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다른 / 고혜숙
"데에엥... 데에엥...." 무위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였다. 저녁 예불 시간을 알리는 거란다. 풀 뽑던 일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사라져 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기도가 되는 순간이다. 다음날 무위사를 찾았다. 불자는 아니지만 부처님께 절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동네 어르신들 찾아뵙는 일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고즈넉하다 못해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무위사였다. 극락보전 하나 덩그러니 남아있어서 왠지 절 이름과 걸맞은 분위기랄까. 유홍준이 남도 답사 일번지로 강진과 해남을 가리키고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사람들 발길이 잦아졌고, 문화재청의 관심을 받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는 중이다. 템플 스테이 푯말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아니, 어느새 무위사가 이렇게 커버렸지?' 법당에 들어가서 절을 했다. 예를 갖추니 마음이 절로 경건해진다. 경내를 걷다가 주지 스님을 만났다. 월하리로 이사 왔다니까 한사코 차 한잔하고 가란다. 커피를 내리는 스님의 내공이 예사롭지 않았다. 강릉에서 수행하던 시절, 테라로사 창업자한테서 직접 배웠단다. 그렇게나 산미가 풍부한 커피를 마셔본 기억이 별로 없다.
산책 삼아서 무위사까지 갔다 오는 날이 많아졌다. 한때 아침이면 반야심경을 소리 내서 읽기도 했다. 부처님 오신 날이나 수륙 대제 같은 행사에 참여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경을 독송하다 보니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고 싶었다.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이야기》를 읽었다. 600 권이나 되는 불교 경전을 한자 260 자로 요약해 놓은 반야심경의 원제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큰 지혜로 저 언덕에 도달하는 데 핵심이 되는 부처님의 말씀'을 뜻한다. 반야바라밀다행을 배우려는 사리자에게 관자재보살은 말한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감각 · 생각 · 행동 · 의식도 그러하니라." 알 듯 말 듯했다. 양자 역학을 생각해 보면 틀리지 않은 것 같았으나 그 심오한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다. 부처님의 직관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법륜스님은 말씀하신다. "이 세상이 왜 연기이고 공인가를 공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실천이 따르지 않는 앎은 오히려 짐만 될 뿐이다." 깊이 새겨두어야 할 문장이었다.
유튜브도 검색해 봤다. 최진석 교수는 반야심경을 가장 높은 경지에 있는 경전으로 꼽았다. 그의 강의에서 핵심 단어는 '건너가기'였다. 그는 물었다. '나는 말고삐를 가지고 있는가?' 자기 삶의 주인인가 질문해야 한다는 거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오리무중이며, 자기만의 경전을 써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만의 경전이라! 홍익학당의 윤홍식 강의는 좀 별난 데가 있었다. '내 안의 양심을 밝히고 인의예지의 실천'을 내세우는 그는 저잣거리에서 들을 법한 말을 툭툭 던졌다. 몰라, 괜찮아, 자명한가,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가 등. 생각, 감정, 오감에 대해서 '몰라!'라고 선언하고 나면 그 자리에 들어선 '참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단다. 참나 상태에 이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던가? 누군가는 사이비라고 깎아내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귀담아들었다. "공에서 오온이 나왔고, 오온이 본래 공이더라. 열반의 세계로 가지 않고 여기 있겠다. 무상하니까, 연기의 작용이니까 만법은 없는 거다." 만법이란 인간의 사유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온갖 개념을 말한다. 머리는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리송하다. 아공이니, 법공이니 하는 낯선 말들. 그 속에서 내게 와닿는 것은 '보시'였다. 남에게 베푸는 보시바라밀은 베풀고도 선행을 자랑하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의미한다.
다시 《반야심경 이야기 》를 꺼냈다. 가없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일깨우는 관자재(관세음) 보살. 그에게 "자는 잠시 보관한 것을 되돌려 주듯 베푸는 자세이며, 비는 너의 고통은 본래 네 고통이 아니라 나로 인해 생겨난 고통이니 나누어 갖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의 삶을 살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하면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겠거니 한다. 그렇지만 역지사지는 언제나 쉽지 않다. 절에 가서 기와 불사를 할 때면, 남들은 워라고 썼나 눈여겨보게 된다. 하나 같이 가족의 건강이나 자신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문구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다. 기껏해야 식구들 안녕을 기도하는 마음을 적는다. 그런 나에게 2,500km를 오체투지 하는 티베트 순례자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다큐 영화 《영혼의 순례길》에서 어떤 노인이 말한다. "순례란 남을 위한 기도의 길이다. 모두의 안녕과 행복을 먼저 빌고 그러고 나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구름 사이사이로 빛나는 저녁노을. 어제보다 더 붉게 물들어 가는 산등성이 쪽을 바라보았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이 겹쳐진다. 세상으로 아파서 서러워하던 시인 이대흠. 그가 묻는다. 내 귀는 얼마나 서럽냐고.
첫댓글 선문답이네요. 이대흠의 <귀가 서럽다> 찾아 읽었네요.
백운동원림과 녹차밭 그리고 월하마을 그 뒤로 무위사까지 눈에 그려지네요.
월하리 월하 마을 광주와도 가깝고 주변 경치가 좋은 곳이지요. 월출산과도 가깝고 백운동 원림, 무위사, 태평양 녹차밭까지 무엇보다 청정지역이죠.
철학자 선생님이 여기도 계시는군요. 불교는 철학이라 말씀하시던 이훈 교수님의 말씀과 닮았네요. 무주상보시, 실천하고 싶습니다. 아참, 글 말미 이대흠 시인이 반갑네요.
참나, 역지사지, 보시, 순례 등 선생님께서 어떤 것에 마음 두고 살아가시는지 잘 느껴집니다. 앞으로 어떤
글 쓰실지 기대도 됩니다.
차근차근 공부하고 생각하시는군요. 겅중겅중 건너뛰는 저와 많이 비교되면서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어려운 공부를 하시네요. 다 잘 모르는 얘기라 부끄럽습니다. 중간에 최진석 교수가 나와서 살짝 반가웠습니다. 그의 '노자' 책과 강연은 좀 들었거든요. 하하.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어떨까요? 생각하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얕게 사는 내게 깊은 부처님 뜻을 일깨워 주시네요.
말이 어려워서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하하하.
글을 쓴 저 자신에게도 반야심경이 담고 있는 진리는 알쏭달쏭 해요. 여전히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기분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