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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3:5)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4-16)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2:20-23)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7-18)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
* 루터의 개혁운동
*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 한국교회의 공과(功過)와 개혁
1.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
ⅰ.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의 국교 선포(밀라노칙령)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타콤(지하 공동묘지)에 숨어살며 초대교회로부터의 참 믿음의 모습을 보존해오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최고 권력의 지원을 받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그 때부터 부패의 길로 들어섰다.
ⅱ. 엄청난 박해 속에서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복음을 간직했던 교회가 힘과 권력을 가지게 되자 본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본질과 알맹이를 외면하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껍데기에 치중하였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원리가 교회에도 작용한 것이다.
ⅲ. 예컨대 미사의 희생제사 거행 등으로 예배의식은 복잡하였지만, 그 가운데 진리는 없었다. 또한 루터는 로마를 순례하면서 바티칸의 화려한 건물에서 인간 허영의 극치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회칠한 무덤’이었다. 그밖에도 면죄부 판매, 유물 숭배 등을 강조함으로 사람들의 눈을 진리로부터 차단했다.
ⅳ. 사람이든 집단이든 초심을 유지하고 본질을 지켜나가는 것은 어렵다. 개구리가 되면 올챙이 시절은 잊어버린다. 겸손했던 사람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뜨거웠던 마음도 싸늘해지고,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다.
ⅴ.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깨달음의 외침이었다. 19세기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그러나 교회는 더 엄청난 일을 했다. 그 포도주를 다시 물로 바꿔버린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ⅵ.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도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정작 그 성전은 장사치들과 돈 바꾸는 환전상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향해 채찍을 드셨던 것처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의 본류에서 이탈하여 변종(變種)이 된 로마가톨릭교회를 향해 ‘진리’와 ‘도덕성’의 횃불을 들었다.
2. 루터와 칼빈의 개혁운동
(1) 루터
① 개혁의 도화선.
ⅰ. 마르틴 루터(1483-1546,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ㆍ신학교수)는 면죄부를 판매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에 대해 95개조 반박문을 작성,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정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The Refomation)의 불을 지폈다.
ⅱ.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 건축의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독일 마인츠 대주교인 알브레히트에게 면죄부 판매권을 위임했으며, 알브레히트는 능변가인 도미니카 수도사 요한 테첼을 행동대장으로 임명했다. 테첼이 “여러분의 조상이나 부모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보시오. 귀를 열어 연옥에서 신음하는 그들의 소리를 들어보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이 통 속에 돈을 넣는 순간, 그 돈이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연옥의 영혼들은 연옥에서 풀려나 낙원으로 옮겨질 것이오”라는 설교로 면죄부를 판매하자 프레데릭 제후가 작센 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했다.
ⅲ. 테첼이 경계 근처에서 신자들을 유인하며 면죄부를 판매하자, 루터는 분노를 참을 길 없어 95개조 반박문을 공개함으로 로마가톨릭교회의 오류를 지적했다. 그것은 새로운 개신교의 탄생을 목적으로 한 외침이 아니라 진정한 교회로의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었다. 다시 말해서 변절된 신학과 교회로부터 성경 본래의 회복운동이었다.
② 루터의 개혁의 핵심.
ⅰ. 루터의 개혁의 핵심은 ‘오직 성경’, ‘이신칭의(以信稱義)’, ‘만인(萬人)제사장주의’에 있었다. 한마디로 루터의 개혁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본 모습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ⅱ. 로마가톨릭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잘못된 성경관에 있었다. 그들은 교회 전통을 가지고 성경 해석을 옭아매므로 전통을 성경 위에 두었다. 개혁자들이 성경을 중요하게 여긴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되돌아가서 성경에 교회의 모델로 계시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고,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생활하자는 ‘본질 회복 운동’이다. 종교개혁은 결코 역사적인 교회의 본류에서 이탈하거나 새로운 종교의 시작이 아니라 심각하게 오염된 교회의 자정 노력이다.(김중은ㆍ장신대)
ⅲ. 사실 루터 이전에도 교황무오설을 비롯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공격하고 성경의 유일한 권위를 주장한 위클리프라든가, 하나님의 죄 사하시는 권세를 인간의 물질적인 목적을 위해 도용한 면죄부 판매를 정면에서 반박한 후스 등 개혁운동의 선구자들이 있었다.
