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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85
10월17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28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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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흙 부스러기 같은 우리 본래의 모습>
언젠가 제가 화가 단단히 난적이 있었습니다. 과속이나 신호위반으로 날아오는 ‘딱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접촉사고도 잦았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공동체 형제들을 모아놓고 장시간에 걸쳐 일장훈시를 늘어놓았습니다.
“형제 여러분들, 이거 너무 한 것 아닙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돈 버는 사람들도 아니고. 부탁드립니다. 어디 가실 때는 미리미리 여유 있게 출발하셔서 규정 속도 좀 지켜주시고, 제발 좀 안전운전,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한 그 다음날 새벽이었습니다. ‘아차!’ 하고 일어난 순간, 수녀원 새벽미사 가기로 한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이미 시간이 빠듯했습니다.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벼락같이 시동을 걸었습니다.
수도원 정문을 나서면서 어쩔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며 불법 좌회전을 하였는데, 갑자기 끼어든 제 차 때문에 직전해 오던 차의 운전자가 미처 브레이크를 밟지 못해 꽤 큰 접촉사고가 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충돌하는 순간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위에서 청소하던 아이들이 다들 창문가에 붙어 서서 제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한 며칠 계속된 복음 내용들이 당대 내로라는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한 질타입니다.
예수님 질책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삶 안에 고착되었던 언행의 불일치였습니다. 지나친 완벽주의였습니다. 별것도 없으면서 지니고 있었던 우월감이었습니다. 까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선민의식이었습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누구라도 당신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나약합니다. 부족합니다. 유한합니다. 하느님 앞에 모두 다 죄인입니다.
지금은 젊다고, 건강하다고, 잘 나간다고 떵떵거리며 살아가지만,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간 존재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서서히 쇠락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흙 부스러기 같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부족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안고가야 하는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삶의 어두운 측면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런 측면의 사유가 부족했습니다.
대체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분들, 남들이 부러워 할 만큼 인생이 잘 풀리고 있는 분들 가운데서도 늘 얼굴이 어두운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나, 알아보니 웃겼습니다. 100가지는 잘 풀리고 있는데, 1~2가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만족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완벽할 수 없습니다. 단 한 가지의 문제도 없이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죄인 신분으로도, 실수를 연발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완벽주의는 사람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본인도 괴롭지만, 주변 사람들은 더 괴롭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마저도 힘들게 해드리게 됩니다.
많이 내려놓으시고, 많이 포기하시면서 편안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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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를 계시한다>
미국의 링컨대통령과 케네디대통령은 놀라운 운명의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고 독일 일간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가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16대 링컨은 노예해방, 35대 케네디는 뉴프런티어 정신으로 존경받았지만 암살로 생을 마쳤다.”며 “두 사람간의 공통점들이 전율감마저 들게 한다.”고 전했습니다.
‘링컨-케네디 커넥션’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링컨은 1846년, 케네디는 1946년 국회의원에 선출됐으며, 링컨은 1860년, 케네디는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링컨(Lincoln)과 케네디(kennedy)라는 이름은 모두 알파벳 7자이다.
▶링컨의 여비서 이름은 케네디였고, 케네디의 여비서는 링컨이었다.
▶둘 다 금요일에, 머리에 총알을 맞고 암살됐다.
▶암살범들과 후임 대통령들은 모두 남부 출신이며, 후임 대통령의 이름은 존슨이었다.
▶링컨의 뒤를 이은 앤드루 존슨은 1808년, 케네디에 이어 취임한 린든 존슨은 1908년 태어났다.
▶링컨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는 1839년, 케네디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는 1939년 태어났으며 이름의 알파벳은 모두 15자이다.
▶부스는 범행후 극장에서 창고로, 오스왈드는 창고에서 극장으로 도망쳤으며 모두 법원판결전 피살됐다.
▶링컨은 암살 1주일 전 메릴랜드주 먼로시에 있었고 케네디는 암살 1주일 전 마릴린 먼로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도 누군가를 따라하며 계시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 삶이 누군가의 삶의 반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 사귈 때는 본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하여 편안하게 되면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본모습이 바로 자신들의 부모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의 말투로 말하고 남자는 자신 아버지의 모습대로 응대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내 안의 누군가가 나를 통해 살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보통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닮습니다. 그렇다고 꼭 사랑해서 닮지만은 않습니다. 미워해도 닮습니다.
양심은 사랑하기 때문에 닮게 만드는 기관이고 자아는 미워하기 때문에 닮게 만드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양심이 발동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투영되어 나타나고 자아가 발동하면 자신이 미워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나오게 됩니다.
