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관군의 추격
1894년 12월 24일 음성 되자니 전투를 끝으로 호서 동학농민군은 해산했다. 해월은 동학농민군을 해산시키면서 어려운 시국이지만 안전하게 피신했다가 후일을 기약하자고 당부했다. 호서 동학농민군들은 눈물을 머금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해산 후 해월의 곁에 남아 피난길을 함께한 인물들은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주요 두령들은 손병희(孫秉熙), 홍병기(洪秉箕), 이승우(李承祐), 최영팔(崔榮八), 임학선(林學善) 등이었다. 임실에서 북행을 시작했던 해월과 호서 동학농민군은 한때 1만여 명에 달했지만, 일본군과 관군과의 20여 차례 전투 끝에 수천의 희생을 내었고 결국 해월의 곁에는 수십 명만 남았다.
동학혁명이 좌절되고 전봉준 등 전라도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대부분이 체포됐지만 동학 교단의 최고책임자인 해월이 체포되지 않자 관군과 일본군은 해월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해월이 충청도 쪽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접한 관군과 일본군은 길목마다 병력을 배치하고 해월을 체포해 이 기회에 동학 교단을 뿌리 뽑으려 했다. 관군과 일본군의 감시망을 뚫고 지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장호원 방향에 일본군과 관군이 지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해월 일행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죽산(竹山)의 월정고개(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송천리)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월정고개를 지키고 있던 관군의 공격을 받고 해월 일행은 매우 급하게 사면팔방(四面八方)으로 흩어졌다. 해월과 손병희는 각기 다른 민가에 숨어 있다가 며칠 후에 극적으로 만났다. <천도교창건사>에는 이때 헤어진 해월과 손병희가 심고(心告)로 서로의 위치를 찾아 만났다는 이적(異蹟)을 기록하고 있다.
해월 힘든 도피 과정에서 병이 나
이렇게 극적으로 만난 해월과 손병희는 1895년 1월 4일 충주 외서촌 무극시(無極市)를 지나다가 일본군 가흥병참부에서 파견한 정찰대와 제16대대 이시모리(石林) 중대의 지대를 만나 수십 명이 희생당했다. 해월 일행은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충주 외서촌 황산리(충북 음성군 삼성면 능산1리)에 있던 이용구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이용구의 집에 이르자 해월은 그만 병이 나서 눕게 됐다. 해월은 12월 1일 임실에서 손병희와 함께 추운 날씨 속에서 소백산맥을 타고 20여 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며 한 달 이상을 걷는 고행을 이어나갔다. 젊은 사람들도 하기 힘든 행군을 하던 해월의 나이는 1895년을 맞아 69세가 됐다. 평생 도바리 생활을 한 튼튼한 몸이었지만 나이는 속일 수가 없었다. 노구를 이끌고 도피하던 해월도 체력의 한계에 부딪혀 병이 나고 말았다.
황산리로 수십 명의 외부인이 마을에 들어와 오랜 기간 머물 수 없었다. 곳곳에 있는 관군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해월 일행은 잠시 숨을 돌리고 한밤중에 다시 마을을 빠져나가야 했다. 몸져누운 해월을 손병희 등 제자들이 교대로 업고 음성 마이산(馬耳山)으로 피신했다. 마이산에서 하룻밤을 보낸 해월 일행은 이목정(梨木亭,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이황리)에 있는 손병희의 동생 병흠의 집으로 잠입했다. 당시 손병흠도 병이 나서 누워있었는데 집으로 찾아온 스승 해월을 뵙자 “내 비록 병이 심하지만, 스승님과 함께 가겠다”라고 함께 길을 나섰다. 손병흠의 집에서 여독을 풀고 해월 일행은 장호원 북쪽의 풍계리와 점동면을 지나 오갑산을 끼고 남한강을 건너 강원도로 향했다. 해월은 손병희 등의 부축을 받으며 힘들게 경기도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남한강을 건너 강원도 원주 부론면의 노림점에 도착할 때까지는 관군의 추격을 받지 않아 그나마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림점에 이르자 관군의 대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 음성 마이산. 해월이 되자니 전투에서 호서 동학농민군을 해산하고 피신 중 1895년 1월 초 이용구의 집에 숨어들었으나 관군의 추격으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급히 이곳 음성의 마이산으로 피신해 하룻밤을 산중에서 보냈다. 해월은 이곳에서 관군의 추격을 벗어나 이목정에 있는 손병희의 동생 손병흠의 집으로 향했다. |
손병희의 대담한 도피법으로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일이 쉽지 않자 손병희는 기발하고 대담한 방법을 동원했다. 노림점에 도착하니 관군이 행인들을 엄밀히 수색하고 있었다. 수색하는 관군을 보고 되돌아갈 수도 없게 되자 일단 해월과 일행을 큼직한 객점에 유숙케 하고 기지를 발휘했다. <천도교창건사>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사(聖師, 손병희)가 홀로 대로상에 천연히 배회하다가 관군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어디 병정이며 무슨 일로 이곳에 주둔하였느냐?” 한대 병정이 의심치 아니하고 대답하되 “우리는 동학당(東學黨)을 체포하려고 온 경병(京兵)이로소이다.” 하거늘, 성사가 노기를 띠며 가로되 “내 또한 동학군이거늘 너의 무리가 알지 못하니 국록(國祿)을 공식(空食) 하는 자로다”하고 주의(周衣)의 궁을장(弓乙章)을 보이니 관군이 흠신(欠身) 하며 가로되 “소인등(小人等)인들 어찌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없사오리까? 대관인(大官人)은 소인배를 희롱하시도다.”하고 암행 검찰사가 모 객점에 내임(內臨)하였거니 누구든지 그 문전에 가 배회하지 말라.
