로써 서양인을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랬다.
박지원은 북경과 열하에서 이슬람국[回回國]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북경에 있는 회교 사원에 들러 관광했고, 열하로 이동할 때에는 청 황제에게 바칠 조공품을 싣고 가는 이슬람 사람들을 만났다. 이 때 그는 哈密王이라 불리는 太子도 만났는데, 12部의 蕃王이라는 사람들이 그를 수행하고 있었고, 황제에게 바칠 물품에는 옥그릇과 자명종이 있었다. 또 열하에서 들린 술집에서는 몽고 사람과 이슬람 사람들만 있어 몹시 당황하기도 했다.
박지원은 唐書에 ‘回紇’ ‘回鶻’로 등장하는 이슬람 국가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했고, 원나라 공주가 시집올 때 이슬람 사람인 偰遜이 함께 고려로 와서 벼슬했고 조선 초의 偰長壽는 그의 손자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박지원은 이슬람 사람들이 몽고나 서장 사람보다 무섭게 생겼고 당나라 때의 회홀보다 사나워졌다고 했지만, 청을 위협할만한 세력으로 판단하지는 않았다. 청 황제가 이슬람 사람들을 우대하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열하에서 러시아[顎羅斯]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러시아는 1689년에 청과 네르친스크(尼布楚) 조약을 체결한 이후 청과 공식적인 무역을 개시했고, 러시아 상인을 북경에까지 파견했다. 그러나 청조는 러시아가 서몽고와 연합하여 위협이 될 것을 우려했으며, 1727년에 캬흐타(恰克圖) 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흑룡강 유역과 몽고의 변경에 묶어놓는 대신 북경으로 상인, 선교사, 유학생을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박지원은 북경의 玉河館이 원래 조선 사신을 위해 지어졌으나 러시아 사람들에게 내주었고, 이들이 ‘코가 큰 오랑캐[大鼻㺚子]’로 청나라 사람들도 쉽게 제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열하에서 러시아인을 만났는데, 이들은 흑룡강에 있는 부락으로 집집마다 당나귀만한 개를 데리고 수레를 끌게 하며 사람도 무척 크다고 했다. 또한 그들의 의관 모양이 특이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과 구별하기가 쉽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 세력의 동향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박지원은 북경과 열하에서 많은 외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그의 체류 기간이 짧았고, 그가 가진 정보도 충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의사소통이 극도로 제한을 받았다. 결국 박지원은 자신의 목격한 바를 충실히 기록해 두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6. 조선이 나아갈 길
박지원은 열하를 최초로 방문한 조선 사신단의 일원이었고, 청이 열하를 방문한 국가들을 대우하는 방식을 보면서 ‘천하의 형세’로 표현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판단했다. 박지원은 북경의 청 정부를 중심에 두고, 동에는 조선, 남에는 강남의 한인, 북에는 몽고, 서에는 서장이 위치한 것으로 판단했다. 오랜 기간 평화가 계속되었던 당시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청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순간 청조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세력으로 이들을 꼽은 것이다. 이들에 대한 청의 대응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조선에 대해서는 경제적 혜택을 주고 賓禮를 극진히 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강남의 한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문화정책을 통해 사상 통제를 가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서장의 반선을 황제의 스승으로 모시고 몽고의 48부 족장을 왕으로 봉하여 우대하는 가운데, 黃敎라는 종교를 통해 몽고와 서장이 서로를 견제하고, 몽고 48부를 독립시켜 그들 내부에서 다시 서로를 견제하도록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박지원은 청의 지배가 끝없이 계속될 것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내 멸망할 것으로 보지도 않았다. 18세기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청나라 세상이 된지 4대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문화와 무력을 오랫동안 부지해왔고, 백 년 동안을 태평세월로 보내면서 四海가 편안하고 조용하니 이는 한, 당 시절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온전히 편안하게 경영하는 뜻을 보니, 하늘이 마련하신 우두머리로 볼 수밖에 없다.
박지원은 청이 夷狄 출신이기는 하지만 중국에 있던 中華의 문물을 가졌고 규모도 제대로 갖추고 있으므로, 조선이 추구하는 ‘北伐’이라는 명분과는 별도로, 아니 그 북벌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청의 우수한 문물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은 청의 실상에 대해 많이 안다고 자부했던 조선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목격한 청의 문물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다음은 그가 책문을 들어서는 순간의 느낌을 기록한 것인데, 그의 놀라움이 잘 나타난다.
