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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든 해야한다고. 무슨 말이든 들어야 한다고.
나의 늙고 아름다운 개. 그 작고 검은 것에 대해 다시금 제대로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펜을 들었습니다.
까미의 풀네임은 알베르 추까뮈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네 놀러 가서 임시보호 중인 강아지를 보았고 단번에 운명을 느껴 꼬물거리는 작고 검은 ‘까미’라 불리는 아이를 엄마에게 전화 한통으로 입양을 통보하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데려온 날부터 그 작고 검은 것을 침대 머리 맡에 놓고 깔아 뭉개지 않도록 조심조심 돌보며 목이 꺾인 채로 잠을 잤습니다.
아이가 소리를 내지 않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간지럼을 태우며 장난을 쳤습니다. 이내 ‘왕’하고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자기주장을 하던 강아지는 아주 우렁차고 보호자를 닮아 예민한 개로 자라났습니다.
맞벌이 부부의 외동딸로 누군가는 제게 혼자 외롭지 않았냐 종종 묻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은, 외로움은 녀석에게 익숙한 자세였지, 저는 학교를 다녀오면 저를 기다리고 있는 개, 누구보다도 저를 반겨주던 개의 존재 덕분에 외롭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문밖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만으로도 옆집 사람인지 가족인지를 감별해내던 소리 감별사. 까미와 정신 없이 장난을 치고 지쳐서 몸을 맞대고 앉아, 또 누워 서로의 들숨과 날숨을 들으며 그 박자를 맞춰가면서 서로의 호흡이 같아질 때 알 수 없는 안도감에 잠이 들곤했습니다.
까미를 모르는 사람들도 산책길에 단 번에 까미를 까미라고 부르기에 혹여 전주인인가 했지만 ‘어떻게 아셨어요?’ 라는 물음에 ‘깜하면 다 까미지 뭐여’라는 어르신의 말씀에 어딘가 모르게 촌스러운 까미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까미가 ‘너무 까미여서’ 탄천에서 운동하시는 몇몇 아저씨들이 까미야 까미야- 하고 부르셔서 자꾸 뒤돌아보며 누가 자기를 불렀나 확인을 하던 녀석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수능 전날, 떨리던 마음으로 새벽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도 녀석의 곤히 잠든 숨소리와 낮게 코고는 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됐습니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내일 저녁에도 까미랑 이렇게 함께 누워 잘 수 있는데. 또 그런 안온한 날들이 이어질텐데 뭐가 걱정이야.하고 안심하면서요.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을 하게 되고 철학을 배웠을 때, 실존주의 철학에 빠지게 됐고 시지프스 신화와 이방인, 페스트를 읽게되면서 까미의 이름은 그렇게 알베르 추까뮈로 완성되었습니다. 촌스럽던 이름은 프랑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고고한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까미는 어느 날 ‘알베르’였고, 급히 부를 때는 ‘깜’이었다가, 할머니가 부를 때는 깜한 금수라고 해서 ‘깜수’였다가, ‘깜시’였다가, 혼날 때는 ‘추깜’이었다가 ‘꼬미’였다가 ‘꼼’이었다가. 말도 안되게 ‘낑’,’깡’,’꽁’이라고 불러도. 혹은 부르지 않아도. 저를 바라보는 지긋한 눈빛에 반응해주는 너무나도 충실한 개가 되었습니다.
집이라는 곳이 항상 포근하고 따뜻하기만 한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가족인들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때로 격돌하고, 그래서 또 가끔 서로가 지옥같고,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 뭐 그런 생각도 종종 드는 평범한 가족이었습니다. 까미는 그런 곳에서 저와 지지고 볶고 함께 한 동료이자 전우이자 가족이자 벗이었고 서로가 서로의 안위를 보살펴주는 보호자였습니다.
스무살 때 탈출(독립)이라는 장기 계획을 세우면서 정말로 진지하게 까미의 나이를 계산하고 까미의 병원비와 돌봄비를 계산했습니다. 28살에 독립을 하면 그 때쯤 까미가 14살이니 까미를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할테고, 내가 재택근무를 하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룸메이트가 있었으면 좋겠고, 룸메이트가 개를 좋아하는 프리랜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고, 안된다면 이를 어쩐담.. 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쓰잘데기 없는 걱정들을 하면서요.
그 계획이 2년 남은 시점이었던 작년부터 세상 참 녹록치 않다는 걸 사회에서 여기저기 얻어터지고 깨달았지만 올해는 정말 세상이 끝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사랑한 이들이 두명이나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명은 심정지였고, 예기치못해서 더욱 갑작스러웠습니다.
