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물건의 향기 / 곽주현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낯익은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깊숙이 들어 있어서 여태껏 눈에 띄지 않았나 보다. ‘어, 이게 여태 여기 있었네. 반갑다.’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지퍼를 열었다. 연필, 볼펜, 지우개, 자, 그리고 면도칼이 가지런히 누워있다. 마치 마법에 걸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다. 그들을 깨우듯 조심스럽게 한 개씩 꺼내서 살폈다.
오래된 필통이 거기에 있었다. 크기가 내 손바닥만 하다. 몸통에는 짙은 암갈색에 붉은 해마가 헤엄치는 무늬가 가득 그려져 있다. 한쪽 면에는 똑딱단추가 두 개 달린 조그만 옆 주머니도 있다. 지퍼로 여닫을 수 있어 학용품을 넣고 꺼내기가 편하다. 귀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기분이다. 연필로 줄을 죽 그어 보았다. 변함없이 제 기능을 한다. 볼펜도 꺼내 같은 동작을 했다. 잉크가 굳었는지 반응이 없다. 그러고 보니 긴 시간이 지났다.
그것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3월 이맘때쯤이었다. 딸아이가 학용품을 사 달라고 하기에 문구점에 들렸다. 공책, 연필 등을 고르다가 이것을 봤다. 이렇게 좁고 길쭉한 지갑도 있나 하고 집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주인이 곁으로 와서 새로 나온 필통이라고 한다. 그것까지 사서 딸아이에게 선물했다. 그때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것이다. 녀석은 이런 모양을 꼭 갖고 싶었다며 필기도구를 옮겨 넣고는 흔들어 보이면서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딸이 중학교에 입학했다. 새 학용품을 준비해야 한다며 필통을 버린다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가지고 다니더니 이제는 그녀의 눈 밖을 벗어났나 보다. 아직 멀쩡한 물건을 쓰레기통에 넣기가 아까워 내가 갖게 되었다. 인조가죽으로 만들어서 내용물이 부딪쳐도 딸랑딸랑하는 소리가 안 나서 좋았다.
그것을 유용하게 쓰던 시절의 어느 날, 딸이 유심히 보기에 “이것 기억나냐?”라고 물었다. 많이 본 듯한데 잘 모르겠다 한다. 이리저리 설명하니 그제야 생각이 났다며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필통 소유권이 내게로 오면서 네 기억까지 넘어온 거라며 함께 웃었다. 여태껏 그걸 갖고 있다며 놀라워한다. 지갑 같은 필통을 ‘파우치 필통’이라 부른다는 걸 그때 알았다. ‘웬만하면 하나 사서 쓰지, 그 낡은 것을 가지고 다니냐.’며 핀잔 비슷한 말을 건넨다. 오래 간직한 물건이 주는 편안함과 기억들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해가 될까.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았다.
현직에 있을 때는 가방에 책과 함께 넣어서 어디를 가든 동행했다. 기본적인 필기구뿐만 아니라 색연필, 종이 클립, 찾아 보기표, 유리 테이프 등이 가득 들어 있어 늘 배불뚝이였다. 여럿이 사무적인 작업을 할 때 필통은 그 진가를 보여줬다. 누가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여기 있습니다." 하고 꺼내주면 “그것참, 보물 창고네.”라는 칭찬을 자주 들었다. 이제는 귀퉁이가 삭아 구멍이 났고,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져 곰팡내가 날 것 같다. 골동품 가게에 들렀을 때 맡게 되는 미묘한 냄새가 풍기는 듯도 하다.
비록 하찮은 물건이지만 긴 세월을 같이 지내다 보니 깊게 정이 들었다. 시간의 흔적이 쌓여 그 속에 숨겨진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래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가까이 두고 있다. 최근에 읽은 강승원과 빈센트의『쓸모 인류』에서 “내 삶에 꼭 쓰일 물건은 사는 게 아니라 만난다.”라고 하는 글귀가 있었다. 인상적이어서 밑줄 긋기를 했는데 오랫동안 함께 한 필통을 보며 그 말에 실감한다.
정년으로 별로 쓸모가 없게 된 필통은 잊힌 체 십 년 가까이 그렇게 서랍 속에 숨어 있었다. 요즈음 나는 잠자던 것을 다시 깨웠다. 먼저 연필을 꺼내어 카트 칼로 뭉개진 심을 세웠다. 좋은 글귀에 밑줄 긋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내 글도 오래된 파우치 필통 향기가 났으면 좋겠다.
예전처럼 필기도구를 챙겨 필통에 넣고 닫는다. 어느새 마흔 살이 넘었지만 아무래도 새것으로 쉽게 바꿀 수 없을 것 같다
첫댓글 '내 삶에 꼭 쓰일 물건은 사는 게 아니라 만난다'는 말이 와 닿네요.
마흔 살이 넘은 필통에선 어떤 향기가 날까요? 그 속에 가득한 얘기가 궁금해집니다.
납니다! 오래된 파우치 필통 향기.
아, 정말 어떻게 이렇게 쓰시는지요.
존경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그 짙은 향기에 흠뻑 젖었습니다.
마법에 걸려 깊은 잠에 빠진, 오래된 필통 속의 필기구들이 선생님의 호흡으로 깨어났군요.
선생님은 글은 언제나 어떤 향기가 나서 읽고 나면 긴 여운이 남습니다.
옛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물건이 있지요. 필통이 그렇네요. 잘 읽었습니다.
아니, 오래된 필통 하나로 이런 따스한 글이 나오다니요.
아주 훌륭한 글입니다. 수필이란 이렇게 쓰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듯 합니다.
저도 딸들 버린 거 아까워서 헌 물건들과 자주 만납니다.
와우, 40년이 된 필통이라뇨?
필통 장사 굶어죽겠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