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101)
2부(51)
남아하처 불상봉 (男兒何處 不相逢)
남자(男子)가 사노라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 -
김삿갓은 감자를 먹어가며,
주인(主人)에게 이런 말도 물어보았다.
"이 깊은 산중(山中)에서 날마다 숯만
구우며 살아가려면, 때로는 외로움도
느끼시겠구려."
지환(志煥)은 당치 않은 소리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을 했다.
"산에는 산짐승 친구(親舊)들도 많은 데다,
숯을 굽기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구워내는 숯이 많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비록 힘이
드는 일이기는 해도 여간 기쁘지 않은걸요."
김삿갓은 숯을 굽는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자신(自身)이 하는 일에 나름의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즐겁게 해나가는
지환(志煥)의 생활상(生活相)을 듣자,
자기(自己) 일에 아무런 사명감(使命感)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의무적
(義務的)으로 살아가는 자신(自身)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 비하면 지환(志煥)은
스스로 만든 천국(天國)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자리 움막은 천정(天井)이
너무 낮아 김삿갓은 무심코 일어서다가
천정(天井)에 이마를 쪼아 붙였다.
"아 얏!"
(하늘은 한없이 높은데, 이 집,
천정(天井)은 왜 이다지도 얕은고!)
김삿갓은 이마를 쓸며
자신(自身)도 모르게 익살을 부렸다.
불편(不便)한 것은 천정(天井)만이 아니었다.
콧구멍 크기의 좁은 방에서 세 사람이 함께
자려니까, 아무리 가로세로 누워도 다리를
펴기에 여간 불편(不便)하지 않았다.
"방이 워낙 비좁아 불편(不便)하시겠지만,
하룻밤 참고 지냅시다. 지내 놓고 나면
이런 일도 좋은 추억(追憶)이 될 것이오."
주인(主人)은 워낙 낙천가(樂天家)인지라,
모든 일을 좋게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상문(梁想文)은
김삿갓에게 미안스러운지,
"선생(先生)을 편히 모시지 못해
죄송(罪悚)합니다." 고 말을 했다.
"아무리 불편(不便)하기로
토굴(土窟)보다야 낫지 않겠소이까?"
김삿갓은 짐짓 익살을 부려 보였다.
주인(主人)과 양상문(梁想文)은 눕기가
무섭게 코를 요란(搖亂)스럽게 골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오금을 못 편 채
좀처럼 잠이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잠이 살짝 들었다가 깨었는데
다시는 잠이 오지 않아,
잠들기를 단념(斷念)하고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뒷산에
올라오니 조그만 정자(亭子)가 하나 있었다.
정자에 올라앉아 산 아래 어둠 속의 수풀과
이를 환히 비추는 달구경을 하는데
배 안의 창자는 주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김삿갓, 빙그레 미소(微笑)를 머금으며
즉흥시(卽興詩) 한 수를 읊었다.
천고만리 불거두 (天高萬里 不擧頭)
하늘은 높아서 만 리건만
머리를 들 수 없고
지택천리 불선족 (地澤千里 不宣足)
땅은 천 리로 넓건만
다리를 펼 수 없네.
오경등루 비완월 (五更登樓 非翫月)
오밤중에 다락에 오른 것은
달구경 때문은 아니오
삼조피곡 불구선 (三朝避穀 不求仙)
사흘을 굶은 것은
신선이 되려 함도 아니다.
다음 날 아침,
오지환(吳志煥)은 마당에 숯불을 피워 놓고
토끼 불고기를 구워 주는 것이다.
김삿갓이 토끼 고기를 먹어 보기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토끼 고기는 노린내가 난다는 말을 들었는데,
불에 구워 먹어 그런지
쇠고기와 다름이 없구려."
양상문(梁想文)은 고기를 맛있게 먹어가며,
"저 역시 토끼 고기는
처음 먹어 보는데 맛이 괜찮습니다.
여보게, 지환(志煥)이!
이런 때에는 술이 있어야 할 것인데,
어디서 술 좀 구해 올 수 없을까?"
"원, 형님 두!
이런 심심(深深) 산중(山中)에서
술을 어디서 구해오란 말입니까?“
오지환(吳志煥)은 양상문(梁想文)에게
넌지시 구박(驅迫)을 주다가,
별안간(瞥眼間) 무엇이 생각난 듯,
무릎을 탁하고 쳤다.