(2) 칼빈
ⅰ. 루터 이후에 보다 성공적이며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것이 칼빈(1509-1564)의 개혁운동이다.
ⅱ. 칼빈이 원한 것은 참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서문에서 “내가 교회에서 교사의 직책을 맡은 이후, 나는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진 적이 없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ⅲ. 칼빈은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타락의 원천이 ‘말씀 없는 의식 중심의 예배’와 ‘성례의 왜곡’에 있음을 간파했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들려지는 곳에, 그리고 성례전이 말씀에 합당하게 거행되는 곳에 참된 교회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ⅳ. 또한 칼빈은 제네바 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구제와 사회참여 활동을 펼침으로 교회의 사회적 사명을 강조하였다.(박경수ㆍ장신대)
3.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ⅰ. 몇 해 전 독일교회는 베를린의 한 교회 건물을 복원시키기로 결정했다. ‘마르틴 루터 기념 교회’라는 이름의 교회다. 한 때는 히틀러의 이름을 따랐었다. 내부로 들어가면 머리 위로 철 십자 형태의 샹들리에가 빛을 발한다. 설교대에는 아리안족으로 둘러싸인 예수, 세례통에는 헬멧을 받쳐 든 채 호위하는 친위대원들의 부조(浮彫)가 새겨져 있다. 성가대에는 히틀러의 ‘제3제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들이 보인다. 1935년 나치당이 집권을 위해 뉘른베르크 시내를 행진할 때 이 교회 오르간이 반주를 했다고 한다. 이 교회당이 처음 세워질 때는 나치와 무관했다. 그러나 2년 뒤 나치가 집권하자, 그 ‘영광’ 앞에 이 교회가 봉헌되었다. 나치즘과 결탁된 이른바 ‘예수의 돌격대원들’이라는 독일교회가 됐던 것이다.
ⅱ. 이 교회 건물이 낡아 2005년부터 붕괴의 조짐을 보였다. 교구는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복원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당시 일부 교회와 종교인들이 나치와 결탁했다는 사실은 교회의 치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구는 엄청난 경비를 들여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논리는 “이 교회는 살아있는 마지막 증거다. 독일교회가 어떻게 나치에 협력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후세들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보여 줄 것”이라는 것이다.
(1)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못하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교회의 부패는 존재한다. 교회는 비록 거룩한 성령의 전이지만 부패한 인간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자성ㆍ참회ㆍ개혁ㆍ갱신을 할 때 비로소 세상에서 희망의 바이러스가 될 수 있다.
①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는 ‘이미’와 ‘아직’의 관계이다.
ⅰ. 이 땅에서의 교회는 그 거룩성에 한계가 있고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 자신이 완전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도상(途上)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ⅱ. 주님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리라”(마13:3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추수 때는 세상 끝이라”(마13:39) 하셨으니 이때가 이르기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승리를 기대치 말아야 한다.
② 역사적으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여 욕먹은 사례가 많다.
ⅰ. 헨리 7세와 8세의 주치의였던 토마스 리나크러가 만년에 복음서를 읽고 “이것이 복음서가 아니든지,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 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경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교회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ⅱ. 교황 이노센트 4세와 대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 발코니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바티칸시로 각국에서 보내온 헌금 주머니들이 속속 도착하는 것을 보고, 교황이 “보시오.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고 말했지만 지금 교황청은 은과 금으로 가득 차 있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지만 지금 로마 교황청은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ⅲ. 루터교가 국교였던 19세기의 덴마크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신약성경이 의미하는 기독교는 덴마크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그는 당시의 교회의 실상을 비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그런데 교회는 더 엄청난 일을 했다. 그건 바로 포도주를 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마저 깨버리고 있다. 그리고 그 깨진 항아리 조각들로 서로 찌르고, 서로 괴롭히고 있다. 깨진 항아리에 찔린 교회와 교인들이 피를 흘리고 있다.