응급실에서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어보며 출입을 통제하는 직원에게 심정지로 죽은 가족의 신원을 확인하러 왔다는 말이 내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십여분을 밖에서 서성였습니다. 추운 겨울밤 유품을 들고 장례식장으로 걸어가던 기억. 옷에 남아있는 향수 냄새, 체취. 그토록 선명한데. 죽음이라니, 끝이라니.
그런 기억들이 끝없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장례를 치르고도 몇주를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누워있었습니다. 하루를 거의 통째로 잠든 채로, 그나마도 깨어있을 때는 울면서 보냈습니다. 울음이라기엔 소리도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만 했지만요. 그런 제 곁에 다가와 살을 맞대고 있어준 까미. 그 무엇보다도 큰 위로와 사랑을 주었던 저의 버팀목이었습니다.
그 충직하고 큰 사랑에 제가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사랑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지요? 마음을 갚고 싶은데, 그 다정함을 다시 돌려줘야 하는데.
녀석을 위해 기꺼이. 무엇이든 해주고, 되어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저를 무너지게 합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전문성 아니냐고. 좀 더 수술의 위험성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최악의 상황에 대해 미리 언지를 해줬어야 하지 않느냐고. 선생님을 원망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만두었습니다. 생사를 감히 누가 통제할 수 있겠냐고. 그 섭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필사적으로 마음 속으로 되뇌이고 또 되뇌입니다.
다만 아직도 놓을 수 없는 아쉬움 한 가지는 이렇게 위험한 수술일 줄 알았다면 수술을 하지 말걸.
아니, 적어도 수술을 하지 않는 선택도 고심해보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자궁축농증 수술을 하루라도 빨리 하지 않으면 급성 패혈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선생님 말씀을 들었음에도, 다시 돌아가도 수술을 했을 거라던 선생님의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제 욕심에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까미가 택시 안에서 숨이 멎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차라리 집에서, 멍든 수술 자국 없이, 가족들과 함께 편안하게, 그 욕심에요.
빨리 가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고 절규하는 내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한다고, 너무 사랑한다고 너무 고맙다고 너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고. 나약한 내가 이만큼 씩씩하게 견딜 수 있었다고.
청각이 제일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감각이라고 하던데,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귓가에 속삭여 줄 수만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더 최악의 경우의 수도 무수히 상상해 볼 수 있고, 이제는 마지막까지 함께 있을 수 있던 것에 그저 감사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랬더라도.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갈 수만 있다면.
녀석의 죽음을 내가 앞당긴 것은 아닐까. 더 고통스럽게 한 건 아닐까.
녀석이 생애주기를 다 마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는데.
거동이 불편해지고, 눈이 멀더라도.
녀석의 수족이되어 그모습마저 함께하고 싶었는데.
녀석이 내게 준 다정함을. 보살핌을. 나도 녀석에게 기꺼이, 너무 간절히 주고 싶었는데. 아니, 그래야만 했는데.
녀석의 장례에서 얼토당토 않는 꽃무늬 바지와 흰 티셔츠를 걸치고 배웅을 했습니다.
그 날 아빠가 멀리 가 있어 장례에 함께 하지도 못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또 다시 지독하게 무례하구나. 물론 인간의 예지만.
좀 더 갖춰입고. 좀 더 의연한 모습으로. 온전한 모습으로 함께 보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너무 초라했어요.
녀석의 딱딱하게 굳은 몸이 다시 부드러워질 수만 있다면 밤이고 낮이고 주무를 수 있는데. 하며 쉴새없이 녀석을 쓰다듬고 주물렀습니다.
뜬눈으로 잠든 녀석의 뿌연 눈을 제대로. 온전히. 담을 수 있도록 계속 바라봤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쁠까.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언니가 평생 까미 곁에 있어줄게. 언니가 평생 까미를 지켜줄게
잠잘 때마다 해주던 말이 무색하게 너무 허망한 죽음이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몰랐을까. 까미가 이렇게 아플 때까지 왜 몰랐을까.
혹시 내가 녀석의 목숨값인지도 모르고 피검사를, 입원을 미뤘던 건 아닐까. 저울질 한 건 아닐까.
바보천치같이 수술 리스크도 모르고 스케일링도 같이 해달라고 어처구니 없는 소리나 했다니.
