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5
씬 41. 바다 (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바다에 떠있는 훈련병들.
그 때, 그들의 뒤쪽에서 강한 라이트가 비춰 온다.
놀라 휙 돌아보는 훈련병들.
상민, 김 준위, 교관1이 각각 책임자로 타고 온 보트가 미끄러져 온다. 각 보트에는 두 명 정도씩 기간 병들이 타고 있다.
김 준위: 작전이 취소됐다. 올라와라.
꼼짝 않고 보트를 바라보다가 이내 휙 고개를 돌려버리는 훈련병들.
김 준위: (큰 소리로) 모두 올라와! 조별로 보트에 타라!
그래도 반응 없는 훈련병들.
손을 뻗어 가까이에 있는 훈련병의 어깨를 잡는
김 준위: 못 들었나? 올라와! 명령이다!
팟- 김 준위의 팔을 뿌리치고 옆으로 헤엄쳐 보트에서 멀어지는 훈련병.
보트 바닥에서 기관총을 집어 들고 철컥 장전하는
김 준위: 이 새끼들! 꼭 이렇게 해야 알아듣겠나!
상필: (버럭 고함치고) 씨팔! 더 기다려 봐! 아직 버틸 수 있어! 취소 될 리 없잖습니까!
정진 쪽으로 다가간
상민: (정진에게 라이트를 비추며) 올라와라.
정진: (상민을 외면하고 정면을 보며) 그냥 보내만 주십시오. 우리, 할 수 있습니다.
상민: 위에서 허가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서 기다리면…….
준호: 명령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김일성 모가지만 따오면 될 거 아냐!
준위: (갑갑한 얼굴로 먼 곳을 돌아보다가 이내 결심이 선 듯 기간 병들을 돌아보고) 끌어 올려.
기간 병들, 보트를 몰아 훈련병들을 세 대의 보트 가운데로 몰아넣기 시작하고.
보트의 물살에 휩쓸리고, 피하는 훈련병들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와 그들 위에서 춤추는 라이트.
“안 가!”
“보내만 달란 말이야!”
“우리가 한다니까! 할 수 있어!”
라고 소리치는 훈련병들의 목소리가 번쩍이는 천둥과 번개 속에 묻힌다.
씬 42. 연병장 (새벽)
비가 그치고 붉은 새벽빛이 연병장을 물들이고 있는데, 바다를 향해 서있는 재현. 그의 눈빛이 모자 아래서 빛나고.
해안에 보트가 들어온다.
보트에서 내리는 훈련병들의 모습은 완전히 젖어있고, 완전히 지쳐있다.
낙오병들 같은 모습으로 군장을 질질 끌거나 천천히 걸어오는 훈련병들.
재현을 보지만 아무도 경례를 붙이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털썩 재현의 발치에 던져지는 군장.
군장을 보고 시선을 드는 재현. 재현을 보지 않고 연병장 안 쪽을 바라보며 서있는
정진: 명령대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말을 마치고 재현을 돌아보는 정진. 그의 눈 속에 잠시 일렁이는 분노의 빛.
재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정진도 연병장 안으로 들어가고.
이내 연병장 중간쯤에서 누워 버리기 시작하는 훈련병들.
보트에서 내려 뒤따라 오다가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이 되어 제 자리에 서는 상민.
연병장 한 가운데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그들의 모습에서 카메라 뒤로 빠지면서 처음으로 실미도 전체의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운 모습이 보이며 F. O.
씬 43. 거리 (낮)
눈발이 휘날리는 거리. 씬1의 버스 정류장에 멈춰서는 버스.
버스에서 내리는 상민. 정복 차림이다.
버스가 떠나고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보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는 상민.
씬 44. 연탄 가게 앞 (저녁)
가게 밖으로 종종 걸음으로 나오는
정진 모: 땔 거 없다니까 일단 두 장만 얼른 갖다 주고.
희주: (뒤쫓아 나오며) 두 장은 자기들이 와서 좀 갖구 가라 그러죠.
정진 모: (연탄 더미에서 두 장을 들어 내리며) 그 집에 가질러 올 사람 없어.
그러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돌아보는 정진 모.
서있는 상민.
정진 모: (연탄을 새끼줄에 매며 희주에게) 주문 받어.
안으로 들어가는
희주: 주소 불러 주세요. 이 동네세요? 몇 장 갖다 드려요?