ⅳ.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 시대의 러시아 교회의 타락상을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속의 대심문관의 이야기를 통해 신랄하게 고발했다. 예수께서 재림했는데 러시아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추기경이 오히려 예수님을 체포하고 감금해 버렸다. 추기경이 밤에 감방을 찾아가 당신이 정말 예수냐고 묻자 주님은 침묵하셨다. 그러자 추기경은 예수께 “왜 와서 우리를 방해하느냐”고 힐난했다. 곧, 우리가 교권을 잡고 세도를 부리며 영화를 누리는데 왜 벌써 와서 방해하느냐는 것이었다.
ⅴ. 1789년의 불란서 혁명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타락한 기독교와 기독교 국가에 대한 격렬한 반발이었다. 불란서혁명 당시 “최후의 사제의 창자와 최후의 왕의 목을 달아라”고 했던 군중의 아우성은 본질을 잃고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분노의 소리였다.
ⅵ. 우찌무라 간조는 “가룟 유다가 부럽다. 가룟 유다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 교회에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ⅶ. 미국의 젊은이들이 교회 앞에 “예수님은 좋다. 그러나 교회는 싫다”는 플랜카드를 내 걸었다고 한다.
(2)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공동체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단체이다.
ⅰ. 예수님은 교회공동체를 향해서 세속사회와는 전혀 다른 윤리와 생활양식을 명하셨으며(마5-7장),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구현하였다.
ⅱ. 초대교회는 강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돈지갑을 공유했으며 경제적 분배를 실현했다(행2:32-47). 또한 그들은 인종적ㆍ문화적ㆍ성적 장벽을 초월한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초대교회는 마치 연리목(連理木)과 같은 모습을 이루었다. 연리목이란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몸통이 서로 맞닿아 한 나무처럼 자라는 나무로 수분과 영양도 함께 공유하면서 살아간다. 마치 부부가 포옹한 모습으로 보인다 하여 부부의 금실을 표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초대교회는 연리목과 같은 공동체로서 세상과는 선명하게 구별되는 가시적인 실재였으며 사회에 거룩한 영향력을 주었다.
(3) 교회는 세상의 빛으로 존재한다.
ⅰ.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다. 험한 밤바다를 오가는 배들에게 등대는 꼭 필요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 등댓불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외로운 등대지기의 몫이다. 아무리 세상이 뒤바뀌고 문명이 발달해도 늘 그 자리에 선 등대처럼, 그리고 그 등대를 지키는 등대지기처럼 교회는 늘 자기 자리에 있으면서 어김없이 빛을 비추어야 한다.
ⅱ. 교회는 계속적인 자기개혁을 함으로 비로소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세상은 빛을 절실히 요구한다. 반딧불만한 빛이라도 좋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저절로 뒷걸음친다. 어둠을 쫓아내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가 없다. 빛은 전염성이 강하다. 어둠은 빛을 잡아먹지 못하지만 빛은 어둠을 쉽사리 물리친다.
ⅲ. 역사적으로 지상의 교회는 수많은 도전을 넘어왔다. 2-3세기는 로마 권력의 이름으로 교회를 없이 하려 했으며, 교회시대를 넘어 19세기에는 포이에르 바흐 등이 철학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공격했고, 칼 마르크스 등은 인본주의와 유물론 사상으로 기독교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같은 공격으로 인해 교회는 더욱 개혁되고 튼튼해졌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며, 또한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4) 세상이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있다.
ⅰ. 교회는 세상에서 공기와 같은 존재이다. 공기가 오염 돼도 사람들은 그 공기를 마실 수밖에 없는 것처럼, 비록 교회가 부패했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교회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다.
ⅱ. 교회의 과제는 오염된 세상 가운데서 얼마나 정화된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것인가로 모아져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 정화는 필수적이다. 교회가 깔끔하고 번쩍이는 첨단 건물을 올린다고 정화되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세상에 도덕적으로 감동을 주는 곳이 돼야 한다.
(5) 교회정화는 두 측면, 곧 ‘진리’와 ‘도덕성’의 문제이다.
ⅰ. 천재식 단국대 치의학 교수는 제자들에게 “명의는 못 되어도 좋다. 다만 기본을 지키는 의사가 되어다오”라고 말한다고 한다. 교회의 기본은 무엇인가?
ⅱ.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의 보다 순수하고 엄격한 도덕성’을 기독교가 급속히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하였다. 교회개혁의 중심은 높은 ‘도덕성’과 순수한 ‘진리’의 회복이이다. 교회는 도덕의 힘으로 지탱한다. ‘도덕성’은 교회의 자존심이요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교회의 ‘도덕성’은 가감 없는 성경 그대로의 ‘말씀’ 선포에서 비롯된다.