책문 밖에서 책문 안을 바라보니 여염집들이 모두 높다랗고 대개 五樑집이다. 이엉으로 집을 이었으나 용마루가 높이 솟고 문호가 번듯하며, 거리는 곧고 판판하여 먹줄을 친 것 같다. 담장은 모두 벽돌을 쌓았고, 거리에는 사람을 태운 수레, 짐을 실은 수레가 왔다 갔다 한다. 벌여 둔 그릇들은 모두 그림을 놓은 꽃사기로 일반 풍물이 하나도 시골티가 없어 보인다.
예전에 내 친구 홍덕보(홍대용)에게 중국 문물의 성대한 규모와 세밀한 心法을 들은 적이 있지만, 오늘로 보아 책문은 중국의 동쪽 끝 벽지인데도 오히려 이만한데, 앞으로 구경할 것을 생각하니 문득 기가 꺾였다. 여기서 발길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치밀면서 전신에 불을 끼얹은 것 같이 후끈한 느낌이 들었다.
박지원은 청의 문물 중에서도 수레, 벽돌, 목축, 선박 등의 제도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모두 평소에는 富國을 위한 도구이지만 유사시에는 强兵을 위한 도구로 활용될 수가 있었는데, 수레는 戰車로, 벽돌을 성곽 건축으로, 목축에서 길러진 우수한 말은 戰馬로, 선박은 戰船으로 이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허생의 입을 통해 조선이 택해야 하는 국가방략을 세 가지 제시했다.
첫째, 臥龍 선생을 추천하면 국왕에게 청하여 그의 오막살이를 세 번 방문하라.
둘째, 조선에서 유랑하는 명나라 장수의 후손들에게 종실의 딸을 시집보내고 훈척 세가의 저택을 몰수하여 살게 하라.
셋째, 천하의 豪傑과 사귀고 간첩을 사용하라.
앞의 두 가지는 누가 보아도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았지만, 세 번째 제안은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제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하에 大義를 외치려고 하면서 먼저 천하의 호걸과 사귀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른 국가를 정벌하려 하면서 먼저 간첩을 사용하지 않고 공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금 만주는 천하를 점거하여 주인노릇을 하지만 스스로 중국과 친하지 않다고 여기는데,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솔선하여 복종하니 저들이 믿는 바이다. 子弟들을 파견하여 학교에 보내고 관리가 되기를 唐, 元의 故事와 같이 하고, 상인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친함을 보이는 것을 기뻐하여 허락할 것이다. 국내의 자제들은 잘 뽑아서 머리를 깎고 오랑캐 복식을 입힌 다음, 君子는 가서 賓貢科에 응시하게 하고 소인은 멀리 강남으로 장사를 가서 그 허실을 정탐하고[覘其虛實] 호걸들과 사귀게 한다면[結其豪傑], 천하의 일을 도모할 수 있고 국가의 수치를 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박지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국제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였다. 가령 조선이 청의 우수한 문물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강남의 한인들이 때마침 抗淸 운동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조선 정부가 그런 정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면 조선 사람이 그처럼 고대하는 ‘북벌’도 한낱 口頭禪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7세기 후반에 鄭成功․鄭錦 부자가 대만을 거점으로 항청 운동을 일으켰을 때 조선 정부는 별다른 정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일본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는, 이들 세력이 바다를 건너와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 조선을 공격하지나 않을까 우려했던 사건이 있었다.
박지원은 열하에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았다. 그리고 국제 정세의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첩자가 중국에 상주하면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의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북경 정부의 동향을 파악할 인력과 상인으로 중국 각지를 다니면서 강남의 한인과 결탁을 할 수 있는 인력을 생각했다. 그러자면 조선인도 청나라 한인처럼 머리를 깎고 오랑캐 복장을 입어야 했다. 박지원은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과는 달리 조선의 관복이 중화문화의 핵심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청의 관복이 말을 타고 전쟁을 수행하기에 편리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청의 우수한 문물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다양한 정보망을 통해 국제 정세의 변화를 면밀히 살피는 것, 그것이 바로 박지원이 생각한 조선의 나아갈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