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길은 하얀 실뱀처럼 꼬불꼬불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름하여 작고개, 동면(東面)에 사는 시골 사람들이 춘천 장을 보러 올 수 있는 유일무이한 직통 길이었다. 산골 아낙네들은 채소며 산나물을 뜯어 시내에 내다 팔아 자식들의 학비며 용돈을 마련 했고, 남정네들은 나뭇짐이며, 저잣거리며, 곡식을 나르는 생명선의 길목이기도 했다.
하기야 다른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길을 버리고, 걷기가 좋은 신작로 길을 택하여 간다면 장터 까지 가는 시간은 한 시간은 더 좋이 걸리게 되어 가지고 간 물건들을 아침 장에 팔지를 못하고 낭패를 맛 보는 일은 다반사 였다. 그러니 자연 이 고갯길은 그들에게는 더욱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길이 였다.
또한 시골 학생들은 이 고갯길을 넘으면서 면학의 길을 닦으며, 내일을 기약하는 희망과 포부를 한껏 키워 오던 길이었다..
우리에게는 겨울은 썰매 터로, 여름에는 목욕을 하러 뒷뚜루 江(소양강 북쪽 강의 옛 이름)으로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 길이기도 했다.
이 고갯길은 우리 할머니의 단골 길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오셔서 화전 밭에 젊음을 다 보내시고, 당신이 회갑을 맞으시던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이 고개를 넘어서 춘천에 정착을 하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부터, 매일 아침 먼동이 틀 무렵이면 할머니는 이 고개를 넘어 가신다. 만천리 시골에는 조그만 家山이 있었다. 그 산에는 잔솔나무가 빽빽이 들어 서 있었고, 나무 밑에는 솔잎이 수북수북 노랗게 쌓여 있었다. 할머니는 그 곳으로 검불을 긁으러 가신다. 검불을 긁어 모아 다독거려 커다랗게 네모진 모양으로 만드신다.
그것을 머리에 이시고 이 십리 길은 좋이 되는 곳을 걸어 오신다. 그 검불은 우리 가족의 가용과 식량의 일부로부터 추운 겨울 철에는 잠자리를 따뜻하게 난방 구실까지 해 주는 큰 자원이었다.
할머니께서 이 고갯길을 힘들어 못 다니실 만큼 몹쓸 길이라고 탓하시는 소리를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다. 다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시며, 굽으신 등 허리를 탁탁 두들기실 뿐이 였다. 어찌 보면 할머니는 이 정도 살 수 있는 것이 오히려 이 고갯길 덕이라고 내심 고마워 하셨을지도 모른다.
나도 이 작고갯 길이 좋았다.
이 고개의 시발은 춘천 막국수의 시발점이 된 내 친구인 영택이네 집 앞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할머니가 들려 주시던 옛 날 이야기의 무대 배경은 나 나름대로의 상상으로 곧잘 이 작고개가 되었기에 고갯길 구비구비마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불쌍한 오누이를 잡아 먹으려고 동아줄에 매달렸던 호랑이가 떨어져 수수깡에 찔려 죽었다는 해와 달 이야기는 고개 밑에 깔린 수수밭 고랑이라고 짐작이 갔고. 옹기장수가 처녀 귀신한테 홀려서 죽은 곳은 첫번째 구비 후미진 언덕 위에 묵은 묘 둥지 위리라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
그 오른 쪽 밑으로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고 그 옆으로 기역자로 지은 기와 지붕이 보인다.
언제고 이 길을 걸을 때면 저 집에는 심술궂은 놀부가 살았고, 마음씨 착한 흥부가 쫓겨나서 주렁주렁 아이들 손을 이끌고 이 길을 걸어서 시내로 갔을 거라는 측은한 생각도 해 보았었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여름 방학이 되면 매일 넘다시피 이 길을 다니면서 배가 고프거나 힘들 때에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머리 속에 떠 올리면 출출하고 배고픈 생각이 잊혀지고는 했었다.
이 고갯길 끝머리쯤 가면 숫돌 봉으로 가는 길과 뒷뚜루 강으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바로 갈림 지점에서 숫돌 봉 쪽으로 가는 입구에는 서낭당이 있었고, 언제나 그 곳에 있는 밤 나무의 허리통에는 숫한 소원이 담긴 울긋불긋한 헝겊이 걸려 오색깃발처럼 바람에 펄럭거렸다., 가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인형도 함께 있었다.
