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
04/29월(月)요일 3:13-16, 갈 2:20-21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 3:16)
연말이 되면 세금 정산으로 분주합니다. 연말 정산을 해야 세금의 일부를 환급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잘 살았는지 한 번 정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영원을 환급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 9:27). 십자가 복음에 눈이 떠지면 누구도 이처럼 삶이 바뀌고 놀라운 기적의 삶을 살게 됩니다.
복음에 눈이 열린 성도들이 잘사는 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이 사시는 삶을 삽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 2:20). 복음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믿으면 누구나 내가 죽고 주님이 사시는 삶을 삽니다. 여기서 죽음은 자아(옛사람)의 죽음입니다. 내 자아가 죽을 때 주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죽지 않으면 주님 따로 나 따로의 분리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통과할 때 참 자아가 회복되어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 3:16). 우리가 예수 믿고 잘사는 길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전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통과하면 누구나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구원도 없습니다. 사랑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요일 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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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 프란시스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겪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길을 가다 우연히 나병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번뜻 스쳤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손을 잡고 기도하다 병이 옮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 왜 그 사람을 지나쳤느냐?”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너무 더럽고 저에게 그 병이 옮길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더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너는 그 환자보다 나으냐? 너는 이전에 그 사람보다 더 더러운 죄인이었다. 나는 너의 흉한 모습을 그대로 사랑하여 너를 안고 십자가에서 죽어 너를 구원하고 너와 함께 살고 있는데 너는 왜 그를 도우려던 나의 손길조차 막았느냐?” 그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언제 주님의 손길을 막았습니까?” “너의 처음 생각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충전된 느낌으로 나병 환자를 안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놀라운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귀족의 집안에서 가출하여 평생을 걸인과 버려진 환자들을 위해 ‘걸인형제단’을 만들어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전, 우리 삶의 목표는 세상적 가치관에 맞는 성공입니다. 사업 잘하고, 출세하고, 부자 되고, 결혼 잘하고, 세상적 욕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된 후 그렇게 살아온 나는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고, 이제는 예수님의 뜻대로, 오직 예수로, 오직 사랑으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 것들을 위해 살아온 나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내가 죽었기에 세상적 성공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는 세상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사랑하며 살게 되는 수단일 뿐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통과한 자들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십니다. 이제 사랑을 흘려보내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영적 눈이 열리면 내 속에 두 가지의 자아를 발견합니다. 참 자아와 거짓 자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짓 자아를 자신인 줄 압니다. 거짓 자아는 마귀의 통치를 받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아입니다. 사랑도 자기 방식의 사랑을 합니다. 이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이 자아는 마귀, 사단의 정욕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참 자아도 있습니다. 참 자아는 원래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한 원래의 자아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고,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통치를 받는 자아입니다. 거짓 자아가 참 자아로 회복될 때 사랑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축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옛 자아를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참 자아인 새사람을 살려낸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믿음이 세례입니다. 세례받을 때 주님과 함께 옛사람에 대해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아직 옛사람, 거짓 자아에 속아 살기에 이미 죽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려고 하니 날마다 다시 살아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참으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거짓 자아에 속으면 교회에서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미운 사람이 갈라집니다. 모든 기준이 자기입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 다니고, 봉사 잘하면 되지,’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거짓 자아의 종교입니다. 종교는 복음을 믿지 않고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 회교, 유교, 다 자신이 노력해서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 속은 것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기준 되면 참 자아의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신앙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한 참 자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참 자아의 주인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을 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사는 길은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와 연합한 참 자아로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밖에 없습니다
https://youtu.be/2O_w1Am9cq0?si=4oFzan-l2WltpS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