물론 미워하는 사람과 반대로 살겠다고 결심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은 다 안 좋습니다. 그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도 미워하는 사람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림은 거꾸로 그려져도 대상은 그대로입니다. 어쨌거나 사람은 좋은 모습, 안 좋은 모습을 본받아 그대로 투영시키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그대로 계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죽였고 박해하였습니다.
겉으로는 그들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참배하지만 속은 그 조상들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다 누군가로부터 배워 그대로 동조하여 드러내는 계시이자 증언입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의 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중에서 좋은 모습만을 되풀이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탄을 계시하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계시합니다. 사탄을 계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의 욕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양심을 믿으면 하느님의 계시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양심을 일깨우러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대신 살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계시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동조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어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합시다.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를 동조하고 계시합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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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1,47-54: 모든 예언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그들의 조상들을 단죄했지만, 비슷한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불의를 저지른 조상들의 자손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행실을 본받은 것이 죄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조상들보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그들의 악함을 씻을 수는 없다.
하느님을 폭행하는 것보다 더 악한 죄는 없으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32)라고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바른 길을 제시한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제 그 후손들은 이 예언자들을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임을 알았고 그에 맞는 영예를 바치고자 무덤을 만들어 그들을 죽인 조상들을 단죄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 선조들을 살인자로 단죄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생명의 주관자, 세상의 구세주를 죽였다. 그들은 그분께 저지른 악에다 또 다른 살인까지 한다. 나쁜 짓이라고는 한 적도 없고 다만 성경 말씀으로 자기들을 권면한 스테파노를 죽였다. 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모두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할 것이다.”(50절) 이것은 그들이 의인의 죽음을 되갚아 주시는 분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마태 23,35)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런 일은 그때까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말씀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62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안에서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며, 생명의 문이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문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못 가게 한 것이다.
이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도 외적인 형식이나 규례에 매달려 그 근본 뜻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록 피는 흘리지 않는다 해도 힘없고 약한 이웃을 헐뜯거나 정신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지? 매일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비아냥거리며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지나 않은지?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지나 않는지 반성하여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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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과 기념물을 건축하면서, 마치 자신들은 그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처럼 보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예언자가 오시리라 예언한 분이시며, 스스로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고, 그래서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그릇된 인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자신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마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율법을 충실히 지키려 하였고, 특히 율법 교사들은 율법을 공부해서 전문가 수준에 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이런 오류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하여 잘 안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늘 신앙의 기본 정신을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신앙인을 개별적인 인격체로 바라보기보다는 교회를 대표하여 신앙을 보여 주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강변하기보다는 우리 각자가 믿는 신앙과 몸담고 있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처신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혹여 우리의 행실이나 태도가 사람들을 잘못된 인식으로 이끈다면, 우리 또한 주님의 이런 꾸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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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 11,47-48)
이 말씀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일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면서 예언자들을 공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활은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과 다르지 않은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후손들이 만든다는 말씀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일을 통해서 자기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뜻인데, 이 말씀에는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이나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 후손들이나 똑같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순교자들을 본받겠다면서 성지순례를 가지만, 그 모습을 보면, 세속 사람들의 속된 관광여행과 다르지 않은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성지로 놀러가는 것과 성지순례는 분명히 다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갈 때는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면서 갔다가, 돌아올 때는 성지순례를 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성지에서 바쳤던 기도들도 잊어버리고, 세속적으로 놀고 즐기기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식의 성지순례는 성지순례가 아니라 죄를 짓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새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세례명을 정합니다. 세례명은 성인의 이름으로 정하는데, 그 성인을 자기의 주보성인으로 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 그 성인을 본받아서 자기도 그렇게 살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성인이 어떤 분인지는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만 정하는 것은 정말로 쓸데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주보성인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다면, 그 성인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받기는커녕 계속 잊어버리고 산다면, 세례명을 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운전석 앞에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붙여 놓고, 또 묵주도 걸어놓은 자동차를 자주 봅니다. 교통사고가 안 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붙여 놓고, 또 묵주를 걸어놓았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모범적으로 교통법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모시고 운전을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교통법규도 안 지키고, 난폭 운전, 음주 운전, 신호 위반을 하면서도 차에 십자고상과 성모상과 묵주가 있으니 사고가 안 나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냥 미신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새로 산 자동차의 축복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식을 했으니 사고가 안 나겠지.”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미신일 뿐입니다. (사실 신앙과 미신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축복식을 한 자동차니까 더 조심해서 운전해야지.”가 올바른 태도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이 말씀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도와주기는커녕 방해만 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구원의 진리’를 뜻하고, ‘지식의 열쇠’는 하느님 나라의 열쇠입니다. 그 열쇠를 치워 버렸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사람들을 막고 있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성경 해석, 잘못된 교리 해석, 잘못된 신학 이론과 승인받지 못한 사적 계시 등은 모두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는 일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사이비 종교 같은 다른 종교나 다른 종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 내부의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잘못된 성경 해석과 교리 해석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잘못된 신학 이론과 승인받지 못한 사적 계시 등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은 실제로 많습니다.