ⅲ.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향을 가진 꽃들이 있다. 이른 봄에 달빛에서 맡는 매화의 암향(暗香), 4-5월에 피는 라이락 향, 한 여름에는 연향, 11월 초에 피는 만리향이 그것이다. 최근 꽃들이 향기를 잃고 있다고 한다. 미(美)버지니아대 연구팀은 대기오염 물질이 꽃향기가 널리 퍼지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꽃향기 분자가 차량 배기가스 등과 쉽게 결합,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꽃향기가 아닌 다른 물질로 변한다는 것이다. 꽃향기의 이동 거리가 줄어들면서, 식물의 수분(受粉)작용을 도와 식물 생태계를 지탱하는 벌들이 위협을 받고, 벌들의 감소는 다시 개화식물의 번성을 위협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이처럼 꽃향기가 생태계를 지탱하는 기초가 되듯, 교회의 높은 ‘도덕성’과 순수한 ‘진리’의 향(香)은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가 된다. ⅳ. 만약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최상의 진리와 세상보다 높은 윤리를 제시하면서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세상은 교회 무용론의 칼날을 세울 것이고, 인간 사회는 더욱 큰 혼란과 무질서와 범죄로 인한 파멸로 치닫게 될 것이다.
(6) 교회개혁은 사회개혁을 낳는다.
ⅰ. 라인홀드 니버는 그의 책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개인보다 집단이 훨씬 더 악할 수 있다는 ‘집단의 위험성’을 설파한다. 곧, 집단은 군중심리의 충동이나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개인보다도 훨씬 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집단의 회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설명하고, 나아가서 집단이 새로워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원죄로부터 도덕적 한계를 갖고 있는 존재인데, 최선을 다하면 어느 정도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집단의 행위는 결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ⅱ. 니버는 당시 사회 진보에 대해 낙관적 태도로 일관하며 사회를 도덕적 차원에서 개혁하고자 했던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니버는 그들의 낙관주의가 현실의 복잡한 구조와 모순을 간과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조건을 더욱 고통스럽고 어렵게 만들었다고 한다.
ⅲ. 니버는 집단이기심을 통제하고 사회윤리를 실현하기 위해선 경찰력이나 군사력 등을 포함한 ‘정치적 방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이 같은 방법은 인간의 내면적ㆍ근본적 변화를 결코 이끌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사회라는 집단의 개혁은 어둠과 맞서 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교회적으로(혹은 개인적으로) 빛을 심는 일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사회개혁은 단박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빛의 확산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ⅳ. 톨스토이는 사회운동을 하는 청년에게 “세상을 향하여 너무 피땀을 흘리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하여 땀을 흘려라. 세상을 낫게 만들려고 하면 너 자신부터 낫게 만들어야 한다. 천국을 네 마음속에 먼저 모시기 전에는 세상을 천국화 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권면했다.
ⅴ.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물푸레나무는 푸른 잎이 얼마나 싱그러운지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 나무의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푸른 물이 우러난다고 해서 물푸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물이 사회라면 교회는 물푸레나무이다. 탁류에 돌을 던지면 더 더러워질 뿐이다. 교회가 자기 정화를 통해서 빛이 되면 자연스럽게 사회 개혁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ⅵ. 교회가 병들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회 개혁은 희망이 없다. 교회는 사회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요, 마지노선이며, 마지막 양심이다. 교회의 아픔은 그 사회의 아픔이다. 세계교회연합의 ‘교회를 교회답게’라는 구호가 절실히 요구된다.
(6) 교회개혁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① 루터의 종교개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ⅰ. 교회개혁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곧, 교회개혁은 루터 당시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옛날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의 사건이어야 한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종교개혁의 표어는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며, 하나님의 복음의 거울 앞에 자기를 비추라는 명령이다.
ⅱ. 사람들은 입으로만 떠드는 ‘하나님 사랑’에 대해 조롱하고 분노하고 저항한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기독교를 향해 ‘개독교’라고 조롱하고 “너희나 잘해”라고 비난하고 있어도, “그래도 교회가 세상보다 낫다”라고 변명하며 그대로 나간다면,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는 쇼와 겉치레에 치중하는, 그래서 속 빈 껍데기의 교회가 되고 있다.