상민: (E) 어머니.
상민의 목소리에 새끼줄 매던 손이 멈춰지고.
천천히 고개를 드는 정진 모.
상민, 정진 모를 바라보는 시선에 뜨거운 물기가 느껴진다.
정진 모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시선이 상민의 군모와 군복으로 향한다.
정진 모: (외면하며) 나, 갔다 오마.
상민: (다가서며) 어머니, 저 상민입니다. 진이랑 사범님께 검도 배웠던 이상민입니다.
반갑기는 하지만 깊은 염려를 담고 상민을 바라보며 슬픈 눈빛이 되는 정진 모.
수첩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오다가 멈칫하는 희주
씬 45. 버스 정류장 (저녁)
버스를 기다리고 서있는 상민.
버스가 도착하고 막 올라타려는데 달려오는
희주: 잠깐만요!
돌아보는 상민.
숨을 고르는 희주. 손에는 보자기에 싼 두툼한 보퉁이가 들려있다.
씬 46. 공터 (저녁)
동네 텃밭에 물을 얼려 만들어진 스케이트장. 아이들 두 셋이 썰매를 타고 있는 그 스케이트장 옆을 걸어가는 상민과
희주: (조심스럽게) 서운하게 생각 마세요. 저 처음 왔을 때도 그러셨어요. 정진이, 아니, 저기 정진씨 아버지가 그렇게 된 분이어서, 엮이면 좋을 거 없다고, 저기, 그 쪽 분이…….
상민: 이 상민입니다.
희주: (어색하게 웃으며) 상민씨가 군인이니까……. 이런 집안에 들락거리면 앞길에 지장 있을 거라고, 우셨어요. (가슴 아프게 이해되는 표정으로 시선 돌리는 상민을 살피며) 정진씨랑 친하셨어요?
상민, 돌아보고.
희주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희주: 사실은 친하시지 않았더래도 부탁 드릴려구 쫓아 온 거예요.
의아한 시선으로 보는 상민.
씬 47. 여관 방 (밤)
쌓여있는 이불에 기대 앉아있는 상민.
돌아보면 희주가 들고 있던 보퉁이가 풀러져 있고 그 안에는 너저분한 서류가 뭉텅이로 쌓여있다.
OL 되는 목소리
희주: (E) 정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요. 이송됐다고만 하고, 어디로 간 건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안 가르쳐 주고, 진정서에다 뭐에다 필요하다는 서류는 다 준비를 해 봤지만, 저는 가족이 아니라서 아무 권리도 없고, 어머니는……. 아는 척을 안 하세요. 경찰서나 교도소 같은데 가 봐야 어머니까지 안 좋은 일 당하실 수도 있고. 사람 없어진 지가 벌써 1년 반인데……. 꼭 좀 부탁 드릴께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만이라도 알면 소원이 없겠어요.
담배를 물고 서류를 뒤적이는 상민.
그러나 이내 서류를 툭 던지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심란한 마음으로 털썩 기대며 눈을 감는 상민.
씬 48. 사격 훈련장 (낮)
사람 모형의 나무판. 탕- 소리와 함께 심장 부분에 구멍이 뚫리고 다시 총성 울리면 머리 한 가운데 구멍이 뚫린다.
사격하는 사람 보이면 엎드려 쏘고 있는 정진.
그 옆으로 훈련병들이 죽 엎드려서 총을 쏘고 있다. 사격장 곳곳에 눈이 쌓여있다.
민호도 그렇고 모두 정확하게 심장과 머리를 쏘고 있다.
훈련병들 뒤로 천천히 걸어가다가 멈칫 서는 기간 병1: (아주 어린 느낌을 주는 얼굴이다)
기간 병1이 보는 훈련병은 준호.
준호가 쏘고 있는 나무판은 심장과 머리가 아니라 다리 사이 부분이 거덜 나고 있다.
준호 옆으로 다가서는
기간 병1: 무슨 짓이야! 제대로 못해?!
대꾸 없이 계속 과녁판의 다리 사이를 쏘는 준호.
기간 병1: 어디를 쏘는 거야!
주변의 훈련병들, 사격을 멈추고 두 사람을 보기 시작하고.
사격 멈추고 기간 병1을 올려다보는
준호: 사격 교관님이 일발 즉사 부위를 맞추라고 가르쳐 주셨거든요. 일발 즉사할 수 있는 데는 머리하고, 심장 그리고 (히죽 웃으며) 거시기.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하는 훈련병들.