이 곳을 저녁무렵 혼자서 지나치기는 썩 기분이 안 좋은 곳이었다. 소름이 끼치고 뭔가 등뒤를 따라 오는 것 같아 머리끝이 쭈뼛쭈뼛 섰고, 뒤가 켕겨 힐끔힐끔 돌아다 보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제풀에 놀란 토끼 꼴이 되기가 일 수 였다.
여름 해는 길기도 했다.
강가에서 철벙대다가 허기진 배를 혁대로 두 구멍은 더 졸라 매고 기다시피 십리 길도 더 되는 작고개 길을 넘는다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고갯길로 접어드는 왼 쪽 옆으로는 길을 따라 과수원이 숫돌봉 밑동까지 펼쳐진다.
은근히 길 옆의 철조망 너머에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복숭아로 시선이 간다. 사방을 두리번거려 본다. 우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라 할 것 없다. 어느 사이 철망 밑으로 기어 들어 간다.
사실 철조망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형식적으로 도로와 과수원의 경계를 구분 지울 정도의 선에 불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규율이고 법인 것 만은 사실이었다. 이제 우리는 도둑이 되는 순간이었다. 우선 한 개를 따서 입에 문다. 맛이 있었다. 으쩍 으쩍 씹으면서 부지런히 두 손은 복숭아를 씌운 종이 봉지를 헤집어 잘 익은 놈으로 고른다.
몇 개 따지도 못했다. 과수원에는 유일한 파수꾼인 똥개가 한 마리 있었다. 이 놈의 누렁이는 어찌나 우리 냄새를 잘 맡는지 모른다. 우리의 침입을 알아 차리고 기를 쓰고 달려 온다. 그 뒤에는 김 씨 영감의 숨이 턱에 차서 지르는 소리가 누렁이 보다 앞서 왔다.
암만 그래도 우리는 비호같이 철조망을 빠져 나와 작고갯 길로 치달아 오른다.
참 신통한 것은 그 문제의 똥개 였다. 입에 허옇게 거품을 물고 쫓아 오던 그 놈의 기세로 보아서는 당장 철조망을 빠져 나와 우리 동무들 중에 누군가의 다리 한 짝은 물고 늘어 질 것만 같은데, 꼭 철조망 앞에만 오면 더 이상 따라 넘어 오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주인이 훈련을 시킨 적도 없을 텐데, 철조망 밖은 뭇 사람들이 공유하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일까. 아래 위로 오르락 내리락 거리면서 악을 쓰고 짖어 댈 뿐, 절대로 넘어와서 물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개를 항상 신통하게 여겨 왔었다.
우리는 그 놈 덕분에 단숨에 고갯길을 오르면서 달콤한 복숭아를 우직우직 깨물면서도 웃음이 막 쏟아 진다. 킥킥거리면서 나무 그늘에 들어가 앉아 서로 보면서 배를 움켜쥐고 나동그라지며 웃는다. 호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던 복숭아가 데구루루 굴러 나온다. 놓칠세라 얼른 잡아 바지가랑이에 쓱쓱 문지른 후 먹어 치운다. 강에서 닦고 온 목덜미며 겨드랑이 땀에 범벅이 되어 따가워서 죽을 지경이다. 복숭아의 솜털이 온몸에 옮겨 붙은 탓이었다.
과수원을 지나면서부터 길 바닥은 가물에 바짝 마른 개울 바닥처럼 물줄기가 흘러간 모양대로 고랑이 나있었고 틈틈이 돌멩이가 박혀 있어서 반반한 곳을 골라가며 이리저리 건너 뛰어야 했다. 길 양편으로는 호랑이 피가 묻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수수 밭에는 여름 땡볕에 키만 길길이 자랐지 아직 덜 익은 수수타래 정수리에는 고추잠자리가 한가로이 조는 듯 앉아 있었다.
공연히 소리가 지르고 싶어 진다. 그렇다고 불러 보고 싶은 이름도 아는 것도 , 뭐 아무것도 없다. 그냥 “야~!!!”하고 악을 쓰듯 산을 향해 소리를 친다. 때 아닌 악다구니 소리에 놀란 장끼가 대꾸나 하듯이 꿕꿕거리면서 산골짝에 메아리를 남긴다.
황소처럼 허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누런 보리밭 이랑 너머로 산도라지 꽃이 피어 있었다.