ⅲ. 신동엽 시인은 4ㆍ19의 진정한 정신의 계승을 강조하며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외쳤다. 교회는 항상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는 인간적인 첨가물과 장식과 불순물들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제거함으로 가공되지 않은 알맹이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건드려 덧낼 필요 없다지만, 속병 깊어지기 전에 미리 상처를 드러내 선제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겉모양은 있으나 뼛속이 빈 골다공증 환자는 조그만 사고에도 폭삭 주저앉는다.
② 역사적인 영적 각성운동들.
ⅰ. 역사를 보면 그 사회가 영적 어둠에 빠졌을 때 그 시대를 선도할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었다.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과 18세기 웨슬리 형제에 의한 영적 부흥운동, 18-9세기 미국에서 일어났던 두 차례의 영적 대각성운동, 그리고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일어났던 우리 민족의 1907년 영적 대부흥운동(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회개운동) 등이 그것이다.
ⅱ. 그 운동들은 단순한 운동으로 끝나지 않고 그 시대를 새롭게 하고 정신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교회의 개혁의 목표는 항상 ‘정체성ㆍ영성(우상을 버림)ㆍ도덕성ㆍ공동체성ㆍ사회성’의 회복이다.
ⅲ. 성경에는 아사의 개혁(왕상15:11-15), 예후의 개혁(왕하10:18-15), 요시아의 개혁(왕하23:1-25), 여호사밧의 개혁(대하19:3-11), 히스기야의 개혁(대하31:1-9), 느혜미야의 개혁(느13:1-31) 등이 소개되어 있다.
③ 교회의 개혁의 대상들
역사적으로 교회의 개혁의 대상은 물질주의와 물량주의, 외형주의, 실용주의, 이기주의, 세속주의, 현세주의, 포퓰리즘, 내세주의, 비윤리 및 기복주의, 혼합주의, 신비주의(체험적 신앙은 중요하나 성경보다 중시되는 체험 강조), 이성주의 혹은 감정주의, 이적주의 혹은 무(無)이적주의, 권위주의 혹은 권위 파괴주의, 전투적 배타주의(십자군 운동, 마녀사냥 등), 교회의 분열과 교회 내 갈등(사회참여에 대한 진보와 보수, 신학의 차이, 대형과 소형, 영성 등), 정교(政敎)유착, 무교회주의, 기타 이단 등이다.
(7) 주님은 타락한 교회일지라도 사랑하신다.
① 주님은 교회를 인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ⅰ. 평안도식 메주 띄우기는 속이 까맣게 썩은 메주를 장독에 넣고 봉해 둔다. 그것을 모르는 타지방 사람들은 남의 집 장독을 열어 보고 메주가 썩었다며 투덜대며 쏟아버린다. 그러나 평안도 사람들은 썩은 메주 속에서 맛있는 된장을 만들어 내고 색깔 좋은 간장을 우려낸다.
ⅱ. 그와 같이 어떤 교회가 비록 썩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사용하실 수 있다. 교회가 썩었다고 외면하고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르는 죄를 범할 수 있다.
② 교회는 우리에게 신앙의 어머니와 같은 곳이다.
ⅰ. 우리는 어머니의 행위에 대해서 비판할 수는 있지만 어머니가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고 하는 엄연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처럼 우리는 교회가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해서 교회를 악의적으로 비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ⅱ. 우리에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물(水)’과 같은 교회를 정화해야 할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 주님은 부레옥잠ㆍ노랑꽃창포ㆍ부들ㆍ줄과 같은 물풀이 물을 정화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물풀이 되어 교회의 오염물질을 걸러내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일차 대상이 되어야 한다.
