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Le Lenteur>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가 1990년 <불멸> 이후 5년 만인 1995년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한 장편소설이다. 체코 출신의 밀란 쿤데라는 1970년대부터 메디치상, LA타임스상 등을 수상하고 1990년대부터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돼 왔지만 아직 수상하지는 못했다. 1988년 국내 번역·출간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를 대표하는 외국 소설이 된 것은 물론 영화로도 많은 팬을 확보하면서 ‘쿤데라 시대’를 열었다.
<느림>은 한 작가 부부가 18세기의 고성에서 들은 200년 전 사랑이야기를 통해 ‘빠름’만이 미덕으로 통하는 오늘의 세계에 ‘느림’이 갖는 미덕을 깨닫는다는 줄거리다. 작가는 자신과 같은 이름의 밀란과 그의 아내 베라로 하여금 파리 인근의 센 강변의 고성에서 하룻밤을 묵게 한다. 그들은 여기서 18세기 이 성의 주인이었던 마담 T와 그의 정부, 그리고 남편의 삼각관계의 사랑이야기를 듣게 된다. 200년 전 연인들은 분별을 잃을 정도로 사랑에 빠지면서도 바로 육체적인 관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냥 상대를 떠나보내고 연서를 교환하는 등 연애의 모든 과정 자체를 즐기면서 천천히 자신들의 사랑을 익혀간다.
작가는 밀란 부부의 사랑과 200년 전 사랑을 중심으로 여자 TV연출가와 카메라맨 사이의 사랑, 불행한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 작가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보고들은 ‘만나자마자 통성명도 없이 동침하고 다음날이면 그냥 헤어지는’ 현대식 ‘빠름(성급함)’의 사랑을 중첩시킨다. 작가는 이 흐름 속에 중국 장자莊子의 고사 등을 인용해 독자들을 18세기와 20세기, 동양과 서양의 ‘빠름’과 ‘느림’, 고상함과 저속함, 정연한 구조의 비극과 단순한 희극을 대비시킨다. 이 과정 속에서 현대 산업사회의 ‘빠름’에 익숙해 있던 주인공 밀란은 점차 “느림과 기억, 빠름과 망각은 각각 은밀한 끈으로 연결돼 있으며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와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와 연결돼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현대가 상실한 ‘느림’의 미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단순한 줄거리를 여러 개의 주제가 연결되고 중첩되면서 하나의 교향곡을 만들어내는 음악의 대위법처럼, 밀란 부부와 마담 T의 사랑이라는 소주제를 교직시키는 중층적인 구조를 통해 펼쳐 보여준다. 이 작품은 쿤데라의 대중적 명성과 문학성에 힘 입어 출간되자마자 ‘르 몽드’ ‘르 피가로’ 등이 ‘특집’으로 대서특필하는 등 다시 한 번 ‘군데라 바람’을 일으켰다.
2013년, 한국에서는 프랑스 밖에서는 최초로 쿤데라 전집이 완간됐다. 쿤데라 전집은 소설 10종, 에세이 4종, 희곡 1종을 포함하여 전체 15종 15권이며 그 분량은 전체 5,156쪽, 원고지로 합산하면 2만3000여 매에 달한다. 당시까지 민음사에서 출간된 쿤데라의 책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2쇄, <농담> 51쇄, <느림> 36쇄, <정체성> 20쇄 등 모두 156회 증쇄되었고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가장 많이 팔린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과거 판본을 모두 합치면 누적 판매 부수가 70만 부에 달했다. 지난 25년간 쿤데라가 한국 독자들로부터 받아온 크나큰 사랑과, 그가 한국 문학, 나아가 한국 문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