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大 소환」후기
– 울산 ‘대왕암’
세상이 참 편해졌다!
예전에 단독주택에 거주할 때, 학창 시절의 추억이 담긴 ‘앨범’과 내 글이 탑재된 ‘책’ 등을 다락방에 보관을 했었다.
어느 해 여름 긴 장마가 시작되었다.
장마가 끝난 후 다락을 정리하다가 보니 비가 세는 바람에 앨범과 책이 훼손되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훼손 없이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때마침 ‘컴퓨터’라는 좋은 기기가 유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녀석을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론 시간이 날 때마다 그 녀석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
‘컴퓨터’라는 좋은 기록장치가 있으니 이제는 언제든지 필요하면 추억을 소환할 수가 있다.
우리 까페 [인생이야기]코너 36번에서 [추억 大 소환]을 하고 나니 뭔가 홀가분한 느낌이다.
특히 고교동기들이 참여하는 단체 방에서 소환에 응한 친구들의 반응이 참으로 고맙다.
잠시나마 고교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그래서 그때의 그 기분을 다시 느끼기 위하여 잠시 동안 추억을 다시 소환한다.
☞ [추억의 '서울역']
70년대 초반 나는 처음으로 [서울역]을 보았다.
당시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예비고사]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하였다.
내가 다니던 농업계고등학교에서는 영어와 수학에서 많은 애로 사항이 있었다.
그래서 부족한 실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방학을 이용하여 서울에 있는 학원에 다니기 위하여 상경을 했다.
촌놈이 처음 보는 서울역은 대단하였다.
정신없이 구경에 열중인 그때 어느 서울 총각 앞으로
경상도 말을 하는 아가씨 두 명이 얘기에 열중하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장난 끼가 발동한 그 청년
"어서 옵쇼!"
하고 갑자기 큰소리로 호객행위를 하였다.
그러자 깜짝 놀란 그 아가씨들
"아이고 식겁이야!"
하면서 줄행랑을 쳤다.
"식겁이 무슨 말이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서울청년이 생각난다.
☞ "안내양 떨어져요. 안으로 좀 들어갑시다! “
대학시절 어느 날 대구시내 '원대(북부)주차장'에서 대명동 '교대' 앞으로 가는 50번 시내버스에서 경험한 일이다.
시골에 갔다가 대구에 와서 학교 부근 자취방까지 가려면 이 버스를 타야 했다.
머리가 더부룩한 청년이 버스에 올라탔다.
겉모습은 분명히 일반인인데 '학생용 회수권'을 내어 밀었다.
"학생이 아니면서 이 회수권을 내면 안 됩니다. 일반인 요금을 빨리 내세요!"
하고 안내양이 얘기를 했다.
"나는 분명히 학생입니다. 그러니 일반 요금을 낼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그 청년과 안내양이 시비가 붙었다.
말싸움이 길어지자 그 안내양 왈
"그러면 학생증을 한번 봅시다!"
라고 했다.
'이젠 싸움이 끝이 나는 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그러면 안내양증도 한번 봅시다."
라고 받아친다.
당시의 안내양들은 제복에 모자를 쓰고 있어서 누가 봐도 한눈에 표시가 나는 차림이었다.
흥미롭게 말싸움을 지켜보는 순간 내가 내릴 정거장이 다가 와서 나는 내리고 말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 [추억 大 소환]에 대한 댓글
올려 진 내 글을 보고 친구가 고교동기회 톡방에 올린 댓글이다.
와?
이 사진 아직까지 ~~
세 번째가 창수아이가?
예나 지금이나 친구는 변함이 없네.ㅋㅋ
친구는 항상 앞에서 일등 난 뒤에서 일등,
“됏나?”
“됐다!”
이 두 마디면 앞 뒤 생각 없이 행동했던 어울리지 않은 추억 많은 소싯적~
“근데 방학 때 꼴 비고 소 먹이기 싫어서 부산에 도망가서 ‘용두산 공원’ 밑에 밤이면 괴 소리 들리는 여인숙 방에서 둘이 한 달간 라면으로 인생 공부했던 추억은 왜 소환 안 하노ㅎㅎㅎ”
그래서 추가로 그 추억도 소환하였다.
☞ ‘용두산 공원’에서의 추억 소환
- 1972년 여름 '용두산 공원'에서 -
사진은 박 군이 얘기하던 1972년 무렵의 부산 [용두산 공원]이다.
50여년이 지난 오늘에야 박 군이 부산 타령을 했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꼴 비고 소 먹이기 싫어서 부산에 도망가서.......’