당황한 기간 병1.
준호: (다시 과녁판을 조준하며) 근데, 저거를 오랫동안 쓰지 않고 그냥 달구만 있어도 죽을 것 같기는 하지.
푸하하하- 아예 대놓고 웃기 시작하는 훈련병들.
얼굴이 시뻘개진
기간 병1: (자기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준호의 머리를 찍어 누르며) 이, 이 새끼! 반항하는 거냐!
머리 찍힌 자세 그대로 엎드려 있는 준호.
준호의 이마에서 흐른 피가 하얀 눈 위로 뚝뚝 떨어지고.
당황스러운 기간 병1.
천천히 기간 병1을 돌아보는 준호.
반사적으로 총을 겨누는
기간 병1: 뭐, 뭐 하는 거야?!
천천히 미소 짓는 준호.
기가 눌린 기간 병1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이내 다시 과녁판을 조준하는
준호: 저 새끼도 저기 서서 3년이거든. 3년 동안 대가리랑 가슴팍에 총알만 맞고 서 있었거든. 그래서, 있어봤자 소용없는 거 내가 날려주는 거야.
쾅! 총을 쏘는 준호.
과녁판 다리 사이의 판자가 퍽 날아가고.
두어 사람 건너에 엎드린 채 철컥 장전하는
원상: 썅! 우리 것두 날려 주자구. 무겁게 달구 있으면 뭐하냐, 쓸 데도 없는 거.
원상을 비롯해서 훈련병들이 너도 나도 과녁판 다리 사이를 쏘기 시작하고.
당황하여 여기 저기 둘러보는
기간 병1: 무, 무슨 짓들이야. 교관님!
그러다가 길게 호루라기를 불면서 훈련장 밖을 애타게 돌아보는 기간 병1.
그 모습을 킬킬거리며 바라보는 훈련병들.
그러나 한쪽에서 줄기차게 과녁의 머리만 쏘고 있는 정진의 모습이 보인다.
씬 49. 거리 (낮)
건자재와 폐기물, 오물 등이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공터.
머리에 새빨간 글씨로 ‘약속 이행’ ‘먹고 살자’‘철거민도 사람이다’ 등등의 구호를 쓴 띠를 두른 몇 만명의 사람들. 각목을 휘두르고 깃발을 펄럭이고 있고, 시위대 뒤편에서는 꽹과리 등을 울리고 있다.
공터 건너편에는 경찰들이 진압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이고.
시위대 선두에 선 사내가 시위대를 향해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사내: 정부는 우리에게 새 집을 주고, 경공업 단지를 마련해 주고, 일자리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기에 뭐가 있습니까? 쓰레기 똥통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던 서울까지 가려면 세 시간, 네 시간이 걸립니다. (시위대의 함성이 터지고) 우리가 살던 집 철거하면서 광주로 가기만 하면 5백 원에 준다던 땅이 지금 얼맙니까? 만 6천원입니다. 우리보고 어디로 가라는 겁니까?! (진압대를 향해 돌아서며 주먹을 불끈 쥐고) 철거민도 사람이다.
시위대: (구호를 따라하며) 철거민도 사람이다!
사내: 우리 집을 돌려 달라!
시위대가 와아- 하는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오는 경찰들.
경찰들이 마구잡이로 시위대를 후려치고 있는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수 백 명의 깡패들이 못 박힌 각목을 들고 언덕 위에 올라서는 것이 보이고.
경찰들이 시위대에 밀리는 것이 보이자 언덕을 내려가는 깡패들.
시위대의 후위를 치기 시작하는 깡패들.
그들의 각목에 시위대의 머리가 터지고 어깨가 찢어지는 모습이 보이며
자막…….- 1971년 봄
씬 50. 골프장 (낮)
한가로운 골프장 전경.
캐디들과 경호원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르고 있는 가운데 골프장을 걸어오는 이 후락과
오국장: 진압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파출소도 불타고 경찰, 민간인 할 것 없이 엄청나게들 다쳤다는 보고입니다.
캐디가 건네주는 골프채를 받아들고 거리를 보는 이 후락.
이 후락이 친 공이 연못에 빠져 버리고.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보는
이 후락: 판사부터 철거민까지 조용한 놈들이 하나도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