여기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라는 말씀에는, 몰라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안 들어간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지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삶’도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본당의 사제나 수도자 때문에 냉담자가 되는 경우를 보면, 그 사제나 수도자의 ‘잘못된 지식’보다는 ‘잘못된 언행’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잘못된 삶’ 때문에 실망해서 냉담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성직자, 수도자답지 않게 사는 사제, 수도자들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안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도 막아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하느님 나라에 안 들어가는 것도 죄를 짓는 일이지만, 남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은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50)
여기서 ‘이 세대’ 라는 말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한다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의 주 임무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고,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의 핵심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는 것은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는 일이고, 그것은 그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한 자들 편에 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다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든 누구든지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 때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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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재건축>
우리는 헌집은 두꺼비에게 주고 새집을 지어 새 정신, 새 마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멘트으로 지은 집은 40년을 지탱 못하고 허물어져 새로 지어야하고 문화적, 삶의 편리를 따라 살면 엣 날에 지은 집은 불편하여 집안 내부를 고쳐야 합니다. 수도원도 사방에 하자가 생겨 이곳을 고치고 저 곳 수리하여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조직도 시대에 부응한 형태를 새로운 형태로 바꾸지 않으면 불편하고 인간조건을 보다 좋게 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위를 재건축하려 공산주의가 생기고 공산주의가 불합리하여 민주주의가 생겨 재건축을 할려고 하지만 또 다른 결함이 생겨 모두가 잘 살기 위하여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형태를 원합니다.
오래된 건물을 새 건물로 바꾸듯이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관리자나 지도자는 새로운 인물로 바꾸어야 합니다. 교회는 본당 신부를 한 곳에 오래 있게 하지 않고 3년 5년 인사이동을 하는 이유는 본당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요사이 교회 안에 문제가 된 희망 원은 시작은 참으로 좋은 뜻으로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려고 대구교구에서 전 신자가 후원회를 조직하여 후원금으로 유지하고 그곳에 관계하는 사람은 봉사적이고 그리스도적 마음으로 일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저곳에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 마침내 재건축을 해야 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잘못된 관례를 고치고 사업체에서 이익을 보려하지 말고 그런 관례가 발생하면 새 것으로 변화 시킬 가난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것을 찾아 잘못한 사람은 진정으로 사과하고 더 잘하겠다는 결심하고 능력이 부족하면 더 양심적 단체에 넘기고 떠나야 하지만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다 하듯이 고쳐쓰고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 관리해야 합니다.
개인도 자기 안에 머물러 변화 없이 살았으면 변화 되어야 합니다. 돌같은 마음을 살 같은 마음으로 바꾸고 매일 새날을 맞이하듯 새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인격의 일부가 망가져 가고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회두의 길을 알려주시고 회두하는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당에서 기도하실 때 “ 허물어지는 내 집을 고쳐다오.” 이 말을 듣고 집에 옷감을 성당에 던져 넣고 이것으로 수리 하세요 하였다는 말이 아닌 것을 알고 허물어 가는 교회를 다시 재건축하라는 명령을 따르려고 새 수도회를 새워, 12세기 성인을 통하여 교회는 새롭게 변화 되였습니다.
오늘도 새롭게 가난한 마음으로 교회가 재건축될 시간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새로운 교회로 변화되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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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최영균 그레고리오 신부님]
<세탁소 간판>
200년 전 덴마크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에 대해 무척 목말라했고 그 답을 구하고자 신학교에 갔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이런저런 하느님과 세상의 진리라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의 마음의 샘은 여전히 말라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은 세탁을 하기 위해 학교에서 나와 세탁소를 찾았습니다. 저 멀리 ‘세탁합니다’라는 문구가 씌여진 간판이 나지막하게 걸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청년은 급히 그 문구가 씌여진 점포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옷을 세탁할 수 있냐고 묻자 주인은 이곳은 간판 만드는 가게지 세탁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진짜 세탁소를 찾아가서 세탁물을 맡기고 기숙사로 오는 길에 학교 정문 머릿돌에 씌어져 있는 교훈을 보았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그후 청년은 학교를 나왔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입니다.