보리 밭을 가로 질러 뛰어 간다. 먼저 맡는 놈이 임자다. 제 만큼 한 뿌리씩 맡아 식식대면서 나무 꼬챙이로 도라지 뿌리를 캐어 들고 여기저기 살펴 본다. 요행히 재수가 좋은 날은 “잔대” 뿌리를 만날 때도 있었다. 제법 큰 뿌리는 겉 껍질을 까면 하얀 종이 보다, 더욱 흰 목화 솜 같은 부드러운 살이 나온다. 아삭거리며 씹히는 맛이며 향긋한 산 냄새가 배어 있는 이 것은, 허기진 배를 향기로 가득 채울 수 있어서 좋았다. 뽑아 든 도라지가 죽을까 보아 흙으로 감싸고 그 위에 다시 갈잎으로 싸 들고 부지런히 집을 향해 고갯길을 오른다. 고개 중턱쯤 오르면 오른 쪽으로는 오리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산의 한쪽을 병풍처럼 가리고 있었다.
웬일인지 이 곳을 지나치려면 아래 배가 사르르 아파 온다. 이것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었다. 꼭 이 곳을 지나칠 때면 오줌이 마렵거나 뒤를 보고 싶은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아침나절 한도 없이 따먹은 뽕밭의 오디며, 버덩에서 캐 먹은 날 감자와 껍질째로 먹어 버린 개구리참외가 필시 탈이 난 것이리라.
후닥닥 뛰어서 오리나무 숲 뒤로 돌아 간다. 언제나 그 곳은 우리들의 안식처 였다.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바지를 내리기가 무섭게 고랑에다 엉덩이를 돌려대고 일을 본다. 몇 마디 푸드득거리는 소리 뒤에는 뱃속이 시원하고 온 전신에 흐르던 땀 마자도 삭으러 드는 듯이 안팎이 시원해 진다. 요렇게 편한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다. 찡그리며 힘을 주던 얼굴들의 표정은 웃음이 피고 서로 마주 보며 낄낄거린다. 오리걸음으로 두어 걸음 가서 떡갈나무 잎으로 밑을 닦고 바지춤을 올리고는 고갯길을 향해 천천히 걸어 간다.
작난 질로 늦어진 고갯길은 어둠이 내려 오고 있었다.
서낭당 주위는 앞 산 봉우리에 가리어 어둑어둑해졌고, 오색 띠를 두른 밤나무 위에는 까마귀 두 마리가 앉아서 마지막 저물어 가는 햇볕을 받으며 우리를 노려 보고 있었다.
“저 놈의 까마귀 덥지도 않은가….” 까마귀를 향해 침을 세 번 퇘퇘 뱉고는 오전에 온 길을 뛰는 듯이 달려간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작고개 길을 걸어서 돌아 갈 곳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 볼 수도 없는 풍경들, 그 곳은 이제 신문명의 기계에 깎기고 헐리어서, 가파르고 멀기만 했던 고갯길이 추억 속에 수채화처럼 기억의 뒤 안 길에 사라져 버렸다.
자동차가 없어서 걸어 넘던 그 작고개 길이 좋았다.
가난한 것을 당연시하고 보릿고개를 수도 없이 넘기면서 살아 왔던 우리네 세대와는 아주 판이하게 달라 졌다. 이 좋은 세상에 누가 배 곯고 살겠는가,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을 찾는다...또 어딜 가도 그렇다. 요즘은 자가용 시대다. 편히 앉아서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간다. 참 세상 편해 졌다. 그런데도 조금만 길이 막혀도 짜증을 내고 푸념들을 마구 쏟아 내며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된다.
물질 만능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데도 뭔지 항상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불만스럽다. 그러고 보면 물질의 풍요로움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 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일을 걸어서 해결하던 어린 시절과 지금의 나는 이렇게 두 시대를 살아 가면서, 과연 어느쪽이 더 행복할까…. 얼른 정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철망 줄 하나가 경계선이었고, 똥개도 그 곳을 넘어서 쫓아 오지않던 그 시절, 모두가 가난함 속에서도 그만한 일로 절도 죄명을 씌우지않던 넉넉한 인심이 있던 그 때가 좋았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과수원 꼬부랑이 김 영감님 그리고 순진한 악바리 똥개…그 과수원 길을 걷고 싶어 진다. 식목일 숫돌 봉으로 가는 길에 심어 놓은 전나무도 꽤나 컸을 텐데….이제는 돌아 가 볼 곳이 없다.
첫댓글 캉가루강님 주신글 잘 읽었습니다 무대가되는 동면을 한번 다녀 오겠습니다 숫돌봉으로 가는길에 심어놓은 전나무 안부를 물어야 겠기에 몇일만 기다려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