라고 했는데 당시에 내게 얘기하기론
“자신감을 기르기 위해서 방학을 이용하여 웅변학원에 다녀야 겠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함께 동참하기를 권유했었는데 나는 부모님께
“대학에 진학하려면 부족한 ‘영어’와 ‘수학’을 더 공부하기 위하여 학원에 다녀야 한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
공부를 하려는 나의 뜻을 부모님은 웬만하면 허락을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〇야!
웅변학원에 가야 한다더니 사실은 소 꼴 베기 싫고 소 먹이기 싫어서 부산에 가자고 했구나!
ㅋㅋㅋ
끝까지 비밀을 지켜주마!
하기사 이젠 거짓말이 탄로 나도 꾸중할 어른도 안 계시지…….”
- 사진 뒤에 보이는 섬이 해운대 '동백섬'이다. -
그 무렵 우리들은 좁은 여인숙 방에서 라면만 한 달을 끓여 먹고 보냈다.
지루하기도 하고 촌놈들이 부산에 온 김에 바람이나 쐬자면서 [해운대 해수욕장]을 찾은 모습이다.
부산을 찾은 우리들은 [용두산 공원] 자락에 위치한 [대청여인숙]에 거처를 정했다.
가진 돈이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여인숙 부엌에 있는 석유곤로를 이용하여 양은냄비에 라면으로 식사를 해결하였다.
라면 한 박스를 사 두어도 금방 동이 났다.
삼시 세끼를 라면으로만 해결했기 때문이다.
김치도 없이 라면만 먹다 보니 나중에는 라면이 쳐다보기도 싫었다.
김치를 집에서 가져가는 것은 상상도 못할 시절이었다.
가져가 봐야 ‘냉장고’도 없는 한 여름에 보관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져온 돈이 달막달막 하고 보니 식당을 찾는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8월 한여름 밤은 무척 더웠다.
선풍기도 없는 좁은 여인숙 방은 견디기가 엄청 힘이 들었다.
그래서 밤이면 가지고 간 소형라디오를 들고 우리는 여인숙과 접해있는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가끔씩 바람이 불어와서 집 보다는 견디기가 훨씬 좋았다.
자정이 되어 가자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었다. 이젠 그만 들어가자!”
하고 친구가 말했다.
“알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조금만 더 있다가 갈께!”
하고는 빈 의자가 보이자 그곳에서 잠시 누워 하늘에 별을 보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친구는 들어가고 나 혼자였다.
단잠을 자는 그 순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순찰을 돌던 방범대원들이었다.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공원벤치에서 잠이 든 수상한 놈이라서 대청파출소로 연행이 되었다.
[학생증]을 제시하고 방학이라서 공부를 하기 위하여 시골에서 왔다고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 한 후에 풀려난 일이 있었다.
박 군이 얘기한
[밤이면 괴 소리 들리는 여인숙 방]의 실체
공원 길목에 위치한 여인숙이다 보니 데이트 족들이 필요에 의해서 여인숙을 찾는 일이 많았다.
요즘 같으면 [시간제 대실]을 많이 찾겠지만 당시만 해도 공원에서 가까운 여인숙을 찾아서 서로를 즐기는 일이 자주 있었다.
고등학생인 우리가 처음부터 그러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설사 알았더라도 가진 돈이 넉넉하지 않으니 방값이 싼 그 여인숙의 유혹에서 벗어날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여인숙’보다는 한 단계 위인 ‘여관’에서 지낼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원하지 않게 밤마다 요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참으로 아득한 옛날 일이다!
☞ 반가운 만남
♥ 때 : 2021년 11월 28일(일)
♥ 곳 : 울산 [대왕암]
「추억대소환」이 계기가 되어 고교 동기회장인 김 군, ‘용두산 공원’을 함께 체험한 죽마고우 박 군과 울산에서 만났다.
코로나가 계속 기세를 부려서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조금 잠잠해졌다.
용기를 내어 우리 셋은 만났다.
‘대왕암’ 출렁다리를 비롯하여 울산의 멋진 풍광을 구경하였다.
푸른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가 보이는 멋진 식당에서 ‘방어회’를 안주삼아 참으로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래서 오랜 친구는 좋은가보다.
몇 십 년 만에 만나도 함께 하는 화제가 공통적이고 전혀 어색함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했던 좋은 시간들을 오래 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바다를 바라보며 즉석 공연을 한 영상도 함께 공유합니다.
-기차소리와 함께
‘돌아와요 부산항에’-
첫댓글 송이골님은 여행한곳을 생생하게 표현해서 기록으로 남겨두셔서
두고두고 좋은 추억이 되겠습니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추억을 먹고 그 시절을 되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