진리를 얻은 사람들의 느낌과 소감을 들은 사람이 결코 진리 그 자체를 얻은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진리를 체험 안에서 알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그 진리를 체험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마치 세탁소 간판을 보고 진짜 세탁소로 착각한 그 청년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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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세 가지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부터 율법교사들에게도 세 가지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율법교사들에 대한 첫 번째 불행 선언입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율법교사들의 언행의 불일치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는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율법보다도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존중했고, 더구나 그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개의 규범을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백성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짐을 지워놓으면서도 자신들은 스스로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마태 23,3)
두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1,47)
율법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면서도 실은 그 예언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소행을 본 따라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질책입니다. 곧 그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들이 “모든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루카 11,50)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교사들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그들은 율법을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율법 안에서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하늘나라로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고 있음에 대한 질타라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열쇠”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름 아닌 말씀이 바로 문이신 당신을 여는 열쇠라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마저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지식의 열쇠”는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율법교사들이 이 “열쇠”를 치워버렸지만, 사도들이 그것을 찾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흘 동안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들을 책망하시다가 저녁식사도 못 잡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들 역시 식사를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질책 당하느라 기분이 몹시 상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이 “독한 앙심을 품고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루카 11,53)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책당할 때는 어떻게 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오히려 광분하고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 곧 가장 큰 은혜의 순간임을 항상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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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앞선 이와 뒤따르는 이 사이에서>
루카 11,47-54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앞선 이와 뒤따르는 이 사이에서>
앞선 이의 의로움은
나 홀로라도 이어
뒤따르는 이도 의롭게
앞선 이의 사악함은
나 홀로라도 맞서
뒤따르는 이는 의롭게
앞선 이의 깨끗함은
나 홀로라도 이어
뒤따르는 이도 깨끗하게
앞선 이의 더러움은
나 홀로라도 씻어
뒤따르는 이는 깨끗하게
앞선 이의 올곧음은
나 홀로라도 이어
뒤따르는 이도 올곧게
앞선 이의 비뚤어짐은
나 홀로라도 바로잡아
뒤따르는 이는 올곧게
앞선 이의 진실함은
나 홀로라도 이어
뒤따르는 이도 진실하게
앞선 이의 거짓됨은
나 홀로라도 밝혀
뒤따르는 이는 진실하게
앞선 이의 나눔은
나 홀로라도 이어
뒤따르는 이도 나누게
앞선 이의 뺏음은
나 홀로라도 맞서
뒤따르는 이는 나누게
앞선 이의 살림은
나 홀로라도 이어
뒤따르는 이도 살리게
앞선 이의 죽임은
나 홀로라도 거슬러
뒤따르는 이는 살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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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줄탁지기….>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병아리 부화 시기가 되면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해 껍질 안에서 아직 여물지 않은 부리로 사력을 다하여 껍질을 쪼아대는 것을 줄(떠들 줄)이라 하고, 이때 어미 닭이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껍질을 바깥에서 부리로 쪼아 깨트리는 것을 탁(쫄탁) 이라고 합니다.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하나의 생명이 온전히 탄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환자는 반드시 낫고자 하고, 의사는 최선을 다해 도울 때 치료가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모름지기 안과 밖, 제자와 스승이 기가 막히게 어울리고, 사람이 하느님의 때를 제대로 만나야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기회)가 딱 맞아서 몸과 마음에 치유가 이루어지고, 은혜가 충만하게 되는 것이 줄탁지기( 줄啄之機) 입니다.
구약의 즈카르야서 10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봄철에 비를 내려 달라고 주님께 빌어라. 주님은 비구름을 만드시는 분, 그분께서는 비를 넉넉히 주시어 사람들의 밭에 푸른 싹을 내신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시에 백성의 지도자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향하여 “회개하라.”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기 때문이다...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로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야단을 치면서까지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몰랐기에 독한 앙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옭아매고 엉뚱한 질문으로 곤경에 빠뜨리려 합니다. 코린토 2서 6장 2절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을 율법을 망가뜨리러 오신 분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 오해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7번이나 “너희는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저는 앞에서 말한 줄탁지기가 “회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끔 하늘을 바라보며 고운님들 자신이 매일 매일 기적 속에서 살고 있음에 감사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으니, 코를 벌렁대며 숨을 쉴 수 있으니, 내 손으로 먹고 싶은 것 먹을 수 있으니, 그리고 내 아픈 다리로 걸을 수 있으니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줄탁지기 삶 즉, 회개의 삶이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줄탁지기 즉, 회개의 삶은 내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베푸는 일에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나누고 베푸는 일이 내 삶을 어지럽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는 잡것들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얻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회개입니다.” 이것이 줄탁지기입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구원의 길을 마련해주시고, 고운님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고운님들의 부족한 기도와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이 치유되고,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자녀에게는 은총 충만한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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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87)
♧♧ 시편 55편 20절….
