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원짜리 수업 / 송덕희
한낮의 땡볕을 뚫고 내비게이션을 따라 농협을 찾아갔다. 문을 열자 달아오른 얼굴에 냉기가 훅 끼쳤다. 번호표를 뽑고 잠시 기다리자 내 차례가 왔다. “농협 온라인 장터에서 쓰고 싶어서요.” 상품권을 내밀었다. 젊은 남자 은행원이 살피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뒤에 앉아 있는 상사에게 조언을 구하고 돌아와 여기서는 처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여기는 단위 농협이고, 농협 은행으로 가셔야 합니다.” 한다. 다 같은 줄 알았는데 별개의 기관이었다.
다시 차를 몰고 안내해 준 ㅂㅅ동 지점으로 갔다. 이곳은 길도 복잡한 데다 주차장도 좁았다. 하는 수 없이 근처 아파트에 세웠다. 잠깐이면 되겠지 싶었다. 은행은 다행히 한산했다. 번호가 찍힌 창구로 가자 앳된 여자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품권 열 장과 신분증을 내밀고 용건을 말하는데, 듣고 있던 팀장인 듯한 분이 다가왔다. 이 업무는 처음이라며 잠시만 기다리란다. 두 사람은 기계가 있는 뒤쪽으로 가 무언가를 조회했다. 잠시 후에 돌아오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이건 누군가가 이미 사용했는데요?” 귀를 의심했다. “아니, 실물이 여기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죠?”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멀쩡히 내가 갖고 있는 걸 다른 사람이 먼저 썼다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니까요? 이상하긴 하네요.” 그들도 의아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어디서 사용했는지 알아봐 주겠다며 다시 확인했다. 정읍 하나로 마트에서 이미 결제한 일련번호라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럼 이 상품권은 휴지 조각이 되는 건가?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직원들도 믿기지 않았는지 자세한 내역을 요청해 보겠다고 정읍으로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누가, 언제, 무엇을 산 건지 확인하고 싶다고 조곤조곤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통화 중간에 “만 원짜리 열 장이요.”라고 했을 때 “10만 원권이에요.” 나는 바로 말했다. 그러나 제대로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문가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믿었다. 통화는 꽤 길게 이어졌다. 도중에 끼어들기도 어려웠다. 확인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30여 분이 흘렀을까? 바쁘면 나중에 전화해 줄 테니 그냥 가도 된다고 친절하게 말했다. 하지만 뜨거운 날씨에 다시 이곳까지 오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괜찮다, 바쁠 건 없다고 태연한 척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연락이 없는지 직원은 내 눈치를 자꾸 살폈다.
이 상품권은 큰딸이 준 것이다. 두 달 전쯤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300만 원을 빌려줬다. 그중 100만 원을 이걸로 갚은 거다. 현금을 주지 않고 왜 번거롭게 이걸 주냐고 했더니, 회사에서 나온 거도 되도록 빨리 써야 한단다. 온·오프라인 어디든 사용할 수 있어서 괜찮다며. 다만 은행에 한 번 가서 전환해야 한단다. 조금 번거롭다고 절차를 알려 줬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큰맘 먹고 나선 길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별생각이 다 들었다. ‘대체 어찌 된 노릇일까? 딸은 내게 이미 써 버린 걸 준 걸까? 그렇다면 회사는?’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다시 창구로 다가갔다. “아직 연락이 없는 건가요?” 일일이 찾아 대조하려면 쉽지 않을 거라고. 난감해했다. 그때 직원이 들고 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좀 보자고 건네받았다. 마트 이름과 일련번호, 날짜와 시간, 지출액이 표에 적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쓴 날짜도 금액도 달랐다. 누군가가 꾸준히 사용한 기록이었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어서 딸에게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엄마, 잘 봐요. 맨 위에 10,000원 × 10매잖아요? 엄마 것은 10만 원이고.” 아뿔사, 이럴 수가? 직원은 여태껏 만 원권으로 착각하고 조회에 열중(?)한 거다. 그제야 꽉 막혔던 물꼬가 터지는 기분이었다. 은행원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옆에 있던 팀장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신입이라 잘 모르고 큰 실수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신입'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런 실수는 처음이란다. 큰 수업료를 치렀다며 이해해 달라고 했다. 직원은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줄 몰라 손바닥만 비볐다.
생각해 보면 나는 처음 상품권을 건네면서도 정확하게 말했다. 통화 중에도 만 원이라 해서 10만 원이라고 바로잡았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직원 머릿속에는 만 원으로 입력되었나 보다. 무엇보다 실물이 버젓이 내 손에 있는데, 누군가 사용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냐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가. 내 말은 흘려듣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을 처리해서 이렇게 커진 것이다. 신입 직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팀장까지 함께 조회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금액을 살피지 않았다는 것이 황당하고 어이없긴 했다.
줄곧 지켜보던 손님과 다른 직원들도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계속 미안하다는데 더 무슨 말을 하기도 그랬다. 돌아보면 나도 그런 적이 많았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내 생각대로 짐작하고, 철석같이 믿었다가 낭패를 본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실수였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직원에게 전환권으로 등록해 달라고 휴대폰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열어서 처리해 주었다.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한 걸, 일이 꼬이는 바람에 반나절이 넘도록 애를 먹었다. 딸은 이 상황을 풍자하는 절묘한 이모티콘 하나를 보내왔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뜨거운 볕에 달궈진 차는 찜통이 되어 있었다.
한바탕 소동을 겪었지만, 상품권은 생각보다 편리하게 쓸 수 있었다. 온라인 장터에는 농부들의 손길로 정성껏 키운 신선한 농수산물이 많았다. 추석을 맞아 사돈과 언니, 동생 집에 우리 한우 한 세트씩을 선물로 보냈다.
그날의 경험은 나도 수업료를 많이 낸 거나 다름없다. 실수를 줄이려면, 사람의 말을 끝까지 잘 듣고 내가 옳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확신이 들더라도 꼭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짚어 확인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당연한 듯하면서도 막상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 들수록 더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