ⅲ. 한국교회는 자체 정화를 통해서 초대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을 구현하고, 사회를 향해서는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시114편은, 이스라엘 공동체(혹은 신약의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성소 또는 영토이며, 하나님의 권세의 현장임을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시114:1-2)
4. 한국교회의 공과(功過)
(1) 공(功)
① 과거
ⅰ. 대한제국 말(末), 선교초기 한국교회는 가난한 백성들의 빵을 해결하고, 무지함을 일깨워주는데 앞장섰다. 교회는 소수였지만 모든 힘을 사회사업과 교육에 결집시켰다. 때문에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 민중의 종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ⅱ. 1920년 춘원 이광수는 “우리 민족은 기독교에 감사해야 한다. 신문명으로 무지를 깨우쳐주었다. 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전해주었고, 병원을 세워서 병든 육체를 고쳐주었으며, 민족정신을 일깨워주었다”고 말했다.
ⅲ.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선교사들이 뿌려놓은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의 선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기독교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② 현재
ⅰ. 한국교회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면서 크게 부흥하고 성장했다. 기독교는 기독교 전래 120년이 조금 지난 지금 한국에는 수많은 교회건물이 올라가고, 기독교인이 천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국회의원과 장관과 법관과 지자체장들 가운데도 적잖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며, 장로 대통령도 배출되었다. 재정도 풍부하고 놀랄 만큼 큰일을 해내고 있다.
ⅱ. 오늘날 사회복지 민간 부분의 70-80%가 교회가 감당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어느 분은 평소 기독교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극단적인 언행을 일삼았으나 보건복지부에 들어가서 보고 놀라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교회는 1997년 이후 수천억 원 이상의 물품으로 북한을 지원하였으며, 탈북자들의 90% 이상이 교회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헌혈과 장기기증자의 70% 이상이 기독교인들이다. 청소년들에게 희망의 길잡이가 되고, 노숙자들에게 친구가 되고, 노인대학을 열어 어른을 섬기고, 재난당한 이웃들에게 찾아가 아픔을 함께 나누고, 태안 앞바다 오염을 씻어내기 위해 달려가는 자원봉사자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다.
ⅲ. 무엇보다 기독교 복음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을 긍정적으로 살도록 힘을 주었다. 방황하는 사람들의 심령을 안정시키며 디딜만한 신념을 제공하였고, 절망의 극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빛을 던져주며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 같은 모든 사례들은 분명 반길 만한 현상이고, 우리는 이 같은 사실들을 세상에 홍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부 사람들은 교회의 역할에 대해 오해를 하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한국교회언론회 ‘성명서’ 참조)
(2) 과(過)
① 과거
a. 일제 말엽
ⅰ. 한국교회는 일제 말엽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천주교ㆍ불교 등과 마찬가지로 신사참배의 죄를 범했다. 1936년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 목사는 총독부 초청 좌담회에 참석, 신사참배를 정당화하고 순응할 것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교단을 향하여 “참배는 종교적 의미가 아닌 반드시 행해야 하는 국가의식이다”라고 발표했다.
ⅱ. 감리교의 굴복 이후 장로교도 1938.9 제27차 총회에서(회장 홍택기 목사) 신사참배 안건을 평양노회장 제안, 평서노회장 동의, 안주노회장 재청으로 가결시켰다. 이때 곽진근목사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며,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ⅲ. 총회 가결 후 노회장들은 총회를 대표하여 신사참배 실행을 결정했다. 특히 장로교의 홍택기, 김길창, 감리교의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직 등은 조선총독부 주선으로 일본에서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에서 참배하기까지 했다.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도 공식적으로 일제에 순응하며 머리를 숙였다.
b. 해방 이후
ⅰ. 북쪽의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압력에 굴복한 영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공산정권을 위해 부역’하는 사례가 많았다. 김일성을 위한 기도회 등 각종 인민환영대회를 개최했으며, 목사들은 인민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인민위원회를 결집했다.
ⅱ. 한편 남쪽의 한국교회는 ‘분열’을 계속하였다. 장로교는 1912 년에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어 1948년까지 단일 총회 아래 있었으나, 그 후부터는 분열이 시작되어 오늘날 43개가량의 장로교단이 존재하며,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교단만도 40개에 달한다.
ⅲ. 성결교회도 1955년 10회 총회 때 W.C.C. 가입 문제로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었다. 감리교단은 1946년 동대문감리교회에서 두 명의 총회장이 생기면서 내부적으로 첫 번째 분열이 생기고, 1970년 11회 총회까지 4회 분열에 이른다. 침례교단은 1959.3 총회와 선교부가 갈등하면서 분열한다.