"아 참! 술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납니다.
나는 워낙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에는 관심이 없는데,
그러나 한 5년 전쯤인가? 산 머루
한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둔 게 있어요.
지금쯤은 술이 되었을 것 같으니
갖다 먹기로 합시다."
"이 사람아! 그런 게 있으면
진작 가져올 일이지 왜 잠자코 있었는가?“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니,
까맣게 잊고 있었지요."
김삿갓은 5년 동안이나
땅속에 묻어 두었다는 머루술이라는
말을 듣자,
대뜸 입에 군침이 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오지환(吳志煥)이 가져온
머루주의 맛은 기가 막히게
향기(香氣)로웠다.
양상문(梁想文)도 술을 마셔 보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김삿갓에게 묻는다.
"선생(先生)! 나는 이렇게 좋은 술을 마셔
보기는 50 평생(平生) 오늘이 처음입니다.
선생(先生) 입에는 어떻습니까?"
"내 입이라고 노형(老兄)의 입과 다를 것이
있겠소? 이 술을 마시니,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 오는 것만 같구려."
오지환(吳志煥)은 그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하였다.
"5년 전에 장난삼아 땅속에 묻어 두었던
머루가 오늘날 두 분을 그렇게도 즐겁게
해 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본디 좋은 술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오.
그러기에 옛날부터,
寬心應是酒 (관심응시주)
마음을 너그럽게 해 주는 데는
술이 제일이요.
遺興莫過詩 (유흥막과시)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데는 시보다
더 좋은 게 없다.고 했다오."
"그거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흘이든 나흘이든 이 술이
바닥이 날 때까지 우리 집에 그냥
머물러 계십시오.
술안주는 노루 고기든 꿩고기든 입맛대로
공급(供給)해 드리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흥이 절로 돋는 소리다.
"선생(先生)! 이 좋은 술을
그냥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양상문(梁想文)조차 보채는 바람에
김삿갓은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좋은 대로 합시다. 그려.
나는 워낙 오라는 데가 없는 몸이니
뭐가 급해서 떠나겠소이까?"
김삿갓과 양상문(梁想文)은 오지환
(吳志煥)네 움막에서 사흘 밤을 더 묵다가,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술이 아직도 더 남아 있으니까.
아예 바닥을 내고 떠나도록 하시죠.“
오지환(吳志煥)은 헤어지기가 아쉬워
호소(呼訴)하듯 만류(挽留)하였다.
그러자 양상문(梁想文)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사람아! 밑술을 조금 남겨 두어야지
우리가 또 오게 될 게 아닌가."
김삿갓도 웃으며 말했다.
"술이 아무리 좋기로
형공(兄公)의 우정(友情)만이야 하겠소이까,
하룻밤 자고 떠나려던 노릇이 나흘이나
묵은 것은 형공(兄公)의 정성(精誠)이
너무도 고마웠기 때문이었소."
그것은 사실(事實)이었다.
술이 좋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였고,
사흘 동안이나 묵은 것은
지환(志煥)이라는 산사람(山人)의
우정(友情)을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고,
뿌리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지환(吳志煥)도 무언가
느껴지는 점이 있는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굳이 떠나신다면 억지로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돌아오는 가을부터는 해마다 머루주를
잔뜩 담아 놓고,두 분이
다시 찾아와 주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그야말로 진심(眞心)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운 우정(友情)이었다.
이별(離別)이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다.
세 사람이 삼거리에서 뿔뿔이 헤어지게 되자,
양상문(梁想文)은 김삿갓의 옷소매를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헤어지면,
선생(先生)을 어느 세월(歲月)에나
또 만나 뵙게 되겠습니까?"
김삿갓은 가슴이 뭉클해 오는
감동(感動)이 밀려 왔지만,
말만은 예사롭지 않게 답했다.
"남아하처 불상봉 (男兒何處
不相逢)이라는
옛말이 있지 않소? 오래 사노라면 어디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설사 못 만나는
한이 있어도, 노형(老兄)이 베풀어 주신
엽전 한 닢만은 죽는 날까지
신주(神主)처럼
품에 지니고 살아가겠소이다."
"....................."
양상문(梁想文)은 대답(對答)하지 못하고,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멀리 사라지는
김삿갓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지환(吳志煥)과 함께
그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