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춘천 이야기13
귀신을 잡고 얻은 치유의 현장, 귀신잡이
<귀신잡이, 병을 치료하던 최고의 방법>
“나무를 잘라 구멍을 파고서 새끼를 꼬아서 한 사람은 새끼를 받고 다른 한 사람은 사귀대를 잡는다.”
이 장면은 춘천시 남산면 행촌리 봉의텃골에서 채록한 귀신잡이 이야기이다. 1970년대까지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우리의 치병(治病) 풍속이다. 모든 병의 근원은 귀신의 조화라 믿었다. 나쁜 귀신이 병을 몰아와서 사람에게 붙으면 몸이 아프다고 여겼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가야 하는데, 원한이 있는 귀신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九泉)에 머물러 있다고 인식했다. 온전히 자신이 타고난 명(命)을 누리지 못하고 죽었거나 살아생전 억울한 삶을 살다가 뜻을 한 번 펴지도 못하고 죽었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거나 비명횡사하였거나 혼인하지 못하고 죽었거나 한 주검은 곧바로 저승으로 가지 못했다. 그런 주검은 신(神)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고 귀(鬼)가 되었다. 이 귀(鬼)는 구천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김시습은 <귀신설(鬼神說)>에서 “어떤 것은 기(氣)가 아직 미진한 것이 있어 강사(强死, 죽어도) 하여도 오히려 무형(無形)한 속에 남아있어, 마치 겨울에 입김을 불면 안개가 끼고 추위가 심하면 얼음이 되는 것과 같아서, 오래되어야 자연히 사라져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선비들은 귀신의 존재유무를 따지면서 철학의 근거로 삼았다. 어쩌면 귀신론이 동양철학의 이기론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런 귀신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병을 옮긴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이 아프거나 소가 아프면 복술이[법사, 경쟁이]를 들여 경을 읊어 귀신을 떼어 가두었다. 이를 대잡이 또는 경읽기 등으로 불렀다. 무당을 들이면 비용이 많이 드니, 마을마다 있는 복술이에게 부탁을 했다. 그래도 낫지 않으면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야간공연, 마을 최고의 구경거리>
마을 사람이 부탁하면, 복술이는 엄나무로 귀신통 또는 사귀통(邪鬼桶)을 만들고, 대나무나 싸리나무에 한지를 끼워 사귀대[귀신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귀신을 뜻하는 한지를 접어 보관했다. 북을 들고 온 복술이는 보통 하룻저녁에서 3주까지도 병경(病經)을 읊었다. 정말 경을 읊는 솜씨가 유창했다. 며칠 밤을 밤마다 읊어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경을 읊다가 적당한 시기가 되면 대잡이가 쥐고 있던 사귀대에 내린 귀신을 사귀통에 몰아넣고 붉은색 진흙으로 구멍을 막고 왼새끼로 돌려 묵었다. 그리고 사귀통을 들고 나가서 적당한 장소에 묻었다. 복술이가 경을 읊다가 일어나서 새로 그 집에 들어온 물건을 찾는데, 정말 귀신같이 알아맞힌다. 장롱에 있는 물건도 정확하게 딱 집어내었다. 복술이는 그 물건에 귀신이 묻어왔다고 했다.
구경거리가 없던 시절 시골에서는 귀신잡이가 최고의 야간공연이었다. 누구 집에 병경을 읊는다고 하면 동네 사람 남녀노소 누구나 모였다. 문을 열어놓고 마당에까지 즐비하게 사람들이 모였다. 복술이의 귀신잡이는 신비 그 자체였다. 모인 사람에게는 주인이 국수며 밥을 해서 밤참을 먹게 했다. 귀신잡이를 하고 나면 아픈 사람의 병은 정말 감쪽같이 나았다.
<병원과 약국이 생기면서 자연히 사라져>
이처럼 귀신잡이는 병을 옮기는 사악한 귀신을 쫓는 축귀의식(逐鬼儀式)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이런 축귀의식은 약이 발달하고 병원이 곳곳에 생기면서 사라졌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옛 풍속이 되었다. 사진조차도 구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춘천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행한 옛 풍속이므로 보전할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