"먼 옛날부터 좌정하여 계신 분 하느님께서 들으시어 그들에게 응답하시리라. 셀라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네."
* 먼 옛날부터 좌정하여 계신 분...
‘먼 옛날부터 좌정하여 계신...’이란 문자적으로 ‘영원부터 앉아 계신...’이란 의미로 이는 하느님의 존재의 영원성과 함께 정의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변하지 않는 본성(하느님의 정의의 불변성)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정의의 절대 불변성 때문에 우리는 악인들에게 고난당하는 중에도 오히려 야훼 하느님께 악인에 대한 정의의 보응을 간구하는 신앙의 용기(담대함)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네...
성경은 우리에게 야훼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잠언 9장 10절.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지혜의 시작이 잘못되어 있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하겠습니다. 지혜의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곧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없기 때문에 삶의 가치관, 태도, 방법 등의 모든 면에서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어긋난 악행을 일삼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에게 하느님의 보응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의 속성에 부합하게 되는 것이며, 또 현세에서 하느님의 정의의 완전한 실현을 바라는 다윗의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시편 55편 21절….
"그는 친구들에게 손을 대어 자기의 계약을 파기하네."
‘그는...’ 특히 다윗과 절친한 친구였던 아히토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아히토펠과 평소에 화목하게 지낸 다윗 자신과 부하들을 가리킵니다. 다음으로 말하는 ‘계약...’이란 다윗과 아히토펠간에 생사고락을 함께 하기로 맹세한 약속을 의미할 것입니다. 다윗은 아히토펠이 그 같은 맹세를 저버리고 자신을 배신하였음을 하느님께 간절하게 말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55편 22절….
"그의 입은 버터보다 부드러우나 마음에는 싸움만이 도사리고 그의 말은 기름보다 매끄러우나 실은 빼어 든 칼이라네."
‘입은 버터보다 부드러우나...’라는 말은 입으로만 모든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하며 평화를 말한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싸움...’이란 말은 겉으로 내뱉은 말과 달리 그 마음 속에는 남을 해치려고 하는 악한 마음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칼’과 같은 날카로운 비수를 몸에 숨기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평화를 청하는 자의 거짓된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아히토펠이 압살롬과 함께 반역을 도모할 때 비록 다윗 앞에서는 자신의 음모를 숨기고 아첨을 했지만, 그 내면에는 언제든지 반역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내줍니다. 이처럼 한 마음으로 두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자, 그것이 곧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전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우리가 진정으로 친구로 삼아야 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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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카메라 렌즈를 여러 개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과 똑같이 본다는 표준렌즈부터 단렌즈, 망원렌즈, 광각렌즈, 접사렌즈까지... 비록 고가의 렌즈는 아니지만 필요하기에 종류별로 가지고 있게 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스마트폰 하나면 다 되는데 굳이 이렇게 많은 렌즈가 필요해요?”
사진 실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표준렌즈를 끼우고 다니지만, 좁은 거리에서 넓은 장면을 찍어야 할 때도 있고 멀리에 있는 사람을 선명하게 찍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 꽃이나 나뭇잎 등 세밀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찍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즉, 상황에 맞춰서 적합한 렌즈를 사용해야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성지순례 중에 아주 웅장한 성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웅장하고 멋진 성당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 카메라를 꺼냈는데, 성당이 너무 크다 보니 전체 사진을 찍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거리를 맞추기 위해서 자신이 한참 뒤로 가면 됩니다. 아니면 광각렌즈를 바꿔서 찍으면 되지요.