너무 미안해서 안된다고, 이런 식으로는 아니라고 가슴을 치면서. 스스로를 꼬집으면서 울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소중한, 나의 제일 가는 친구. 나의 모든 것을 함께 지켜본 내 삶의 목격자.
나를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준 내 친구의 죽음 앞에
부탁할 것이 있어요, 선생님.
더 좋은 수의사선생님이 되어주세요.
그리고 까미를 기억해주세요.
모르겠어요. 더 대단한 끝맺음을, 이야기를 하고싶었는데. 이런 초등학생같은 말들 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저에겐 무수히 많은 세계와 친구들과 언어가 있었지만 까미에겐 제가 세계였겠지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빛, 걸음걸이, 소리, 몸의 움직임만 보고 들어도 알 수 있었어요. 까미의 세계가 외롭지만은 않았기를.
먹을 것을 유난히 좋아하고, 다리와 허리가 길쭉하고, 턱과 가슴께로 이어지던 흰털이 매력적이던,
발톱도 흰색과 검은색이 번갈아 있어 몸에 빛과 어둠이 공존해 신비로왔던,
쓸개골 탈구였지만 튼튼한 뒷다리 근육으로 어디든 점프해서 올라왔던,
초중고 계주 선수였던 반려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만큼 달리기가 빨라 항상 반려인보다 저만치 멀리 가던
나의 아름다운 개.
까미가 생전에 믿고 다닐 수 있는 동물병원이 있어서 감사했어요.
그동안은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렸었는데. 참 든든했어요.
좋으신 분들이라고.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24시 동물병원에 가서 마지막으로 까미를 보셨던 수의사선생님께 까미 진료내역을 보여드렸어요.
그날 마지막으로 까미 상태를 보셨으니
사인이라도 혹시나 알 수 있을까 해서.
혈전이었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제가 참 집요하죠. 그치만 이해해야만했어요. 까미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한달이 지난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까미를 애도하는 글을 주치의 선생님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까뮈 반려인 드림.
(돌봄의 긍정성에 대해 말하고싶다기 보다 준비되지 못한 이별을 한 슬픔에 대해 나누고 싶었어요.)
첫댓글 아.. 저는 이 글을 못 썼어요.
지난 겨울에 애기 보냈는데 쓰신것처럼 저도 어제일처럼 선명해요
반려동물의 죽음은 정말 너무나 짧고 허망하죠 나는 사랑을 더 줄 수 있고 더 주고 싶은데 애기들은 참 뭐가 그리 급한지
아픈티도 많이 안내고 가는게 참 그래요.
저희 첫째는 끝내 사인을 모르게 되어서 저도 참 마음이 무거웠는데 너무 잘 표현해주셨어요. 굉장히 공감갔구요.
까미 동영상까지 올려주시니 괜히 제가 더 감사합니다
알베르 추까뮈.. 하필이면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이름에 영감까지 받은 애기 너무 이쁘네요
정말 그날이 너무나 선명해요. 사실 이글은 작년에 쓰인 글이거든요. 그런데 수의사선생님께 메일을 드리고 답장을 받지 못했어요. 물론 답장을 기대하고 쓴 건 아니지만. 나의 수명을 줄 수 있다면 반으로 똑 떼어줄 수 있는데, 어째서 녀석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게 흘렀는지. 참 잔인한 법칙이다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답장을 받지 못했는데 댓글을 주셔서 마치 답장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네요.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상아님. 이런 일이 있으셨군요. 본격적으로 반려인이 되어보지 못했지만, 상아님의 글을 읽으며 항상 나를 기다려주고 나와 함께해 준 존재란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생각지도 못할 깊은 유대감과 그들만의 시간이 거기에 있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추까미는 지금 상아를 바라보고 있겠죠? 이렇게 펜을 들어 적어주고 나를 추억해줘서 고맙다고 생각하겠죠? 쉽지 않으셨을텐데 이렇게 말해주시고 나눠주신 것으로 까미에 대한 애도의 한 걸음을 시작하게 되셨을 것 같아요. 글 감사합니다.