ⅳ. 한국교회의 분열은 대부분 정당성이 희박하다. 분열이 교리적인 문제, 곧 신앙고백이나 신학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나 교권대립, 파벌의식 등 신학 외적인 것에 기인하고 있다. 물론 교회의 분열이 한국에만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 심각성과 저급성에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의 분열은 소위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② 현대
a. 부정적인 평가.
ⅰ. 한국갤럽의 조사에 의하면 2004년 우리나라 전체인구 중 종교인 비율은 개신교 20%, 천주교 8%, 불교 25%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회적 이미지는 불교와 천주교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TV 등의 언론은 한국교회를 향하여 스토커 수준의 공격을 퍼붓고 있다. 국회의원의 종교 분포는 개신교, 천주교, 불교 순이지만 부정부패에 연루된 사례는 기독교인이나 무종교인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ⅱ. 부정적 이미지는 긍정적 이미지보다 강하다. 이미지 공식은 ‘10 빼기 1은 0’이다. 열 번 잘해도 한 번 잘못하면 다 날아간다. 오늘 우리 사회는 반기독교 정서가 강하다. 그래서 교회의 개혁이나 갱신이 없이는 한국 교회의 미래는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자기반성과 자기 혁신을 모르는 ‘물레방아 교회’는 언젠가 교회는 물론이고 교회가 속한 사회까지 낭떠러지 위에 세우고 마는 법이다.
ⅲ. 흔히 “한국교회는 신학이 없다”고 말한다. 장로교ㆍ감리교ㆍ성결교ㆍ침례교 등에 대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교회성장 논리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갱신(更新)의 외침을 역행하는 것이 대세고 이른 바 성공으로 가는 길이 되고 만 듯하다. 시장논리에 따라 교회와 목회자를 평가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교회가 성장 이벤트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CEO(전문경영인)=목회자’라는 등식이 확산되고 있으며, 가시적 성장을 위한 기업경영원리가 경쟁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ⅳ. 현재 많은 교회에서 도입 중인 각종 제자훈련 프로그램, 셀, G12, 두 날개, 아버지학교, 가정학교, 큐티 모임, 다락방, 순장모임, 알파코스, 트레스디아스 등도 변화의 목적보다는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성장은 둔화되고 있다.
ⅴ. 한국교회는 1970년대 산업화와 함께 초고속 성장세가 1990년 전후까지 20년 동안 계속됐지만, 1990년을 전후해 ‘민주화’ ‘다원화’ 과정에서 많은 젊은이와 지식인들이 교회를 이탈하면서 ‘현상유지’ 내지는 침체기로 접어들었다. 목회자의 성공신화, 대형교회의 꿈, 세습, 교단정치, 교파분열과 연합정신의 결여, 사이비 복음의 발흥 등도 교회의 급속한 쇠락을 불러왔다.
ⅵ. 개혁의 대상이었던 중세교회의 현상이 한국 교회에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은 마이동풍(馬耳東風), 여전히 제 길 곧 ‘성장제일주의’로만 가고 있으며, 이것은 교회 본질의 심각한 훼손을 초래하고 있다. 문제는 사람이다. 사람이 바뀌어야 환경이 바뀐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변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자성(自省)운동이다.
b. 긍정적인 평가.
ⅰ. 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판은 “세상이 교회에 요구하는 기대치가 너무 높기 때문”이며, “세계 50위 안에 22개의 교회가 한국에 있는 것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세계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국교회는 지금도 잘하고 있고, 앞으로 더 잘해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ⅱ. H교회 K목사는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을 피력한다.(기독교연합신문 제957호)
“한국교회가 위기가 아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늘 위기 속에 있었다.
예수님 시대에도 핍박이 있었다. 예수님은 ‘저희가 나를 미워한 것처럼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는 사회가 교회를 받아주지 않아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많이 받았다. 천주교에서는 우리보다 먼저 수천 명의 순교자를 내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의 신사참배의 오욕에 이어 해방 후 6ㆍ25전까지도 교회는 사회의 좌우익 싸움과 함께 온갖 싸움을 다하며 분열됐고 6ㆍ25의 비극을 만났다.
70-80년대 들어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은 했으나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고, 기복적 신앙으로 무속신앙화 되어갔고 신비주의로 치달으면서, 교회의 집회가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될 때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기도 했다.