그런데 성당이 너무 크다고만 불평한다면 어떨까요? 사진 좀 찍게 성당 크기를 줄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간직하고 있었던 우리는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상대방만 바꾸라고 청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밈으로써 자기네 조상들이 한 짓을 단죄한 유대인들의 헛된 미신을 비판하십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어 세운 것이 어째서 악한 범죄행위가 될까요? 오히려 예언자들을 명예롭게 해 드린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세움으로써 그들을 죽인 자기 조상들이 잘못되었음을 단죄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들의 행동을 본받아서 똑같은 모습으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실제로 죽였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자신들이 불의를 저지른 선조들의 상속자임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무덤을 만들어 세운 것보다 조상의 행실을 본받는 것이 그들의 죄인 것입니다. 율법을 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21,12)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죄한 예수님을 죽인 사람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죽은 자들에게 참회할 기회를 주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지 않으니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회개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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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덕목}
제이슨 워맥(Jason Wamack)은 ‘포춘’이 선정한 변화를 선도하는 500대 리더 중 한 명이자, 미국의 100대 최고 행동 변화 사상가입니다. 그가 이런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의 체험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학교에서 부모에게 연락할 때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을 때만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수업 후에 학부모와 학생에게 전화를 다섯 통씩 하면서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대화의 내용은 칭찬입니다. 학생의 좋은 점 한 가지를 선택해서 칭찬하면서 앞으로도 이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점을 인정하다 보니 아이들이 그 좋은 점을 반복해서 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누구나 다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이를 기초로 리더로 또 사상가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점을 고치라고만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좋은 점은 보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늘 갈등과 대립으로 서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인정과 지지 그리고 칭찬.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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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운전할 때입니다. 굽은 길에서는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속도가 빠르면 차는 원심력이 있어서 제동거리가 길어집니다. 원심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평상시처럼 운전하면 차가 바깥으로 멀어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난간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물에서 장난할 때입니다. 물을 한 방향으로 계속 돌리면 중앙에 원 모양의 구멍이 생깁니다. 구심력은 주변의 물건을 빨아들입니다.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기압의 차이로 돌풍이 불곤 합니다. 돌풍은 회오리바람이 되어 주변에 있는 걸 빨아들입니다. 바람이 강하면 나무, 자동차, 소까지도 빨아들입니다.
불가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차원을 넘어서 존재했던 것, 존재하는 것, 존재할 것과도 관계를 맺는다고 합니다. 이걸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하며, 우리는 흔히 ‘인연(因緣)’이라고 합니다. 자아를 통제하지 못하고, 내면의 깊이가 적으면 밖에서 오는 인연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운전 중에 옆에 운전자가 손가락질하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잠시 불편한 건 상관없지만 온종일 그 불편함이 간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근심, 걱정, 불안, 불평, 불만, 원망은 외부에서 들어와 마음의 평화를 흔들어 놓습니다. 외부의 원심력이 강하면 영적인 갈등이 심해집니다.
모임에서 구심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샘이 깊은 물처럼 기쁨과 평화가 샘솟습니다. 장자가 이야기했듯이 마음을 ‘빈배’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야유와 조롱이 있어도 영적 성장의 발판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칭찬과 존경을 겸손과 온유함으로 녹여내는 사람입니다. ‘난향천리, 덕향만리’라는 말처럼 주변을 향기롭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쉽게 끓고, 쉽게 식는 우리의 정치에도 이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서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렸던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사람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말씀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비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행동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사람은 본인도 진리를 보지 못하지만, 남들도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겁니다.” 지혜롭지만 겸손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결단력이 있지만 온유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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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와 겸손>
-하느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힘들다 합니다. 누구나 아름다운 삶에 아름다운 죽음을 소망할 것입니다. 곱게 물들어가기 시작한 가을의 단풍들, 황금빛으로 익어가며 고개 숙인 가을의 벼이삭들, 평화로운 일몰시 곱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 등 모두가 아름다운 노년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날이 한결같이 아름답게 살아갈수 있을까요? 하루하루 회개와 겸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는 오늘이고 오늘은 내일이 됩니다. 오늘 회개하여 새롭게 살아야 어제의 반복이 되지 않을 수 있고 날마다 이런 오늘이 있어 아름다운 내일의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어려움이나 시련들은 모두 회개를 통해 비움과 겸손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이래야 참된 영적성장과 성숙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실 내가 잘 살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구원받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겸손을 통해 이런 구원의 은총을 깨닫습니다.
오늘 루카복음과 제1독서 로마서가 참 좋은 대조를 이루며 깊은 묵상으로 이끕니다. 저는 루카복음의 바리사이들에게서 참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대로 오늘의 부정적 인간현실을 보는 듯 했습니다.
반면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를 읽으며 참 자유로움을,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제 자신 회개했습니다. 너무 치열히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하느님의 은총을 잊어 각박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읽으며 문득 떠오른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하느님이 들어설 여지가 공간이 없습니다. 참으로 모범적 신자의 모습입니다만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모습에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는 오십보 백보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모습이며 전혀 회개나 겸손이 없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불행선언은 바로 이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를 향합니다.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기념하면서 다시 예언자들을 죽이며 악행의 역사를 반복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입니다. 참으로 회개하여 끊어버리지 않으면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입증하는 진리입니다.
