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7-20) // 천국에서 큰 자
조선 최고의 순교자 27살 청년 토마스 목사
1840년 9월 7일 영국웨일즈 태생 1863년 6월 하노버 회중교회에서 안수 런던선교회 소속 중국선교사로 파송됨. 그해 12월 중국 상하이에 도착 후 4개월만에 부인 캐럴라인이 풍토병으로 죽음.
중국 산둥성 지푸에서 독립선교사로 세관원 일. 병인박해로 피신해온 천주교인들을 보고 조선선교 비전다시 갖음
1865년 9월 4일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조선에 권서로 파송되고, 황해도에서 한국어를 배웁니다.
1866년 1월 베이징에 돌아와 한국의 선교를 준비하며, 런던선교회에서 재임명 받습니다.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안내자 겸 통역자로 한문 성경 수십 권을 가지고 떠납니다.
1866년 8월, 셔먼호가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평양 감사 박규수와 협상하며 무역협상을 요구했습니다. 셔먼호의 선장은 대포로 조선을 위협하면서, 병졸까지 납치해서 감금하면서 계속해서 항진을 강행하고 대치합니다.
썰물 때가 되어 물이 급격히 줄어들자 셔먼호는 강바닥에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1866년 9월 2일 평양감사 박규수의 불을 붙인 신탄선을 보내 셔먼호를 불태웠습니다.
23명의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고,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님도 한문성경 몇 권을 갖고 헤엄쳐 나왔는데, 박춘권이 칼로 토마스 목사를 쳐 죽임으로써 그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목사의 나이 27살 이었습니다. 그 시체는 토막 났고 이어 강변에서 불태워 졌습니다.
얼마나 허무한 죽음입니까? 그런데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당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최치량이라는 13세 소년이 토마스 선교사가 흘린 성경 3권을 주워 집으로 가져옵니다.
그런데 서양인 물건에 함부로 가져온 것이 무서워 평양성 대동문을 지키던 박영식에게 주게 됩니다.
그런데 박영식도 이 성경을 불태우지 않고 집으로 가져와서 뜯어 벽지로 사용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다가 그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시간이 흘러 13살이었던 최치량이 성인이 되어서 박영식의 집을 구입한 후 주막을 시작합니다.
1893년 토마스 선교사가 죽은지 27년 후 평양선교가 처음 시작된 해에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다가 최치량의 주막에 머물다가 성경으로 벽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1894년 최치량이 세례를 받습니다. 최치량의 주막이 평야 최초의 널다리골 예배당(후에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중심에 있던 장대현 교회)이 됩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장로님이 조선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됩니다.
오늘 말씀은 누구와 비교하여 더 의로워지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즉 바리새인보다도 더 의로운 자가 될 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친다.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오해한 제자들에게 율법은 완성되어야 할 것과, 그 완성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한다. 천국에서 큰 자는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운 자라고 말씀하신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의
義개념에 대하여 좀 더 숙고할 가치가 있는 말씀을 하신다.
믿음과 의, 그리고 율법의 관계가 무엇인지 잘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본문은 율법에 대하여 정확한 규정을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율법에 대한 올바른 규정을 말씀하신다.
천국에서 큰 자는 예수님처럼 율법을 완성하는 자이다.
율법의 완성 -
주님은 율법을 폐하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17절).
구약의 율법은 주님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죄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저촉될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주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시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아담 이후, 이 땅 위에 태어난 사람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으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다.
그 분은 아담의 후손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기에 죄와는 처음부터 무관하신다. 그러니 예수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17)
율법과 주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과 율법과의 관계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그렇듯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반대하는 자가 되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율법주의자가 되어도 안 된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는 게 律法主義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율법은 없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이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一點一劃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18)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으로 일차적으로 율법은 이뤄졌다. 또 십계명으로 일컬을 수 있는 윤리적 율법도 그 요구를 예수님께서 친히 지키심으로 완성하셨다.
율법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고 인간이 행해야 할 의의 표준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켜 완전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힘으로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작은 자와 큰 자 –
한 마디로 행동하는 자는 큰 자이고 행동하지 않는 자는 작은 자다(19).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한결 같이 말은 하는데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23:3,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말은 많이 한다. 잘 가르친다. 그러나 말이나 그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이 없다.
열매가 없다. 그들은 손가락도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천국에서 작은 자의 모습이다.
이 말씀은 구원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상급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율법은 믿음의 문제라기보다 상급의 문제이다.
(마7:21)에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상급의 문제를 믿음의 문제로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야고보는 행함으로 말미암은 구원’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생활에 익숙한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행함의 문제에 걸리므로 천국에서는 작은 자라고 나무라신다.
신앙생활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형식화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야고보도 오늘 성경과 같은 견지에서 말하였다.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율법에 관한 한 전문가라고 자처하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무가치한 선생으로 다루면서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라고 제자들에게 교훈하신다.
더 나은 의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구약 율법의 문자적인 해석에 강조를 두었다. 그들은 그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문자적인 해석을 통해 율법의 의미를 변질시켰다. (21절) 이하에서 율법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면서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 제시하신다.
더 나은 의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말만 하고 실천하지는 않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는 삶을 말한다. 예수님은 수도 없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했다. 이는 그들이 사람을 의식하여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나은 의’란 하나님을 의식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어떤 일을 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왜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주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 보다 동기를 중심을 더 중요하게 보신다.
산상수훈의 율법에 관한 것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복음을 통해 율법이 폐하였다는 것이 아니란 것이고 완성 이란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너와 나는 모든것을 함께하고 함께나누자
하고서는 자기의 것을 먼저 채운뒤에 그 나머지를 가지고 나누면서 너와 내가 정당하게
바르게 나누는거야 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르다고 말씀하실까요.
바리세인과 지금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에 생각에 나의 이익에 맞추어 사람들과의
관게를 한다면 하나님이 모르실까요.
욥 33:29 실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욥 33:30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그들에게 비추려 하심이니라
우리네 인생과 신앙생활은 우리가 살아가며 구원을 말하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지만 먼저
사도 바울이 말한 믿음을 알아야 하고 야고보가 말하는 실천하는 행동하는 신앙생활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빛으로
살아가게 하심을 믿어야 한다.
산상수훈을 묵상하고 십계명과 산상수훈을 비교하면서 나의 인생과 행동과 믿음의 삶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