성숙되지 못한 교회는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거론됐고, 교파 분열은 눈에 가시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교회 성장이 멈추면서 그나마 다행스럽게 선교사들이 세계로 뻗어나갔지만 선교지에서조차 부끄러운 일들이 자주 일어나 ‘Koreans, go home’이란 말도 들어야 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위기는 지금의 것이 아니고 늘 위기 속에서 오늘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한국교회를 들어 사용하고 계신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는 것과 같다. ‘남은 자들’과 ‘그루터기’들이 한국교회에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3) 개혁의 길
① 긍정과 부정으로 대립되는 양진영.
ⅰ. 오늘날 한국교회는 외형상으로는 그 성장과 위세를 자랑할 만하다. 세계적인 대형교회들이 즐비하게 있고, 지식적으로도 박사 학위를 가진 목회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이 같은 한국교회의 부흥은 성령님의 역사요,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헌신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ⅱ. 다른 한편 한국교회는 부정적인 면도 많이 드러나고 있어서 사회의 비난과 냉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한국교회는 목회기술자는 많지만 본질(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표(師表)의 부재, 무인가 신학교의 난립과 이로 인한 무자격 목회자의 양산, 지도자의 도덕적 해이, 사회적ㆍ역사적 책임의식의 부재, 기복주의 신앙, 물량주의, 집단이기주의 등이 그것이다.
② 최선의 길.
ⅰ. 한국교회의 ‘과(過)’에 대해 사람마다 다소간에 인식의 차이가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요17장의 기도에서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중점적으로 구하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하나 됨’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를 세상에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ⅱ.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당시의 교회와 교인들이 서로 다툼과 갈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다. 답답하다. 미치고 싶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 할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나니“라고 말하며 탄식했다. 하나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 곧,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허구성을 스스로 선전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고 경고한다.
ⅲ.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이 다른 교회들을 서로 비판하며 자중지란에 빠지기보다 교회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다름’을 수용하고 각각 제 길로 갈 필요가 있다. 곧, 개혁의식이 있는 교회라면, 자신이 먼저 개혁과 갱신을 실천해 보이며 앞서 가면 될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개혁을 말하면서도 자기 안에 실천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 현명한 자는 남의 손을 빌려 개혁 당하기 전에 스스로 먼저 개혁한다. 스스로 개혁하면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ⅳ. 우리는 ‘교회’라는 브랜드에 부정적 이미지가 완전히 각인되기 전에 서두를 필요가 있다. 값싼 은혜에 계속 안주하면 스스로 정화할 기회를 놓칠 지도 모른다. 지금은 비록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으면 되지만, 더 지체되면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영국 부흥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스펄전이 담임했던 런던의 한 교회는 한 때 수만 명이 모였으나 지금은 노인 60-70명이 모여 예배드리는 초라한 교회로 전락했다.
ⅴ. 오늘 교회가 개혁의 목소리에 겸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스펄전의 교회처럼 쇠락의 길을 치닫게 될 지도 모른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무신론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 그 죽은 신의 무덤이 오늘날의 교회다”라고 말했다. 그가 비록 무신론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교회들의 행태를 비판한 말이지만, 교회의 세속화는 반(안티)기독교 정서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다.
ⅵ. 따라서 교회가 세상에 살아남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속적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흐름을 읽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부정적인 부분을 깨고 스스로 정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교회의 자기정화는 창조적 파괴이면서, 교회를 새롭게 비상(飛翔)시키는 날개이다. 겨울 철새인 가창오리는 해마다 우리나라의 겨울 하늘을 떼 지어 비행하며 장관을 이룬다. 하늘에서의 그들의 군무(群舞)는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한국교회가 이 땅에서 하늘로 높이 솟아올라 군무를 공연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ⅹ.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으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무겁고 크다. 그것은 신자 개인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그 교회가 속한 민족에 대한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심판하실 때는 그 나라 안에 있는 교회의 영적 순결(진리성)과 도덕성을 기준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제도의 개혁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영성 곧 영혼의 개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의 개혁의 핵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나라의 명운은 최상위 0.1%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 있다. ‘교회다운 교회’ 0.1%를 바란다면 한국교회를 너무 저평가한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