예전에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압축한 20권의 만화로 된 실록을 본 느낌으로 한 권이면 충분하다 싶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당쟁과 숙청, 살육의 ‘보복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해방후 76년이 되었어도 좌우의 첨예한 갈등과 분열과 투쟁은 계속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언제 이런 악순환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지요! 답은 회개와 겸손뿐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의 결론으로 이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못박듯이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이 세대가 상징하는 바,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를 겪고 있는 모든 세대입니다.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바로 오늘 이 세대에 속하는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피흘리는 악순환의 역사를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어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리는 율법교사들에게도 가차없이 불행을 선언합니다. 이 또한 남이 잘 되는 것을 못보는 우리의 못된 심보의 부정적 측면으로 역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참 사악합니다. 회개는 커녕 예수님께서 그 집을 떠나시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예수님을 몰아대기 시작합니다. 이런 비숫한 양상을, 참으로 잔혹하고 잔인한 모습을 우리도 오늘의 현실에서도 눈뜨고 보고 있지 않습니까? 회개가 쉬운 듯 해도 얼마나 가깝고도 먼지, 그래서 회개의 은총이라 합니다. 정말 주님께 청할 것은 회개의 은총, 겸손의 은총입니다.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통해 바리사의 기도를 연상했다면 오늘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는 세리의 기도를 연상했습니다. 꼿꼿이 서서 독백의 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얼마 전 열 명의 나병환자들의 예수님을 향한 부르짖음도 생각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요, 회개에서 울어난 겸손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칠 마지막 유일한 기도도 이 자비송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정적 결론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바리사이처럼 잘 살아서 의롭게 되는 구원이 아니라 세리처럼 회개하여 겸손할 때 의롭게 되어 구원입니다. 우리가 잘 살아서, 죄가 없어서 구원이 아니라 회개하여 겸손할 때 하느님 은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이런 진리를 명쾌히 밝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우리가 잘 나서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구원 받는 우리들이고 여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잘 살고 못살고는 사람 생각이고 도토리 키재기일 수 있습니다.
못 살아도 참으로 회개를 통해 겸손해 질 때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은총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행위의 법이 아니라 믿음의 법으로 의롭게 된 우리들입니다. 회개를 통한 겸손한 믿음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하느님의 의로움의 은총으로 구원을 체험한 이들은 세리처럼 겸손할 수 뿐이 없습니다. 기도를 바친다면 단 두가지, 자비송과 감사와 찬미의 기도뿐일 것입니다.
“주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세세영원히 감사와 찬미받으소서.”
진정한 수행은 회개와 겸손으로 이끄는 수행입니다. 참으로 수행에 치열할수록 회개를 통한 겸손도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저절로 자비송과 더불어 감사와 찬미 기도가 그 삶의 전부가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노년을,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득 제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하늘이신 하느님만 추구하는 나무같은 수행자로 살다보면 바리사이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주 겸손히 멈춰 고요한 관상의 호수, 사랑의 호수, 은총의 호수가 되어 하늘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 때, 세리처럼 텅 빈 충만의 겸손한 사람이, 참으로 깊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개와 겸손의 복된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오늘 기념하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서신중 마지막 유언같은 감동적인 말씀을 나눕니다. 이런 순교성인의 열렬한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회개와 더불어 겸손으로 이끌어 줍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 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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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트집을 잡는 사람>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이나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냐 할 것이요,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 구애 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시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가 11,47)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주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욥기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스승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집을 잡기에 앞서 주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하며 권고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12,6-7)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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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비장하고 결연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불행 선언이 계속되고,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율법을 대체할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 모든 내용들이 "책임"이라는 무겁고 중차대한 말씀으로 모아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루카 11,50)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잘못을 조목조목 밝히신 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살해해온 죄악을 언급하십니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바가 집권층과 종교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이나 이익과 불협화음을 낼 때 그들은 가차없이 그 목소리를 없앴지요.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절이며, 곧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들이 흘린 피는 바로 하느님의 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51)
책임론. 예나 지금이나 책임을 진다는 건 결코 가볍지 않은 일입니다. 되돌릴 수 없이, 이미 벌어진 일의 결과와 파장까지 수습하고 보상하는 일은 커다란 희생과 대가가 요구되고, 설사 책임진다 해도 모두를 만족시킬만큼 온전한 해결은 어렵기 때문이지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선사받은 소중한 율법을 민족주의적이고 편협한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내내 하느님의 목소리를 외면했던 책임을 그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언젠가 자기들 입으로 "책임"을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긴 합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종용할 때 내뱉은 군중의 외침이지요. 이 얼마나 무모하고 경솔한 호언장담입니까...