알베르 추까미가 저를 바라보고 있으려나요? 상상만으로 큰 위로가 되네요. 까미가 준 다정함을 저는 유기견을 임시보호하며 돌려주고 있어요. 까미가 지켜보고있다면, 네 덕분에 4마리의 유기견이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고. 너와의 사랑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게도 까미가 있었어요. 마당에 살던 길고양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마당 고양이들 가족 사이에 끼여들었더라고요. 그게 웃겨서 '이방인'으로 불렀어요. 마당 고양이들은 다 제 손을 타는 녀석들인데 이방인은 끝까지 손을 안 탔어요. 죽기 전에 너무 아팠던지 한 번은 잡히더라고요. 병원에 데려갔지만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제 능력이 그게 안 됐어요. 녀석에게 이방인 말고 알베르 카뮈 이름 따서 '까미'라는 이름을 마음 속으로 지어주고 있었어요. 손 타게 되면, 내 새끼 되면 그렇게 불러주려고.. 작년 가을에 잃었습니다.
저는 1년 넘게 함께한 아이와 헤어지면서도 많이 힘들었는데, 상아님의 마음은 어떨까. 또 지금 함께 사는 네 고양이들이 떠나갈 때 나는 어떻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 일을 어떻게 헤쳐나가고 계실지, 견디고 계실지 어떤 위로로도 부족하겠지요.
평생을 나만 사랑해주는, 그 사랑이 단 한 번도 변하지 않는 이 작은 존재들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평화가 얼마나 큰지, 무엇과도 비교가 불가한 그 사랑이 너무도 고마워서 되려 미안해지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계속계속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주 퇴근길에 로드킬 당한 새끼 고양이 사체를 수습했어요. 그날은 숙직을 해서 아침에 퇴근을 했는데 중학교 앞 등굣길에 새끼 고양이가 눈이 튀어나온 채 피를 흘리고 있더라구요. 등교하는 아이들은 울기도 하고 꺄악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깜짝 놀라 욕을 하기도 했어요. 손이 벌벌 떨리는데 핸드폰을 붙잡고 어디에 전화를 해야하는지 검색을 했어요. 그리고 그 사이에 아이가 소리도 없이 발버둥 치며 죽었습니다. 인간은 왜이렇게 해로운 걸까요. 일방적인 위로와 평화. 사람도 동물들에게 위로와 평화를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길냥이 급식소, TNR 세상 좋아졌다 하는데 길고양이들의 생존은, 실상은 여전히 위태위태하기만 한 것 같아요. 까미의 죽음이 1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죽음을 지켜보거나 떠올리면 미칠듯한 슬픔과 불안이 올라와요. 그래도 사체가 더 훼손되지않도록 정신을 부여잡고 그동안 새끼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주며 돌봐주셨다는 중학교 선생님과 아이를 박스에 담아 구청에 인계하였습니다. 왜 때문인지 고쌤에게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상아 저도 길고양이 보면 신생아들이 막 돌아다니는것같아 매번 조마조마합니다..
어디서 고양이들 모아 신호등 보는 교육이라도 시켰으면 하는 바램까지 듭니다
제 눈앞에서 건너면 (이러면 안되지만 무단횡단을 해서라도) 같이 건너는데
늘 마음이 불안하네요
@상아 마당고양이들 때문에 아픔과 죽음을 계속 봐야했던 1년간 저도 모르게 제가 많이 지쳤더라고요. 완전한 개입도 방관도 못하는 어정쩡한 마음때문에 더 자책하고 괴로웠어요. 지금은 적당한 거리를 두는 법을 연습 중입니다. 아이들의 죽음을 보는 것은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그 아이들이 내게 준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고 강하게 마음을 먹어보아요. 아마 상아님도 그런 마음으로 다른 아이들 돌보시는 거라 생각해요. 조금 울고 많이 힘내세요!
상실의 마음이 너무 절절하게 느껴지는 글이네요. 계속 눈물이 나네요.. 까미와의 소중한 추억, 상아의 소중한 마음까지, 글로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이 글은 쓰면서, 퇴고하면서, 올리면서도 계속해서 울게 되는 것 같아요. 같이 울어주셨다니 정말 위로가 됩니다. 감사해요.
가슴이 쫄아드는 저린 아픔..이 글을 어떻게 쓰셨을지요. 반려견 까미가 아닌 까미의 반려인이라 칭하니 느낌이 참 다르네요. 얼마나 의지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셨을지, 보낼때의 마음이 어떠셨을지, 이후의 그리움까지 전달이 잘 되어 제가 상아님이 된듯한 착각으로 눈물 흘렸습니다. 영상플레이 도전은 다음에...좋은 글 고맙습니다.
같이 눈물을 흘려주시다니 정말 다정하신 초록이님, 그마음에 많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영상은 까미와 제가 뛰노는 몇 초 안되는 짧은 영상입니다. ㅎㅎ 지금도 까미는 강아지별에서 마음껏 뛰놀고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