손병희의 대담하고도 기발한 발상으로 해월 일행은 마치 호랑이굴을 빠져나오듯이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지나갔다. 손병희는 자신이 암행 검찰사인 것처럼 꾸며서 관군들의 눈을 피하고 무사히 노림점을 통과했다. 해월 일행은 원주를 거쳐 횡성을 지나 홍천으로 빠져나갔다.
탈출의 성공과 가족의 고초
홍천의 고대(高垈, 홍천읍 삼마치리)에서 며칠 머물렀던 해월은 인제 남면 느릅정[유목정, 柳木亭]에 있는 동학도 최영서(崔永瑞)의 집으로 숨어들어 뒷방으로 숨어들었다. 해월은 태백산 중인 인제로 숨어듦으로써 기나긴 탈출에 성공했다. 느릅정은 인제현청과는 약 18km 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느릅정은 해월이 1880년 <동경대전>을 간행한 갑둔리와는 고개 하나를 넘으면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해월을 위시한 동학 지도부가 인제를 찾은 이유는 인제 지역이 깊은 심산유곡이어서 피신하기도 좋았지만, 인제의 동학도인들이 동학혁명 당시 기포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동학에 대한 지목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원도 인제는 해월이 1870년대 중반부터 드나들던 곳이었고 특히 관의 지목이 심하면 찾아드는 곳이었다. 언제나 해월이 안심하고 숨을 수 있는 곳은 강원도의 인제였다.
해월이 최영서의 집에 도착한 때가 1895년 1월 하순이었다. 1894년 12월 1일 임실 갈담에서 북행을 시작한 지 약 두 달간의 고난의 행군 끝에 해월은 관군과 일본군으로부터의 추격을 뿌리치고 탈출에 성공했다. 해월은 수많은 위기를 헤쳐가며 동학 교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해월의 가족은 심한 고초를 당했다. 해월의 부인과 자식은 청산에서 붙잡혀 충청도의 12개 고을을 돌며 수모를 당했다. 또 해월의 은거지를 대라는 고문을 받아 다리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해월의 딸들은 아전들에게 끌려가다시피 시집을 보내야 했다.
▲ 홍천의 높은 터. 해월이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숨어든 곳으로 홍천군 홍천읍 삼마치리 오음산 중턱의 해발 6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해월은 원주의 노림점을 지나 횡성을 거쳐 이곳 홍천의 높은 터로 숨어들었다. 해월은 이곳에 당도해 관군의 추격을 벗어났다. |
▲ 인제 느릅정. 해월이 동학혁명의 긴 도피를 끝내고 강원도 인제까지 탈출해서 은거했던 강원도 인제 남면 느릅정 최영서의 집은 신남휴게소 뒤에 있었다. 느릅정은 <동경대전>을 간행한 갑둔리와는 고개 하나만 넘으면 있는 가까운 곳이다. 현재 최영서의 집은 흔적이 없다. |
전봉준·손화중·최경선·성두한 등 동학혁명 지도자 참형
해월은 최영서의 집 뒷방에서 조용히 봄을 맞이했다. 동학혁명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제자를 위해 해월은 끊임없이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무너진 교단을 추스르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해월은 동학혁명으로 인해 교단이 이전에 당해보지 못한 어려움에 부닥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자(君子)가 환난(患難)에 처하면 환난대로 함이 그 도(道)요, 곤궁(困窮)에 처하면 곤궁대로 함이 그 도니, 우리들이 큰 환난을 지내고 큰 화(禍)를 겪은 오늘이라, 마땅히 다시 새로운 도로써 천리(天理)의 변화에 순응할 따름이니라.
해월은 동학혁명으로 인해 교단이 무너지고 교인이 흩어지는 어려움을 당했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어려움을 잘 극복해 다음을 준비하자는 의미로 제자들을 타일렀다. 해월이 이렇게 어려운 과정에서 교단을 수습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전봉준 등 동학혁명의 지도자들이 처형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봉준은 12월 2일 순창 피로리에서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돼 12월 7일 일본군에 인도됐다. 생포 당시 상처를 입었던 전봉준은 나주에 있던 후비보병제19대대의 미나미 코지로에게 넘겨져 치료와 함께 심문을 받았다. 최경선은 전봉준의 체포 소식을 듣고 귀화의 뜻을 밝힌 뒤 3일 체포됐다. 손화중도 12월 11일 고창에서 체포됐다. 김덕명은 이듬해인 1895년 태인에서 체포돼 전주로 이송됐다. 김개남은 12월 1일 동학혁명 지도자 가운데 가장 먼저 체포돼 신임 전라도관찰사인 이도재(李道宰)에 의해 전주 초록바위에서 효수형을 당했다.
김개남을 제외하고 체포된 동학혁명 지도자는 모두 서울로 압송돼 재판에 넘겨졌다. 전봉준은 다섯 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일본 영사는 전봉준에게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끈질기게 물었지만, 전봉준은 관련이 없다고 끝까지 부정했다. 전봉준은 판사의 회유와 협박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너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가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 잡으려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이지 다른 말을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을지언정 적의 법의 적용을 받지는 않으리라.
이러한 의지는 다른 동학혁명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전봉준을 치료하던 일본인들도 전봉준을 회유했지만, 전봉준은 “내 구구히 생명을 위하여 활로를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라고 뿌리쳤다. <대전회통> 형전에 따라 전봉준·손화중·최경선·성두한·김덕명 등 동학혁명 주모자들은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에 처했다. 전봉준은 교수대에서 ‘운명(殞命)’이라는 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때 만나서 천지가 내 편이더니(時來天地皆同力)
운 다 하니 영웅도 할 수 없구나(運去英雄不自謨)
백성 사랑 올바른 길이 무슨 잘못이더냐(愛民正義我無失)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爲國丹心誰有知)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