사실 아무리 권위자이고 지도자라 하더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들이 무슨 책임을 질 수 있게습니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또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은 하고 계시지만 실상 속으로는 그 책임을 온전히 당신 것으로 받아안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역사 안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의 죄와, 앞으로 그들이 그 역사에 편승해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율법주의적 정당성을 보장받아 벌일 예언자 살해의 완결판(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책임까지 당신이 떠안으려 작정하고 계십니다. 당신 자신에게 모든 죄의 책임을 지우시는 것이지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수님의 강생 구속이라는 엄청난 호의가 감사는커녕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지지조차 않아도 예수님은 묵묵히 당신의 길을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책임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로마 3,21)
율법의 열혈 신봉자인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 사울의 입에서 이런 놀라운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사도 바오로는 살아있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돌에 새겨진 율법 조항의 문자를 대신하리라 자신있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유다인 입장에서는 천인공로할 반역적 발언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 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로마 3,22)
게다가 사도 바오로는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 경계까지 허물어 버리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국적, 종족, 혈연, 제도, 신분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에게 의롭다 하신다니, 구원의 가능성은 이제 온 인류에게로 활짝 열어 젖혀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3-24)
"거저"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거저"는 아니지요. 우리는 "거저" 얻었지만 하느님과 예수님의 희생은 "거저"가 아니었으니까요. 이스라엘 역사 안에 줄곧 흘려진 하느님의 피와, 이 모두를 책임지기 위해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의 피로 얻은 의로움의 가치는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로마 3,25)
주님께서 그저 믿으라고만 하십니다. 당신이 책임 진 것에 대해 공치사도 없고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시면서, 그저 내가 너희를 위해 한 것을 믿으라고만 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인이어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의로움으로 구원될 것이니 그저 믿으라고요... 과연 모든 책임을 떠안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를 대신해, 내 죄를 대신 책임져 주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감사하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요. 오늘 기념하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순교자도 다른 모든 순교자, 증거자들처럼 그 감사와 사랑 때문에 함께 책임지는 길, 곧 순교의 길을 마다 않고 받아 안은 분이지요.
책임을 진다는 것.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사랑으로 그 문을 열고 구원의 길을 거저 터 주신 그분이 저만치 앞서 가십니다. 그 길은 사랑으로 장님이 되고 사랑으로 무지해진 영혼만이 흔연히 따라나설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책임을 떠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또 어떻게 그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을 것인지 묵묵히 숙고해 보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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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 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로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을 위해 사랑한다.’
는것은 사랑의 목적과 그 이유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에 육가 원칙이 적용되면 이미 빛바래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理性적 논리를 뛰어넘습니다. 비논리적입니다.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되기 위하여 자신의 始初와 자신의 基源으로되돌아가고 자신의 源泉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은총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당신 모습대로 내셨기에 하느님은 우리 자신의 시초요, 기원이며, 원천이십니다. 그거기에 참된 사랑이 되려면 하느님께 되돌아가서 그분의 사랑의 원천에서 흘러나온 사랑과 하나 될 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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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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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예수님은 예언으로 들어가는 문이시다>
율법 교시들이 불행한 것은 그들이 예언에 담겨 있는 우리 주님의 나타나심에 관한 지식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요한 10,7-9 참조) 당신이 문이시라면, 지식의 열쇠가 그분께 있음은 분명합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그들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지요.
-시리아인 에프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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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믿음이 있는 자>
"독한 앙심을 품고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궁지에 몰리신 적 있나요?
앙심을 품는 사람은 어떻게든 걸고 넘어뜨려
쓰러지는것을 봐야 직성이 풀리게 됩니다.
엄청난 상처를 주고 발 뻗고 자는 사람들!
죄 짓고도 잘 먹고 잘 산다는 사람들,
지금은 넘어갈지 모르나 그의 후손들이
책임지고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님만 바라고
주님만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결국 믿음이 승리하는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자는 진 것 같아 보이나
이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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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루카 11, 51)
들국화도
들국화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무책임에서
책임으로 나가는
여정입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피에 대한 우리의
동반책임입니다.
책임은 변명을
멈추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책임에서
벗어나는 우리의
첫 시작입니다.
십자가의 진실을
바라보는 데서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믿음은 생명
하나 하나를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잃어버린 사랑의
책임을 다시
찾게 합니다.
사랑의 책임은
귀기울여
우리의 아픔을
듣는데서
이루어집니다.
욕망을 정화하는
사랑의 책임으로
나가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십자가의 책임임을
기억합시다.
삶과 삶
길과 길을
이어주는
사랑의 책임인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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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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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시면 함께 나누겠습니다.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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